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부사 선정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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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府使善政碑文解說集

 (觀察使, 郡守 包含)

비림 공원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에 있다.)

북단

서편

 

동편

관찰사 이지연 1

서희순 3

이근필 5

정기선 2

군수 박수문 3

김이의 8

최한후 1

 

관찰사 민형식 9

이호준 7

윤자승 6

김명진 8

오취선 4

군수 조규순 13

이언양 2

 

서편

 

동편

고상국 잠곡 10

군수 윤장 5

조제만 11

정무 4

이상선 16

이헌주 7

오영석 19

조병갑 18

박정규 20

 

부사 이득준 1

군수 김지순 9

이희주 6

강이문 12

한치조 15

이익수 10

김석균 14

김봉수 17

   남단

관찰사 목록

1.이지연:재임 1823.11.10~1825.4.16 입비 1825.10

2.정기선:재임 1827.8.20~1829.5.7 입비 1832

3.서희순:재임 1833.4.17~1834.10.20

4.오취선:재임 1868.1.5~1869.6.15 입비 1869.9

5.이근필:재임 1877.12.22~1880.12.29 입비 1881.2

6.윤자승:재임 1880.12.29~1882.11.24 입비 1882.12

7.이호준:재임 1886.6.14~1887 입비 1887.11

8.김명진:입비 1890

9.민형식:입비 1904

10.고상국 잠곡:입비 1684

 

부사 목록

 

1.이득준:1786~1787 재임, 1788 입비

※ 박재문:1773 입비

 

군수 목록

 

1.최한후:1482 재임, 1511 입비

2.이언양:1586 입비

3.박수문:1646~1648재임,1648입비

4.정무:1686 재임, 1701 입비

5.윤장:1713 입비

6.이희주:1718 입비

7.이헌주:1823 입비

8.김이의:1826 입비

9.김지순:1826 입비

10.이익수:1832 입비

11.조제만:1833? 입비

12.강이문:1842 입비

13.조규순:1849 입비

14.김석균:1857 입비

15.한치조:1870 입비

16.이상선:1878 입비

17.김봉수:1881 입비

18.조병갑:1886~1887 재임,1887 입비

19.오영석:1888 입비

20.박정규:1904 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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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觀察使李公止淵恤民善政碑

( 관찰사 이공 지연 휼민 선정비 )

   澄淸之志(증청지지)  搔剔之功(소척지공)  萬口同辭(만구동사)  吁嗟乎公(우차호공)   

        관찰사 이지연 공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 청렴함을 칭송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을유년 10월 비를 세운다.

      歲在乙酉十月  日建(순조 25년 1825, 을유)

 1.이지연:재임 1823.11.10~1825.4.16

 

2. 觀察使鄭公基善永世不忘碑

(관찰사 정공 기선 영세 불망비)

    不動聲色(부동성색) 坐鎭澆風(좌진요풍)  洗寃澤物(세원택물)  咸曰我公(함왈아공)

        관찰사 정기선 공이 권세를 부리지 않고 풍속을 잘 다스려 백성들의 억울한 일이 없게하여 존경을 받았기에 이를 잊을 수 없어 순조32년 (1832)에 이 비를 세웠다.

    道光十二年壬辰閏九月日  (朝鮮純祖三二年  西紀一八三二年)

 2.정기선:재임 1827.8.20~1829.5.7

 

3. 觀察使徐公熹淳恤民善政碑

        ( 관찰사 서공 희순 휼민 선정비 )

        嗟嗟徐公(차차서공)   其德是風(기덕시풍)    澤深地厚(택심지후)   垂恩大同(수은대동)        

淸以潤民(청이윤민)   歉能變豊(겸능변풍)    碑也有思(비야유사)   壽傳無窮(수전무궁)

        관찰사 서희순 공은 어진 덕으로써 교화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사욕이 없어 백성들이 윤택하게 살았고 흉년에는 이재민을 구제하여 이를 기리어 비를 세웠다.

 3.서희순:재임 1833.4.17~1834.10.2

 

4. 觀察使吳公取善永世不忘碑

( 관찰사 오공 취선 영세 불망비 )

 兩載寢糴(양재침적)   百世頌騰(백세송등)

    관찰사 오취선 공은 2년 동안이나 양곡 거둬들이는 일을 중지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잘 도와서 그 은혜를 잊지 못해 비를 세웠다.

      己巳九月  日(고종6년, 1869, 기사)

 4.오취선:재임 1868.1.5~1869.6.15

 

5. 觀察使李公根弼淸德善政碑

( 관찰사 이공 근필 청덕 선정비)

           宣德有化(선덕유화)   不遐玆鄕(불하자향)  來 ○ ○ ○     遺愛召棠(유애소당)           

과막기보(科瘼旣補)   재견차상(災蠲且詳)   勒石記績(늑석기적)   用視無疆(용시무강)

                관찰사 이근필 공은 덕으로써 교화시키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정사를 바르게 하였기에 조선 고종 12년(1876)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

       光緖七年四月  日 (高宗十八年 一八八一年)

 5.이근필:재임 1877.12.22~1880.12.29

 

6. 觀察使尹公滋承永世不忘碑

     ( 관찰사 윤공 자승 영세 불망비 )

        관찰사 윤자승 공을 길이 잊지 않기 위해 고종 19년 (1882) 비를 세웠다.

    光緖八年 壬午十二月  日建(高宗十九年 一八八二年)

 6.윤자승:재임 1880.12.29~1882.11.24

 

7. 觀察使李公鎬俊永世不忘碑

      (관찰사 이공 호준 영세 불망비)

   棠舍勿剪(당사물전) 竹馬爭迎(죽마쟁영)  化洽旬宣(화흡순선)   志槪澄淸(지개증청)   

        관찰사 이호준 공은 일을 순리로 처리하고 선정을 베풂이 흡족하고 그 뜻이 맑아 길이 잊을 수 없어 고종 24년(1887) 비를 세웠다.

      光緖十三年丁亥十一月  日 (高宗二十四年 一八八七年)

 7.이호준:재임 1886.6.14~1887

 

8. 觀察使金公明鎭永世不忘碑

 ( 관찰사 김공 명진 영세 불망비 )

      趾美棠舍(지미당사)  興感桐鄕(흥감동향)   又捐餼廩(우연희름)   用贍黌堂(용섬횡당)     

  稅駄革謬(세태혁류)  灾結救荒(재결구황)   百世貞珉(백세정민)   山高水長(산고수장)

        관찰사 김명진 공은 창고의 쌀을 흘어 학교의 재정을 돕고 잘못된 세금제도를 고치고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어 비를 세웠다.

※ 거창박물관 뜰에 있는 순상국巡相國김공명진金公明鎭영세불망비는 고종 27년(1890,경인) 12월에 세워진 것이니 함양 비도 이해에 세워졌을 것이다.

 

9. 觀察使閔公衡植去思不忘碑

( 관찰사 민공 형식 거 사 불망비 )

 簡在帝心(간재제심)   尹玆南荒(윤자남황)   助弊郡庠(조폐군상)   廉調驛租(염조역조)       

比之寇栢(비지구백)   咸曰召棠(함왈소당)   銘公之蹟(명공지적)   壽以龜趺(수이구부)      

관찰사 민형식 공은 고을 향교를 돕고 조세를 감했으며 흉년에 곳간을 헐고 백성들을 구제했기에 이를 기리기 위해 조선 광무 8년(1904) 비를 세웠다.

      光武八年甲辰六月 日(一九0四年)

 

10. 故相國 潛谷○○○○○○

       康熙二十三年 二月 日(肅宗十年 一六八四年)

- 내용 불명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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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府使李侯得駿淸德善政碑

(부사 이후 득준 청덕 선정비

  謹按萬歷乙卯李公諱成吉來守是郡  最著聲績 今侯以公之六代孫

   亦莅玆土愛民淸德紹修先烈爲永世遺愛之蹟 侯之世德 猗歟盛哉

   이득준 부사는 그의 6대조 이성길 공이 광해 7년(1615)에 군수로 와서 공적을 남겼는데 그 후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사욕이 없어 선대를 이어 업적을 쌓았기에 이를 기리기 위해 정조 12년(1788)비를 세웠다.

    歲戊申三月 日建(正祖十二年一七八八年)

※ 府使朴侯載文永世不忘碑

乾隆三十八年癸巳(1773영조49)十一月建

(마천면 창원리 창원마을 동구에 군수김이의비와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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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府使崔侯漢侯淸德善政碑

(부사 최후  한후 청덕 선정비)

  淸如氷蘗(청여빙벽)   政右赣黃(정우공황)   一年治化(일년치화)  萬古難忘(만고난망)

        조선시대 최한후 부사가 사욕이 없고 바른 정사를 베풀어 잊을 수 없기에 이를 기리기 위해 중종6년(1511)에 비를 세웠다.

        正德辛末五月 日建(朝鮮中宗六年 西紀一五一一年)

※ 이 시기는 함양군수 시절이지 부사가 아니므로 이 비의 명칭은 잘못임

 

2. 郡守李侯彦讓淸德善政碑

 (군수 이후 언양 청덕 선정비 )

○ ○ ○ ○     ○ ○ ○ ○

     萬曆十四年(宣祖十九年一五八六年)

咸豊四年甲寅五月重修(哲宗 五年 一八五四年)九世孫  

   이언양 군수는 사욕이 없고 덕망이 높아 선정을 베풀었기에 이를 기리어 선조 19년(1586)에 비를 세우고 철종 5년(1854)에 중수했다.

 

3. 郡守朴侯守文善政碑

  ( 군수 박후 수문 선정비)

戊子三月 日建(仁祖二十六年一六四八年)

        戊午秋 曾孫 준王+俊-人 莅晋陽移立建碑閣

        (무오추증손준리진양이립건비각)

   조선 중기의 박수문 군수가 선정을 베풀어 인조 26년(1648) 3월에 비를 세웠는데 무오년(1738,영조14) 가을에 증손 준이 진양에 부임하여 옮겨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4. 郡守鄭侯堥永世不忘碑

( 군수 정후 무 영세 불망비 )

     조선후기 정무 군수의 치적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 숙종 27년(1701) 3월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康熙四十年三月 日建(肅宗二七年 一七0一年)

 

 5. 郡守尹侯樟愛民善政碑

( 군수 윤후 장 애민 선정비 )

       조선후기의 윤장 군수는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39년(1713)에 비를 세웠다.

  癸巳五月  日建(肅宗三十九年一七一三年)

 

6. 郡守李侯熙疇淸德善政碑

( 군수 이후 희주 청덕 선정비 )

     이희주 군수는 사심이 없고 덕망이 높아 선정을 베풀었기에 조선 숙종 44년(1718) 그를 위한 비를 세웠다.

崇禎甲申後戊戌四月 日建 (肅宗四十四年年 一七一八年)  

 

7. 郡守李侯憲周淸德善政碑

  ( 군수 이후 헌주 청덕 선정비 )

   南康遺規(남강유규)   北海餘化(북해여화)   三年治蹟(삼년치적)   一碑猶寡(일비유과)   

   조선후기 이헌주 군수는 3년동안의 정사에서 법도를 바로 잡고 덕화를 널리 펴 그 치적이 지대함으로 사심없고 선정을 베푼 공을 기리어 순조 23년(1823) 5월에 비를 세웠다.

                     道光三年五月 日建(純祖二三年 一八二三年)

 

8. 郡守金侯履示+韋淸德善政碑

(군수 김후 이의 청덕 선정비)

      賨渝變舊(종유변구) 冠服回新(관복회신) 氷壺霜鏡(빙호상경) 事這稱均(사저칭균)

                조선후기의 김이의 군수는 맑고 깨끗한 정사로 인해 평화로운 고을을  이루웠기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순조 26년(1826) 5월에 이 비를 세웠다.

       丙戌五月  日建(純祖二十六年一八二六年)

※ 郡守金侯履示+韋永不忘碑(世字가 원래 없다)

遺化玆鄕 惠老山戶 流民蜂聚 綠石安堵

丙戌六月日建

(마천면 창원리 창원마을 동구에 부사박재문비와 같이 있다.)

 

9. 郡守金侯芝淳永世不忘碑

  ( 군수 김후 지순 영세 불망비 )

     김지순 군수는 이 지방에 부임하여 치적을 쌓았기에 이를 길이 잊지 않기 위해 순조 26년(1826) 11월에 비를 세웠다.

    道光六年丙戌十一月 日建 (純祖二十六年 一八二六年)

 

10. 郡守李侯益秀善政碑

( 군수 이후 익수 선정비 )

   歷選循吏(역선순리)  不讓古昔(불양고석) 宅心公潔(택심공결)  五載惟一(오재유일)

            口碑罔報(구비망보)  庸識于石(용지우석) 風聲育英(풍성육영)  春脚保赤(춘각보적)        

이익수 군수는 공명정대하고 깨끗하며 영재를 기르는데 명성이 높아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어 그 선정을 기리어 순조 32년(1832) 윤9월에 비를 세웠다.

      道光十二年壬辰閏九月 日(純祖三二年 一八三二年)

 

11. 郡守趙侯濟晩永世不忘碑

     ( 군수 조후 제만 영세 불망비 )

            自有梁肉(자유양육)   安用藥石(안용약석)   剖決如流(부결여류)   動符軌躅(동부궤촉)

               良苦明飢(양고명기)   寧甘冒法(영감모법)   便宜之政(편의지정)   惠人也洽(혜인야흡)   

    조선후기 이 고장의 조제만 군수는 법을 잘 다스려 양민의 고통과 기근을 덜어 편의를 도모하는 정치로 풍성한 은혜를 끼쳤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어 불망비를 세웠다.

 

12. 郡守姜侯彛文淸德善政碑

( 군수 강후 이문 청덕 선정비 )

  玉溫氷冷(옥온빙냉)  維侯之淸(유후지청)   四載爲治(사재위치) 百務告成(백무고성)          

강이문 군수는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깨끗하게 사심 없이 정사를 펼치어 4년 동안 모든 일을 잘 베풀어 치적을 쌓았기에 헌종 8년(1842) 그를 위해 비를 세웠다.

道光二十二年 壬寅九月  日建 (憲宗八年 一八四二年)

 

 13. 郡守趙侯奎淳永世不忘碑

( 군수 조후 규순 영세 불망비 )

政先簡易(정선간이)  治務公平(치무공평)  懷我以德(회아이덕)   徯侯其蘇(혜후기소)      

 民有餘粟(민유여속)  軍無逋丁(군무포정)  五載循撫(오재순무)   一境歡愉(일경환유)       

조규순 군수는 임기동안 정사는 간편하고 공정하게 덕으로써 다스렸으며 백성들은 풍요롭고 태평성대를 누림으로써 길이 잊을수 없어 조선 헌종15년(1849)비를 세웠다.

      道光二十九年己酉八月  日 (憲宗十五年 一八四九年)

      季子秉甲丙戌七月莅任十月日建閣移奉(高宗23年1886)

※  

태인 조규순 공적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1, 피향정 내)

 

 

 

 

 

 

 

   조규순 공적비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으로 태인현감을 지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이는 조병갑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백성으로부터 1천량을 수탈하여 세운 것으로 농민들의 원성을 샀던 문제의 비석으로, 글자 그대로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는 비이다. 이 비는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 경내에 있다.

 

14. 郡守金侯奭均永世不忘碑

( 군수 김후 석균 영세 불망비 )

  百世淸標(백세청표) 五載治規(오재치규)  一片語石(일편어석)  萬口同辭(만구동사)  

    김석균 군수는 5년간 이 고장을 깨끗이 다스린 표본이 되어 한결같이 칭송이 자자하며 길이 잊지 않기 위해 철종 8년(1857) 7월에 비를 세웠다.

  咸豊七年丁巳七月  日建(哲宗八年 一八五七年)

 

15. 郡守韓侯致肇永世不忘碑

 ( 군수 한후 치조 영세 불망비 )

  昔謠來暮(석요래모)  盍將去思(합장거사)  威愛攸及(위애유급) 廉介自持(염개자지)      

敝完欹整(폐완의정)  綱擧目隨(강거목수)  鄒魯玆土(추노자토) 永世有辭(영세유사)   

   한치조 군수는 폐습을 고치고 기강을 세워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이 고장을 이루었기에 그를 길이 잊지 않기 위해 고종 7년(1870) 8월에 비를 세웠다.

 庚午八月日(高宗七年一八七0年)

 

 16. 郡守李侯象先永世不忘碑

( 군수 이후 상선 영세 불망비 )

     公廨惟新(공해유신)   賑政以仁(진정이인)   去後遺愛(거후유애)   我侯之民(아후지민)  

       이상선 군수는 공청을 쇄신시키고 인자하게 백성들을 구제하여 사랑으로써 다스렸기에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고종 15년(1878) 9월에  비를 세웠다.

  光緖四年戊寅九月 日建(高宗十五年 一八七八年)

 

17. 郡守金侯鳳洙永世不忘碑

      (군수 김후 봉수 영세 불망비 )

       捐廩捄弊(연름구폐) 奉救彈誠(봉구탄성) 擧斷明察(거단명찰) 德溢我銘(덕일아명)   

   조선말기 김봉수 군수는 이 고장을 다스리면서 치적을 쌓았기에 이를 영원히 잊을 수 없어 고종 18년(1881) 2월에 이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光緖七年辛巳二月  日(高宗一八年 一八八一年)

 

18.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

( 군수 조후 병갑 청덕 선정비 )

     先侯之思(선후지사)   遺民是撫(유민시무)  削廩繕廨(삭름선해)  減租蠲布(감조견포)      

束薪政嚴(속신정엄)   食蘗心苦(식벽심고)  牛刀二載(우도이재)   龜趺千古(구부천고)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 7월에 비를세웠다.

光緖十三年丁亥七月 日(高宗二四年 一八八七年)

 ※ 조병갑(趙秉甲/?~?)

조선 후기의 탐관(貪官). 본관 양주(楊州). 1892년 4월 28일 고부군수 부임. 1893년(고종 30) 고부군수(古阜郡守)로서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함양군수 선정비각도 세웠다)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도피, 뒤에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전라도 고부군은 드넓은 평야와 해안까지 끼고 있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물산(物産)이 풍부하기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에 1892년 4월 28일 조병갑(趙秉甲)이 군수로 부임한 이래,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그의 수탈 방법은 원래 있던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허물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 보를 만든 다음 그 농민들에게서 수세(水稅)를 거두었고, 예전에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며 고부 농민들로부터 돈을 빼앗았으며, 돈 가진 자들을 불효(不孝), 불목(不睦:사이가 서로 좋지 않음), 음행(淫行), 잡기(雜技:여러 가지 노름) 등 갖가지 죄목으로 엮어 가둔 후 속전을 받고서야 풀어 주는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1893년 11월 고부의 농민들은 불법적 수탈을 벗어나기 위해, 전봉준을 추대하여 관에 제출할 소장을 써 달라 하고 대표 40인이 조병갑을 찾아가 수세를 줄여 달라고 진정하였다.  그러나 감면을 진정한 군민들은 도리어 붙잡혀 처벌을 당하는 곤욕을 치뤘다. 이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의 송두호(宋斗浩)의 집에서 은밀한 계획을 모의하였다. 전봉준 등 20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추진한 이른바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이었다. 12월 비밀리에 무장으로 내려가 손화중을 만났다.  하지만 '무장회동'에서 전봉준은 손화중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난 군수 조병갑은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 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즉 고부의 농민 5백여 명이 1894년 갑오년 1월 9일 예동(禮洞) 마을에 모여들었고,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리고 탐학(貪虐:탐욕이 많고 포학함)한 향리를 처벌한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사발통문의 3개 결의내용이 실행된 것이다. 이것이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시발이다.참고사이트

 

19. 郡守吳侯榮錫淸德善政碑

( 군수 오후 영석 청덕 선정비 )

 公廉守介(공염수개)  化洽百里(화흡백리)  捐俸蠲布(연봉견포)  厚戶保子(후호보자)

    鞭蒲之頌(편포지송)  氷蘗其美(빙벽기미)  吏安民懷(이안민회)  政出一視(정출일시)   

   조선말 오영석 군수는 청렴하여 덕화가 뻗쳤고 봉급을 털어 세금에 보태며 형벌은 가볍고 관리가 편하며 백성들이 덕을 입으니 고종 25년(1888) 7월에 이를 기리어 비를 세웠다.

 光緖十四年戊子七月 日建(高宗二五年 一八八八年)

 

20. 郡守朴侯晶奎淸德善政碑

( 군수 박후 정규 청덕 선정비 )

 莅鄒魯鄕(이추노향) 邁召杜跡(매소두적) 矯捄役價(교구역가)  釐正結冊(이정결책)    

崇儒廩捐(숭유늠연) 立約俗革(입약속혁) 銘言在玆(명언재자)  永世無斁(영세무역)

    조선말 박정규 군수는 역가를 바로 잡고 유학을 숭상하며 풍속을 새롭게 하여 고종 갑진년(1904) 6월에 이를 기리어 청덕 선정비를 세웠다.

   光武八年甲辰六月 日(一九0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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