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사찰사략


859년 통일신라 헌안왕 3년 함양 엄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굴산문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

고려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지은 오진탑비문에 대중(大中:당 선종 연호) 말년(13, 859) 신라 헌안왕 3년(859)에 개청이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했으니 이때 이미 엄천사는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883년 통일신라 헌강왕 9년 헌강왕의 명으로 결언선사 지리산 엄천사 창건. 883년(헌강왕9)에 엄천사 창건이라 했는데 낭원대사 개청은 이미 헌안왕 3년(859)에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창건 연대가 오히려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대 기술에 착오가 있은 것이다.

1317년 충숙왕 4년 정사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충숙왕 4, 1317)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 군자사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1404년 태종 4년 갑신 홍무(洪武) 37년 갑신(홍무는 31년에 끝)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군자사를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407년 태종 7년 정해 12월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난 해에 사사(寺社)를 혁파하여 없앨 때에 삼한(三韓) 이래의 대가람(大伽藍)이 도리어 태거(汰去)하는 예에 들고, 망하여 폐지된 사사(寺社)에 주지(住持)를 차하(差下)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승도(僧徒)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산수(山水) 좋은 곳의 대가람(大伽藍)을 택하여 망하여 폐지된 사원(寺院)에 대신한다면, 거의 승도들로 하여금 거주할 곳을 얻게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 고을의 자복사를 모두 명찰(名刹)로 대신하였는데,

조계종(曹溪宗)에 양주(梁州)의 통도사(通度寺) 등등 감음(減陰)의 영각사(靈覺寺) 등등

천태종(天台宗)에 등등

화엄종(華嚴宗)에 등등

자은종(慈恩宗)에 승령(僧嶺)의 관음사(觀音寺) 등등 남포(藍浦)의 성주사(聖住寺) 등등 함양(咸陽)의 엄천사(嚴川寺) 등등

중신종(中神宗)에 등등

총남종(摠南宗)에 등등

시흥종(始興宗)에 등등. 태종실록.

1437년 세종 19년 정사 정극인(丁克仁)-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세종 19년(1437)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太學請誅妖僧行乎疏 世宗朝)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1438년 세종 20년 무오 7월 환관 배훤(裵萱)을 보내어 중[僧] 행호(行乎)를 함양(咸陽)에 가서 불러 오게 하였다.세종실록.

행호는 조선 초기 태종, 세종조의 고승으로 고려 명신 해주 최씨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戒行)이 뛰어났고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태종이 치악산 각림사를 짓고 창건 대회를 베풀 때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고 , 또 장령산 변한 소경공(昭頃公)  묘소 곁에 대자암을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에 금대사,안국사를 창건하였고, 천관산에 수정사를 지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불타 버린 만덕산 백련사를 효령대군의 도움을 받아 1430년(세종 12)부터 중수하기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하였다. 조선 초기 유생들의 강한 척불론 속에서도 왕실에 대한 불교 보급에 힘썼다.민족문화백과사전. 마천면 가흥리에 금대암과 안국사가 있는데 안국사에는 행호대사의 은광당대화상 부도가 있고, 그의 효성을 상징하듯 그의 어머니 부도도 있다.

1439년 세종 21년 기미 4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였다.세종실록.

 전하께선 흥천사의 탑을 조종께서 부탁한 바라 하시어, 그 넘어질 것을 근심하사 할 수 없이 새롭게 한 것이온데, 이미 이 탑을 새롭게 하였으면 그만둘 것이옵거늘, 저 중 행호는 무슨 물건이기에 번거롭게 역마(驛馬)로 불러서 흥천사에 두고, 그 공억(供億)을 주어 드디어 도성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참부처[眞佛]라고 지목하여, 위로는 종척(宗戚)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예(禮)로써 우러러보고 시주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고 의심나게 하옵니까. 또 이 절에서 안거회(安居會)를 크게 베풀고 국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그 일을 확대시키는데도, 비록 헌사(憲司)에서라도 그 지나치게 악함을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오니, 무뢰승(無賴僧)들이 여염(閭閻)에 있으면서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방자히 행하여 악함이 더할 수 없사오매, 그 재물을 소모하고 백성을 좀먹는 해를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분부하였다.세종실록.

대자암(大慈庵)도 역시 산이니 행호로 하여금 서울 안에 있지 말고 대자암에 있게 하여, 여름 달을 지내고 서늘한 때를 타서 산으로 돌아가게 함이 가하지 않겠는가. 내가 마땅히 이와 같이 처치하겠다.

5월  중 행호(行乎)를 보내어 산으로 돌아가기를 명하고, 길 연변의 각 고을 수령과 각 역승(驛丞)들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내려가는 전 판선종사(判禪宗事) 행호(行乎)에게 그 공억(供億)을 힘써 정결하게 하고, 감히 만홀하게 말지어다.”

하고, 또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하여 쌀과 소금 각 10석을 주게 하였다.세종실록.

1448년 조선 세종 30년 무진 7월  사헌부가 아뢰었다. 또 근일의 일로 보더라도 중궁(中宮 소헌왕후 1395-1446)을 위하여 기도하던 때에 중 일운(一雲)이 작법(作法)을 하였는데, 조금 뒤에 죽었고, 중 행호(行乎)가 법주(法主)가 된 뒤에 오래지 않아서 또한 죽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불력(佛力)이 증험이 없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종실록.

1449년 세종 31년 기사 원경(圓瓊) 영각사 중건.갈천집.

1474년 성종 5년 갑오 1월 학열(學悅) 선사 금대사(金臺寺)에 주석하다. 함양군수 김종직에게 약과 먹을 선물하고 김종직은 사례 시를 지어 보냄.점필재집. 학열은 신미(信眉), 학조(學祖)와 함께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였다. 또 세조의 명을 받들어 오대산 상원사의 중창 불사를 감독하였는데 세조가 1465년(세조11) 친히 낙성 개당식에 참석했을 때 오대산의 여러 고적과 상원사의 역사를 자세히 적어 올리자 세조가 기뻐하여 포백을 상으로 주었다.세조실록.

1520년 중종 15년 경진 3월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지리산 마천면 추성리에 초암 곧 벽송암을 을 짓고 주석하였으니 이 절이 지금의 벽송사이다.경암집.

1523년 중종 18년 계미 성묵(性默) 영각사 중창. 갈천 임훈 영각사에 우거하며 중창기를 지음.갈천집.

1530년 중종 25년 경인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삼천포 출신) 벽송암에서 벽송대사를 만나 도를 깨달음.동사열전. 부용대사의 제자가 서산대사(1520-1604)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이다.

1539년 중종 34년기해 <법화경> 덕유산 영각사 중각

1623년 인조 1년 계해 청매인오(1548~1623) 지리산 영원암에서 열반하다. 영원암 靈源庵 : 군자사 君子寺 서쪽 30리쯤에 있다. 고승 인오 印悟(법호는 청매 靑梅1548-1623 서산대사의 제자)가 머물던 곳이다. 인오가 여기에서 죽었고 인하여 부도(방광사리탑)를 만들었다. 靈源庵在君子寺西三十里許,高僧印悟所住,印悟死于此而因爲浮屠.(지금 절의 동쪽 산등성이에 청매의 방광사리탑이 남아 있다.) 천령지 天嶺志

1636년 인조 14년 병자 지리산 군자사에서 <묘법연화경>을 간행하다. 崇禎元年丙子(1636)七月 日 慶尙道咸陽智異山君子寺開刊

1684년 숙종 10년갑자 대화사 선찬(善贊) 등이 영각사 대웅전 표석비를 세우다.비석 현존.

1685년 숙종 11년 을축 <법화경> 지리산 안국사 신간 유진

1686년 숙종 12년 병인 우담 정시한(1625~1707) 9월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아들 정항도 와서 같이 숙박, 암승은 일천(一天)과 선찬(善贊: 영각사 대웅전 표석비<숙종10년,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영각사 문을 지나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724년 경종 4년 갑진 <법화경> 덕유산 영각사 개간

1743년 영조 19년 계해 영은사에 월암당 부도를 세우다. 영은사지 부도를 지금 백운암 앞 마당에 옮겨 놓았는데 모두 6기이다. 한 부도는 구계당이라 쓰여 있으나 연대가 없고 하나는 월암당인데 건륭 8년[1743(영조 19년)] 계해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다.

1753년 영조 29년 계유 5월 활연당(豁然堂) 장우(長愚) 대사 지리산 황령암(黃嶺庵 남원시 산내면) 중건.용담집. 활연당의 부도는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 옛 입구에 있다.

1765년 영조 41년 을유 영은사 입구에 석장승 1쌍을 세우다. 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 우호대장군(右護大將軍), 경상남도 민속자료 19호, 1996년 3월 11일 지정

1772년 영조 48년 임진 문곡(文谷)대사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경암집. 안의면 상원리 장수사 터에 문곡대사의 부도탑이 있다.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

1774년 영조 50년 갑오 《화엄경》80권 책판이 완각되어 영각사에 장판각을 세워 보관하다. 영조 46년(1770) 경인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설파대사가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에 세워 보관하였다.

1774년 영조 50년 갑오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 산청의 심적암(深寂菴)에서 서거. 추파는 함양 벽송사 고승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의 스승이다. 일찍이 생전에 함양 휴천면 동호리 소재 엄천사(嚴川寺) 종각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다.추파집.

1783년 정조 7년 계묘 사근도 찰방 실학자 아정 이덕무 6월 초1일에서 14일까지 본아(수동면소재지 찰방관아)에 있었다. 15일, 본아에 있었다. 감사의 고과에서 최(最)를 받았다. 그 제사에 이르기를 '폐정(弊政)을 바로잡기에 온 힘을 썼다.' 하였다. 16일에서 20일까지 본아에 있었다. 이때 함양 태수(咸陽太守) 이공 응운(李公膺運)이 술을 보냈으므로 공이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자사(君子寺: 제1도, 제2도)에 가서 하계(下界)를 굽어보며 웃으니. 생략. ->반짝이점.gif 군자사(君子寺)의 미나리밭과 이덕무(李德懋)의 군자사 사적

1783년 정조 7년 계묘 아정 이덕무 : 계묘년 6월에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생략.->leaf_gree.gif 엄천사는 인목대비의 원찰- 인목대비 아우 천도문

1788년 정조 12년 무신 장수사 육사탱(창건대공덕주 각연조사지진, 태조왕사 무학대화상지진, 대조계종 청허대화상지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선교도총섭 송운대선사지진, 포월당대선사지진, 취은당대선사지진)과 은신암 산신탱 금어 함식과 두성에 의해 완성.

1793년 정조 17년 계축 봄~겨울 함양군수 윤광석의 사재 헌금으로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전년에 소실된 지리산 영원암 중건하고 진영각도 짓다. 1839년에 노광리 「영원암중수기」를 짓다. 중봉당의 부도는 영원사 입구에 있다.

1806년 순조 6년 병인 2월 전년 겨울에 소실된 장수사(수원부 분봉상시 소속) 개건을 위해 공명첩 1백 장을 발급하다.

일성록    왕명별    순조   6년  2월  27일

강: 命長水寺修葺時空名帖一百張成給 推水原留守趙鎭寬  

목: 備局啓言 卽見水原留守趙鎭寬擧條 則以爲安義縣長水寺修葺時空名帖二百張令廟堂下送本道事 允下矣 空名帖法意甚嚴 二百張之請 未免太多 限一百張 令該曹成給 守臣之不請廟堂稟處 直請令廟堂下送 有違格例 請推考 允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