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역사기행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로 들판은 한껏 싱그러워 보이고 화림동 굽이굽이를 돌아 남계천을 이룬 물줄기는 안의, 함양 들판을 충분히 적시고도 남아 다시 엄천강과 경호강을 거쳐 곧장 남강으로 내닫는다.


함양을 바라고 진주, 단성을 지나는데 문득 '풍토(風土)'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설픈 조합어(調合語)이기도 한 '신토불이'라는 말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한테 별로 낯선 말은 아니겠지만 하필 단성을 지나면서 이 말, 풍토가 생각난 건 아마도 눈앞에 다가선 지리산의 무게와 함께 떠오른 역사의 한 장면 때문이다. 19세기 말,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사회는 그 중심축이던 신분제가 다양한 변화요인에 의해 분화되는데 그러한 일련의 과정속에서 변혁의 축으로 등장한게 농민이다.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흐름 선두에 단성의 농민들이 있고 '진주민란'이 바로 그것이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기인 이야기를 이렇듯 불쑥 내뱉는 것은 단성을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한 지리산 연봉의 무게감과 논둑 높이가 몇 미터씩이나 되는 다랑논을 일구었던 이곳 농민들의 뚝심이 결국 '민란'을 주도하지 않았나 하는 색각에서다.

강가로 난 협곡 사잇길을 몇번씩이나 돌아나자 제법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들판마다 일꾼들이 가득한, 이 특이한 상황은 논둑과 도로변에 산처럼 쌓여진 양파자루를 보고서야 이내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동면에서 시작된 양파의 행진은 함양읍을 거쳐 안의까지 계속되었는데 한때 전국 생산량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함양의 잠업과 한지를 지금은 양파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자 함양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함양군수가 수령으로 있던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읍내 크기로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결코 평가할 수 없는 곳이 이곳 함양고을이겠다. 삼국시대엔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당시에 쌓였던 황석산성과 사근산성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엔 교통의 요충지로 물산이 이곳에 집중되기도 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곧장 지곡에 있는 정여창 고택으로 가야했지만 잠시 상림숲에 들리기로 했다. 초여름이라 아직 매미소리가 없어 숲속의 흥취를 조금 떨어뜨릴 법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상림숲이다. 아름드리 활엽수 숲길을 걷는데 몸속까지 드는 시원함속에 고운의 백성사랑도 그대로 느껴진다. 너른 잔디밭 한쪽에 선 사우정에 여전히 함양수태를 그리는 이 고을 백성들의 고운사랑이 그대로 전해져 즐겁다.

 



상림숲에서의 한가함을 뒤로 하고 다시 지곡 개평마을의 정여창 고택으로 향하는데 읍내 한 가운데에 선 학사루가 오른편으로 들어온다. 최치원이 함양태수시절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통일신라때에 창건한 듯 하나 지금의 학사루는 숙종때에 증건한 것이라 한다. 건물은 그저 묵묵히 섰는데 '학사루' 현판 글씨로 인해 결국 정여창은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고 갑자사화때는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안음현감(지금의 안의) 정여창을 만나러 가는 길을 학사루 건물로 인해 늘 무겁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았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무거울 필요도 없겠다. 잠깐 산청쪽을 바라보며 남명선생을 생각하자 다시 기분이 맑아진다. 함양이 산중에서도 큰 고을로 섰던 이유를 실감하면서 너른 들판을 지나는데 여전히 온통 붉은 양파가 든 붉은 망사자루 천지다.

개평마을에서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왼편으로 높고 기인 흙담장길 안에 정여창고택의 솟을 대문과 사랑채 지붕이 보인다. 정려를 알리는 다섯 개의 문패가 걸린 솟을 대문을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사랑채가 눈에 들어오는데 크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절로 느껴진다. 일각문과 중문을 조심스레 들어서자 여타의 양반가와 달리 앞마당이 훤한 안채가 나타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사랑채보다 건축년대가 더 올라간다고 한다. 안채뒷편에는 가묘가 위치해 있고 별당옆으로 안사랑채 섰는데 3,000여 평의 대지가 알맞게 각 건축물들을 안고 있어 정갈하면서도 단정하다. 어쩌면 이러한 건물의 기품에서 폭군 연산군에게도 주눅들지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안음현감을 지내던 중 훈구파의 모함에 종내 귀양길에 오르고 만 선생의 강직한 성품이 엿보이는 듯 한다.


덕유산을 오른편으로 낀 육십령은 고개가 험준하기로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니 그 이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물산이 풍부한 함양고을에는 그만큼 많은 장사치들이 드나들었을테고 고개 위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도적들이 있었을테니 60명이 함께 모여 고개를 넘지 않고는 안될 수 밖에...

이 육십령 아래에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계곡마다에는 원래 팔담팔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네 곳에만 정자가 남아있으니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그곳이다. 대충대충 도끼질로 마감한 계단이 시원한 동호정, 지금 처지가 안타까운 군자정, 20세기 철제 홍예교에 주눅든 거연정, 달바뒤가 정자보다도 좋은 농월정 등은 이곳 화림동 계곡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여 그 물골이 말이 아닌 곳이 또한 이곳이다. 어떤 연유에서 지어졌든 상관없이 지금은 그 처지가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다. 화림동을 찾아서 육십령 고개아래 사람들의 애환도 지나칠 수 없겠지만 무분별한 발길에 점점 기둥이 기울어져 가는 이들 정자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한번쯤 보낼 일이다.

 

농월정계곡

동호정
군자정


<글/사진 강충관>
95년부터 천리안 답사 동호회 “우리 얼”에서 활동 중.
99년 1년 동안 대학연합신문에 “우리문화”에 대한 글을 연재.현재 청소년과 대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답사 안내를 하고 있다.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1686년 숙종 12년 병인 3월  퇴계학파 성리학자 원주 거주 우담 정시한 영호남 여행. 4월 11일 아침에 거창 출발, 사근역에서 말 먹이 주고 저녁에 함양읍 냇가 서쪽 서원촌(백연서원) 김후달(金後達) 집에 도착, 군수 심도명(沈道明,沈澈의 字)이 방문, 같이 숙박. 12일 냇가 방축 구경. 13일 최고운과 김점필을 모신 백연서원 참배, 심원록(尋院錄)에 서명. 이은대에 등람, 식후에 서계 유람. 14일 아침에 매일 동숙하던 군수와 작별, 오후에 안양사(安養寺: 휴천면 문정리 법화사)에 도착. 15일 여암(驢巖), 삼성대(三聖臺), 용유당(휴천면 용유담) 유람, 오후에 군자사 도착, 향로당에서 숙박. 16일 진사 박세혁 내방, 저녁 금대암 방문, 안국사 향로전에서 숙박. 17일 벽송암 종장 천륜(天倫) 내방, 저녁 서암 방문, 노승 정찬 영접. 19일 아침 두타암, 무량굴, 상무주 방문,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내방. 20일 묘적암 방문, 상무주로 귀환. 21일 윤판옥 수리, 견성암 종장 자징(自澄), 묘적수좌 사철 내방. 22일 군자사 승통 법안 내방. 24일 지리산 산불. 25일 상무주암을 떠나 천인암(千人菴), 상고대암(上高臺菴) 방문, 오후 실상사 도착. 26일 고철불 관찰. 27일 저녁 천인암으로 이거. 29일 영기 수좌 실상사로 귀환. 윤4월 1일 견성암 왕래. 17일 도솔암에서 천왕봉 등정, 반야봉 유람, 저녁 칠불암 도착. 19일 금류동(金流洞) 도착. 5월 1일 삼일암 왕래. 6월 28일 군선요어(群仙要語) 3자 읽음. 7월 4일 황정경오장도 6장, 도장초(道藏抄) 10장 읽음. 5일 황정경채취도 이하 수십 장 종편 읽음. 23일 황정 오장도, 도장초 심신론(心神論) 읽음. 30일 저녁 연곡사 가서 비전의 선각선사비를 보다. 8월 4일 황정 도장초 17장 다 읽음. 6일 황정 채약도 등 10여 장 재독. 20일 불일폭포 관람. 화개동을 지나 구례현 화엄사 향로전 숙박. 부도암에 올라 연기(烟起)조사 석상, 선각조사 모친 석상 관람. 22일 운동 비전 참배, 실상사 도착. 24일 부도전에서 쉬고 견성암에 오르다. 25일 천인암과 상무주암에 오르다. 9월 2일 묘적암 방문, 박광선(朴光善: 함양읍내 서원<백연서원>촌에 산다고 함) 내방. 3일 묘적암에서 천인암으로, 견성암으로 하산하여 군자사 도착. 저녁 후에 말 타고 금대암 방문. 7일 금대암 출발 등구창촌(登龜倉村) 도착, 안국동암 각자승(刻字僧) 채간(綵侃) 동행 오도재 넘어 제안역촌에서 비를 만나 무릅쓰고 전진, 함양읍 냇물 서쪽 백연서원촌 김후달(金厚達) 집에 도착. 저녁 사근찰방 우홍성(禹弘成)과 함양군수 내방. 8일 아들 정항, 김후달과 이은대에 올라 함양읍내를 바라보고, 걸어서 학사루에 가서 등람. 군수와 작별하고 개평촌에 도착, 상주 출신으로 장가온 생원 황재겸 집에 숙박.

9월 9일 정일두선생과 노옥계 집터를 참관, 안음현을 지나 화림동 동구에 도착, 향교 앞 긴 다리를 건너 점풍루에 등람, 심진동과 화림동의 큰 내가 합쳐지는 경계에 반하여 이사와 살고 싶어 함. 일두선생 유람처인 군자대(군자정) 도착, 신평 전좌수촌에서 말 먹이고 옥산창촌(玉山倉村) 김진추 집에 숙박.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아들 정항도 와서 같이 숙박, 암승은 일천(一天)과 선찬(善贊: 영각사 표석비<숙종10년,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영각사 문을 지나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3일 3좌 가섭상을 참관. 14일 고현을 지나 올라가 수송대 유람, 다시 고현을 지나 거창읍에서 말 먹이고 가조현 문좌수 남로(文南老) 집에서 숙박. 이하 생략(1997년 9월 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정시한 [, 1625~1707]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나주()
우담()
별칭 자 군익()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우담집》,《산중일기》

본문

본관 나주(). 자 군익(). 호 우담().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 원주()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로 천거되어 집의() ·사업()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에 올라 1691년(숙종 17) 앞서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 장()씨의 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 ·이익()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 《임오록()》 《관규록()》 《사칠이기변()》 《변무록()》 등이 있다.

산중일기 []

요약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정시한(:1625~1707)이 삼남 일대를 돌아본 기행록.
구분 기행록, 필사본
저자 정시한()
시대 조선시대(1686~1688)
소장 고려대학 중앙도서관

본문

필사본. 2권 2책.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1686년(숙종 12) 3월 13일에 원주() 본가를 출발하여 청주 공림사()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 등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도의 명산과 고찰을 돌아보고, 겸하여 저자의 친척집을 두루 방문한 다음 1688년 9월 19일 원주 대야()의 본가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이 정확한 기록은 당시의 사찰() 현황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담선생문집()》 권19∼20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민영규() 교수의 집교()로 인문과학자료총서() 제1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