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간행한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로 인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절교 사건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에 「여윤함양광석서 與尹咸陽光碩書」가 있는데 이는 윤광석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편지이다. 박지원은 정조 16년(1792)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뒤 그 2년 전(정조14,1790)에 함양군수로 와 있던 윤광석과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친하게 지내었다. 그런데 윤광석이 이임(정조19,1795)에 임하여 서둘러 자기 조상 후촌(後村) 충헌공(忠憲公) 윤전(尹 1575-1636)의 실기 곧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 일명 『후촌집 後村集』을 간행함으로써 그 내용에 박지원의 조상인 기재(寄齋)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윤전의 요직 진출을 방해했다고 나쁘게 묘사한 글로 인하여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박지원과 윤광석이 죄수 심문 일로 인하여 모였다가 헤어질 때 윤광석이 『후촌집 後村集』의 원고를 내주며 교열을 부탁하였는데 박지원은 원고의 교정 상태가 어지러워 대충 보고 말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자기 조상 이야기가 있는 것을 간과하였으니 윤광석 측에선 묵인한 것으로 오해하고 문제가 없다고 파악하고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뒤늦게 박지원 문중에서 내용을 보고 박지원을 힐난하니 박지원은 졸지에 조상을 욕보이는 일에 동참한 패륜아가 된 것이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함양의 학사루에서 간행할 때 안음의 각수승(刻手僧)을 보내어 지원하였고 그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한 입장이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조 16년(1792)에 윤광석이 함양군 서계(西溪)에 흥학재(興學齋)를 세우자 그 기문을 지어주었으니 『연암집』에 있는 「함양군흥학재기」이다. 정조 17년(1793)에 안음의 여인으로 함양의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간 밀양박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하자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고 윤광석과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등도 열녀전을 지었다. 정조 18년(1794)에 윤광석이 학사루가 퇴락하자 자기 봉급을 털어 크게 중수한 뒤 박지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으니 그것이「함양군학사루기」이다. 정조 19년(1795)에 윤광석이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를 간행함에 미쳐 박지원을 연루시킴으로써 둘은 절교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인간 관계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얽혀 있으니 이것을 초월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박지원의 절교 사건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는 3권 1책으로 그 책판이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최치원과 김종직 향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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