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 靈源寺


청매 인오(靑梅印悟 1548~1623) 방광사리탑

자 묵계(默契). 호 청매(靑梅).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3년 동안 의승장(義僧將)으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왜적이 물러가자 부안(扶安) 요차봉(了嵯峯)의 마천대(摩天臺) 기슭에 월명암(月明庵)을 짓고 살다가, 지리산(智異山) 연곡사(鷰谷寺)와 함양 영원사로 옮겨 거기에서 말년을 보냈다. 부도인 방광사리탑이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에 있다. 저서에 《청매집(靑梅集)》이 있다.

  소  재 : 마천면 삼정리
  연  대 : 신라시대
 

 영원사는 불타기 전만해도 백 칸이 넘는 이홉 채의 건물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 사찰은 신라 때 영원대사가 창건한 뒤로 수 많은 고승 선객들이 수행했다. 그 가운데는 서산, 청매, 사명, 지안 스님들이 수행 했다.

 영원사는 영원대사가 창건할 때 얽힌 일화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영원스님은 입산한 지 얼마 안 돼 현재의 영원사 부근에 토굴을 파고 8년을 계속 참선 수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깨우침을 얻지 못해 수도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나섰다. 그가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내려오다 보니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는 시늉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를 이상히 여긴 영원스님이 가까이 다가가니 노인이 혼잣 소리로 말했다.

"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 이다. " 그리고는 노인이 표현히 사라졌다. 젊은 영원스님은 노인의 말에 깨달은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2년을 더 수도 정진한 끝에 마침내 득도하여 영원사를 세우게 되었다. 영원스님의 하산길을 막고 깨달음을 주었던 그 노인은 다름아닌 문수대성이었을 것이라고 후세 스님들은 믿고 있다.

 영원사는 유서 깊은 사찰과는 달리 재난 탓인지 경내에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만 있고, 등 너머 산마루에 조실스님들의 부도와 상무주암에 각운대사의 필단사리 3층 석탑만 있다.

교통편

함양읍에서 마천면 삼정리 양정마을까지 운행하는 노선버스가 하루에 서너 차례씩 있다. 차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때는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벽소령과 백무동 길이 갈리는 강천리 앞 실덕마을에서 하차하면 되는데 실덕 ~ 양정 버스 정류소의 거리는 도보로 30분 정도 걸린다. 주변 경관이 좋으므로 걸어가는 편이 오히려 좋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마천에서 대절하면 양정마을까지 갈 수 있다.
시외버스 정류소 앞의 벽소령 상회(함양 962-5456)등에서 민박과 매식이 가능하다.  

 

천령지 天嶺志             

영원암 靈源庵 : 군자사 君子寺 서쪽 30리쯤에 있다. 고승 인오 印悟(법호는 청매 靑梅1548-1623 서산대사의 제자)가 머물던 곳이다. 인오가 여기에서 죽었고 인하여 부도를 만들었다. 靈源庵在君子寺西三十里許,高僧印悟所住,印悟死于此而因爲浮屠.(지금 절의 동쪽 산등성이에 청매의 방광사리탑이 남아 있다.)   

  

於于集卷之六
 雜識
遊頭流山錄

三月丁卯

又蹭蹬抵靈源菴。靈源。靜界也。喬基爽塏。俯臨群木。剖篔簹引飛泉。琮琤鳴玉。㵼下木槽中。淸瑩可以解渇。菴小不063_590a滿三四楹。而淸僻可愛。南對馬耳峯。東望天王峯。北負上無住。有名僧善修居之。率徒第演經。四方釋子多歸之。與詢之頗相善。餉之以松餻蔘餅八味茶湯。是山多竹實柹子栗子。每秋收而舂之以爲粻云。日晩風色颯然。前峯雲氣苒苒而生。知有雨候。遂促行轉獅子項。下長亭洞。牽脩蔓直下絶磴。過實德里。始見野田初決渠。白水決決。暮投君子寺。寺野刹也。埃氛滿堂。獨牧丹對禪房方敷榮。可賞。寺前舊有靈井。號靈井寺。今改以君子。未知取何義也。數日間淸遊雲表。有若羽化淸都。忽一夕擠落黃塵。使人神精逼塞。夜夢將魘。夫子所謂君子居何陋者。恐難服膺也。063_590b壬申。朝發。經義吞村。多感古焉。昔者。佔畢齋從此路向天王峰者也。彼彼我我。吾不必由斯。徑行三四里。至圓正洞。洞天弘敞。去去加勝。至龍游潭。層峯合沓。皆多石少圡。蒼杉赤松所攅聚。復以蘿薜經緯之。亘一大石。劈兩厓成巨峽。東江流其中而奔注之。噴沫舂撞。石爲猛浪所簸磨。或成窪。或成堆。或呀然而成罅。或坦然而成場。高低起伏數百步。萬千殊狀。不可以殫形。釋徒尙誕。指石缺者爲龍抓。石嵌圓者馬龍蟠。石中裂谺谽者爲龍抉穿而行。民之無知。咸以爲信。至此不覺頂禮。爲士者亦曰龍不見石。爲變化所使。余亦目其可駭可愕。想有神物宅玆。豈夸娥巨靈063_590c能斧斤以成之者。試以詩驗之。乃書一絶投之淵。以調戲之。俄而。厓窟中有如煙非煙之氣脈脈而昇。亂峰蒼翠之間。有殷殷之聲。閃閃之光。乍作而乍止。同行者遂褰裳徑渡。略彴走投于荒祠中以竢焉。須臾雨足如銀繩。飛雹大如鳥卵。一䝰驟至。座中年少輩色沮。幾失匙焉。移晷而後宇宙盤駁。日脚漏於雲際。遂緣厓而行迷失路。入灌叢中。草露濡裳。藤梢刺面。推且挽披荒榛。仄轉山腹而登。行行傴僂。折篁笋採蕨芽。行屩爲之滯淹。東過馬跡庵。攅柯挐蔓。故基猶存。夤緣山冢。十步九折。陟降之勞。無不汗顔。酸股繭足。若使被人役使爲也。其怨咨嗔怒。雖呵禁難止。而063_590d群行朋息。嘻笑盈路。豈非賞心之可娛也歟。遂入頭流菴。菴之北有臺。直南而望之。有飛瀑瀉于巖間。如懸玉簾數十仞。雖竟夕坐玩。不覺其疲。而會雨新晴。谷風淒緊。以爲過爽不可久淹。遂入禪房安頓焉。癸酉。侵晨而行掠甕巖。入淸夷堂。穿森木亂石叢。至永郎臺。俯臨陰壑。然昏黒。魄遁眼眩。攀木却倚。愕眙而不能稽。永郎者。花卽之魁也。新羅時人也。率徒三千人。遨遊山海。我國名山水。無不寓名焉。循山脊。指天王峯而東。山多烈風。樹木皆擁腫。枝柯向山而靡。苔髮骨樹。鬖鬖如人被髮而立。松皮柏葉之木。中無腸而榦四披。枝頭下搶干地。山益高而樹益短。山之063_591a下。濃陰交翠。而至此花梢未吐葉。尖如鼠耳。巖罅有積雪盈尺。掬而啗之。可以沃渇喉。有草纔抽芽。靑莖者曰靑玉。紫莖者曰紫玉。僧云此草味甘滑可食。擷之盈掬而來。余曰。僧稱靑紫玉。乃仙家所餌瑤草也。乃植杖手摘之。殆滿囊焉。前登少年臺。仰瞻天王峯。高出雲漢。無雜草木。只蒼柏聯緣而生。被氷霜風雨所侵暴。枯死骨立者十居二三。望之如頒白老人頭。殆不可盡鑷者也。少年云者。或稱永郞之流也。余意天王峯。長老也。此峯。奉承之如少年。故名之歟。下視群山萬壑。衆皺爛熳。此地尙然。而況於第一峯乎。遂飛杖登天王峯。峯之上有板屋。乃聖母祠也。祠中安063_591b一石塑。爲白衣女像。未知聖母是何人。或曰高麗王太祖母。爲其生育賢王。能統三韓。故尊祀之。式至于今。嶺湖之間。要福者歸之。奉以爲淫祠。仍成楚越尙鬼之風。遠近巫覡。憑玆衣食之。登絶頂。俯察儒士官人來。卽雉兔散藏身林薄中。伺其遊覽者。下山還聚焉。環峯腰列板閣如蜂房。將迎祈禠者宿留焉。托以宰殺爲禪家禁。繋牛畜于山下叢祠而去。巫者取以資其生。故聖母祠白母堂龍遊潭。爲巫覡之三窟。誠可憤也。

萬曆三十九年辛亥四月日。默好翁記。       

 

月沙先生集卷之十六
 倦應錄
邊山月明寺僧印悟。送沙彌寄問。次其軸中韻却寄。三首。 悟方在智異山盤若峯。 


一別高僧三十年。朅來消息兩無緣。月明寺裏懸燈宿。頭白人間夢杳然。
今憑白足訪雲蹤。聞說移居盤若峯。欲向仙山話舊事。蓬萊回首路重重。
踏遍名山臥一庵。盡收諸幻問優曇。勞生世味嘗曾了。069_363a老子端宜共學參。      

         

사찰순례지인 삼정산

삼정산은 사찰순례 산행길로 애용되고 있다. 북쪽 끝자락의 실상사에서 시작해 능선 동쪽 사면에 들어서 있는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 영원사, 도솔암 등 크고 작은 사암 잇는 절길이 나있어 길만따라가면 사암들을 두루 살펴봐 가며 산행을 하다보면 이 사암들이 천왕봉이나 수도산 또는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어 전망도 뛰어나다.

삼정산 절길 산행은 실상사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기도 하나, 체력이 약한 사람은 노선버스가 닿는 삼정리 양정마을에서 영원사로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도 한다. 영원사까지는 도로가 나있어 마천에서 택시를 대절해 오를 수도 있다. 산행은 높은 산을 바라보며 오르는 묘미가 있으므로 삼정마을에서부터 시작하여 약수암으로 내려오면 웅장한 지리산의 주 능선을 등에지고 내려오므로 실상사에서부터 오름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수암엔 도봉 스님이 혼자 수행을 하며 산다. 도 닦는 분이 성질 나빠졌다니. 오가는 등산객들 때문에 골치란다. 뼈 빠지게 마련한 장작을 허락 없이 함부로 때질 않나, 심지어는 비 바람 피한다고 스님이 암자를 비운 사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문수암 오르는 길에는 산악회 리본이 거의 없다. 도봉 스님이 꼴 보기 싫다며 눈에 띄는 족족 떼냈다.
문수암에서 상무주암까지는 짧은 거리지만, 수림이 울창하고 돌마다 이끼가 끼어 있는 등 운치가 뛰어나다. 한국 선종의 중흥주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움을 얻었다는 상무주암에서 삼정산 정상에 오르려면 영원암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길을 따라야 한다.

문수암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는다. 15분쯤 가면 전망대. 전망대 바로 곁에는 상무주암이 있다. 상무주(上無住).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이고,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다.

상무주를 지나면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삼정리 영원사로 빠지고, 오른쪽으로 치고 오르면 삼정산 정상 가는 길이다. 15분 정도면 헬기장. 삼정산 표지판이 있지만 정상은 아니다. 10분쯤 뒤 대동금속이 95년 세워둔 표지판이 있는 바위가 정상이다. 정상에서 마천쪽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삼정리 벽소령으로 오르는 골짜기이고, 왼쪽은 뱀사골이다.

상무주암에서 영원사로 가는 길은 정상 아래 사면길에 이어 날등을 따르다 안부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영 원사(靈源寺)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한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건립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영원사라고 한다. 한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제일 큰 사찰이라고 했다.

이 절 규모는 너와로 된 선방(禪房)이 9채에 100간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 많았다고 한다.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組室案錄)을 보면 부용영관(芙蓉靈觀), 서산대사, 청매(靑梅),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 상언(雪坡 常彦), 포광(包光)스님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원사가 그 위용을 잃게 된것은 여수 반란사건때 반란군이 아군의 공격에 쫓겨 이 곳까지 찾아와 절터를 아지트로 삼으면서, 건물등을 작전상 모두 불태워 없애면서 부터다.

그 후 1971년 중건 하였다고 전한다. 이 곳에는 많은 부도들이 있는데 원당형의 둥근 석탑이 5기가 있으며 , 대는 2층 탑신을 가진 조립형으로 되어 있다.
이들 부도들은 영원사의 유물로 추정되며, 영암당탑, 설파당탑, 중봉당탑, 청계당탑, 벽허당탑, 청매탑 등 이름있는 스님들이 수도하던 곳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고승의 호를 딴 부도들이 있다. 엽송설화 30권을 기록했다는 구곡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3층석탑이 방광(放光)했다는 이야기 등도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禪風)을 말해주고 있다.

영원사쪽에서 산오름을 하다보면 숲속에 군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가있다. 다가가서 보면 사람과 똑같은 실물인형이다. 빨치산 전투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삼정산은 지리산의 전망대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역사적 아픔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곳곳에서 빨치산 관련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청매 인오 부도탑-방광사리탑

설파 상언 부도탑-설파당탑

       

지리산의 절    ▒     영 원 사                                                                   


소실된지 30여년만에 복원된 지리산의 천년고찰 영원사.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해발 9백미터의 산중턱에 있는 이절은 통일신라시대 영원조사가 창건한 이래 서산, 청매, 포광스님등의 당대의 선지식들이 주석한 바 있는 수도 도량이다. 너와 지붕으로 된 웅장한 선방들은 여순사건과 6.25전란으로 완전 소실되어 지금은 몇 개 남은 주춧돌과 부도들로 웅장했던 옛가람의 모습을 더듬을 수 있을뿐  슬레이트 가건물 두 채가 보기에도 외롭기만 했으나 최근 대웅전이 새로 지어졌다. 지리산 주능의 한가운데인 삼각고지에서 북으로 뻗은 우뚝솟은 삼정산을 등에 업고 있는 영원사의 앞에는 벽소령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해발 9백미터에 자리 잡은 이절은 고산지대에 있으면서도 사방이 높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바람이 잠잠하고 비교적 따뜻하다. 이 절은 소실되기전 만해도 100칸이 넘는 9채의 건물로 웅장한 가람의 모습을 지녔었다고 한다. 소실되기 전의 건물중 일부는 특히 주변의 울창한 수림을 이용하여 지붕을 기와대신 너와로 이었던 것이 다른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절에는 비록 탑이나 석등 하나 제대로 없긴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영원대사가 창건한 후 수많은 고승, 선객들이 이곳에서 수행했음이 밝혀지고 있어 지난달 이절의 위치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영원사에 보존되어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법상인 부용 영관스님을 비롯, 서산, 청매, 사명, 징안 및 화엄보살로 불리던 설파 상언스님과 석전 박한영스님의 법사인 포광스님 등 이절에 주석했던 조실스님만 109명 기록되어있다. 이들 수많은 조실과 고승, 선객들 가운데 이 절을 창건한 영원조사의 영원사 창건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입산 한지 얼마 안된 영원스님이 이곳에 와서 현재의 영원사 부근에 토굴을 파고 참선수도  하기를 8년, 그래도 깨우침을  얻지 못하자 수도장을 다른곳으로 옮기려고 나섰다. 산길을 터덕터덕 내려오다보니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영원스님이 곁에 가니 노인은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있으면 큰고기가 낚일 것이다"고 말하고는 표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젊은 영원스님은 노인의 말에 깨달은 바 있어 다시 토굴로 들어가 2년을 정진수도한 끝에 득도하여 영원사 창건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영원스님의 하산길을 막고 깨달음을 주었던 노인은 다름아닌 문수대성이었을 것이라고 후세 스님들은 믿고 있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영원사가 폐허로 변한 것은 1948년 여순사건때 반란군이 절 주변으로 몰려오면서 부터였다. 반란군이 행패로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어져 사세가 기울어진데다가 6.25동란으로 이 절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스님들이 옛절을 찾아와 부서진 탑조각을 모으고 가건물을 세워 불상을 모셨다. 1천여평의 경내에는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이 있고 여기저기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을 뿐만아니라 구곡 각운대사의  필단 사리 3층석탑 등이 옛날의 선풍을 말해주고 있다. 경내에 유일하게 사리탑을 남긴 청매스님은 영원사에서 남쪽으로 마주보이는 산중턱의 토굴에서 오랫동안 참선한 수도승이었다. 수도중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거나 관솔을 잘라다 남원, 함양등지의 장에다 내다 팔았다. 이는 연명을 위해서라기보다 세상속에서 부처님의 참뜻을 찾자는데 있었다. 그래서 청매스님은 물건값을 주는대로 받고 팔리지 않는 것은 누군가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도록 두고 산으로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생을 수도에만 전년하던 청매스님은 말년에 영원사 조실로 계셨다. 하루는 대중들이 아랫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다 보니 절터가 전소한 듯 환해, 놀라 절로 달려와 조실로 가보니 청매스님이 숨져있어 다비를 했더니 사리가 나왔다 한다. 이 사리를 모실 사리탑을 현재의 영원사 동쪽능선에 세웠는데 이것이 때로는 환하게 빛을 발해 스님들은 이를 방광사리탑이라고 불렀다는 것. 그런데 방광 사리탑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이를 보려고 많은 스님들 뿐만아니라 신도들까지 모여 들었다. 외부스님과 신도들의 접대에 지친 스님들이 사리탑을 가까운 절로 옮겼더니 그후 부터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염송설화는 고칙(古則) 1,225개조와 역대조사의 염송을 집대성한 것으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참고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민족의 태평을 기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모두 30권이다 . 이 설화는 흔히 고려 고종 13년(1126년) 진각국사 혜감이 엮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영원사의 구곡 각운선사가 엮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원사에는 각운선사와 염송설화에 얽힌 탑1기가 있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각운선사가 염송설화를 엮을 때 자주 붓이 망가져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마침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 그 족제비꼬리를 잘라 붓을 만들어 염송설화 30권을 마무리 짓고 나니 염송설화를 쓴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 한다. 영원사 스님들은 이 사리를 모셔놓을 3층석탑을 세우고 필단사리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상무주암에 설파스님의 부도가 있다. 설파스님은 학인때 전북 고창의 선운사에 계셨는데 강원 조실인 희암스님이 자정만 되면 학인들이 자는 방을 향해 절을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학인들이 희암스님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화엄대성이 계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암스님은 학인들이 설파스님을 시기하여 그를 해칠 것이 걱정돼 선운사 강원에 있지 말고 당시 영원암에 가서 은거하라고 하여 설파스님이 이 절에 옮겨온후 마침내 득도를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영원사에는 이절을  거쳐간 수많은 고승, 선객들의 뒷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유서깊은 절의 복원에 앞장서고 있는 김대일 스님이 이곳에 온 것은 1973년. 선방에서 참선수행만 하던 대일스님은 공부차 이곳에 왔다가 영원사가 지닌 수많은 내력과 전설에 매료되어 복원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8년부터 복원불사를 본격화 해온 대일스님은 "옛가람의 모습을  되살려 이곳에서 수행하던 선사들의 정신을 오늘과 내일에 면면히 이을 수 있는 수도도량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새로 복원된 영원사는 1차로 1억원의 예산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