영각사와 설파대사


 

  설파대사비명 雪坡大師碑銘

  어느 날 나는 일이 있어 우연히 도성 문밖으로 나갔더니 헤진 납의를 입은 중이 벽제하는 소리를 못 들은 듯이 갑자기 앞에 엎드렸다. 그 안색이 민망하고 급박한 사정이 있는 자 같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겨 너는 무엇을 하는 자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호남의 중으로 성연(聖淵)이라고 합니다. 법사인 설파화상을 위하여 대인께 한마디 말을 얻고 거듭 시방의 중생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나라에 금법이 있어 중은 도성에 들어갈 수 없고 정승 집에는 또 사사로운 정을 전달할 수 없기에 성밖의 여관에서 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름 지나 가을 되고 가을 지나 겨울 되어 쓰러져 죽는 것이 조석간에 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렵니다." 고 하였다. 나는 뭉클하게 그 정성에 감동하여 그들이 지은 행장을 올리게 하였다. 행장은 다음과 같다.
  대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虎巖(체정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悔菴:정혜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喚醒:지안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하였는데 여러 이름난 스님들을 참방함에 미쳐서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시 이해하였다. 신묘한 이해는《화엄경》에 더욱 풍부하였다. 반복하여 공부한 것은 한강의 모래알 수처럼 많고 강송하는 소리는 꾀꼬리 울음같이 퍼지었다. 마침내 그 틀린 점을 바로잡고 그 귀취를 통일하여 근세 바보의 꿈 이야기같은 견해를 씻어 버렸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어 각각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 설이 무궁무진하였다.
  옛날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839 중국 당나라 스님)가 《화엄경수소연의초》를 지었는데 그 뜻이 은미하여 강해하는 이들이 괴롭게 여겼다. 스님이 한번 보고 동그라미 쳐서 소(疏)니 과(科)니 표시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마치 나그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윽고 승재와 부영 등이 스님에게 사뢰기를 "《화엄경소초》 가운데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스님은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금강산에 유람한 것은 두 번, 묘향산 한 번, 두류산은 늘 참선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스님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에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팠었고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 고 하였었다.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스님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뒤로 영각사에 우거하였다. 어느 날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을 이건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큰 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노년에 영원사(靈源寺:함양군 마천면 삼정동 소재)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염불로써 일과를 삼았다. 날마다 천 번 염불하는 것을 열 번 되풀이하였는데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다.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일찍이 근세에 화장할 때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미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의 이치로 보면 있다는 것도 애초에 없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애초에 있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해도 가하고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또 불가할 것이 없다. 참으로 있고 참으로 없고를 누가 능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 뭇 제자들이 그 정성을 기탁할 데가 없어 영원사에 부도를 세웠는데 선운사 승려도 그렇게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머리를 깎은 것을 기념하여서이다.
  아, 스님은 한마디로 평가하면 화엄경의 충신이고 성연은 또 스님의 충신이다. 섬기는 대상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유가나 불가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명을 짓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겁의 후인들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스님이 임종시에 제자에게 당부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고 또 부득이하면 채상국(蔡相國)에게 비명을 청하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한 경우이겠는가? 나는 스님을 모르는데 스님은 나를 잘 아니 의리상 저 버릴 수 없어 이에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 《화엄경》이 있으니
바른 법이요 중요한 경전이라
누가 받들어 가졌는가
설파의 마음은 유구하다
불의 신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날뛰어 태웠는가
머리 속에 옮겨 간직했다가
저 책판에 올려 새기었다.
여래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나는 너를 훌륭히 여기노라
설파의 공덕에 대하여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영각사에 간직되었던 《화엄경》 책판은 6.25 때 불탔다. 영원사에는 지금도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모습으로 설파당탑이라 새겨진 부도가 남아 있다.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雪坡大師碑銘


日。余因事偶出郭門外。有弊衲僧如不聞呵道。突黑衣卒伏於前。其色若有悶急者然。余恠問曰。若何爲者。對曰。僧乃湖南沙門名聖淵者。爲法師雪坡和尙。願得大人一言重。以詔十方衆生。有邦禁也。僧不可以入都城。相門又不可以私情導達。乞城外旅店食。夏以秋秋以冬。僵死在朝暮。然不得所願。欲死無歸。余油然感其誠。許令進所爲狀。其狀曰。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236_559c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於喚惺孫也。三十三。因大象固請。陞座於龍湫板殿。師自幼穎悟甚。及參諸名師。三乘五敎。無不言下卽會其玅契神解。於華嚴尤篤。反覆則恒河計沙。講誦則迦陵遍音。卒能正其譌一其歸。以滌近世癡人說夢之見。願學者日以坌集。各示金繩覺路。其說纚纚不竆。在昔淸涼大師有所撰抄中䟽科。其義多隱晦。講解者病之。師一覽。圈而表之。曰疏曰科。各有攸宿。如客得歸焉。頃之。勝濟㫙穎等白師曰。大經抄中所236_559d引。亦無不衍誤。盍移錫海印。證諸本以補同異。師往留之。考較乃已。自是遊金剛者再。妙香者一。頭流常面壁焉。庚寅。澄光寺火。所藏華嚴八十卷板一無遺。師歎曰。於斯而不盡心。其敢頂禮如來。於是鳩財剞劂。人天助力。春始夏訖。其晦䵝者。惟師之口誦是賴焉。板旣完。新建閣峙諸靈覺寺傍。前數日。有虎跑寺後。僧又夢神人告曰。此可藏如來大經云。方經之安於閣也。有瑞光蟠空。會者咸異之。師以爲此偶然也已。是後寓靈覺。一日謂寺主曰。寺不移建。必圮於水。盍圖之。亡何。水大至寺果圮。僧亦有胥溺。衆乃服其236_560a神。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是日也。弟子二十有七人。奉以涅槃。諸龍象奔奏號哭。雖下界衆蚩。亦莫不相告齎咨。師嘗論近世火浴舍利之出。有不慊于心者。及涅槃。雖祥光七夜不減。竟不以一舍利現靈。釋氏觀理。有固未始不爲無也。無亦未始不爲有也。有而謂之無可也。無而謂之有。亦無不可。眞有眞無。又誰能辨之。羣弟子無以寓其誠。豎塔靈源。禪雲僧亦如之。此不忘舊時薙髮也。嗚呼。師一言以蔽之。曰華嚴之236_560b忠臣也。若聖淵。又師之忠臣也。盡心所事。儒與釋道未嘗不同。余不銘。何以勸在後之千劫也。况師臨化飭弟子曰。愼勿碑。又曰。如不得已。非乞銘蔡相國。不可。余不知師。師能知余。義不可相負。乃作銘。銘曰。
佛有華嚴。正法眼藏。誰其抱持。雪坡心長。鬱攸何物。敢爾跳踉。移諸腹笥。登彼文梓。如來色笑。曰余嘉爾。雪坡功德。我聞如是。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영원사 부도군(靈源寺 浮屠群)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영원사 입구에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가운데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부도는 조선 후기 화엄학(華嚴學)의 고승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부도이다. 상언스님은『화엄경』 판목을 다시 새겨 영각사(靈覺寺)에 봉안하였고, 영원사에서 10여 년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편을 염송했다고 한다. 그의 부도는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다른 4기는 벽허당[碧虛堂(1.1m)], 영암당[影巖堂(1.2m)], 중봉당[中峯堂(1.3m)], 청계당[淸溪堂(0.9m)]의 부도인데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이외는 법명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霜月大師碑銘 


余屛居明德山中。.....日。方丈僧春坡堂義一。袖憕寤所撰霜月大師狀。來請銘。余儒者徒也。師之狀奚爲於余之門。春坡留半載乞食。不獲不歸。試閱其狀。犂然有契余意者。嗚呼。註說之支離。儒與釋奚異。其狀曰。師名璽篈。俗姓孫。順天人也。母金。於浴佛夕。夢梵僧授一顆珠。已而有娠生師。肅宗丁卯也。十一。投曹溪之仙巖寺極俊長老。十六。受具於文信大師。十八。參雪巖和尙。道旣通。衣鉢歸焉。遍參碧虛南嶽喚惺蓮華。皆獲其心印。二十七。歸故山。開演三乘宗旨。四方緇流多歸之。

 

지안(志安)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64-1729(현종5-영조5)
삼낙(三諾)
환성(喚醒)
활동분야 대선사
지안(志安)에 대하여
지안(志安)
1664(현종 5)∼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 성은 정씨(鄭氏). 호는
환성(喚醒), 자는 삼낙(三諾). 춘천출신.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정원(淨源)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세 때 설제(雪霽)를 찾아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였다.
1690년(숙종 16) 모운(慕雲)이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였는데, 모운이 수백명의 학인(學人)을 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므로 뒤를 이어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을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지안이 말한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지리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도인이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하여 급히 옮기자, 며칠 뒤 그 절이 불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다가 큰비가 쏟아지는 날 절을 떠났는데,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두막집에서 잤다.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잣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었을 때 학인 1, 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 법회 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의견 때문에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도착한 지 7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나이 65세, 법랍 51세였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비가 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喚醒派)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
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 등으로 연결된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 喚醒詩集》 1권이 현존한다.
참고문헌
東師列傳,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渭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