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인물역사연표 咸陽郡守人物歷史年表


 

소속 대한민국 경상남도; 조선 경상도, 경상우도, 진주부(1895), 경상남도(1896); 고려 경상도; 통일신라 강주(康州).

군명 이칭: 속함(速含), 함성(含城), 천령(天嶺), 허주(許州), 함양(含陽)

188년 신라 벌휴이사금 5년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 아막성 남원시 아영면 성리, 천령군의 속현인 운봉현의 옛 이름)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가 방어하다.삼국사기.

伐休(一作發暉)尼師今 五年 春二月 百濟來攻母山城 命波珍찬 仇道 出兵拒之.

백제 초고왕 23년 2월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삼국사기.

肖古王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484년 신라 소지왕 6년 7월 고구려가 북방 국경을 침범하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 아래에서 격파하다.삼국사기.

六年 秋七月 高句麗侵北邊 我軍與百濟合擊於母山城下 大破之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 이차돈 순교, 신라 불교 공인.

576년 신라 진흥왕 서거, 차자 진지왕 즉위, 태자 아들 진평왕 함양으로 피신

579년 신라 진평왕 즉위, 잠저시 별궁에 군자사(君子寺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터) 창건

602년 신라 진평왕 24년 백제가 천령군의 속현인 아막성(阿莫城) 공격, 신라 격퇴, 화랑 귀산과 추항 전사.

二十四年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추項死之.三國史記.

백제 무왕 3년 8월 신라의 아막산성 공격, 실패하고 철병하다.삼국사기.

百濟 武王 三年 秋八月 王出兵圍新羅阿莫山城(一名母山城) 羅王眞平遣精騎數千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타, 畏石, 泉山, 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令佐平解수 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 武殷帥衆拒戰 解수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士當軍無退 豈敢奔退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추項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수僅免 單馬以歸.

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추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蓋聞道於賢者之側乎 時圓光法師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才+區衣進告曰 俗士전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鷄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란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眞平王建福十九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暮)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于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貴山-추項 幷以少監赴焉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 曰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추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戶滿野 匹馬隻輪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群臣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추項大舍.삼국사기,열전.

616년 신라 진평왕 38년 10월 백제가 모산성을 침공하다.

三十八年 冬十月 百濟來攻母山城.

백제 무왕 17년 10월 달솔 백기를 시켜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백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624년 신라 진평왕 46년 백제 무왕 25년 10월 백제가 신라의 속함, 앵잠 등 6성 공격, 속함성 등 함락, 신라 장군 눌최(訥催) 전사

冬十月 百濟兵來圍我速含-櫻岑--熢岑-旗懸-穴柵等六城 於是 三城或沒或降 級飡訥催 合烽岑-櫻岑-旗懸三城兵堅守 不克死之.

冬十月 攻新羅速含, 櫻岑, 山+支岑, 烽岑, 旗懸, 冗柵等六城取之.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冗 當作穴〕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委之諸將 國之存亡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築畢而歸 於是百濟侵攻愈急 速含-岐岑-冗柵三城〔冗 當作穴〕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 危 此誠志士義夫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  軍士死亡無幾人 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此奴 宜遠之 訥催不聽 至是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  奴反與鬪俱死 王聞之悲慟 追贈訥催職級 

702년 신라 성덕왕 1년 해동 화엄종 시조 의상(義湘 625-702)대사 서거.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토속 지명을 한문 지명으로 고쳐 천령군이라 개칭

十六年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尙州 領州一, 郡十, 縣三十; 삽良州爲良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二, 縣三十四; 菁州爲康州 領州一, 郡十一, 縣二十七; 漢山州爲漢州 領州一, 小京一, 郡二十七, 縣四十六; 首若州爲朔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一, 縣二十七; 態川州爲態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三, 縣二十九; 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縣二十五; 完山州爲全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 縣三十一; 武珍州爲武州 領州一, 郡十四, 縣四十四.(良州一 作梁州)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 領縣二 雲峯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利安縣 本馬利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822년 신라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 최웅(崔雄) 토벌 공으로 속함군 태수에 임명.삼국사기.

十四年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 完山 菁 沙伐四州都督 國原 西原 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 牛頭 삽良 浿江 北原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찬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찬 速含郡太守 令忠位級찬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찬張雄先發 잡찬衛恭 波珍찬悌凌繼之 伊찬均貞 잡찬雄元 大阿찬祐徵等 掌三軍俎征 角干忠恭 잡찬允膺 守蚊火關門 明基 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從衆赴黃山 安樂赴拖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侍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御恭 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 滅之 諸軍共至熊律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自死 從者斷首與身各藏 及城陷 得其身於古塚誅之 戮宗族 黨與凡二百三十九人 縱其民 後論功爵賞有差 阿찬祿眞 授位大阿찬 辭不受 以삽良州屈自郡近賊不 汗於亂 復七年

828년 신라 흥덕왕 3년 견당사 김대렴(金大廉) 중국에 조공 가다.

829년 신라 흥덕왕 4년 견당사 김대렴(金大廉) 중국에서 차 씨를 가지고 와 하동, 구례, 산청(속두류록), 함양 등지 지리산 일대에 심음 .삼국사기.

三年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876년 신라 헌강왕 2년 심광대사(深光大師)가 영각사(靈覺寺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창건, 심광대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의 제자로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聖住寺)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은 백월보광탑비에는 심광(心光)이라 표기되어 있다.

883년 신라 헌강왕 9년 결언대사(決言大師)를 시켜 엄천사(嚴川寺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터) 창건, 낙성식에 헌강왕 행차.엄천사사적기. 결언은 화엄종의 학승이다.

885년 신라 헌강왕 11년 봄 2월에 호랑이가 궁궐의 뜰에 들어왔다. 3월에 최치원이 돌아왔다.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소(黃巢)의 도적 무리를 깨뜨린 것을 축하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虎入宮庭 三月 崔致遠還 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冬十月壬子 太白晝見 遣使入唐 賀破黃巢賊

(태산군(太山郡)[현재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수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893년 신라 진성왕 7년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치원은 부성군(富城郡)[현재의 충남 서산시]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出爲太山郡太守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太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894년 신라 진성여왕 8년 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궁예가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갔는데, 그 무리가 6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일컬었다.

八年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粲 冬十月 弓裔自北原 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895~898년 신라 진성여왕 5~6년 고운 최치원 선생 천령군 태수 재임, 대관림 조성, 학사루 건립, 상련대 창건.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아래에 "방로태감(防虜太監) 천령군 태수(天嶺郡太守) 알찬(알粲17관등 중 제6관등) 최치원(崔致遠)"이라고 썼다.신증동국여지승람.

927년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 신라 서울 침공, 경애왕 살해, 경순왕 즉위.삼국사기.

 

995년 고려 성종 14년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

1012년 고려 현종 3년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

1128년 고려 인종 6년 무신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엄천사(嚴川寺 휴천면 동호리 남호마을)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1129년 고려 인종 7년 기유 10월 진주 지리산 오대사(五臺寺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조선시대에 오대사로 불리었다, 현재는 단학선원 수련원) 터에 수정사(水精社) 창건. 낙성 법회에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 성선(性宣)이 초청되어 불경을 강하다.동문선.

1145년 고려 인종 23년 김부식 등 삼국사기 편찬, 여기에 함양군(咸陽郡)으로 표기되어 있다.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 領縣二 雲峯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 利安縣 本馬利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1172년 고려 명종 2년 함양현 감무 (咸陽縣監務)로 강등

1198년 고려 신종 1년 무오 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송광사) 제1세 조사(祖師)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상무주암(上無住庵 마천면 삼정리)에 은거,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크게 깨닫다.

1200년 고려 신종 3년 경신 보조국사 상무주암에서 순천 송광사로 이주.보조국사비명.

1205년 고려 희종 1년 을축 조계산 수선사 제2세 조사 선문염송(禪門才+占頌) 저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지리산 금대암(金臺庵 마천면 가흥리)에서 수도하다.진각국사비명.

1254년 고려 고종 41년 하천단(河千旦 ?-1259)이 비서감으로 국자감시를 주관하여 시부(詩賦)로 이소(李邵) 등 33인을 뽑았다. 하천단은 이안현(利安縣 안음현)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여 당시의 외교 문서 표전(表箋)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최자(崔滋 1186-1260) 보한집(補閑集)을 짓다.여기에 지리산 무주암에 살던 대혼자(大昏子) 무기(無己) 스님 이야기가 있다.

1284년 고려 충렬왕 10년 갑신 3월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1226-1292)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 참선하다.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인형과 같았으며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들이 무릎 위에 앉아서 놀았다.

1286년 고려 충렬왕 12년 병술 6월 원감국사 조계산 수선사 제6세 조사가 되다.원감국사비명.

1375년 고려 우왕 1년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1405) 하동으로 귀양. 함양현과 사근역을 지나며 함양객관(咸陽客館 삼구 太守罷衙來勸酒), 효발함양(曉發咸陽 초구 再過咸陽縣), 차사근역판상시운(次沙根驛板上詩韻 사구 勝地起新亭) 등의 시를 지음.쌍매당집.

1380년 고려 우왕 6년 경신 왜구 침입, 사근산성(沙斤山城) 함락, 함양현 감무 장군철(張群哲) 전사

1389년 고려 창왕 1년  기사 함양(咸陽) 사람 전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처 송씨(宋氏)가 왜놈의 노략을 당하였는데, 왜놈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송씨는 죽음으로써 맹세하여 좇지 아니하니, 왜놈이 즉시 그를 죽였다.태종실록.

1390년 고려 공양왕 2년 이안현(利安縣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을 감음현(感陰縣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에 부속시키다

1392년 고려 멸망.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1357-1417)  부여현 감무에서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 교수정(지곡면 개평리 경남 문화재자료 76호)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침. 성종 사제문 수양명월 율리청풍 (首陽明月 栗里淸風)

 

1395년 조선 태조 4년 함양군(咸陽郡)으로 승격

1397년 태조 6년 5월 순군 천호(巡軍千戶) 한을기(韓乙氣)를 보내어 박자안(朴子安)을 군중(軍中)에서 베게 하였는데, 그때에 자안이 왜적을 쫓아 바야흐로 전라도 진포(鎭浦)에 이르렀다. 일이 저 적에 관계되므로 비밀히 하고 선포하지 않으니, 바깥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그 아들 박실(朴實)이 듣고 전하의 잠저(潛邸)에 이르렀다. 마침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 등 여러 종친이 전하의 잠저에서 나오니, 전하(殿下)가 문에 나와 영접하였다. 실이 울며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니, 전하가 말하였다.
  “국가의 큰 일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여러 종친이 들어갔다가 하직하고 가니, 전하가 또 문에 나와 보내었다. 실이 땅에 엎어져 통곡하니, 전하가 마음으로 불쌍하게 여겨 여러 종친과 함께 예궐하여 청하게 하자 하니, 여러 종친이 말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비밀한 일인데, 상감께서 만일 어디서 아셨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
  곧 함께 예궐하여 내관(內官) 조순(曹恂)을 시켜 계청(啓請)하게 하니, 순이 말하였다.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바깥 사람이 어찌 알지 못 할 리가 있겠는가?”
  순이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처음에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너희들은 자안(子安)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있다가 중추원(中樞院)에 명하였다.
  “내가 자안의 죄를 말감(末減)하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지인(知印)을 불러 문서를 이송(移送)하라.”

  중추원에서 심구수(沈龜壽)를 시켜 아뢰니, 곧 명하였다.
  “네가 힘을 다하여 빨리 달리어 시간에 미치어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라.”
  구수가 명을 받고 빨리 달리어 행하는 길이 이미 반이 지났는데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대신 글을 보냈다. 글이 이르는 날, 관원이 자안을 사형하고자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히고 칼날까지 갖추었다. 홀연히 바라보니 넓은 들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며 입자(笠子)로 휘둘렀다. 관원이 괴이하게 여겨 형(刑)을 멈추고 기다려서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은 본래 학술이 없고 또 무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전하가 그 아비 구제한 것을 어질게 여러 금려(禁旅)를 맡게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태조실록
. 박실은 함양 박씨로 함양의 효자이다.

1399년 정종 1년 7월 함양(咸陽) 화척(禾尺) 매읍금(每邑金)의 처가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서운관(書雲觀)을 시켜 옛 글을 상고하게 하니, 아뢰기를,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는 것은 태평 세월을 주장한다고 하였고, 어떤 데에는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외국(外國)이 내조(來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정종실록.

1400년 정종 2년 8월 박습(朴習)과 이은(李垠)으로 좌간의(左諫議)와 우간의(右諫議)를 삼았다.정종실록.

1407년 태종 7년 8월 서북면(西北面) 행대 감찰(行臺監察) 이유희(李有喜)가 복명(復命)하였다. 유희가 아뢰었다.
  “황태감(黃太監)을 맞이하러 온 요동(遼東) 군인이 의주(義州) 촌락(村落)에 흩어져 들어가서 우마(牛馬)를 바꾸는데, 혹은 강제 매매를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전 도순문사(都巡問使) 여칭(呂稱), 의주 목사(義州牧使) 신유정(辛有定) 등이 금지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추핵(推劾)해 아뢰게 하여, 여칭은 함양(咸陽)으로, 신유정은 칠원(漆原)으로 귀양보내고, 현임(現任) 수령(守令)은 볼기[笞]를 때려 환임(還任)시키고, 이미 속산(屬散)된 자는 자원에 의하여 부처(付處)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2월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난 해에 사사(寺社)를 혁파하여 없앨 때에 삼한(三韓) 이래의 대가람(大伽藍)이 도리어 태거(汰去)하는 예에 들고, 망하여 폐지된 사사(寺社)에 주지(住持)를 차하(差下)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승도(僧徒)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산수(山水) 좋은 곳의 대가람(大伽藍)을 택하여 망하여 폐지된 사원(寺院)에 대신한다면, 거의 승도들로 하여금 거주할 곳을 얻게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 고을의 자복사를 모두 명찰(名刹)로 대신하였는데,

조계종(曹溪宗)에 양주(梁州)의 통도사(通度寺) 등등 감음(減陰)의 영각사(靈覺寺) 등등 

천태종(天台宗)에 등등

화엄종(華嚴宗)에 등등

자은종(慈恩宗)에 승령(僧嶺)의 관음사(觀音寺) 등등 남포(藍浦)의 성주사(聖住寺) 등등 함양(咸陽)의 엄천사(嚴川寺) 등등

중신종(中神宗)에 등등

총남종(摠南宗)에 등등

시흥종(始興宗)에 등등. 태종실록.

1408년 태종 8년 11월 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박자안(朴子安)이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 콩 50석과 종이 1백 권과 곽(槨)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고, 시호(諡號)를 양혜(襄惠)라 하였다. 자안은 기위(奇偉)하고 장략(將略)이 있었다. 두 아들이 있으니 박실(朴實)과 박유(朴유)이다.태종실록. 박자안은 함양 박씨로 함양 사람이다.

1413년 조선 태종 13년 2월 명하여 효자(孝子)와 절부(節婦)의 문(門)을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가 보고하였다.

 "함양(咸陽) 사람 전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처 송씨(宋氏)는 기사년(1389 고려 창왕1)에 왜놈의 노략을 당하였는데, 왜놈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송씨는 죽음으로써 맹세하여 좇지 아니하니, 왜놈이 즉시 그를 죽였습니다."태종실록.

1414년 조선 태종 14년 4월  함양(咸陽) 사람 김원생(金元生)이 끌고 가던 소가 벼락을 맞았는데, 3일이 지나서 김원생도 또한 죽었다. 태종실록.

1417년 조선 태종17년 감음현을 안음현으로 개칭, 관청을 안의면으로 옮김

3월 태종의 총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 1373-1440)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사근역(沙斤驛)으로 귀양.태종실록.

6월 7일 박습(朴習)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삼았다.태종실록. 박습은 함양 박씨로 안의면 사람이다. 박습은 금의환향한 뒤 안의면 심진동에서 산수 유람하며 용추폭포 곁에 원당(願堂)을 지었다. 각연조사(覺然祖師)가 절의 규모를 갖추니 한국동란 때 불타기 전까지 장엄히 존재하던 장수사(長水寺 안의면 상원리)이다.옥계집.


8월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이 의령 현감(宜寧縣監) 성계(成蹊)를 파직하여 장(杖) 1백 대를 속받았으니, 큰 비가 올 때에 물가에 이미 베어 놓은 화곡(禾穀)을 거두어들이지 않아서 표류(漂流)하게 한 때문이었다.태종실록.

9월 7일 박습(朴習)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태종실록.

1418년 태종 18년 2월 대사헌(大司憲) 박습(朴習)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그 직(職)만 파면하였다.

5월 박습(朴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태종실록.

1418년 세종 즉위년 8월 10일 박습(朴習)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태종실록.

8월 26일 병조 판서 박습(朴習), 참의(參議) 이각(李慤), 정랑(正郞) 김자온(金自溫), 이안유(李安柔), 양여공(梁汝恭), 좌랑(佐郞) 송을개(宋乙開), 이숙복(李叔福)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었다. 그리고 의금부 제조(提調) 유정현 등에게 명령하기를,
  “상왕께서 모든 정무에 대하여는 보살피시기 가쁘시나, 오직 군사에 관한 일만은 들으시겠다고 하셨는데, 병조에서는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한 가지도 여쭙지 않았으니, 경(卿)들은 그 까닭을 국문하라.”
하고, 또 삼성(三省)의 형조 판서 조말생, 대사헌 허지, 우사간 정상(鄭尙)과 위관(委官) 호조 참판 이지강(李之綱)들에게 잡치(雜治)하도록 하였다. 상왕은 최윤덕(崔閏德)에게도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안문(按問)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9월 14일 박습 <경상남도> 사천(泗川)으로 귀양가다.세종실록.

11월 25일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형률(刑律)에 의거하면, 강상인과 박습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에 해당되므로, 수모자(首謀者)와 종범자(從犯者)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게 될 것이오며, 그들의 부자(父子)의 나이 16세 이상이 된 자는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고, 15세 이하와 처첩(妻妾), 조손(祖孫), 형제(兄弟), 자매(姉妹)는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서 노비를 삼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세종실록.

12월10일 박습의 집을 몰수(沒收)하여 장흥고(長興庫)를 삼았다.

1422년 조선 세종 4년 1월에 송희경(宋希璟)이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에 임명되자 10일에 사헌부 집의 박안신(朴安臣) 등이 탄핵했으나 무사하고 4년간 1425년 세종 7년까지 재임함.세종실록. 송희경은 가사문학의 대가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3)의 고조부로 호는 노송당(老松堂) 또는 균리(筠里)이고 담양으로 이사하였다. 면앙집.

4월 박의손(朴義孫)을 죽였다. 의손은 역적 박습(朴習)의 아들로서 곤남현(昆南縣) 관노(官奴)로 몰입(沒入)되었는데, 그 어미는 습의 버림을 받은 아내이므로 서울에 살게 되었다. 의손이 천역을 싫어하여, 글을 지어 관찰사 최사강(崔士康)에게 바쳤는데, 말하기를,
  “한 남자의 탄식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여자의 원망으로 3년 동안 큰 가물이 오는 것이다. 만일 모자를 같이 살게 하면 천행입니다.”
라고 하였다. 사강이 그 사연을 보고하니, 태상이 말하기를,
“의손은 본시 죽을 사람이나 내가 특히 용서하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원망과 분을 품었단 말이냐.”
하고, 의금부 옥에 내려 치죄하여 참형에 처한 것이었다.세종실록.

1423년 세종 5년 3월   전 좌군 도총제(前左軍都摠制) 여칭(呂稱 1351-1423 시호는 정평靖平)이 돌아갔다. 여칭의 자(字)는 중부(中父)이니, 그의 본관(本貫)은 경상도 함양(咸陽)이다.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전법 전리 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歷任)하여, 밖으로 나가서 공주(公州)·나주(羅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었다. 우리 왕조 때에 와서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 조(曹)의 전서(典書)가 되고,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되어,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임오년에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에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개성 유후(開城留後)·형조 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 계사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이 때에 와서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이다. 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들은 둘이니, 여계(呂稽)와 여뇌(呂賚)이었다.세종실록. 여칭은 청주목사를 지낸 인연으로 그 후손이 청주에 살고 그의 부조묘(不示+兆廟)는 청주에 있다.

4월   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국가의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무릇 신하들이 작고하면, 상제(喪祭)를 반드시 그의 작위와 훈벌의 등급에 따라 품절(品節)하는 것이 모두 옛법에 근본한 것이다. 경은 단정하고 바르며, 강직한 자품으로 이치(吏治)에 장점이 있으면서 학문까지 겸비하였다.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 다섯 도(道)의 감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 임오년에 북방을 순문(巡問)하였을 때 마침 어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었는데, 경이 마음껏 의(義)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安寧)을 도모하였다. 태종께서 더욱 가상히 여겨 허여하셨다. 그 뒤에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되어 여러 군대를 모두 거느렸으며, 혹은 판형조(判刑曹)로 혹은 지의정(知議政)이 되었으니, 모두 높은 품질(品秩)이다. 이리하여 경은 위엄스러우면서도 은덕이 있는 상(相)이 나타났고 번잡한 일은 <덜어서> 없게 하였으며, 요령을 따지는 재주를 갖추어서,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를 가릴 것이 없이 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경은 이같은 지위를 얻은 것이나, 이러한 이름을 받게 된 것은 다행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번에는 늙었다 하여 집에서 휴양한 적도 몇 해나 되었으나, 아직 기력이 그다지 쇠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나의 미치지 못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 돌보지 아니하여 나의 구인(舊人)을 빼앗아 갔는고. 이 향기롭지 못한 박전(薄奠)이나마 그대로 가시지 아니한 정혼(貞魂)을 위로할 수가 있을는지.”
하였다.세종실록.

1425년 조선 세종 7년 최연손의 증조부인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가 12월 10일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부임하다.세종실록.

1438년 세종 20년 7월 환관 배훤(裵萱)을 보내어 중[僧] 행호(行乎)를 함양(咸陽)에 가서 불러 오게 하였다.세종실록.

행호는 조선 초기 태종, 세종조의 고승으로 고려 명신 해주 최씨 최충(崔沖 984-1068)의 후손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戒行)이 뛰어났고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태종이 치악산 각림사를 짓고 창건 대회를 베풀 때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고 , 또 장령산 변한 소경공(昭頃公)  묘소 곁에 대자암을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에 금대사,안국사를 창건하였고, 천관산에 수정사를 지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불타 버린 만덕산 백련사를 효령대군의 도움을 받아 1430년(세종 12)부터 중수하기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하였다. 조선 초기 유생들의 강한 척불론 속에서도 왕실에 대한 불교 보급에 힘썼다.민족문화백과사전. 마천면 가흥리에 금대암과 안국사가 있는데 안국사에는 행호대사의 은광당대화상 부도가 있고, 그의 효성을 상징하듯 그의 어머니 부도도 있다.

12월 이숙번이 함양(咸陽)의 배소(配所)에서 오니, 명하여 쌀 10석과 옷 한 벌과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이숙번은 1440년에 서울 부근에서 죽었고 함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438년 세종 20년 4월  의정부에서 병조 정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경상도 함양(咸陽)에 신설한 역(驛)은 제한(蹄閑)이라 일컫고, 안음(安陰)에 신설한 역은 임수(臨水)라 일컫고, 삼가(三嘉)에 신설한 역은 삼산(三山)이라 일컫고, 단계(丹溪)에 신설한 역은 벽계(碧溪)라 일컫고, 초계(草溪)에 신설한 역은 팔진(八鎭)이라 일컫고, 신반(新反)에 신설한 역은 신흥(新興)이라 일컫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1439년 세종 21년 4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였다.세종실록.

 전하께선 흥천사의 탑을 조종께서 부탁한 바라 하시어, 그 넘어질 것을 근심하사 할 수 없이 새롭게 한 것이온데, 이미 이 탑을 새롭게 하였으면 그만둘 것이옵거늘, 저 중 행호는 무슨 물건이기에 번거롭게 역마(驛馬)로 불러서 흥천사에 두고, 그 공억(供億)을 주어 드디어 도성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참부처[眞佛]라고 지목하여, 위로는 종척(宗戚)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예(禮)로써 우러러보고 시주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고 의심나게 하옵니까. 또 이 절에서 안거회(安居會)를 크게 베풀고 국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그 일을 확대시키는데도, 비록 헌사(憲司)에서라도 그 지나치게 악함을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오니, 무뢰승(無賴僧)들이 여염(閭閻)에 있으면서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방자히 행하여 악함이 더할 수 없사오매, 그 재물을 소모하고 백성을 좀먹는 해를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분부하였다.세종실록.

대자암(大慈庵)도 역시 산이니 행호로 하여금 서울 안에 있지 말고 대자암에 있게 하여, 여름 달을 지내고 서늘한 때를 타서 산으로 돌아가게 함이 가하지 않겠는가. 내가 마땅히 이와 같이 처치하겠다.

5월  중 행호(行乎)를 보내어 산으로 돌아가기를 명하고, 길 연변의 각 고을 수령과 각 역승(驛丞)들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내려가는 전 판선종사(判禪宗事) 행호(行乎)에게 그 공억(供億)을 힘써 정결하게 하고, 감히 만홀하게 말지어다.”
하고, 또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하여 쌀과 소금 각 10석을 주게 하였다.세종실록.

9월  경상도의 안음현(安陰縣)과 함양군(咸陽郡)에 지진(地震)이 일었다.세종실록.

10월 처음에 동지돈녕부사 권담(權聃)의 전처(前妻)는 박습(朴習)의 딸이었는데, 습(習)이 참형을 당한 후에 나라에서 이혼시키고 다시 공조 판서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나, 그래도 박씨와 은근히 통하여 딸을 낳았었다. 담이 장차 죽을 때에 자신이 문권을 만들어서 그 딸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고, 그 아우 권총(權聰)과 숙부 지중추원사 권제(權足+是)로 하여금 증인이 되게 하였다. 정연(鄭淵)이 이를 다 갖고자 하여 권제와 권총을 걸어 사헌부에 송사하였더니, 사헌부 장령 정지담(鄭之澹)이 아뢰기를,
  “권제는 말하기를, ‘담이 자기 손으로 문권을 만들어서 전처의 딸에게 허급하였다.’ 하옵고, 연은 말하기를, ‘이렇게 된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요, 담의 본의가 아닐 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서로 힐난하지마는, 다 실정으로 대답하지 아니하온즉, 본부에서 공함(公緘)만으로 왕복하여서는 심문하여 실정을 얻을 수 없사오니, 의금부에 내려서 취조하여 실정을 밝히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우선 본부로 하여금 총(聰)을 나오게 하여 친히 물어서 시비를 밝히게 하였다.세종실록.

1441년 조선 세종 23년 7월 왕세자빈 권씨가 졸(卒)하였다.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권자홍(權自弘)으로 상장(喪葬)의 제사(諸事)를 맡게 하였으니, 자홍은 빈의 종형(從兄)이었다.세종실록.

8월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정양(鄭穰)과 용담 현령(龍潭縣令) 이거경(李居敬)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유시하였다.세종실록.

1444년 세종 26년 겨울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제계리(蹄溪里 유림면 국계리) 별장에서 공부함.사숙재집.<送兪修撰歸養序>"咸陽爲郡。介在智異衆山之間。僻陋最甚。景醇於甲子(세종26,1444)冬。寓於蹄界里莊舍。余方隸業。思得一儒士與之講論。時鄕學廢弛。赴籍者不過數十人。而其爲人。率皆愚蒙孤陋之徒。後二十一年甲午(성종5,1474)夏。景醇遭養親(양부 강순덕)服。是年冬。挈家南歸。時一善金侯宗直爲郡守。"

1448년 조선 세종 30년 1월 경상도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이보흠(李甫欽)을 대구(大丘)로 옮겨 임명하라.”
하였는데, 사창(社倉)의 편의 여부와 당시에 둔 창고를 시험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또 보흠(甫欽)에게도 이를 유시(諭示)하였다
. 이보흠 세종 28년 7월 성균관 주부.세종실록. 세조 3년 7월에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가 10월에 처형되었다.세조실록.

7월  사헌부가 아뢰었다.세종실록.

또 근일의 일로 보더라도 중궁(中宮 소헌왕후 1395-1446)을 위하여 기도하던 때에 중 일운(一雲)이 작법(作法)을 하였는데, 조금 뒤에 죽었고, 중 행호(行乎)가 법주(法主)가 된 뒤에 오래지 않아서 또한 죽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불력(佛力)이 증험이 없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449년 세종 31년 원경(圓瓊) 영각사 중건.갈천집.

1452년 단종 즉위년 11월   앞서 이숙번(李叔蕃)의 처 정씨(鄭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부처(夫妻)는 노비(奴婢), 전지(田地), 가사(家舍), 재산(財産)을 함께 서명(署名)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맏사위인 전 현감(縣監) 강순덕(姜順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내가 전의 문안(文案)을 고치고자 하여 강순덕으로 하여금 가져오라 하였으나, 강순덕이 이에 따르지 않으므로써 모자(母子)의 의리를 어기었습니다 또 그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수양(收養)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고 칭탁하고, 노비를 마음대로 여러 조카에게 나누어 주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1구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남편의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단종실록.

1455년 조선 단종 폐위, 세조 즉위

1456년 세조 2년 6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지(傳旨)를 반들어 이유(李瑜)를 경상도 순흥(順興)에, 이어(李어 王+於)를 함양(咸陽)에, 이영(李瓔)을 전라도 금산(錦山)에, 이전(李전 王+泉)을 임실(任實)에, 정종(鄭悰)을 광주(光州)에 안치(安置)하니, 청컨대 그 고을의 수령에게 미리 거처할 곳을 수리하게 하되, 난간, 담장과 문호(門戶)를 될 수 있는 대로 높고 견고하게 하고, 내려간 뒤에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로 지키게 하여 외간 사람들과 서로 통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이어는 한남군(漢南君)으로 휴천면 동호리 한남마을에서 귀양살이하여 그 유적으로 한오대(漢鰲臺)가 있고 묘소는 함양읍 상림 뒤에 있는데 경남 기념물 165호이다.

1458년 세조 4년 4월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기를,
  “윤목(尹穆)과 박습(朴習)의 자손은 모두 벼슬길을 허통(許通)하게 하라.”
하였다.세조실록.

1459년 조선 세조 5년 5월 함양(咸陽)에 안치(安置)된 이어가 병으로 죽었다.세조실록.

1460년 조선 세조 6년 지함양군사 신자교(申子橋) 부임

4월 12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극배(李克培)가 박귀생(朴貴生)을 잘못 탄핵한 일을 가지고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며 이르기를,“신(臣)은 성품이 본래 혼미(昏迷)하고 어리석은데, 임무가 중(重)하니 감당하기가 어려워 명(命)을 받은 이래로 주야(晝夜)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힘써 종사(從事)하며 항상 스스로 척려(惕厲)하였습니다. 지난번 길생(吉生)의 집 강도(强盜)를 추국(推鞫)할 때에 차사원(差使員)인 삼가현감(三嘉縣監), 김효영(金孝瑛)과 단성현감(丹城縣監), 유말손(柳末孫) 등이 처음에 박귀생(朴貴生)을 주모자(主謀者)로 하여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함양군사(咸陽郡事) 이항무(李恒茂)와 의령현감(宜寧縣監) 윤자영(尹子濚) 등의 고복(考覆)도 또한 같았으며, 신(臣)이 친히 신문(訊問)할 때에 당하여서도 도적질을 한 모양과 장물(臟物)을 분배(分配)한 수량의 말이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臣)이 또한 사정을 듣고 살피는 일에 어두워서 능히 조사하여 밝게 해서 실정(實情)을 알아내지 못하여 성상의 염려를 초래(招來)하였으니, 신의 죄는 용서 받지 못할데에  있습니다. 뻔뻔스러운 얼굴로 직사(職事)에 나아가니 마음이 실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빌건대, 신(臣)의 관직을 파면시켜서 신(臣)의 혼미(昏迷)하고 무망(誣妄)한 죄를 바르게 하소서.” 하니, 유서(諭書)로 대답하기를,“실수는 경(卿)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곧 수령(守令)의 과실이니, 혐의(嫌疑)스럽게 여기지 말고 관직에 나아가라.”하였다.

1461년 조선 세조 7년 4월 함양 태수 신자교(申子橋) 함양성 문루(제운루齊雲樓)를 중수하고 종제 보한재 신숙주로 하여금 그 기문을 짓게 함.보한재집.

1463년 조선 세조 9년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29세 호남 여행, 함양 방문, 함양, 팔라현(八螺峴 함양 인월 경계 팔령재) 등의 시를 지음.매월당집.

1466년 조선 세조 12년 1월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를 함양군수(咸陽郡守)로 개칭

11월 함양 군수(咸陽郡守) 노신경(盧藎卿)을 파직(罷職)하였다가 환임(還任)하도록 하였는데, 노신경은 성봉조(成奉祖)의 손서이다. 노신경의 이름을 고쳐 노선경(盧善卿)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하였다.세조실록.

1470년 성종 1년 1월 함양 군수 박수미(朴壽彌)와 안악 군수(安岳郡守) 허준(許峻)과 비인 현감(庇仁縣監) 김사성(金嗣成)이 하직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숭문당(崇文堂)에 나가서 이들을 인견(引見)하고 유시하였다.

3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오응(吳凝)이 졸(卒)하니, 부의(賻儀)를 내려 주고 조제(弔祭)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오응은 괴과(魁科)에 뽑히어 10년이 못되어 승지(承旨)가 되고, 나아가서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에 이시애(李施愛)가 장차 난을 꾀하여 거짓말을 선동하였으나, 오응이 조치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었으므로 파면되었다. 뒤에 기용하여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9세였다. 오응은 용의(容儀)가 아름답고 치산(治産)을 좋아하였으며, 또 사랑하는 첩에게 미혹되어 적처를 소박하였다.성종실록. 오응은 함양 오씨로 함양에서 남원으로 이주하였다.

1470 12:28-1475년 12:28 성종 1-6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 함양군수로 재임

1472년 성종 3년 함양군수 김종직 함양 서쪽 지역 농사 시찰 팔라계(八羅溪)를 따라 방곡(坊谷) 방문. 팔라계를 서계(西溪)로 지명을 고침. 팔라계 상류의 팔라현(八羅峴)에 올라 시를 읊음. 점필재집. 팔라현이 팔량치(八良峙)로 바뀌었다가 팔령재(八嶺岾)로 바뀜.

김종직 지리산 용유담 유람, 뇌계 유호인(자克己)과 회헌(晦軒) 임대동(林大仝 자貞叔 고택은 유림면 유평리 회곡서당 터, 서원은 수동면 화산리 화산서원) 수행.점필재집.

여름 매계 조위 김종직을 찾아와 예기를 배움. 8월 김종직 지리산 천왕봉 등정.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 한인효(韓仁孝 자 백원百源), 덕봉사(德峰寺) 승려 해공(解空), 법종(法宗) 수행.점필재집.

1474년 성종 5년 1월 학열(學悅) 선사 금대사(金臺寺)에 주석하다. 함양군수 김종직에게 약과 먹을 선물하고 김종직은 사례 시를 지어 보냄.점필재집. 학열은 신미(信眉), 학조(學祖)와 함께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였다. 또 세조의 명을 받들어 오대산 상원사의 중창 불사를 감독하였는데 세조가 1465년(세조11) 친히 낙성 개당식에 참석했을 때 오대산의 여러 고적과 상원사의 역사를 자세히 적어 올리자 세조가 기뻐하여 포백을 상으로 주었다.세조실록.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다원 시를 지음                        

                      차 밭(茶園)

                        점필재 김종직 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欲奉靈苗壽聖君
新羅遺種久無聞
如今힐得頭流下 힐才+吉+頁
且喜吾民寬一分

竹外荒園數畝坡
紫英鳥嘴幾時誇
但令民療心頭肉
不要籠加粟粒芽

後學 金侖秀 譯
後學 李昌九 書

여름 강희맹이 양부 강순덕(姜順德)의 상을 당하고 겨울 가족을 이끌고 화장산 아래 제계리 별장으로 이주하다. 그때 함양군수 김종직을 따라 제계리를 방문한 뇌계 유호인과 처음 만나 교유하다.사숙재집.<送兪修撰歸養序>"咸陽爲郡。介在智異衆山之間。僻陋最甚。景醇於甲子(세종26,1444)冬。寓於蹄界里莊舍。余方隸業。思得一儒士與之講論。時鄕學廢弛。赴籍者不過數十人。而其爲人。率皆愚蒙孤陋之徒。後二十一年甲午(성종5,1474)夏。景醇遭養親(양부 강순덕)服。是年冬。挈家南歸。時一善金侯宗直爲郡守。"

1475년 성종 6년 4월 함양군수 김종직 용유담 성모묘(聖母廟)에서 기우제를 지내다.

점필재 문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신정지(申挺之) 및 노승 무비(無比) 지리산 천왕봉 등정. 기우제를 위하여 엄천사에 머물던 김종직 무비에게 시를 지어줌.점필재집.

12월 28일 함양군수 김종직이 임기 만료하여 승문원(承文院)의 참교(參校)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다.성종실록.

1479년 성종 10년 3월 함양 군수 여충보(呂忠輔)를 경직(京職)에 바꾸어 제수하였다가 농삿달을 당하여 수령(守令)이 체임(遞任)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가을을 기다려서 바꾸어 임명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481년 성종 12년 3월 뇌계 유호인이 임기 만료로 떠나는 함양군수 여충보 명의로 함양군삼성(三姓:함양여씨,함양오씨,함양박씨) 족보서를 대작함.뇌계집.

1482년 성종 13년 함양군수 양성재(養性齋) 최한후(崔漢侯)가《황산곡집 黃山谷集》을 간행하다. 전 거창현감(1479~1482재임) 유호인(1445-1494)이 지은 발문.뇌계집.

"내가 마침 부모가 연로하다고 사직하고 함양에 돌아올 때《황산곡집 黃山谷集》1질을 성임(成任 1421-1484) 공에게 빌렸고 또 별집(別集) 산질을 그 아우 성현(成俔 1439-1504) 공에게 얻었다. 그것을 갖고 뇌계(水+雷 溪 지금의 위천)가에서 음미했는데 거창에 부임하게 되어 널리 펼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이때 김자행(金自行)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하형산(河荊山) 공이 도사(부지사)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부탁해서 각수를 모집하여 판각하였다. 절반쯤 했을 때 가뭄이 들고 농사일이 급박해 즉시 편의상 이웃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게 했는데 지연되어 해를 넘겼다.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채 나도 그만두고 돌아왔다.

지금 관찰사 이철견(李鐵堅 1435-1496, 1481.10~1482.7 재임) 공이 우리 고을 군수 최한후(崔漢侯) 선생에게 그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고을을 널리 감독하며 친히 오류를 바로잡아 한결같이 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겨우 열흘 만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 최한후는 화순 최씨로 만년에 벼슬에서 은퇴한 뒤 함양에 정착하였다. 그가 소요하던 곳이 유림면 손곡리 지곡에 있는 함허정(涵虛亭)이고 그 아래에는 1970년에 세운 양성재 최공 유적비가 있다. 유호인은 최한후와 함께 지리산 군자사를 유람, 유숙하며 칠언 율시 2수를 남겼다.뇌계집.

1484-1489년 성종 15-20년 매계(梅溪) 조위(曺偉) 함양군수 재임. 2월 사직.

1484년 성종 15년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조위(曹偉)가, 아비가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청하니,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守令)으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함양군수에 제수되다.성종실록.

이해 안음현(거창군 위천면)에서 유관(劉瓘 1484-1542) 출생. 장인은 함양군수 조영손(趙永孫 본한양).갈천집.유관-유우민(劉友閔),유우안(劉友顔),유우삼(劉友參).유우삼-유덕개(劉德盖),유공개(劉功盖),유명개(劉名盖),유기개(劉氣盖);유세한(柳世漢),신복기(愼復起),성후경(成厚慶),경집(慶緝).

1487년 성종 18년 6월 함양 군수 조위(曹偉)가 사리를 아는 조관(朝官)으로서 집에다 외읍(外邑)의 기녀(妓女)를 두고서 첩으로 삼았다고 추국(推鞫)하여 죄를 적용하게 하고, 그 기녀는 본 고을로 돌려보내게 하였다.성종실록.

1488년 종 19년 1월 수령 등이 금하는 것을 어기고서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신 것을 함양 군수 조위(曹偉)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488년 성종19년 10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성숙(成숙 人+叔)에게 하서(下書)하여 도내(道內)의 함양 군수 조위(曹偉)와 의성 현령(義城縣令) 유호인(兪好仁)의 부모(父母)에게 각각 쌀 4석(碩), 황두(黃豆) 2석(碩), 식염(食鹽) 5석(碩), 미역 1상(箱), 청주(淸酒) 10병(甁)을 내려 주되, 건물(乾物)과 젓갈도 편의(便宜)에 따라 갖추어 주라고 명하였다.성종실록.

4월 뇌계 유호인이 탁영 김일손이 지은 삼인동행록에 제시(題詩)함. 삼인은 진주목사 경임(慶임), 진주교수 김일손, 사천현감 예충년(芮忠年)임.뇌계집. 7월 김일손 교수직 사임.탁영연보.

1489년 성종 20년 2월 함양군수 조위 부친상으로 사직. 매계집. 4월 탁영 김일손(1464-1498)과 일두 정여창(1450-1504) 지리산 등정. 탁영의 스승 신임 함양군수 이잠(李箴)이 노자를 후히 지급함.탁영집. 1490년 성종 21년 3월 이잠 평해군수.성종실록. 악양에서 지은 일두의 시.

풍포범범롱경유 風蒲泛泛弄輕柔 갯버들 하늘하늘 가벼이 흔들리고

사월화개맥이추 四月花開麥已秋 사월 화개 땅엔 보리 이미 익었네

간진두류천만첩 看盡頭流千萬疊 천만 구비 두류산을 다 구경하고

고주우하대강류 孤舟又下大江流 외로운 배를 타고 큰 강물 내려가네

7월 이승종(李承宗)이 예천군수에서 상피로 함양군수로 이임된 사실이 언급됨.성종실록.

경상도 전후 수령들의 친분 기록인 금란계록(金蘭契錄)에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이승종(李承宗) 자자후(字子後) 본인천(仁川)이 전 진주교수 탁영 김일손 등과 함께 수록됨.탁영속집.

1493년 성종 21년 7월 정여창(鄭汝昌) 장사랑(將仕郞)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 임명.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여창이 거상(居喪)을 잘하자 향리[鄕閭]가 감화되었는데, 어떤 갑사(甲士)가 정여창을 본받아 상중에 있으면서 죽을 먹으니, 백정(白丁)이 기롱(譏弄)하기를, ‘정여창을 본받고자 하여 죽을 먹으니,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라고 하였다. 정여창이 일찍이 태학(太學)에 유학할 적에 장관(長官)이 유생(儒生)을 모아 《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하였는데, 정여창이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강문(講問)하니, 장관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학궁(學宮)의 노비(奴婢)가 항상 아침 저녁으로 소를 잡아서 유생을 먹이자, 정여창이 의리에 어긋난다 하여 홀로 먹지 아니하니, 여러 동류가 공경하고 어려워하였다.” 하였다.】성종실록.

1493-1496년 성종 21-연산 2년 탁영 김일손의 백형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 함양군수 재임

1493년 성종 24년 3월 함양 군수 김준손(金駿孫)이 사조(辭朝)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칠사(七事)를 성실하게 수행하라고 유시하였다.성종실록.

12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이 함양 군수 김준손(金駿孫) 등이 청렴(淸廉)하고 신중하게 공무(公務)에 봉사하고 있다고 보고하여 한 자급 승급시키다.성종실록.

1494년 성종 25년 1월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표연말(表沿沫)이 아뢰기를,
  “조강(朝講)에서 인(仁)이 예(禮),의(義),지(智)를 포함하는 까닭을 하문(下問)하셨는데, 신이 대답하면서 그 뜻을 다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지(天地)는 만물(萬物)을 낳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태어난 만물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으니, 이른바 인(仁)입니다.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되는데, 원(元)이란 만물을 낳는 것의 시작이고, 형(亨)이란 낳은 만물이 성장하는 것이고, 이(利)란 낳은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고, 정(貞)이란 낳은 만물을 저장하는 것이니, 원(元)이 형(亨),이(利),정(貞)을 포함하는 것이며 인(仁) 또한 그렇습니다. 옛날 상채(上蔡) 사람 사씨(謝氏)가 정명도(程明道)를 보고 사문(史文)을 들어서 외며 한 자도 틀리지 아니하니,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물(事物)을 애완(愛玩)하여 뜻을 잃었다.’ 하자, 사씨(謝氏)가 땀이 나서 등허리를 적셨는데,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이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하였습니다. 후에 주자(朱子)의 문인(門人)이 주자에게 묻기를, ‘사씨(謝氏)가 부끄러워하여 땀을 흘렸으니, 스스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인데, 정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는데, 바야흐로 동(動)하려고 하면, 처음부터 있는 수오지심(羞惡之心)·공경지심(恭敬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보다 먼저 동하므로, 동하는 데는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사단(四端)의 발로(發露)는 모두 먼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부터 시작되니, 이것이 이른바 인(仁)이 의(義)·예(禮)·지(智)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성종실록
.

4월 임금이 합천 군수 유호인(兪好仁)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유호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을 지냈으니, 그에게 쌀, 콩 아울러 15석, 유둔(油芚) 3사(事), 종이 70권, 석회(石灰) 20석을 부의(賻儀)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이 논한다. 유호인은 문장(文章)과 행실(行實)이 있어서 시배(時輩)들의 추대를 받았는데, 시(詩)를 잘 지어 격률(格律)이 우아하고 옛스러웠다. 오래도록 경악(經幄)에 있다가 친히 여러 번 외방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돌아가서 몸을 돌보겠다고 빌었었다. 임금이 그 재주를 아끼어 특별히 자급을 올려서 부근 군(郡)에 임명하였으나, 몇 달이 되지 아니하여 죽으니, 사림(士林)이 그를 아까와 하였다.】성종실록.

11월 회령 부사(會寧府使) 양관(梁灌 1437-1507)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은 계묘년에 사마동 만호(斜麻洞萬戶)에 제배(除拜)되었고, 정미년에는 고산리 첨절제사(高山里僉節制使)에 제배되었으며, 경술년에는 덕천 군수(德川郡守)에 제배되어 12년 동안을 늘 서북(西北)에만 있었습니다. 신의 세 아들이 모두 장성하였으나, 모두 성혼(成婚)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또 신이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었으니, 만약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혼인[婚嫁]시킨다면 더욱 시기를 놓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함양(咸陽)의 본가(本家)에 돌아가 자식들을 혼인시킨 뒤 부임(赴任)하게 해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어찌 노고(勞苦)가 여기에 이른 줄을 알았겠는가? 지난번에 변경에 있은 지 오래 된 자는 이미 환차(換差)하도록 명하여 나들면서 균로(均勞)하게 하였는데, 지금 양관이 외임(外任)에서 갈린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어찌 또 회령 부사에 주의(注擬)하였는가? 경직(京職)으로 환차(換差)시키도록 하라.”
하였다.성종실록. 일로당(逸老堂) 양관은 청렴한 관직 생활로 후에 청백리에 뽑혔다. 그가 살던 일로당은 후에 일로당과 박맹지(朴孟智), 표연말(表沿沫), 강한(姜漢), 하맹보(河孟寶), 양희(梁喜)를 모시는 구천서원(龜川書院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의 강당이 되었다.

1495년 연산 1년 가을 탁영 김일손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남계서원 근처에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짓고 일두 정여창에게 현판을 쓰게 함.탁영연보.

1496년 연산 2년 함양군수 김준손(金駿孫) 모친 병으로 인해 사직함.윤3월 모친상.수헌집.

1498년 연산 4년 7월 김일손 청계정사에서 취성정부(聚星亭賦) 지어 당고(黨錮)의 화를 예견함. 무오사화 일어나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던 김일손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받고 처형됨. 탁영연보. 정여창 종성으로 귀양감

1499년 연산 5년 2월 성종실록 편찬 완성, 전후 편찬자 명단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예문관 응교(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藝文館應敎) 신(臣) 표연말(表沿洙)

 

1502-1507년 연산8-중종2년 최연손(崔連孫)이 함양군수로 재임

1507년 중종2년 10월 사헌부(司憲府)가 탄핵하였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최연손(崔連孫)이 전임 함양 군수 때 그 아들의 장모[妻母]집이 군내(郡內)에 있었는데, 본래 빈궁하여 초가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최연손이 부임한 지 6년 안에 크게 기와집을 지었는가 하면 곡식도 꽉 차 있으며, 또 《황산곡집(黃山谷集)》 판본(板本)이 그 군(郡)에 있어 유림들이 다투어 인출(印出)하기를 간청했으나, 최연손은 번거롭고 요란스러운 것이 싫어서 그 판본을 불태워 버렸으니, 이는 선비로서 차마 할 짓이 못 됩니다. 그 직위(職位)를 개정(改正)하소서.

1513년 중종 8년 6월 이충걸(李忠傑) 함양 군수 임명.중종실록.

가을 조참(趙參 본함안) 함양군수 임명.충재집中+皿齋集.

1518년 중종 13년 12월 헌부가 아뢰기를,

"함양 군수 김식(金湜)은 성질이 본래 암약(闇弱)하고 병 때문에 사무를 보지 못하니,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519년 중종14년 11월 기묘사화 일어나 조광조 등 처형됨. 간신배 이항(李沆)이 경상좌도 감사에서 대사헌으로 임명되어 상경할 때 함양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명공의 이 행차 신선산에 오르는 듯하니 명공차거사등선 明公此去似登仙       

혼잡한 것은 날카로운 칼로 잘라야 하리 반착수빙이기단 盤錯須憑利器단 專+刀    

사냥한 뒤 어찌 교활한 토끼가 없겠는가 전후기무삼굴토 佃後豈無三窟兎       

마침 한 마리 물수리 하늘에 날아오르네 회간일악상추천 會看一악上秋天      

이 시를 본 이항은 기뻐하며 받아가 조정에 귀환한 뒤 유림 사이에 전파하니 유림들은 불안해 하였다.사재집. 이 시는 이항을 물수리에 비유하고 조광조의 잔당들을 남김없이 소탕할 것을 부추긴 것이다. 문계창은 함양군수에서 1518년 중종13년 풍기군수로 이임되어 1522년 중종 17년 임소에서 사망함.풍기군지.

1520년 중종 15년 함양군수 정효순(鄭孝純)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 마동에 족정(足亭) 건립. 관찰사(1520-1521재임) 김극성(金克成) 현판을 씀.진양지.

3월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지리산 마천면 추성리에 초암 곧 벽송암을 을 짓고 주석하였으니 이 절이 지금의 벽송사이다.경암집.

1523년 중종 18년 성묵(性默) 영각사 중창. 갈천 임훈 영각사에 우거하며 중창기를 지음.갈천집.

1526년 중종 21년 7월 간원이 아뢰기를

"함양 군수 안서(安心+胥)는 인물이 경망하기 때문에 전에 여러번 탄박(彈駁)받았었습니다. 더구나 함양은 큰 고을이라 더욱 합당치 않습니다. 아울러 체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 여지승람 찬집 일로 함양 방문, 함양군수 안서(安心+胥) 망악루를 중수하고 어득강에게 시를 짓게 함.관포집.

1528년 중종 23년 진주 거주 윤영(尹寧 본파평)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윤영은 일찍이 안의면 심진동 장수사를 유람하고 이름없던 못을 설옥담(屑玉潭)이라고 명명하였다.옥계집.

1529년 중종 24년 가을 갈천 임훈 함양 방문, 친구 유자옥(兪子玉)의 부탁으로 그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발문을 지음.갈천집.

1530년 중종 25년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삼천포 출신) 벽송암에서 벽송대사를 만나 도를 깨달음.동사열전. 부용대사의 제자가 서산대사(1520-1604)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이다.

1532년 중종 27년 옥계 노진 백형 노희(盧禧) 안의 심진동에 이주함.옥계집.

1533년 중종 28년 옥계 노진(盧示+眞 1518-1578) 안의 심진동 장수사(長水寺) 위쪽 현수사(玄水寺)에서 공부함.옥계집.

1533-1535년 중종 28-30년 정효순(鄭孝純) 풍기군수 재임. 함양군수도 역임함.

1537년 중종32년 1월  간원이 아뢰기를,
  “풍기 군수(豊基郡守) 안서(安心+胥)는 성품이 본디 탐오(貪汚)하여 가는 곳마다 비루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 또 탐욕하여 마음대로 백성을 침학(侵虐)하되 더욱 꺼리는 것이 없어 감히 도리에 어긋나게 우졸(郵卒)을 부리고 세포(細布)를 거두기까지 하므로 찰방(察訪)과 서로 힐책하다가 찰방이 연유를 갖추어 감사(監司)에게 신보(申報)하니, 안서가 자기의 죄를 벗어나려고 거짓말을 꾸며서 또한 감사에게 신보하였습니다. 감사는 안서의 죄를 분명히 알면서 그 고을이 아내의 고향이라 하여 버려두고 묻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한 방면의 기강이 해이가 날로 심하여져서 온 도 안의 수령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감사 이현보(李賢輔)와 군수 안서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였다.중종실록.
  “이현보는 근일 예안(禮安)이 부모의 고향이라 하여 용서한 일을 서장(書狀)에 실었는데 그 아뢴 말이 사사로운 데에 걸려 일의 체모를 크게 잃었으므로 이미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또 풍기가 아내의 고향이라 하여 군수의 죄를 버려두고 묻지 않았으니 잘못이 더욱 많다. 긴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한 방면을 맡은 중요한 직임을 가벼이 파할 수 없겠으나, 이현보는 사죄(私罪)를 두 번 범하여 잘못이 크게 관계된다. 안서도 아울러 파직하라.”

1538년 중종 33년 무술 봄 옥계 노진 지우산(智雨山) 장수사 유람, 부도암의 각연조사탑을 관람, 유장수사기를 지음.옥계집.

1543년 중종 38년 김윤석(金潤石 字仲수 目+卒 본예안,거영주) 함양군수 재임. 퇴계 선생 함양 방문, 시를 지어 증정.퇴계집. 김윤석 1510년 식년 진사, 1528년 중종 23년 무자식년시에 문과 급제. 중종 29년(1534) 10월 승정원 주서(정7품), 중종 33년(1538) 5월 사헌부 지평(정5품), 중종 35년(1540) 11월 사헌부 장령(정4품). 퇴계의 시는 중종 29년(1534)에 지은 것으로 속집에 실려 있으나 김윤석이 중종 29년(1534)에는 정7품이니 도저히 종4품인 함양군수에는 임명될 수 없다. 함양군수는 1538년 정5품을 지낸 뒤나 1540년 정4품을 지낸 뒤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퇴계의 시에 천령봉춘기이감天嶺逢春氣已酉+甘이라 하여 봄을 노래했고 퇴계 43세 때인 1543년 1월에 안음현 영승촌 지금의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의 처가를 방문했으니 계절이 일치한다. 또 퇴계의 시에 아금다병군유심我今多病君猶甚이라 하였는데 퇴계는 이해 2월에 사헌부 장령을 병으로 사직하였다. 처가를 방문할 때 함양을 방문하고 안음으로 간 것으로 추정하면 김윤석이 이때의 함양군수였을 것이다.

1544년 중종 39년 금원복(琴元福)이 함양군수에 임명되고 가을에 재상(災傷) 검사가 사실과 어긋났다고 하여 파직됨.퇴계집.

1545년 인종 1년 4월 퇴계 문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지리산 유람, 마천을 거쳐 천왕봉 등정, 유지리산기행편이란 장편 시와 엄천촌(嚴川村), 용유담, 군자사동(君子寺洞), 함양군수 성몽열(成夢說)에게 답함 등의 시를 남김.금계집

성천뢰(成天賚)에게 답함. 때에 천령 태수 성공 몽열이 서간으로 산행을 위문하므로 장난삼아 답하다.

내의천봉제일두 來倚千峰第一頭 뭇 산 중의 첫째 봉우리에 의지하며
소간환해등부유 笑看환海等부유 인간 세상 하루살이 같음을 비웃네
요장물색분류거 聊將物色分留去 좋은 경치를 나누어 남기었다가
기여시선후일유 寄與詩仙後日遊 시선이 뒷날 노닐 때 전해주게 하리

1549년 명종 4년 8월 남명 조식 선생 포연대(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유람, 목욕하고 욕천(浴川) 시를 지음. 함양 문사 남명 문인 남계 임희무(林希茂 1527-1577)와 박승원(朴承元) 동참함.남명집.

전신사십연전루 全身四十年前累 온몸 40년 동안 찌든 때

천곡청연세진휴 千斛淸淵洗盡休 맑은 냇물에 씻어버리리

진토당능생오내 塵土당能生五內 티끌이 오장 안에 생긴다면

직금과복부귀류 直今과腹復歸流 당장 배를 갈라 흘려버리리.

1552년 명종 7년 개암 강익이 주도하여 일두 정여창을 모시는 남계서원 창건. 강당 건립. 함양군수 서구연(徐九淵)이 지원함. 서구연 이임.개암연보.

1553년 명종 8년 개암 강익과 덕계 오건 지리산 유람. 강익 지리산 등구동(登龜洞)에 서당 양진재(養眞齋) 건립.개암연보.

1559년 명종 14년 남계서원 사당 건립. 함양군수 윤확(尹確)이 부임하여 양진재 방문 담론 후 지원함.개암연보.

1561년 명종 16년 함양군수 윤확(尹確)이 그 외조부 판서 이자건(李自健 1455-1524)의 신도비명을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에게 청탁함.양곡집.

1563년 명종 18년 안음 원학동(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의 갈천 임훈 선생 부친상. 남명 조식 선생(63세) 개암 강익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조문. 남계서원에 들러 유숙하고 사당에 참배. 동국 제현 중에 일두 선생만이 거의 흠이 없다고 품평함. 조문 후에 많은 선비들이 덕유산 남쪽의 삼동(三洞 안음현의 원학동, 심진동-장수동, 화림동-옥산동)의 산수가 수려하여 무릉도원이라 일컬어지니 유람하라고 권유하자 조문 행차이므로 뒷날 가겠다고 거절함.남명연보.

개암 강익 양진재 남쪽에 시 읊는 곳인 풍영정(風詠亭) 건립.개암연보.

1564년 명종 19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대(金대 雨+對)의 아들 김광두(金光斗 1541-? 본순천) 식년 진사시에 합격함.사마방목.

남계서원 동재와 서재 및 대문 건립. 개암 강익이 건물명 명명.매암 조식(曺湜)이 글씨씀. 함양군수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 1522-1590 동강 김우옹의 백형)이 부임하여 지원함.개암연보.

봄 옥계 노진 남계천 서쪽 추담(秋潭) 위에 사립 교육 기관 신의재(申義齋) 건립. 대개 신지이효제지의(申之以孝弟之義)에서 취한 것이다. 옥계집. 이곳이 후일 옥계를 모시는 당주서원의 강당이 되었다.

1566년 명종 21년 3월 남명선생 옥계(玉溪) 노진(盧진 示+眞) 저택(지곡면 개평리) 방문. 개암 강익 및 옥계 노진과 함께 갈천정사 재방. 갈천 등과 함께 삼동 유람. 남명이 지은 화림동 시.남명연보.

유안음옥산동(遊安陰玉山洞)

        1

백석운천면 白石雲千面 하얀 돌 위에 구름은 갖가지 모양

청라직만기 靑蘿織萬機 푸른 이끼 옷감 형상도 가지가지

막교모사진 莫敎摸寫盡 모든 모습 죄다 묘사하지 말게나

내세채미귀 來歲採薇歸 멀잖아 고사리 캐러 돌아올지니.

       2

벽봉고삽수여람 碧峰高揷水如藍 푸른 봉우리 높이 솟고 물은 쪽빛 같구나

다취다장불시탐 多取多藏不是貪 많이 가지고 많이 간직해도 탐함이 아니라네

문슬하수담세사 문蝨何須談世事 이를 잡으면서 하필 세상사 이야기할 것인가 (문 才+門)

담산담수역다담 談山談水亦多談 산 이야기 물 이야기 또한 이야기 거리가 많나니.

      3

춘풍삼월무릉환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부는 삼월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제색중류수면관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하늘 빛에 시냇물 표면도 너르구나

불시일유비분사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 밖의 일은 아니지만

일유인세역응난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지

5월 동강 김우옹, 중형 개암 김우굉, 숙형 사계 김우용 및 함양 선비 사암 노관, 매촌 정복현, 개암 강익, 죽헌 정지(鄭摯), 매암 조식(曺湜) 함께 서계(西溪 함양읍 복골) 유람. 시 창화. 광혜원(廣惠院)에서 해산.동강집.

6월 개암 강익 등의 상소로 남계서원에 사액이 내려짐.명종실록.

1568년 선조 1년 5월 김우홍 모친상 함양군수 사직.

1568년 선조 1년 곽황(郭황 走+黃 字景靜) 예안현감 임기 만료 함양군수로 부임.퇴계집.

1569년 선조 2년 함양군수 곽황(郭황 走+黃 字景靜) 순직. 퇴계 선생이 만사를 지어 조문함.퇴계집.

1572년 선조 5년 2월 남명 조식(1501-1572) 선생 별세. 함양군수 이장영(李長榮)이 만사를 지어 조문함.남명집.    

1578년 선조 11년 6월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이 병으로 사직하자 체직시켰다. 후백이 전조를 맡았을 적에 힘써 공론을 유지하였고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척이라 하더라도 자주 와서 문안을 하면 매우 그르게 생각하였다. 하루는 족인(族人)이 와서 문안을 하고 녹을 구하는 뜻을 보이자 후백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이는데 그것은 선출할 사람의 명단이었고 족인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의망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네가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만약 구해서 얻는다면 공적인 도리가 아니다. 애석하다. 그대가 스스로 발설하고 말았네그려.”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후백은 사람을 가려 벼슬을 제수할 때마다 반드시 가합한지의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공적인 처사와 충성심이 근대에 비교할 자가 없다고 그에 대하여 감복하였다.선조수정실록.


  8월 이조 판서 노진(盧示+眞)이 졸하였다. 노진의 자(字)는 자응(子膺)인데 함양(咸陽)의 옥계(玉溪)에 살았으므로 문인들이 옥계 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노우명(盧友明)은 학문과 조행에 있어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노진이 겨우 강보(襁褓)에서 벗어날 때부터 그의 아버지가 성리학의 문자를 가르치니 노진이 기뻐하면서 힘써 읽혔다.
  노진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 동안 복제를 어른처럼 지켰으며 장년이 되어서는 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그 명성이 대단했다. 과거에 급제하자 두 번이나 사관(史館)에 천거하였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예조 좌랑으로서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자청하여 모친을 봉양하였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일찍이 내직(內職)에 오래 있지 않고 네 번 목사와 군수가 되었고 두 번 감사가 되었던 것은 모두 모친을 위한 때문이었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깐 사이도 모친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손수 감지(甘旨)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끝내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친의 나이 70세가 되자 전적으로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간청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늘그막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복을 입었는데 여묘살이를 하면서 슬픈 각고속에 조석으로 묘소에 오르는 일을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시행하다가 결국 그로 인하여 병이 들고 말았다. 모친의 복을 마치고 나서 공의 왕후(共懿王后)의 상사를 치르기 위하여 형조 판서로 대궐에 나왔으나 병세가 이미 위중하였다. 재차 대사헌으로 삼았으나 숙배하지 못하였고 병조에 옮겨 제수하였다가 또 이조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출사할 수가 없었다.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고 약을 하사했지만 얼마 후에 졸하고 말았다. 사대부가 서로 조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시골 사람들이 상구(喪柩)을 맞이하여 회장(會葬)하였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사람이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예조가 그의 효행을 상께 아뢰니, 그 문에 정표하라고 명하였다.
  노진은 성품이 온화하고 장중하였으며 지조가 확고하여 간신들이 권병을 천단하던 때를 당하였지만 한번도 행적에 물들지 않았고 벼슬살이도 청렴하고 근실하게 하였으므로 상이 특별히 포상을 내려 아름답게 여겼다. 그는 관리의 사무에도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김계휘(金繼輝)가 영남 지방을 안핵하면서 그가 행한 공적을 조사해 보고 감탄하기를 ‘덕행과 문학에다 관리의 사무까지 이처럼 통달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으며, 뒤에 문효(文孝)란 시호를 내리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시호를 받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10월   호조 판서 이후백이 졸하였다. 자(字)는 계진(季眞)이며 호는 청련 거사(靑蓮居士)였다. 함양의 개평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시가와 문장으로 호남 지방(외가는 강진)을 주름잡았는데 과거 공부를 좋게 여기지 않다가 중년에 비로소 과거 공부를 하여 급제하였다. 처음에 훈도(訓導)가 되어 발해(發解)되었기 때문에 교서관 정자로 삼으니 선비들의 논의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더욱 성대해지자 즉시 청현직에 두루 통했다. 일찍부터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문원(文苑)에 두루 선임되어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에 이르렀으나, 김귀영(金貴榮)의 저지로 대제학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기개가 있었다. 그가 비록 문한(文翰)에 종사하였지만 몸단속을 엄숙하게 하였고 말할 때나 조용히 있을 때에도 절도가 있었으며 기쁜 표정과 언짢은 표정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자제들이나 아랫사람들이 감히 시사의 득실에 대하여 묻지를 못했다.
  그는 벼슬이 육경(六卿)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가난하고 소박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비록 선배 명류로서 서인으로 지목을 받았지만 그는 좋다 나쁘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후진들도 역시 그의 전주(銓注)에 승복하였다. 김효원(金孝元)이 번번이 선진(先進)들을 공박하면서 항상 하는 말이 ‘이후백은 단지 육경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된다면 나는 그를 논박할 것이다.’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승이 되기를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졸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진과 이후백이 잇따라 죽자 정2품에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79년 선조 12년 신계서원(新溪書院 당주서원 전신) 건립

1581년 선조 14년 1월 동지사(冬至使)의 선래 통사(先來通事)가 입경하여 동지사 양희(梁喜)가 옥하관(玉河館)에서 죽은 일을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양희가 옥하관에서 죽었다 하니 놀랍고 슬프다. 전례에 있는 모든 할 만한 일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양희의 분상자(奔喪子) 2인과 호상(護喪) 1인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고, 6장씩 붙인 유둔(油芚) 3부(浮), 쌀과 콩 도합 20석(石), 종이 70권(卷), 공석(空石) 90번(番), 석회 30석을 별치부로 내리라.”
하였다.선조실록.구졸재(九拙齋) 양희는 이조 판서 청련 이후백 및 예조 판서 옥계 노진과 함께 천령삼걸(天嶺三傑)로 일컬어졌다.

전교하기를,
  “양희가 군명(君命)을 받들고 상국(上國)에 사신 갔다가 객관에서 죽었으니 불쌍하고 측은하다.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려고 전례를 두루 상고하게 했으나 그런 예가 있지 않았고 다만 예조가 치제하는 규정만 있는데 제문(祭文)을 짓지 않고 낭청도 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 예가 너무도 소략하였다. 이번 일은 공사로 인하여 밖에 있다가 죽은 다른 경우와 동일하게 논할 수 없는데, 더구나 《대전》에 ‘종2품 이상은 조제(弔祭)한다.’고 되어 있음이겠는가. 양희가 진실로 차함(借銜)이 2품이지만 사신으로 갔다가 죽었으니 그 직함이 아직도 그 몸에 있는 것이다. 이제 관원을 보내 치제하는 것이 인정으로나 예로나 법으로나 다 안 될 것이 없다. 이 뜻을 예조에 물어 상의하여 확정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상의 하교에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로 행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선조실록.

1592년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 남명선생 문인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 의병을 일으켜 수원을 지나갈 때 호남의병장으로 그 지방에 주둔하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선생 시를 지어 격려함.건재집.

양군 홍주가 포의로 의병을 일으켜 행재소로 향할 때 행군이 수원성을 지나가므로 감탄스럽기 그지없어 시를 지어 전송하다

국보하다간 國步何多艱 국운은 어찌 이리 어려움이 많은가

해추방공극 海醜方孔棘 바다 오랑캐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하네

시호자기서 豺虎恣其서 승냥이 호랑이 그 이빨을 드러내고

훼척사기독 훼척肆其毒 살무사 전갈은 그 독기를 뿜어내네

난여원파월 란輿遠播越 임금님은 멀리 피난하고

천지내회색 天地奈晦塞 천지는 캄캄하구나

군능기초망 君能起草莽 그대가 포의 출신으로

분불구명석 奮不軀命惜 떨쳐 일어나 목숨을 아끼지 않네

월해장근왕 越海將勤王 바다를 건너 왕에게 가려 하며

우불탄험막 又不憚險邈 또 험한 길도 꺼리지 않네

확청정무기 廓淸定無期 왜적 소탕은 기약이 없으니

식록아실뉵 食祿我實뉵 국록을 먹은 나는 실로 부끄러우이 (뉵 而+心)

하이답승평 何以答昇平 어떻게 태평 시절에 보답할 것인가

서망지자곡 西望只自哭 서쪽을 바라보며 다만 통곡할 뿐이네.

1593년 선조 26년 남명, 황강 문인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1527-1595) 사근도(沙斤道 청사는 수동면 화산리 사근역) 찰방 부임.탁계집.

11월  헌부가 아뢰기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이각(李覺)은 군량을 인수해 오다가 사람들에게 도둑 맞은 것이 수백 석이나 되었는데, 축난 수량을 채우려고 따로 섬을 작게 만들어 13두(斗)가 들도록 하여 중국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국 군사들이 이를 알고 본래의 섬을 찾아냈는데 과연 대소가 현저하게 달랐으므로 중국 장수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 때문에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선조실록.

1596년 선조 29년 가을 남명, 옥계 문인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함양군수 임명

1597년 선조 30년 가을 조종도 함양군수 사직,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 진입, 8월 18일 황석산성(黃石山城) 함락, 전 함양군수 조종도, 안음현감 곽준 순국.대소헌일고. 조종도 일찍이 삼가의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지나며 지은 시.

공동산외생수행 空同山外生雖幸 공동산(신선이 사는 산) 가에서 사는 것도 행복하겠지만

순원성중사역영 巡遠城中死亦榮 장순과 허원의 성 안에서 죽는 것도 영화롭겠지.

*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중국 당나라 현종 시대 안록산의 반란 때 수양성(수陽城)을 사수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임.

1601년 선조 34년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함양군수 역임. 월명총과 만덕총에 대하여 보고 듣고 체험하고 관심을 기울여 시로 읊고 수필로 기록을 남겼다.《태촌집》제 5권에 있는《효빈잡록 效嚬雜錄》하〈여화餘話〉에 더 자세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변강쇠전(가루지기타령)의 배경 설화가 된 것이다.김윤수 월명총과 만덕총.함양문학7.

<월명총>

금석정심마불린 金石貞心磨不린 금석같이 곧은 마음 갈아도 닳지 않고

곡수이척사동분 穀誰貽戚死同墳 낭군이 근심 끼쳤으나 무덤은 같이 썼네

능교만고부윤기 能敎萬古扶倫紀 능히 만세에 윤리를 세우게 하였고

우향삼농작우운 又向三農作雨雲 또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렸네.

1603년 선조 36년 계묘 8월  함양의 유생인 생원(生員) 남음(남陰) 강인(姜인) 등 수십 인이 상소하여 양홍주(梁弘澍)를 공격하고 정인홍(鄭仁弘)을 변호하다. 양홍주는 고(故) 대부(大夫) 양희(梁喜)의 아들이며 백부(伯父)는 양흔(梁心+斤)이고 정인홍의 처제(妻弟)이다.  당초 정인홍이 양가(梁家)에 붙어 살 때에 아비 양희가 그의 사람됨을 중하게 여겨 일마다 반드시 자문하였으나 양홍주는 아비와 잘 지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양홍주가 정인홍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튼 까닭이라고 하였다.선조실록.

1605년 선조 38년 1월 25일 헌부가 아뢰었다. 함양군수(咸陽郡守) 고상안(高尙顔)은 사람됨이 용렬하며 정사를 아랫 관리에게 맡겨 관아의 일이 나날이 폐추(廢墜)되고 백성의 삶이 침해됨이 많으며, 또한 무뢰한 족속을 놓아 마을의 부녀를 겁간(㤼奸)하려고 하는 등 위세와 폭력을 자행하여 본부에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이틀 후인 27일에 유순무(柳舜懋)를 함양군수(咸陽郡守) 로 제수하였다.

1614년 광해 6년 남명선생 문인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함양군수 부임.설학집

3월 3일 동계 정온 하옥되다.광해군일기. 역적 정온이 갇혀 있을 때 이대기는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었는데, 신구하는 상소를 스스로 지어 단성(丹城)에 사는 이유열(李惟說)을 소두(疏頭)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유열이 서울에 와서 상소하지 않고 돌아가자 이대기가 크게 성을 내고는 군유(郡儒) 정옥(鄭沃 휴천면 목현리 사람으로 서산 정씨이다) 등으로 하여금 유열이 소를 올리지 않은 죄를 공격하게 하고, 또 도내에 통문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직(司直) 정온(鄭蘊)은 삼대(三代) 이후의 유직(遺直)으로 강상을 붙들고 시비를 밝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정(閔瀞)이 그 말을 듣고 상소하여 정옥 등을 공격하면서 병기를 잡지 않은 역적이라고 논박하였는데, 상께서 그 소를 <대신에게> 내려서 수의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대신 정인홍이 좌상으로서 마침 서울에 와 있었는데, 의논드리기를 ‘군부 외에 무슨 강상이 있으며 조정 외에 또한 무슨 시비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소두를 잡아다 문초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방관이 이와 같이 역적 무리를 비호했으니 치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이대기를 준열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1616년 광해 8년 11월 선조실록 편찬 완료. 전후 편찬자 명단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 충무위 사과(行忠武衛司果) 신 강인(姜인).

1629년 인조 7년 기사 11월 함양 출신 양경홍(梁景鴻)의 역모 사건(군관軍官으로 함경도에 귀양가 있던 양경홍이 후금後金의 군대를 끌어들여 반란을 꾀하려다 같은 귀양객인 진명생陳命生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몇 년간 현으로 강등. 겨울 역향 처벌 시행, 함양군수 파직, 함양군은 함양현으로 강등.

1630년 인조8년경오~1631인조9년신미 봄 최산휘崔山輝(최현崔晛의 아들) 함양현감.

1631년 인조 9년 3월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 등이 아뢰기를,
  “함양(咸陽)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는데, 이미 군(郡)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니, 지금 혁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케 하라.”
하였다.인조실록.

1635년 인조 13년 남두창(南斗昌 1602-?) 증광 진사시에 합격. 그의 부친 남이성(南以聖) 통훈대부 전 행 함양군수.사마방목.

1636년 인조 14년 7월 지리산 군자사에서 묘법연화경 간행.

항목 서지사항
청구기호 서울대학교 규장각 一簑古 294.333-B872mf
원서명 妙法蓮華經
현대어서명 묘법연화경
편저자 [釋]鳩摩羅什(印) 譯;[釋]戒環(宋) 解
편저자(한글) [석]구마라집(인) 역;[석]계환(송) 해
판사항 木版本
간지 咸陽
간자 君子寺
간년 仁祖14年(1636)
권수 1冊(60張)
광각 變相圖. 四周單邊, 半葉匡郭:20.8×16.2cm, 有界, 8行 13字
판심 上下內向黑魚尾
책크기 32×23cm
序, 跋, 권수 권말 序:道宣, 靖康丁未(1127)…及南. 卷末:康熙五十一壬辰(1712)六月만복사萬福寺化主범행梵行比丘(墨書), 刊記앞뒤로 축수문구와 시주자명단, 제작자명단이 수록되어 있음
刊記 崇禎元年丙子(1636)七月 日 慶尙道咸陽智異山君子寺開刊
자료의 전반적성격 기원전후 인도에서 성립된 후 중국에서 세차례 漢譯된 ≪妙法蓮華經≫ 가운데 가장 유행한 鳩摩羅什本을 바탕으로 여기에 승려 戒環이 주석을 단 戒環本 妙法蓮華經으로 仁祖14年(1636)에 君子寺에서 간행된 것이다. ≪妙法蓮華經≫은 ≪華嚴經≫과 함께 大乘佛敎의 중요한 2대 경전의 하나로 요약해서 ≪法華經≫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 가장 빈번하게 간행된 불경 중 하나로 언해본을 포함해서 100회 이상 간행되었음
내용주기 序品, 方便品
소장본주기 卷1(1冊)外缺
사부분류 子部 釋家類
M/F번호 M/F85-16-335-F
기타사항

1636년 인조14년 12월 병자호란

1637년 인조 15년 1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 노천동(蘆川洞)에 은거. 송명흠이 55세 때 기록한 「기월성고사기묘記月城故事己卯」에 의하면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피병계(避兵計)로 사산(沙山:공주 사한리)에 갔다가 이듬해 1월에 안의 화림동의 노계촌(蘆谿邨)에 우거하였고 2월에 항복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월성촌(月城邨)에 들어가 세상에 뜻을 끊고 초가를 짓고 살았고 8월에는 모리로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방문하였다. 이듬해(1638) 1월에 사산에 돌아갔다.

동춘당이 이곳 노천과 월성에 산 것을 기념하여 안음현감 정중만(鄭重萬)이 안음 유림과 함께 숙종 29년(1703)에 화림동 계곡의 하류인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을 건립하고 동춘당 송준길을 제향하였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함양 서상 노천 유적

 안음 노천에 동춘선생이 심은 큰 고목이 있는데 보고 느끼어 짓다

안음노천 유일대고목 내동춘선생수식야 감부일절

安陰蘆川 有一大古木 乃同春先生手植也 感賦一絶 

                     돈재 유상대 敦齋 柳相大(1864-1935)

하부청교상접천 下覆靑郊上接天 아래로 푸른 들판 덮고 위로 하늘에 닿은 채

풍상열진포경년 風霜閱盡飽經年 온갖 풍상을 겪으며 수백 년 세월을 지냈네

 지금초목근상호 至今樵牧勤相護 지금까지 나무꾼과 목동들이 서로 보호하니

불식자심숙사연 不識玆心孰使然 모르겠어라 이 마음 누가 그리 하게 하는가

돈재 유상대는 진주 유씨로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에서 태어나 노백헌 정재규와 경승재 유종원 및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등에게 수학하였다. 화림동과 원학동을 유람하며 이 시와 함께 영각사, 월성초당, 모리, 수승대 시를 지은 것이다.돈재집.

모은정 아래 반석에는 반암(磻岩)이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동춘장구소 同春杖屨所 동춘선생이 산책하던 곳

노천화석정 蘆川花石亭 노천의 화석정이라네

영사구초엄 永思舊草广 영사선생의 옛 초가집

가포대은병 稼圃大隱屛 농촌의 대은병이라네

이란 절구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예전 동춘당이 소요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석정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로 율곡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대은병은 중국 주자가 은거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율곡선생은 은거한 황해도 해주의 석담구곡이 무이산과 비슷하여 은병이라 이름하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다. 영사선생은 효자 서준(徐儁)의 호이고 동시에 그의 묘각의 이름이다. 영사재는 대로마을 아래 마을인 오산에 있다. 동춘당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북쪽의 월봉산을 넘어 거창 북상의 월성으로 옮겨가 초당을 짓고 8개월 정도 기거하다가 귀향하였다.

1641년 인조 19년 6월 함양군 평민 원련(元連)이 절터에서 의춘대길(宜春大吉)이라 새겨진 황금 130량이 든 단지를 발굴함. 이 절이 관음전(觀音殿)이었다.천령지.

 
仁祖十九年。咸陽郡民元連夜梦。神人告曰。吾當厚賚汝。一日地得一古缸。覆以甓。甓上有一千年三字。開視之。有物黃赤色。約可數十片。一片有文在面曰宜春大吉。連不知爲金。同郡人瞞語曰此錫也。賤直而沽之。恐語泄。移居全州府。府尹求之急。其人以十許兩納戶曹。戶曹疑不盡輸。刑訊之。潛谷言其不可。上命釋之。差司宰正李俒。送其金於淸人。淸人却之。<<硏經齋全集外集卷六十,筆記類○蘭室譚叢,咸陽金>>

 仁祖 42卷, 19年(1641 辛巳 / 명 숭정(崇禎) 14年) 6月 23日(丁卯)

○丁卯/慶尙道咸陽郡民元連窮不自存, 挈妻子作土室於古寺基側以居。 夜夢, 神人告元連曰: “吾當厚賫汝。” 若是者再三。 元連心甚怪之, 語其妻曰: “有夢如此。” 其妻且曰: “我夢亦然。” 一日掘土, 有聲鏗然, 見之乃一古缸也。 上覆以甓, 甓上有一千年三字。 開視之, 則有黃赤色物, 約可數十片, 而一片有文, 在面曰宜春大吉。 元連不知其爲金, 同郡居人心知之, 瞞語元連曰: “此乃錫也。” 元連信之, 卽受輕價而與之。 其人恐語泄, 移寓湖南, 全州府尹疑其跡而捕之, 其人自度難免, 齎持十許兩來詣戶曹曰: “聞, 國用蕩竭, 歲幣之金, 無計辦出, 願以此獻。” 戶曹判書李溟將入啓論賞。 未幾, 全州、咸安等官, 以其人奪占奇貨, 謀免己罪, 除出若干金, 來納戶曹, 情迹可惡。 於是, 拿其人于義禁府, 盡徵餘金, 竝百三十兩, 而疑其人之不盡輸, 久在刑訊中。 右承旨金堉啓曰: “天慳至寶, 秘藏千年, 至于今日, 而出爲國家之用, 此非人力之所爲也。 雖未知其休徵吉兆, 而當公私赤立之日, 補經費而紓民力, 其爲有益, 豈可勝言哉? 元連以蚩蠢無知之氓, 視同燕石, 而姦民知其可居, 廉價而取之。 乘時射利, 先納塞責, 其巧詐欺人之狀, 誠極痛惡。 然買賣之際, 巧言欺瞞, 欲利於己者, 此賈兒之常態, 市場之人皆此輩也, 何可以此深罪之哉? 此金實由此人先納, 而爲國家之用, 則雖謂之有功可也。 以巧詐之罪, 縱不得蒙賞, 獨不可以贖其刑乎? 且此非偸取公家之物也, 遠方民人自得, 而自相買賣, 國家旣給價用金, 而又囚其人於王獄, 則不但有冤抑之怨, 抑恐有傷於王政之大體也。 臣忝在出納之地, 代察該房之事, 有懷不敢不陳。” 答曰: “此人於發覺之後, 欲免厥罪, 欺罔國家。 啓辭中所謂先納有功等語, 皆涉不察也。 雖然, 有傷大體之說是矣。” 卽日命釋之。 後, 上以其金, 送於淸國, 淸國還其金, 勑曰:

新羅舊日之黃金, 旣爲朝鮮所得, 王不自私, 專人送來, 足見事大之誠。 其宜春大吉、一千年之語, 似屬祥瑞, 王之得, 卽朕之得也。

1643년 인조 21년 계미 함양현은 함양군으로 복군, 정홍명이 함양군수로 부임.

癸未。連有除命。以兵議。黽勉赴召。遷大司成。上疏懇辭。仍乞授一州郡。奉公牧民。以仰答恩造。私便將息。留數月。除咸陽郡。首相沈公悅。請勿許外補。留爲士林矜式。上溫諭曰。某之文學廉介。予知之素矣。奈不肯久留何。旣赴任。殫心撫字。宣上德意。必先於煢獨。設老人宴。聚上下年七十以上者。公束帶延入。終日醉嬉。一境感悅。居三歲。以病辭遞。時文衡缺。上命勿罷。擢爲兩館大提學兼知成均館事。進嘉善階。公中路疾作。辭歸鄕。沈綿數歲。

1643-1646 인조 21-24년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92-1650) 함양군수 재임. 재임 중 덕봉사 유람하고 시를 지음.기암집.

덕봉사에서           제덕봉사 題德峰寺
불향소진불등미 佛香消盡佛燈微 향불도 사그라들고 등불도 어렴풋한데
장실소연진사희 丈室蕭然塵事稀 주지 방은 적막하니 속된 일도 드무네
투득소한성신숙 偸得小閒成信宿 잠시 틈을 내어 이틀 밤이나 묵고
효종명후하산귀 曉鐘鳴後下山歸 새벽 종이 친 뒤 산을 내려 돌아가네

※ 덕봉사는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덕봉에 있었다. 인조 21년 경에도 건재했었는데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미상이다. 지금 축대와 추월당 학훈대사(秋月堂 學訓大師) 등의 부도가 남아 있다.

1651년 효종 2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이장영(李長英)의 아들 이집성(李集成 1630-? 본전주)이 식년 진사시에 합격.사마방목.

1657년 효종 8년 일두선생의 증손 춘수당(春睡堂) 정수민(鄭秀民) 함양 최초의 사찬 읍지 천령지(天嶺誌) 편찬, 종손 창주(滄洲) 정광연(鄭光淵 1600-?) 서문을 지음.천령지.

1654년 효종 5년 이지화(李之華) 1588(선조 21) ∼ 1666(현종 7)에 재임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동계
(東溪). 대구출신. 경두(慶斗)의 손자로, 현감 종문(宗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경창(全慶昌)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검열·대교를 역임하고
1621년에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김해·창원·파주의 목사
를 지냈다.
그뒤 병조참의·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의 막하에서 군
량의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 5)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全城世稿, 大東野乘

1660년 현종 1년 당주서원(지곡면 공배리에 1943년 4월에 위당 정인보가 비문을 지어 세운 유허비가 있다) 사액

1661년 현종 2년 5월 홍문관 전한 이수인(李壽仁)이 집에서 졸하였다.
  이수인의 자(字)는 유안(幼安)이니 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담담하고 조용하여 벼슬길에 나서려는 뜻이 없었다. 효종 즉위년에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강진(康津)의 옛 집으로 돌아가 수죽(水竹) 사이에다 움막을 짓고 서사(書史)를 벗삼아 지냈다. 삼사(三司)에서부터 사인, 전한에까지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현종개수실록.

1665년 현종 6년 송준길 고려대장군 여림청(呂林淸)의 묘표음기를 짓다. 그 비석은 현재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마을의 여장군 묘소 앞에 서 있다.

1670년 현종 11년 대전시 동구 중리동의 유형문화재 송애당(松崖堂) 주인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문인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 안음현감으로 부임하다.이계집.

1670년 백연서원(栢淵書院) 함양읍 백연리에 있었고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을 모신 사당이다. 현종 11년(1670)에 건립하였다. 고종5년(1868)에 철거하였다.

1671년 현종 12년 4월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 1620-1681)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흉년으로 아사하는 유민들을 진휼하다.

1672년 현종 13년 봄 남몽뢰 구황 치적 제일로 준직(準職)의 명을 받았다. 준직이란 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5월 안음현 관아 밖 대숲 속에 관덕정(觀德亭)을 짓자 안음현감 김경여의 아들인 김진수(金震粹 자는 晦叔)와 같이 활쏘기도 하며 그 기문을 짓다.

9월 우암 송시열 선생 함양군수 남몽뢰에게 답신을 보내다.송자대전.

  권처사(權處士 명은 昌業 남몽뢰의 외숙)의 묘표는 당시에 매우 참람한 짓인 줄 알면서도 또한 감히 부탁하신 정중한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억지로 초하여 바쳐서 취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교하신 뜻을 받드니 칭찬이 실제에 지나치고 표현이 너무도 겸손하기에 내 자신 부끄럽고 송구함이 더욱 더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인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새로 고치도록 하시니 또 어진 군자의 두터운 마음씀을 볼 수 있었는바 일자지사(一字之師)일 뿐만이 아닙니다. 깊이 명심하여 다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삼가 분부에 따라 개정하겠습니다. 그밖에 고친 것도 여러곳입니다.
  대개 당시에 바쁘고 어지러워 전혀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소학 小學』 선행편(善行篇)에서 장관(張觀)이 말한 "바삐 하면 그릇된다"는 경계를 가슴에 새기지 않아서입니다. 송구합니다. 묘표의 초본은 행장과 함께 반납합니다. 그 초본은 뒤에 안음현감 편에 도로 보내주시거나 따로 한 본을 베끼어 돌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대개 집에 초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애들이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양석번(梁錫蕃)이 춘와(春窩)란 서실을 짓자 남몽뢰가 그 기문을 짓다.이계집.

1673년 현종 14년 2월 남몽뢰 진주목사로 영전.

유정기(兪正基 1645-?) 식년 진사시 합격. 부친은 통훈대부 전 행 함양군수 유명익(兪命益).사마방목.

1674년 현종 15년 3월 함양군수를 지낸 진주목사 남몽뢰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을 간행하고 발문을 짓다.이계집.

1675년 숙종 1년 남계서원 서서(西序)에 동계 정온을 배향.

1679년 숙종 5년 권수(權燧 1656-?) 식년 생원시 합격. 생부는 통훈대부 전 행 함양군수 권양(權讓).사마방목.

1680년 숙종 6년 3월 경신환국.  전 함양군수 남몽뢰 61세 남인이 몰락한 경신환국으로 의금부에 하옥되다.

1681년 숙종 7년 겨울 남몽뢰 전남 고흥군에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 월 15 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이계집.

1683년 숙종 9년 계해 용문서원(龍門書院) 중수하다. 소치재(笑癡齋) 강명세(姜命世 1632-1708) 기념시를 짓다.소치재유고.

1686년 숙종 12년 병인 3월  퇴계학파 성리학자 원주 거주 우담 정시한 영호남 여행. 4월 11일 아침에 거창 출발, 사근역에서 말 먹이 주고 저녁에 함양읍 냇가 서쪽 서원촌(백연서원) 김후달(金後達) 집에 도착, 군수 심도명(沈道明,沈澈의 字)이 방문, 같이 숙박. 12일 냇가 방축 구경. 13일 최고운과 김점필을 모신 백연서원 참배, 심원록(尋院錄)에 서명. 이은대에 등람, 식후에 서계 유람. 14일 아침에 매일 동숙하던 군수와 작별, 오후에 안양사(安養寺: 휴천면 문정리 법화사)에 도착. 15일 여암(驢巖), 삼성대(三聖臺), 용유당(휴천면 용유담) 유람, 오후에 군자사 도착, 향로당에서 숙박. 16일 진사 박세혁 내방, 저녁 금대암 방문, 안국사 향로전에서 숙박. 17일 벽송암 종장 천륜(天倫) 내방, 저녁 서암 방문, 노승 정찬 영접. 19일 아침 두타암, 무량굴, 상무주 방문,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내방. 20일 묘적암 방문, 상무주로 귀환. 21일 윤판옥 수리, 견성암 종장 자징(自澄), 묘적수좌 사철 내방. 22일 군자사 승통 법안 내방. 24일 지리산 산불. 25일 상무주암을 떠나 천인암(千人菴), 상고대암(上高臺菴) 방문, 오후 실상사 도착. 26일 고철불 관찰. 27일 저녁 천인암으로 이거. 29일 영기 수좌 실상사로 귀환. 윤4월 1일 견성암 왕래. 17일 도솔암에서 천왕봉 등정, 반야봉 유람, 저녁 칠불암 도착. 19일 금류동(金流洞) 도착. 5월 1일 삼일암 왕래. 6월 28일 군선요어(群仙要語) 3자 읽음. 7월 4일 황정경오장도 6장, 도장초(道藏抄) 10장 읽음. 5일 황정경채취도 이하 수십 장 종편 읽음. 23일 황정 오장도, 도장초 심신론(心神論) 읽음. 30일 저녁 연곡사 가서 비전의 선각선사비를 보다. 8월 4일 황정 도장초 17장 다 읽음. 6일 황정 채약도 등 10여 장 재독. 20일 불일폭포 관람. 화개동을 지나 구례현 화엄사 향로전 숙박. 부도암에 올라 연기(烟起)조사 석상, 선각조사 모친 석상 관람. 22일 운동 비전 참배, 실상사 도착. 24일 부도전에서 쉬고 견성암에 오르다. 25일 천인암과 상무주암에 오르다. 9월 2일 묘적암 방문, 박광선(朴光善: 함양읍내 서원<백연서원>촌에 산다고 함) 내방. 3일 묘적암에서 천인암으로, 견성암으로 하산하여 군자사 도착. 저녁 후에 말 타고 금대암 방문. 7일 금대암 출발 등구창촌(登龜倉村) 도착, 안국동암 각자승(刻字僧) 채간(綵侃) 동행 오도재 넘어 제안역촌에서 비를 만나 무릅쓰고 전진, 함양읍 냇물 서쪽 백연서원촌 김후달(金厚達) 집에 도착. 저녁 사근찰방 우홍성(禹弘成)과 함양군수 내방. 8일 아들 정항, 김후달과 이은대에 올라 함양읍내를 바라보고, 걸어서 학사루에 가서 등람. 군수와 작별하고 개평촌에 도착, 상주 출신으로 장가온 생원 황재겸 집에 숙박. 9일 정일두선생과 노옥계 집터를 참관, 안음현을 지나 화림동 동구에 도착, 향교 앞 긴 다리를 건너 점풍루에 등람, 심진동과 화림동의 큰 내가 합쳐지는 경계에 반하여 이사와 살고 싶어 함. 일두선생 유람처인 군자대(군자정) 도착, 신평 전좌수촌에서 말 먹이고 옥산창촌(玉山倉村) 김진추 집에 숙박.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암승은 일천(一天)과 선찬(善贊: 영각사 표석비<숙종10년,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3일 3좌 가섭상을 참관. 14일 고현을 지나 올라가 수송대 유람, 다시 고현을 지나 거창읍에서 말 먹이고 가조현 문좌수 남로(文南老) 집에서 숙박. 이하 생략(1997년 9월 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정시한 [, 1625~1707]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나주()
우담()
별칭 자 군익()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우담집》,《산중일기》
 

본문

본관 나주(). 자 군익(). 호 우담().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 원주()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로 천거되어 집의() ·사업()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에 올라 1691년(숙종 17) 앞서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 장()씨의 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 ·이익()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 《임오록()》 《관규록()》 《사칠이기변()》 《변무록()》 등이 있다.

산중일기 []

요약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정시한(:1625~1707)이 삼남 일대를 돌아본 기행록.
구분 기행록, 필사본
저자 정시한()
시대 조선시대(1686~1688)
소장 고려대학 중앙도서관

본문

필사본. 2권 2책.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1686년(숙종 12) 3월 13일에 원주() 본가를 출발하여 청주 공림사()를 거쳐 속리산() 법주사() 등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도의 명산과 고찰을 돌아보고, 겸하여 저자의 친척집을 두루 방문한 다음 1688년 9월 19일 원주 대야()의 본가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이 정확한 기록은 당시의 사찰() 현황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담선생문집()》 권19∼20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민영규() 교수의 집교()로 인문과학자료총서() 제1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1687년 숙종 13년 정묘 양천익(梁天翼 1638-?) 식년 생원시 합격. 부친은 절충장군 행 부호군 양태제(梁泰濟).사마방목.

1689년 숙종 15년 남계서원 동서(東序)에 개암 강익을 배향.

1699년 숙종 25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당(金당 金+堂)의 아들 김성항(金聖沆 1674-? 본안동) 증광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703년 숙종 29년 안음현감 정중만(鄭重萬)이 안음 유림과 함께 동춘당이 함양 노천과 거창 월성에 산 것을 기념하여 화림동 계곡의 하류인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을 건립하고 동춘당 송준길을 제향하다. 헌종 10년(1844) 경에 거창군 북상면 월성으로 이건되었다가 고종 9년(1872)에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77년에 초당계에서 서원 터에 동춘송선생월성초당유허비(同春宋先生月星草堂遺墟碑)를 추연 권용현이 비문을 짓고 강암 송성용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여기에서 영조 18년(1742)에 서원을 월성으로 옮겼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1714년 숙종 40년 안의면 당본리(堂本里)에 안음현감 이의록(李宜錄)의 주동으로 대소헌 조종도와 존재 곽준을 모시는 황암서원(黃巖書院) 건립. 이의록 봉안문 찬술.

1717년 숙종 43년 12월 황암서원에 사액.

1721년 경종 1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이우신(李雨臣)의 아들 이정보(李鼎輔 1693-? 본연안)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728년 영조 4년 안음 출신 정희량 반란을 일으킴. 무신란. 이인좌의 난.

3월 안음(安陰)의 적 정희량(鄭希亮) 등이 거창(居昌)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장차 전라도 경계를 넘으려 하였다. 운봉 영장(雲峰營將) 손명대(孫命大)가 안음의 적변을 듣고는 미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급히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팔량령(八良嶺)을 점거하니, 적이 이 때문에 감히 넘지 못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거창으로 돌아갔다.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처음에 군사를 내어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모두 적과 내응하니, 박사한은 낭패(狼狽)하여 오수욱(吳遂郁)과 더불어 손명대의 군사에 의탁해 함께 영애(嶺隘)를 지키다가 적이 함양을 버리자, 박사한이 다시 본군으로 들어가 이민(吏民) 가운데 적을 따른 자를 죽였다. 운봉(雲峰)의 천총(千摠) 정후교(鄭後僑)는 강개(慷慨)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는데, 손명대가 군사를 내어 적을 막을 때 정후교의 힘이 많았다. 적이 함양에 들어오자, 정후교가 수백 명의 군사로 함양으로 달려들어가 적괴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고 청하였으나, 손명대는 감사(監司)가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쓰지 못했다.영조실록.

4월  운봉 현감(雲峰縣監) 손명대(孫命大)의 장계에 이르기를,
  “함양 군수 박사한(朴師漢)이 역적인 가짜 함양 군수 최존서(崔存緖) 및 허격(許格) 등을 잡아서 엄중히 가두었는데, 최존서는 함양에 살면서 병기(兵器)를 도적의 진중(陣中)에 수송하고, 허격은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적병(賊兵)을 호궤(牛+高饋)한 자입니다.”
하였다.영조실록.

4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함양 군수 박사한(朴師漢)이 적장(賊將) 심수명(沈壽明), 안음(安陰)의 위현감(僞縣監) 신수헌(愼守憲)과 그의 아들 신윤증(愼潤曾) 등을 체포하여 효시(梟示)하였고, 적당(賊黨) 이만채(李萬采), 이익춘(李益春), 정규서(鄭奎瑞) 등은 엄중히 가두었습니다.”
하였다.영조실록
.

1729년 영조 5년 안음현 혁파, 거창군과 함양군에 분속, 함양부사(咸陽府使)로 승격

1736년 영조 12년 병진 안음현 복구. 4월 신 안음현감 이현량(李顯良) 부임, 관청 재건.

1737년 영조 13년 정사 12월 안음현감 이현량 순직.

1738-1743년 영조 14-19년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示+石 1686-1761) 안음현감 재임.

1742년  영조 18년 안음현감 조영석 안의면 후암리 이쪽 지역에서 후암리 저쪽 지역으로 성천서원 이건.성천서원사우중수상량문「星川書院祠宇重修上樑文」을 지음.관아재고.

1743년 영조 19년 계해 8월 심약(沈약 金+피리약) 안음현감 부임.

1744년 영조 20년 갑자 9월 이정덕(李廷德) 사근도 찰방 부임.

1745년 영조 21년 최치원과 김종직을 모신 백연사(栢淵祠)를 함양부사 아무개가 중수하고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1709-1787)에게 그 기문을 짓게 함.강한집.백연서원.

1746년 영조 22년 병인 11월 이정덕 사근도 찰방 이임. 심약 안음현감 사직.

1747년 영조 23년 정묘 7월 시서화 삼절의 명화가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사근도 찰방 부임. 사역잡술(沙驛雜述), 역관남루 수수정(驛館南樓數樹亭), 파관귀로(罷官歸路), 사정중헌(謝鄭重獻), 증벽송암성안선사(贈碧松菴惺岸禪師) 등의 시를 지음.능호집.

1749년 영조 25년 기사 8월 이인상 사근도 찰방 임기 만료.

1753년 영조 29년 계유 5월 활연당(豁然堂) 장우(長愚) 대사 지리산 황령암(黃嶺庵 남원시 산내면) 중건.용담집. 활연당의 부도는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 옛 입구에 있다.

1754년 영조 30년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1720-1777 합천) 같은 노론계 학자인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1688-1768 거창),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 1725-1797 함양)과 함께 수승대와 송대(松臺 송준길이 노닐던 곳)를 유람하였다.모려집.

1759년 영조 35년 함양부 호구수 4,763호 21,640인

1759년 영조 35년 5월 송준길의 현손인 역천 송명흠(1705-1768)은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와 함께 성천서원(안의면 후암리)을 참배하고 월성(月城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을 유람하였다.역천집.

1764년 영조 40년 10월 송준길의 현손인 역천 송명흠 가야산을 유람하고 성천서원(星川書院)을 참배하고 삼동을 유람하며 월성을 방문하고 지리산 유람 길에 군자사(君子寺)에 자며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 1725-1797 안의면 하원리 하비마을에 녹봉서원이 있었고 지금 퇴락한 서당과 비석이 있다)과 시를 창화하기도 하였다. 역천집.

1765년 영조 41년 8월 단성(丹城) 출신의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 1713-1785) 안의 삼동 유람. 영각사, 용유담, 군자정, 차일암(遮日巖), 월연암(月淵巖), 심진동, 장수사, 도솔암(兜率菴)에 올랐다가 심진동구로 나와 광풍루, 사근역(沙斤驛)을 지나 단성으로 귀가하였다. 지리산과 안의 삼동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과 「유삼동록遊三洞錄」을 짓고 두 가지를 묶어 「인지총화仁智總話」라 이름하였다.이계집.

1767년 영조 43년 7월 안의현으로 개칭

 산음(山陰)의 일곱 살 여자아이가 애를 낳았다. 소금 장사 송지명(宋之命)이 간음한 사실을 산음 어사(山陰御史) 구상(具庠)이 조사하여 보고하다.영조실록.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맞이하였다. 하교하기를,
  “추로(鄒魯)의 고을과 같은 현(縣)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니 바꾸어야 하겠다. 안음(安陰)과 산음(山陰)은 서로 경계가 접해 있는데 불과하나, 전에는 정희량(鄭希亮)이 생겼고 지금은 음부(淫婦)가 생겼다. 아미산(峨眉山)이 있었기 때문에 삼소(三蘇)가 태어났던 것이니, 이름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현의 이름을 한두 번만 바꾸지 않았다. 안음을 안의(安義)로 고치고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고치되, 해조(該曹)로 하여금 표지를 붙여 계하(啓下) 하도록 하라.”
하였다.영조실록.

1771년 영조 47년 안의현 호구수 4,565호 19,311인

1772년 영조 48년 임진 문곡(文谷)대사 백화(白花), 환암(喚庵) 대사와 함께 영원암(靈源庵 마천면 삼정리)에서 만일회(萬日會) 개최.경암집. 안의면 상원리 장수사 터에 문곡대사의 부도탑이 있다. 문곡은 이 몇 년 뒤에 서거하고, 환암은 영원암에서 10년 살다 서거함.경암집.

1774년 영조 50년 영각사(靈覺寺: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소재 전통 사찰 55호)에 장판각 건립 화엄경 책판 보관. 영조 46년(1770)에 징광사(澄光寺: 순천시 낙안면 소재)에 불이 나서 소장되었던《화엄경》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스님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그 불명확한 부분은 오직 스님이 입으로 외운 것에 의지하였다. 책판이 완성(영조 50년, 1774)된 뒤 새로 장판각을 영각사에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팠었고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 고 하였었다.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스님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뒤로 영각사에 우거하였다. 어느 날 주지에게 이르기를 "절을 이건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큰 물이 져서 절이 과연 무너지고 승려들도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번암집.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 산청의 심적암(深寂菴)에서 서거. 추파는 함양 벽송사 고승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의 스승이다. 일찍이 생전에 함양 휴천면 동호리 소재 엄천사(嚴川寺) 종각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다.추파집.

1777년 정조 1년 이원회(李元會 1749-? 본전주) 식년 생원시 합격. 생부는 통정대부 전 행 함양부사 이엽(李燁).사마방목.

1778년 정조 2년 무술 문곡(文谷)대사의 제자 이성(貽成)이 풍신(豊信)으로 하여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게 찾아가 문곡대사의 비명(碑銘)을 받아오게 함. 풍신은 봉암(鳳巖)대사의 제자로 임색(任臣+責)의 편지를 가지고 번암을 찾아가 봉암대사의 비명을 받아오기도 하였다.번암집. 봉암대사는 함양군수 대소헌 조종도의 후손으로 산청 율곡사 승려인데 그의 부도(1779년 기해 4월 세움)는 합천 묵방사 입구에 비와 탑이 있다. 문곡대사는 함양 장수사 승려인데 무주 백련사에서 입적하였고 부도는 장수사 터 기슭에 있으나 비석은 없다. 번암은 또 봉암대사와 문곡대사의 영찬(影贊) 및 산청 심적암 승려 추파대사의 영찬(추파의 제자 경암 응윤의 부탁으로 지음) 그리고 함양 영각사 설파대사의 비명을 짓기도 하였으니, 그의 부친이 단성현감을 지낸 인연인 것이다.

가을 경암대사 덕유산에서 산청 안심암(安心庵)으로 화봉(華峰)대사 예방, 하동 쌍계사 은선강당(隱仙講堂)에 주석, 다솔사 팔상전 중건기를 지음.경암집.

1782년 정조 6년 임인 2월 실학자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사근도 찰방 부임.

1783년 정조 7년 계묘 6월 23일 사근도 찰방 아정 이덕무 그 아들 이광류와 함께 지리산 등반, 군자사에 숙박, 군자사사적기를 초록.청장관전서.

 
  디렉토리검색 > 고전국역총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9권 >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군자사(君子寺)

   
계묘년(정조 7, 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경남 함양(咸陽)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 주D-001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그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충숙왕 4, 1317)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홍무(洪武) 37년 갑신주D-002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19년(숙종 6, 1680) 경신에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갑자년(1684)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숙종10)에 방호(方壺)의 필추(苾芻 비구(比丘)를 말한다) 형곡 복환(荊谷復還)이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自爾厥●' 라고 한 것의 '●' 자는 '后' 자인 듯한데 이 글에 '●'로 썼으니 생각건대, '后'자가 비록 '後'자와 통용되기는 하나 아마도 후왕(后王)의 후(后)자를 혐의쩍게 생각하여 고의로 '口'를 빼고 '●'로 쓴 것인가 보다. 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주 D-001] 내관(內觀) : 불교 용어. 바깥 경계를 떠나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공부를 말한다.
[주 D-002] 홍무(洪武) 37년 갑신 : 홍무는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로서 31년으로 끝나고 37년은 없다. 갑신년은 태조 사후 6년째가 되는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樂) 2년(1404,조선태종4)에 해당한다.
 
 
 

 

 

 

 

 

 

 

 

 

 

 

 

 

 

 

 

 

 

 

 

 

 

 

 

 

 

 

 

1783년 정조 7년 계묘 6월 초1일에서 14일까지 본아에 있었다. 15일, 본아에 있었다. 감사의 고과에서 최(最)를 받았다. 그 제사에 이르기를 '폐정(弊政)을 바로잡기에 온 힘을 썼다.' 하였다. 16일에서 20일까지 본아에 있었다.

21일, 지리산(智異山)을 유람하였다. 이 산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있으며,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또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이다. 평지에서 곧바로 정상까지 70리이다, 최상봉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이곳에 일월대(日月臺)가 있다. 아들 광규(光葵)와 함양부(咸陽府)의 여러 손들이 함께 갔는데 상봉에 10여 리 못미쳐서 강풍이 호되게 불어서 추위가 몸을 엄습하는 것이 겨울과 같아서 모두들 솜옷을 입었다. 봉우리에 올라서 나무를 베어 불을 피우고 풀을 엮어 집을 만들어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이곳에서 낙조와 일출을 구경하고 남쪽으로 대마도(對馬島)를 바라보니 사방이 아득한데 구름 사이로 바다가 환히 비치는 것이 한 조각 거울과 같았다.

이때 함양 태수(咸陽太守) 이공 응운(李公膺運)이 술을 보냈으므로 공이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저녁에 여러 신선이 수레를 급히 몰아 함께 군자사(君子寺)에 가서 하계(下界)를 굽어보며 웃으니 어지러운 세상이 안개처럼 덮여 있는데 가운데 중생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맑은 샘물에 양치질하고 붉은 구름 기운을 헤치고서 백모당(白母堂)에 내려와 앉자 편지 한 장이 날아서 땅에 떨어졌으니 평지에 신선이 기거함을 알겠습니다. 사뿐이 머리 들어 인간 세상을 바라보니 흰 구름만 자욱했습니다. 보내주신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노라니 장수하는 비결을 알 듯합니다. 이에 구름 속에서 손을 잡고 먼 곳을 향해 감사를 표합니다."

23일, 관아에 돌아왔다.

11월 이덕무 이임.

1785년 3월 경암대사 하동 칠불암에 주석, 요적(妖賊) 체포를 위한 관음불공축을 지음.경암집.

1787년 정조 11년 정미 안의현감 김재순(金在淳) 삼동(三洞) 유람.금릉집 2책 p313 풍패정기(風佩亭記) .

2월 경암대사 진주 화장암(華藏庵) 유람, 화장암기를 지음.경암집.

1788년 정조 12년 무신 함양군으로 환원

6월 우통례 우정규(禹禎圭)가 상소하여 《경제야언(經濟野言)》이란 책자를 올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현궁(弦弓) 한 장을 하사하였다.정조실록.

1789년 정조 13년 함양군 인구수 24,198

1791년정조 15년 신해 여름 영원사에서 설파(雪坡)대사 입적하다. 대구 팔공산 승려 추파 및 설파 제자 인악 의첨(仁嶽義沾) 영원사로 설파대사의 상에 조문 오다. 벽송사로 경암대사를 방문, 경암대사는 칠불암에 가 있어 만나지 못함.인악집.

1792년 정조 16년 함양군수 윤광석이 함양군 서계(西溪)에 흥학재(興學齋)를 세우자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이 그 기문을 지어주었으니 『연암집』에 있는 「함양군흥학재기」이다.

여름 경암대사 덕유산 은신암(隱身庵 안의면 상원리)에 주석, 벽송암기(碧松庵記)를 지음.경암집.

1793년 정조 17년 계축 봄~겨울 함양군수 윤광석의 사재 헌금으로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전년에 소실된 지리산 영원암 중건하고 진영각도 짓다. 1839년에 노광리 「영원암중수기」를 짓다. 중봉당의 부도는 영원사 입구에 있다.

7월 안음의 여인으로 함양의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간 밀양박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하다.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고 윤광석과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및 경암대사 등도 열녀전을 지었다.

1794년 정조 18년 윤광석이 학사루가 퇴락하자 자기 봉급을 털어 크게 중수한 뒤 박지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으니 그것이「함양군학사루기」이다.

1795년 정조 19년 윤광석이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를 간행함에 미쳐 박지원을 연루시킴으로써 둘은 절교에 이르고 말았다. 그 사연은「여윤함양광석서」에 자세하다. 인간 관계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얽혀 있으니 이것을 초월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박지원의 절교 사건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는 3권 1책으로 그 책판이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최치원과 김종직 향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9월 명은(明隱) 김수민(金壽民 1734-1811 자字 제옹濟翁, 본관 부안,장수 출신) 안의 삼동 유람.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의 부전동(負傳洞)을 거쳐 극락암(極樂庵)에서 일박, 20일에 용유담(龍游潭 서하면 봉전리)에서 놀고 오현(梧峴 서하면 봉전리 오현마을)에서 이박, 21일에 군자정(君子亭 바위), 차일암(遮日巖), 월연암(月淵巖), 화림동각자(花林洞刻字)를 보고 화림동천을 벗어났다. 명은이 지은 「三洞遊山錄」을 인용한다. "화림동천을 벗어나니 사방이 훤해졌다. 곧 안의현 소재지였다. 오른쪽 성천서원(成 星의 오자임 川書院)은 동춘송선생을 여기에 봉안하였는데 미복이라서 감히 참배하지 못하였다. 물의 남쪽에 광풍루와 제월당이 있는바 일두선생이 현감일 때 창건한 것이다. "

김수민의 여정을 더 살펴보면 우정전가(禹廷全家)에서 삼박, 당시 현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1792-1796재임)이 지은 연상각(煙湘閣),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보고 풍자시를 짓고 안의향교를 지나 지대촌(止垈邨 안의현 지대면知代面, 안의면 신안리)에서 사박, 23일에 녹봉서당(鹿峯書堂 안의면 하원리 하비마을)으로 녹봉 유언일(劉彦一 1725-1797, 황고 신수이 문인)을 방문, 심진동에 들어가 장수사(長水寺)에서 오박, 24일에 용추폭포(龍湫瀑布)를 보고 용추암(龍湫庵)에서 서산(西山), 송운(松雲), 무학(無學), 문곡(文谷)의 영정을 친견, 도솔암(兜率庵)에 올랐다가 녹봉서당에서 육박, 25일에 위천면 상천리(上川里)에서 칠박, 26일에 면우곡(眠牛谷 위천면 강천리 면동)에서 팔박, 27일에 수승대(搜勝臺)를 거쳐 갈천동(葛川洞)에서 구박, 28일에 남령(藍嶺)을 넘어 영각사(靈覺寺)에서 십박, 29일에 화엄판전(華嚴板殿)을 보고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귀가하였다.명은집..

1797년 정조 21년 정사 4월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2-1859) 26세 엄천사(嚴川寺)에 이주하다.감모재집.

1801년 순조 1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이석(金履錫)의 아들 김가순(金可淳 1771-? 본안동) 증광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803년 순조 3년 김면순(金勉淳 1782-? 본안동) 증광 생원시 합격. 생부는 통훈대부 전 행 함양군수 김이석(金履錫).사마방목.

8월 경암(鏡巖)대사 표충사(表忠祠) 향사 참석 후 귀로에 천왕봉 등정한 함양군수와 순창군수를 만나 담소, 음시, 두류산회화기(頭流山會話記)를 지음.경암집.

1804년 순조 4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상목(金相穆)의 아들 김기석(金箕晳 1784-? 본광산)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월 경암대사 지리산 벽송암에서 서거.경암집.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은 추파대사의 제자로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에 오래 주석하였다. 지금도 벽송사 밑에는 경암당탑의 부도가 있다. 남곡당(南谷堂)과 율봉당(栗峰堂)의 부도도 있다.

1810년 순조 10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윤정진(尹定鎭)의 아들 윤자찬(尹滋贊 1784-? 본파평)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2월 옥천(玉泉) 강주호(姜周祜 1754-1821) 안의 삼동 유람. 수망령, 장수사, 용추폭포, 풍류암(風流巖)을 유람하고 안의현 동쪽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서 잤다. 광풍루, 월연암, 관어대(觀魚臺), 군자정을 유람하고 산청으로 갔다. 강주호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유천(柳川) 강한(姜瀚 1719-1798)의 문인인데 강한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종친인 백록(白麓) 강시환(姜始煥 1760-1814)과 함께 산수 유람을 학문의 요체로 비유하며 자주 유람하였다.옥천연방고.

1816년 순조 16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지순(金芝淳)의 아들 김조근(金祖根 1793-? 본안동) 식년 생원시 합격.사마방목.

1819년 순조 19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기필(金箕弼)의 아들 김재겸(金在謙 1794-? 본광산) 식년 생원시 합격.사마방목.

1822년 순조 22년 함양군수 김려 재임중 순직, 한국최초의 어보인 <우해이어보>를 지은 실학자 목민관

김려 [鑢, 1766~1822]

본관 연안(). 자 사정(). 호 담정(藫). 1791년(정조 15) 생원이 되고, 이후 청암사() ·봉원사() 등에서 독서하다가, 1797년 강이천()의 비어()사건에 연루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가난한 농어민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갖게 되어, 이것이 이후 그의 문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그곳의 부기()와도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시를 지어, 필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겉만 화려한 벌열()보다 우수함을 강조하고 벌열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9년 다시 필화를 당하였으며 이때 그의 저서가 대부분 분서()되는 화를 입었다. 1801년(순조 1) 강이천 비어사건의 재조사에서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진해()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민들과 지내면서 《우해이어보()》를 지었다.

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더불어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 1806년 아들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 1812년 의금부를 시작으로 정릉참봉() ·경기전영(殿) ·연산현감을 거쳐 함양군수 재직중 죽었다. 패사소품체() 문장의 대표적 인물로 이옥() 등과 교유하였으며, 김조순()과 함께 《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집을 낸 바 있다. 저서에 《담정유고(稿)》 《담정총서()》 《한고관외사()》 《창가루외사()》 등이 있다.

우해이어보 []

요약

한국 남해안의 어류()에 관한 연구서.
구분 어보
저자 김려
시대 조선시대
소장 연세대학도서관

본문

필사본. 1권 1책. 조선 순조 때의 문신 담정() 김려(鑢)의 저서. 연세대학 도서관 소장. 우해()란 진해() 앞바다를 이른 말로, 진해를 우산()이라고도 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1801년(순조 1)에 가톨릭교 신봉의 혐의를 입어 진해에 유배되어 있던 2년 반 동안, 그 곳 어부들과 근해()에 나가 물고기의 종류를 세밀히 조사하여 그 생리() ·형태() ·습성() ·번식 ·효용 등을 연구 ·기록한 것으로, 어류를 주제로 한 <우산잡곡()> 1수()도 수록되어 있다. 조사 ·기록된 어류와 조개류는 약 70종에 달하며,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더불어 한국 어류 연구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1837년 헌종 3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홍철모(洪哲謨)의 아들 홍봉주(洪鳳周 1813-? 본풍산)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841년 헌종7년 6월 남계서원 준도문 위에 풍영루 증축. 함양군수 강이문(姜彛文)이 낙성식에 참여. 정환필(鄭煥弼 1798-?)이 기문을 지음.일두속집.

1843년 헌종9년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유언일의 유적인 녹봉서원(鹿峯書院) 상량문을 지음.감모재집. 노광두는 함양 출신으로 옥계(玉溪) 노진(盧示+眞)의 아우의 후손으로 신성진(愼性眞 1752-? 신수이의 손자)의 문인이고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의 외손이다. 문과 급제하고 호조 참판까지 지냈다.

1844년 헌종 10년 9월 노광두 73세로 함양군수 조연명(趙然明), 거창현감 이재가(李在稼 재임 1838-1841?), 진사 정환기(鄭煥琦)와 함께 삼동 유람을 떠나 수승대를 종일 감상하고 월성(月城)에 들어가 성천서원(星川書院)을 참배하고 동춘선생유지(同春先生遺址)를 방문하였다.감모재집.

1845년 헌종 11년  안국사(安國寺 마천면 가흥리) 승려 정훈(正訓)이 소아과 전문의서 『보유신편(保幼新編)』을 간행하고,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1775-1856, 당시 71세)가 서문을 쓰다.

1847년 헌종 13년 남계서원 풍영루 소실

 4월 병와(病窩) 송심명(宋心明 1788-1850) 함양의 정동응(鄭東膺) 및 안의 성북의 박정기(朴禎箕) 등과 함께 산천 유람.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함양의 은신암(隱身庵), 장수사(長水寺), 용추폭포, 풍류암(風流巖), 녹봉서원(鹿峯書院), 월연암(月淵巖), 대고대(大高臺)를 거쳐 산청을 지나 귀가하였다. 송심명은 남명의 연원으로 존양재(存養齋) 송정렴(宋挺濂)의 6대손이며 삼가의 유전(柳田)에서 정조 12년에 태어나 철종 1년에 별세하였다. 감모재 노광두와 이종(姨從)으로 친하였다. 성리학과 서법에 뛰어나고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병와집.

1849년 헌종 15년 남계서원 풍영루 중건. 노사 기정진(1798-1876)이 중수기를 지음.일두속집.

1855년 철종 6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석균(金奭均)의 아들 김헌진(金獻鎭 1830-? 본안동) 식년 생원시 합격.사마방목.

1860년 철종 11년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 1809-1877) 함양 마천 지리산의 무주암(無住菴)을 탐방하고 「무주암기」를 짓고 법화암(法華菴), 벽송암(碧松菴), 영원암(靈源菴), 무주암을 시로 읊었다.월촌집.

1869년 고종 6년 기사년 부계(扶溪) 전병순(田秉淳 1816-1890) 부전암(扶田菴) 옛터에 스승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명명해준 부계정사(扶溪精舍 서상면 옥산리 부전동 현존)를 건립.부계집. 전병순은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 1800-1870), 입헌(立軒) 한운성(韓運聖 1802-1863),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 1814-1889)과 함께 매문오현(梅門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전병순의 아우 율리(栗里) 전시순(田蓍淳)도 홍직필의 문인이다. 조병덕의 문인 사근당(四近堂) 전상묵(田相默)도 서상면 옥산리 출신이다. 임헌회의 함양 문인 미산(薇山) 정환주(鄭煥周), 무산(武山) 강용하(姜龍夏).

1871년 고종 8년 일두선생의 13대 종손 서산군수 출신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 1811-1879) 지곡면 평촌리 상개평 일두종택 위에 만귀정(晩歸亭) 건립, 기문 지음. 만귀정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 정자 앞의 옥계천 개평폭포 위 바위에 개은장구소 조손 근상(介隱杖구所曹孫近相), 풍호암(風乎岩), 송월담(松月潭), 송석대(松石臺) 등의 각자가 있다.

1873년 고종 10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김석근(金奭根)의 아들 김병식(金炳軾 1848-? 본안동) 식년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885년 고종 22년 김헌수(金獻洙 1864-? 본광산) 식년 생원시 합격.부친은 통훈대부 전 행 함양군수 김영문(金永文).사마방목.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오영석(吳榮錫)의 아들 오재승(吳在升 1868-? 본보성) 식년 생원시 합격. 오재두(吳在斗 1862-? 오재승의 형) 증광 생원시 합격.사마방목.

1891년 고종28년 통훈대부 행 함양군수 민정식(閔廷植)의 아들 민병희(閔丙禧 1874-? 본여흥) 증광 진사시 합격.사마방목.

1892년 고종 29년 무신란 의병 성주 이씨 3인에게 충신 정려 내림. 삼의각(三義閣 병곡면 송평리). 삼의사는 단종조의 충신 고은(孤隱) 이지활(李智活)의 9세손 이숙(李木+肅)과 그 아우 이진(李木+晉), 이숙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이다.

1894년 고종 31년 갑오경장으로 사근도 찰방 폐지

1895년 고종 32년 안의현이 안의군으로 개편됨

무신란 의병 하동 정씨 9인에게 충신 정려 내림. 구충각(九忠閣 수동면 우명리). 구충신은 일두선생의 7대손 동봉(東峰) 정희운(鄭熙運), 그의 아들 정중헌(鄭重獻), 정상헌(鄭尙獻), 정사헌(鄭師獻), 조카 정소헌(鄭炤獻), 재종질 정윤헌(鄭胤獻), 정찬헌(鄭纘獻), 정승헌(鄭承獻), 재종손 정진후(鄭鎭后+土)이다. 동봉이 강학하던 곳이 수동면 우명리에 있는 구남정사(龜南精舍)의 동봉재이다.

1896년 고종 33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신암(愼菴) 노응규(盧應奎)  경남 안의에서 거병(擧兵)하여 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삼고,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 등 문인, 임경희(林景熙)·성경호(成慶昊) 등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였다.

1896년 건양 1년 3월 위고(渭皐) 노근수(盧近壽 1845-1912) 함양읍 죽곡리에 칠리정(七里亭) 세움. 현재는 없음.

1899년 광무 3년 3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화림동과 심진동 유람. 장수군의 용연정(龍淵亭)을 지나 육십령을 넘어 군자정(君子亭), 농월정(弄月亭), 광풍루(光風樓), 심원정(尋源亭), 장수사(長水寺)를 유람하고 수망령(水望嶺 월성동에서 심진동으로 넘어가는 거창과 함양의 경계에 있는 고개)을 넘어 월성(月城)에 이르렀다. 연재집.

안의면 출신으로 송병선의 문인인 죽포(竹圃) 이교직(李敎直 1852-1918) 송병선이 이해 3월에 안의를 역방(歷訪)할 때 광풍루에서 뵙고 모시고  용추사를 보고 수망령을 넘어 월성초당(月城草堂)을 방문.죽포집.

1901년 광무 5년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의 숭양정(崇陽亭 지곡면 덕암리 주암마을 지금은 없음) 방문, 시를 지음.월고집.*次崇陽亭韻 辛丑1901 《月皐文集》 상p434. 정태현은 일두선생의 후손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도숭산(道崇山) 아래에 숭양정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904년 4월 정태현의 송덕비(관찰정태현영세불망비)를 도덕고개 바위에 병곡, 백전, 원수(元水 지금의 함양읍 운림리) 주민이 세움.현존.

1906년 광무 10년 수동면 원평리에 청계정사 중건, 유허비를 세움, 탁영 김일손의 후손 김용희(金容禧)의 청탁으로 정암 조광조의 후손 조종필(趙鍾弼) 비문을 짓고 함양군수 이종원(李鍾元) 글씨씀.

1907년 덕유산호랑이 문태서(文泰瑞 1880-1913) 호남 의병대장으로 13도 연합의병부대에 참여.

 

1910년 경술국치.

1913년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1963)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 후임으로 경남일보 2대 주필 취임.

유림면 유평리 옥산에 백화재(白華齋) 건립. 거창 유씨 양묵재(養默齋) 유서규(劉瑞奎 1828-1905)와 그 차남 소심재(小心齋) 유석근(劉錫謹 1860-1931)의 묘각이다. 원래 양묵재의 묘각으로 세운 것이다. 한말의 남명학파 명유들인 회봉 하겸진(1870-1946)이 상량문을, 남천 이도묵(1843-1916)이 기문을, 월연 이도추(1847-1921)가 명(銘)을, 면우 곽종석(1846-1919)이 백화삼장(白華三章)을 지었다.

1914년 안의군 폐지, 화림동(花林洞)심진동(尋眞洞)은 함양군으로, 원학동은 거창군으로 분속.

1914년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 1870-1940) 45세로 중국에 가서 강유위(康有爲)를 만나 공교(孔敎) 운동을 배워 옴. 권도용 공교 운동에 참여.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연 승하하자 항간의 민심은 일본을 의심하였고 국장일이 3. 3일로 정하여지자, 국장일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 하기 위하여 3. 1일을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진 것이다. 이날을 정점으로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우리 함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3. 28일 함양 장날 오후 3시를 기하여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일본군 헌병에게 주동인물 4명은 체포되었다. 1919. 4. 2일 함양 장날 병곡면 사람 김한익(金漢益)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혀 가게되자 하승현이 군중들을 데리고 노도와 같이 뒤를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다. 병곡면민은 하승현 선생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면장의 발의와 군수의 동의로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잇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군에서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1919년 삼일운동. 6월 권도용 경남유림대회 조선독립선언문 찬술, 대구 감옥에 수감. 1987년에 독립운동 유공으로 대통령포장, 묘소는 병곡면 도천리.

1921년 차경석(車京石)이 1911년 전라북도 정읍(井邑)에서 증산사상(甑山思想)을 기반으로 신흥종교 보천교를 창교. 차경석은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을 만난 뒤로는 그를 추종하였다. 1909년 강일순이 죽자 1911년 신도들은 강일순의 부인 고씨(高氏)를 중심으로 선도교(仙道敎;뒤에 태을교)라는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하였고, 차경석은 이때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1921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뒤에 보천교라 개칭)로 선포하였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고, 이와 함께 보천교에서 대동아단결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자 고위간부들이 이탈,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교세가 위축되는 가운데 1936년 차경석이 죽자 교단은 해체되었다.

1927년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진종 백용성 선사(震鐘白龍城禪師)가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을 건립하여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제창하였다. 불교계가 직접 생산에 참여하고 노동의 대가를 중시하는 가풍은 중국의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를 직접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는 선불교(禪佛敎)의 총림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대한 문제를 검토한 것은 대각사상(大覺思想) 2호에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선불교의 이러한 전통은 한국불교에서는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용성선사는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포교의 방편으로도 생각하였다. 그는 노동과 생산을 중시하고, 사원의 경제적인 자립을 위한 방법을 다각도로 실천한 바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북청의 광산사업에 관한 것이지만, 사업경영의 경험이 없었던 그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포교와 역경사업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함양 백운산의 화과원에는 밤나무와 감나무 등의 유실수를 일만여 주 심었으며, 토지도 30정보 정도를 확보하였다고 한다. 6.25 사변 때 폭격으로 폐허화 된 것을 재건하고 밤나무, 감나무, 사과, 배 등을 식재하여 선농병행을 실천하는 사찰이다.

1928년 11월 1일 함양군 불교포교당에서 유아보육기관으로 함양유치원을 개원하고 보육활동에 들어가 현지의 칭송이 다대하였다.불교54호

1930년 함양군 인구수 79,249

1944년 함양군 인구수 83,413

1945년 3월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춘암(春菴) 이강(李堈 1877-1955) 안의면 초동리 박동마을 귀원정(歸園亭) 방문, 현판과 기문을 친히 짓고 글씨 씀. 이어서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 모은정(慕隱亭) 방문, 현판을 쓰고 기문을 지음.

 

1949년 함양군 인구수 102,284

1950년 한국동란. 7월 25일경 공산군 함양에 진입.

1951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개

1954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종료

1957년 석복면을 함양면에 통합 함양읍으로 승격, 1읍 10면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함양읍, 수동면, 지곡면, 병곡면, 백전면, 유림면, 휴천면, 마천면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의 죽염의 발명가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 중앙 정계의 혼란을 피해 휴천면 월평리 살구징이에 은거, 암 치료약인 오핵단(五核丹) 등 신약(神藥) 개발.

1968년 춘계하선생기념비(春溪河先生記念碑) 세우다. 근대의 문장 대가 춘계 하기현(河琪鉉)이 병곡면 광평리 축수동(逐水洞) 홍하담(紅霞潭) 아래 언덕에 산천대(山泉臺)를 조성했는데, 그 위에 그의 문인 이재선(李在宣)과 우석근(禹石根) 등이 비를 세운 것이다. 그 위쪽에 구로정이 있다.

1967년 함양군 인구수 123,008

1981년 함양군지 발간

1984년 대구광주간 88고속도로 개통

1990년 함양군 인구수 55,014

1998년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진주함양간 개통

1999년 7월 함양역사관 홈페이지 개통, http://hamyang.or.kr  http://hamyang.org

2000년 도곡서원(道谷書院) 복원

6월 정성화 편찬 휴천면지 발간

2001년 황암사(黃巖祠) 복원

11월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함양대전간 개통

2002년 7월 2일 민선 천사령 함양군수 취임 ~2006년 6월

2003년 10월 5일 농월정 방화로 전소

2005년 10월 15일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 선생 서거 200주년 기념 추모 학술 심포지엄 개최, 함양문화원 주최

12월 12일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중 진주통영간 개통

2006년 5월 31일 민선 제4대 함양군수 선거 이철우, 최은아 낙선, 천사령(전경찰청치안감) 재선

2006년 10월 13일 제1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개최

2007년 9월 8일 제2회 함양죽염축제(위원장 최은아) 가곡상림 개최

12월 13일 함양울산간고속도로 중 장수익산간고속도로 준공

2008년 1월말 기준 인구:40,642명, 세대:17,710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