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사와 문곡대사


 

  문곡대사비명 文谷大師碑銘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 너는 회당(悔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배운 지 몇 년 되어 바야흐로 불경에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으로 하는 학문은 수고롭고 마음의 학문은 고상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소매를 떨치고 금강산과 묘항산에 들어가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안으로 참구하고 삼매(三昧)가 아니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 우리 유가는 불가를 비난하여 이단이라고 한다. 비난하는 자가 자격이 있은 뒤에야 비난당하는 자가 그 그름을 안다, 지금의 학자는 어찌 일찍이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배운 바가 참으로 성리학의 책 몇 권만 섭렵하면 피곤할 정도로 그 입에 올리는 것은 성명(性命)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이다. 명성이 여기에 있고 영화로움과 이익이 여기에 있다. 그 마음을 돌아보면 이미 황폐해졌다. 그런 자들은 남들을 바로 잡을 겨를이 없이 남들에게 바로잡히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스님의 기풍을 들으면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스님은 만년에 덕유산 향적봉 아래 구천동(九千洞) 백련사(白蓮社)에 머물며《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등 책으로 사방에서 오는 이들을 교수하였다. 71세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법랍(승려가 된 햇수)은 55세이다. 다비(승려의 화장식)하는 날에 기이한 징조가 많았다고 한다. 스님의 속성은 이씨로 농서군공(농서군공:이장경李長庚 성주이씨의 중시조)의 11세손이다. 문곡은 그 호이다. 그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 산청 율곡사의 봉암대사의 제자로 채제공에게 봉암대사 비명을 받으러 간 스님)으로 하여금 편지를 갖고 천리 길을 달려 나에게 비명을 청하게 하였다. 그 의리가 가상하여 명(銘)한다.

나는 우리 유가를 옳게 여기니
부처에게 어찌 아첨하리오
명을 지어 후세에 보이나니
한마디 말이 뜻에 맞으리.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영조 때에 판서를 역임하고 정조 4년(1780) 이후 8년간 서울 근교 명덕산(明德山)에서 은거한 뒤 정조 12년(1788)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 후기 남인 정승으로 명재상이었다. 어릴 때 단성현감인 부친을 따라 산청에서 6년을 살아 그 인연으로 율곡사 승려 봉암대사(鳳巖大師의) 찬영문(讚影文)과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에 문곡(文谷)대사가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1778년 정조 2년에 문곡(文谷)대사의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으로 하여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찾아가 문곡대사의 비명(碑銘)을 받아오게 함. 풍신은 봉암(鳳巖)대사의 제자로 임색(任臣+責)의 편지를 가지고 번암을 찾아가 봉암대사의 비명을 받아오기도 하였다.번암집. 문곡대사는 함양군 안의면의 장수사 출신이라서 장수사 터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부도가 있다. 석종형 부도로 문곡지탑(文谷之塔)이라 새겨져 있다. 문곡대사의 스승 묘언은 번암 채제공이 영찬을 지은 취은대사로 추정된다. 취은대사의 영정은 장수사 육사탱(1788년 정조 12년 은신암 산신탱과 일괄 그림)으로 남아 있다.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師俛焉歸依學幾年。方且見星於法海三藏。一日忽曰。口學勞心學高。遂拂袖入楓嶽竗香。專精內究。非三昧不屑焉。嗚呼。吾儒詆佛氏以爲異端。詆之者有諸己而後見詆者知其非。今之學者曷嘗有以心而不以口者乎。所學苟能涉程朱書數卷。敝敝焉尙厥口。曰性命也。曰理氣也。聲名焉在是。榮利焉在是。顧其心茅已塞矣。若然者。吾恐其未暇正人而見正於人之不暇也。聞師之風。庶可以知所警矣。師晩住德裕香積之下九千洞白蓮社。以華嚴圓覺楞嚴書。敎授四方來者。七十一怡然示寂。法臘五十五。闍維之夕。多異徵云。師俗姓李。隴西公十一世孫也。文谷其號。其徒貽成。使豐信賫書走千里。乞銘於余。其義足尙。銘曰。
吾是吾儒。佛何足媚。銘以示後。唯是一言契意。

 용추사 부도군(龍湫寺 浮屠群)  

용추사(龍湫寺) 건너편 용추폭포 위쪽 기슭에 석종형 부도 3기가 있는데 1기는 둥근 대형 좌대석 위에 있다. 그것은 청심당(淸心堂)의 것이고 나머지 2기는 "문곡지탑(文谷之塔)", "연우당축훈대사탑(煙藕堂竺訓大師塔)"이란 명문이 있으나 문곡대사 외는 모두 시대와 사적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樊巖先生集卷之五十八
 
翠隱大師影贊


生果治其心。形骸便屬外物。

死果往而生。前塵不須戀結。

泡散雲收。是何七分之留落祇林。

龍象之燒香膜拜者。可能諦文谷師相傳之心

 

樊巖先生集卷之五十八      채제공(蔡濟恭 1720~1799)
 
文谷大師影贊


口學勞

心學高。

頓悟之言。妙不在多。

惟口是騖。衆生則那。

升者其氣。蛻者其影。

因依有所。盍禮以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