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尹訒)에 대하여

 

 1555(명종 10)∼1623(인조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지(訒之).

 

영의정 필상(弼商)의 5세손이며, 용종(龍從)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사과에 이르렀다.

 

1601년(선조 34) 생원이 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판관이 되었다.

 

1605년 형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예조정랑·함양군수, 1608년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장악원첨정이 되면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였으며,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지평·연산군수가 되고 1612년 장령·필선이 되었는데, 이때 김제남(金悌男)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더욱이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 되어 그의 사주를 받아 이위경(李偉卿)·정조(鄭造)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 김대비가 무고(巫蠱)를 일삼고 역모에 내응하였다는 죄목을 만들어 유폐를 상소하였다가 김효성(金孝誠)·윤전(尹烇) 등의 탄핵을 받고 강상죄(綱常罪)로 삭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판교(判校)가 되고, 1615년 문학·집의·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 대사간이 되면서 이각(李覺)·정조·임건(林建) 등과 함께 김대비의 폐모를 발론(發論)하여 마침내 서인으로 만들어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21년 예조참판이 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한찬남(韓纘男)·정조·이위경 등과 함께 대북파로서 주살당하였다.

 

두류산일록(박여량, 1610년)

일시 : 1610년(광해 2) 9월 2일 ~ 9월 8일

동행 : 박명부∙정경운∙박명계∙신광선∙박명익∙이윤적∙노륜 및 승려∙악공∙종 등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도率庵)’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 1548 ~ 1623)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佛經)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윤 아무개가 함양군수로 나왔을 때, 청렴한 정사를 베풀어 작목(作木)으로 받은 녹봉은 한 푼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에도 자기의 말을 팔아 혼수를 장만하였다. 인오가 그 말을 듣고 지은 시에 “옛날 사람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오늘 이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라 하고, 마지막 연에 “산승이 맑은 덕을 도울 길 없으니,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라고 하였다.

 

무릇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 입으로 전하여 사모하는 것은 이 고을 백성들이 할 일이다. 세상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혼자 외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우러러 흠모하는 정을 바쳤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함께하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아줄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