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유담(龍遊潭)에 대한 다양한 묘사 - 김용규(시조시인)


엄천골짜기에 있는 자랑스러운 명승지 중의 하나인 곳이 바로 용유담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선인들이 지리산 기행을 하면서 이곳을 지나가며 제각각 용유담에 관한 묘사를 해 놓았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끝까지 읽어 보시면 재미 있습니다.

*1611년 <유몽인>선생의 [유두류산록]에서 용유담 묘사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 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 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기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시로써 증험 해 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서서 연못에 던져 희롱해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 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층층의 푸른 봉우리 사이로 우레 가은 소리와 번쩍번쩍 번갯불 같은 빛이 잠시 일어나더니 곧 그쳤다.


*1610년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에서 용유담 묘사

우리는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냇물을 굽어보기도 하고, 서성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보나 서쪽으로 보나 그 장엄한 경관이 빼어났고 수석도 기괴하였다. 내가 둘러앉아 신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좌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패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 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1586년 <양대박>선생의 [두류산기행록]에서 용유담 묘사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남은 흔적 있네”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1489년 <김일손>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에서 용유담 묘사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 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1790년 <이동항>선생의 [방장유록]에서 용유담 묘사

용유담에는 활 모양으로 큰 돌들이 계곡에 쌓여 있었다. 
그 돌들은 지붕마루 같은 것, 평평한 자리 같은 것, 둥근 북 같은 것, 큰 항아리 같은 것, 큰 북 같은 것, 
성난 호랑이 같은 것, 질주하는 용 같은 것,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어 있는 것, 쭈그리고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에 그득히 널려 있었다. 

그밖에도 기이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형상을 이루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계곡 가운데로는 큰 돌이 나 있는 홈통으로 물길이 나 있었는데, 
세찬 물줄기가 요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요동치면서 흘러내려 드넓은 못을 만들고 있었다. 
못은 수리에 곧게 걸쳐 있었고, 양쪽의 골짜기에는 묶어 세운 듯한 소나무 수만 그루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어둡고 컴컴하였다.


*1643년 <박장원>선생의 지리산기에서 용유담 묘사

오후에 용유담에 도착하여 말 안장을 풀고 쉬었다. 
용유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그 위에는 모두 흰 돌이 깔려 있었다. 
물에 잠긴 돌빛이 깊고 맑았다. 높고 낮은 돌 위에는 수백 명도 족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돌위에 앉아 술 몇 잔을 주고받았다. 
악사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돌을 쪼개고 구름을 뚫어 마치 깊은 물 속의 용이 신음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낸 뒤 다시 길을 떠났다. 
길 옆에는 엄천창이 있었다.


*1686년 <정시한>선생의 산중일기에서 용유담 묘사

나귀에서 내려 좌려암과 삼성대를 보고 *용유당 [ 현 용유담]에 이르니, 하얀 돌이 한 골짜기 수백리 사이에 어지럽게 솟아 있었다.
물소리가 땅을 흔들어 우레소리처럼 은은하게 들리고 냇물은 검푸른 빛으로 깊어서 모래톱이 없었다.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좌우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고 바위의 상하에는 신룡이 감고 뒹군 흔적이 있었다. 특이한 모습이었다

 (자료 : 지리산 아흔아홉골, 옛산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