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실학촌(계획)


은거의 땅 연암협, 실학의 땅 안의 - 이종묵

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煙湘閣選本○記
百尺梧桐閣記 


由正堂西北數十擧武。得廢舘十有二楹。而軒無欄。階無甃。大抵墀墄所築。皆水磨。亂石疊卵絫碁。歲久頹圮。滿地磊落。傾側膩滑。難着履屐。草蔓之所縈。蛇虺之所蟠。遂乃日課僮隷。撤砌夷級。凡石之圓者。盡輦去之。擇石於崩崖裂岸之間。若氷之坼也。珪之削也。觚之楞也。爭來効伎。呈巧於甍簷之下。獒牙互嗑。龜背交灼。窰皸袈縫。以文以完。不施繩刃。宛若斧劈。沿甃正直。有廉有隅。於是乎堂有陛而門有庭矣。復斥其252_021b前楹。補以脩欄。新其塗墍。剷除猥雜。舘客讌賓。以遨以息矣。百笏量庭。十弓爲池。盛植芙蕖。種以魚苗。於是乎揭風欞凭月楹。俯淸沼而幽敻窈窕。衆美畢具矣。夫宿漿換器。口齒生新。陳躅殊境。心目俱遷。士民之來觀者。不覺池之昔無。閣之舊有。而咸謂斯軒之翼然湧出於池上也。墻外有一樹梧桐。高可百尺。濃陰暎檻。紫花飄香。時有白鷺翹翼停峙。雖非鳳凰。足稱嘉客。遂榜之曰百尺梧桐閣

世人惡圭角而喜圓渾。故用字爲文。輒頹弛膩溜。實皆危兀如累卵。吾欲使僮隷。悉去其字之不中律者。亦恐贏他白。本燕岩之用字。尖方斜正無不可。但惡圓耳。故上者不可置下。東者不可移西。而極錯落處。還極齊整。文理燦然。自出古色。

 

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煙湘閣選本○記
孔雀舘記 


百尺梧桐閣之南軒曰孔雀舘。南距不數十武。頂胡盧而對峙者曰荷風竹露堂。隔其中庭。架竹爲棚。雜植枸杞,玫瑰,野棠,紫荊于其中。脩條柔蔓。綴絡扶踈。掩暎虧蔽。春夏爲屛。秋冬爲籬。屛宜錯花。籬宜積雪。因252_021c圭其竇。爲天然之門而不扉焉。穿北垣。引溝澮。納之北池。又溢北池。經其前爲曲水。摘蓮葉以承杯。以泛以流。此孔雀舘之所以同室殊境。移席改觀者也。余年十八九時。夢入一閣。穹深虗白。類公舘佛宇。左右錦匣玉籤。帙然排揷。曲折經行。纔通一人。中有數尺綠甁。揷二翠尾。高與屋齊。裴徊久之而覺。其後二十餘年。余入中國。見孔雀三。小於鶴而大於鷺。尾長二尺有咫。赤脛而蛇退。黑嘴而鷹彎。遍體毛羽。火殷金嫩。其端各有一。金眼石綠。點睛水碧。重瞳暈紫界藍。螺幻虹毅。謂之翠鳥者。非也。謂之朱雀者。亦非也。時警竦而入。晦卽鬖髿而還魂。俄閃弄而轉翠。倐葳蕤而騰燄。葢文章之極觀。莫尙於此。夫色生光。光生輝。輝生耀。耀然後能照。照者。光輝之泛於色而溢於目者也。故爲文而不離於紙墨者。非雅言也。論色而先定於心目者。非正見也。在皇城時。與東南之士。日飮酒。論文於段家舖。每擧。似孔雀爲之評其詩若文。而座有高太252_021d史棫生。戱之曰。我客斯容。何如夫子家禽。相與大笑。其後五年。客之遊中州者。得孔雀舘三字而還。錢塘人趙雪帆所書也。曩者吾於趙。未有一面。豈於他人乎。聞余之風。而萬里寄意者耶。然而舘非私室之號。而吾且老。無一廛之室。顧安所揭之。今幸蒙恩。得宰名區。水竹四載。以官爲家。則舊書弊簏。隨身俱在。霖餘曝書。偶得此筆。噫。孔雀不可復見。而追思疇昔之夢。安知宿緣之不在於斯乎。遂刻揭前棟。並識如此。

目之於色同得也。至於光也輝也耀也。有視之而不能覩者。有覩之而不能察者。有察之而不能形諸口者。非目之不同也。心靈有通塞焉故也。譬如此楮與此墨。有不辨黑白者。瞽者也。辨黑白而不知其爲文字者。嬰兒也。知其爲文字而不能聲讀者。奴隷也。堇能聲讀而半信半不信者。村坊學究也。順口一讀。如誦夙記。而恬然不以爲意者。塲屋秀才也。此文宜書之雪牋。點以乳碧。藏之老252_022a蠧篋中。不然。寧可繙說一遍。使不辨黑白者聽之。切不可一經此輩口眼。此輩熟見優人笠上攢翠疊錢氣像。却不知綠甁瑣窓中風韻。

 

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煙湘閣選本○記
荷風竹露堂記 


正堂西廂。廢庫荒頓。廐湢相連。數步之外。委溷棄灰。朽壤堆阜。積高出簷。葢一衙之奧區。而衆穢之所歸也。方春雪消風薰。尤所不堪。遂乃日課僮隷。畚擔刮剔。匝旬而成曠墟。橫延二十五丈。廣袤十之三焉。刜灌薙茀。夷凸塡坎。槽櫪旣徙。地益爽塏。嘉木整列。蟲鼠遠藏。於是中分其地。南爲南池。因廢庫之材。北爲北堂。堂東面橫四楹縱三楹。會檼如髻。冐以胡盧。中爲燕室。連爲洞房前左挾右。虛爲敞軒。高爲層樓。繚爲步欄。疎爲明牕。圓爲風戶。引曲渠穿。翠屛畫苔。庭鋪白石。被流暎帶。鳴爲幽磵。激爲噴瀑。入于南池。架甎爲欄。以護池塢。前爲脩墻以限外庭。中252_022b爲角門以通正堂。益南以折。屬之塘隈。中爲虹空以通烟湘小閣。大抵堂之勝在墻及肩以上。則更合兩瓦。竪倒偃側。六出爲菱。雙環爲瑣。綻爲魯錢。聯爲薛牋。瓏。窈窕邃敻。墻下一樹紅桃。池上二樹古杏。樓前一樹梨花。堂後萬竿綠竹。池中千柄芙蓉。中庭芭蕉十有一本。圃中人蔘九本。盆中一樹寒梅。不出斯堂。而四時之賞備矣。若夫涉園而萬竹綴珠者。淸露之晨也。凭欄而千荷送香者。光風之朝也。襟煩鬱而慮亂。巾嚲墊而睫重。聽于芭蕉而神思頓淸者。快雨之晝也。嘉客登樓。玉樹爭潔者。霽月之夕也。主人下帷。與梅同癯者。淺雪之宵也。此又隨時寓物。各擅其勝於一日之中。而彼百姓者無與焉。則是豈太守作堂之意也哉。噫。後之居斯堂者。觀乎荷之朝敷而所被者遠。則如風之惠焉。觀乎竹之曉潤而所沾者匀。則如露之漙焉。此吾所以名其堂。而以待夫後來者。

252_022c文如作九層露臺。辟除築累。若是其勤。而一朝登覽。怡然快樂。不知其材力工費。已是中人十家。

此篇當最諧俗眼。尤宜入選。

 

은거의 땅 연암협, 실학의 땅 안의

이종묵(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2장 안의에서 실현한 북학의 뜻

1780년 홍국영이 실세하자 박지원은 서울로 돌아와 서대문 바깥 평동(平洞)에 있는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집에 거처하다가 삼종형(三從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때의 체험을 적은 글이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중국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연암협을 오가면서도 주로 박명원의 소유인 삼개(麻浦, 三浦로도 적는다)의 세심정(洗心亭)에 거처하였다. 시를 즐겨 짓지 않았던 박지원이지만 다음 작품은 참으로 운치가 있다.


우리 집 문밖은 바로 서호인지라,

여기저기 배에서는 쌀 사려 소금 사려 소란하네.

가을 기러기 한 번 울자 일제히 닻을 올리더니

강 가득 달은 달빛 아래 김포로 내려가네.

我家門外則湖頭 米鬨鹽喧幾處舟

霜雁一聲齊擧矴 滿江明月下金州

박지원, <강마을에 살면서(江居慢吟)>(『연암집』)


서울로 돌아와 중국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즐거운 일이 많지 않았다. 우환은 거듭되었다. 1783년 절친했던 벗 홍대용을 잃은 것은 그의 평생에 가장 슬픈 일의 하나였던 듯하다. 게다가 1787년 정월 부인 이씨가 죽었다. 시집 와서 가난한 살림에 자주 이사 다니느라 고생이 심했기에 박지원은 부인이 죽은 후 평생을 홀몸으로 지냈다. 같은 해 7월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형 박희원(朴喜源)이 죽었다. 박지원은 어머니같이 의지하던 형수를 묻은 연암협에 나란히 묘를 장만하였다. 이듬해인 1788년 3월 일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맏며느리가 사망하고 장남도 거의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

이러한 세월을 종제 박수원(朴綬源)이 지방 사또로 부임해 나가 비게 된 계산동(桂山洞)에 기거하면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평시서(平市署) 주부(主簿), 제릉령(齊陵令), 한성부 판관 등의 벼슬을 하였다. 한가한 틈이 나면 마포 세심정에서 기거하기도 하고, 가끔은 연암협을 둘러보고 왔다.  

그러던 중 박지원은 1791년 안의현감(安義縣監)에 제수되었다. 박지원은 1780년의 연행(燕行) 체험으로 견문을 크게 넓힌 바 있다. 열하에 있을 때 중국의 문인들과 만나 고금의 학술과 정치, 예술, 과학 등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조선의 문명을 알리는 데도 진력하였다. 이러한 연행의 체험을 기록한 『열하일기』는 당대 중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북학론(北學論)을 개진한 책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인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배우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중국의 벽돌과 수레의 사용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은 1781년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 서문을 쓰면서,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는 것, 그것이 올바른 학문의 방법이다.”라 선언하고, 순(舜)이나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도 성인이 된 까닭이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남이 말해준 것을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선의 선비들이 편협해서 이용후생의 학문을 싫어함을 비판한 바 있다.

박지원은 책과 견문을 통해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중앙의 정치무대에서는 이를 펼칠 계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 안의는 오늘날 함양과 거창에 걸쳐 있는 조그마한 고을이지만, 현감이 되어 한 구역을 직접 다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경세의 뜻을 작게나마 펼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박지원은 안의에서 이용후생의 정신으로 목민관으로서의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옥사는 관대하게 처리하였고 불쌍한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방을 쌓아 수해를 예방하였거니와, 특히 수차(水車),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을 쏟았다. 물론 중국에 갔을 때 눈여겨 본 것을 여기서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지원은 안의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공작관(孔雀館),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등의 중국건물을 지었다. 왜 이러한 중국식 벽돌 건물을 지었을까? 이때의 일을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안의(安義)는 본래 산수가 빼어난 고을로 일컬어졌다. 심진동(尋眞洞), 원학동(猿鶴洞) 등의 이름난 땅이 있었다. 아버지는 만년에 가난 때문에 벼슬을 하여 고을원이 되었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와 대나무에 무척 만족하셨다. 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였다. 마침내 연못을 파고 아래위로 개울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었다. 은연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았다. 이는 중국의 집 짓는 법을 본뜬 것이었다. 긴 대나무와 무성한 숲은 푸른빛을 띠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집에는 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공작관(孔雀館),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이 그것이다. 아버님은 이들에 대해 각각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문집에 실려 있다.


박종채는 박지원이 풍류를 좋아하여 이들 건물을 지었다고 하였지만, 사실 풍류를 위해서라면 전통적인 건축방식의 목조건물을 지으면 될 것이니, 굳이 벽돌 건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박지원이 지은 중국식 건물은 북학의 상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궁벽한 농촌에는 박지원이 북경에서 열하로 가면서 보았을 듯한 붉은 벽돌로 제작된 농가들이 반듯하게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초가삼간과는 절로 대비가 된다. 박지원은 선진문명을 사람들에게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주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용에 ‘풍류’가 가미되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박지원이 중국식 벽돌집이 실용만이 아니라 풍류의 장으로 꾸미기 위하여 그 이름을 멋있게 붙였다.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공작관(孔雀館),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등의 이름은 중국 문인의 기이한 호나 시에서 딴 것으로 추정된다. <죽오기(竹塢記)>(『연암집』)에 따르면, 박지원이 연암협으로 오갈 때 가끔 머물던 개성의 양씨의 집 편액을 써 줄 때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공작관(孔雀館), 행화춘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畵溪),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을 나열하면서 선택을 하라고 한 바 있다. 실재 개성 양씨의 집에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라는 이름을 준 바 있다. 또 연암협에 살 때의 글을 『엄화계수록(罨畵溪蒐逸)』이라 하였다. ‘주영렴수(晝永簾垂)’는 소강절(邵康節)의 <모춘의 노래(暮春吟)> “깊은 봄 긴긴 낮에 주렴을 드리우니, 정원에는 바람이 없는데도 꽃이 절로 날린다(春深晝永簾垂地, 庭院無風花自飛).”에서, ‘우금운고(雨今雲古)’는 장염(張炎)의 <산중백운사(山中白雲詞)> “비는 지금 내리고 구름은 오래되었는데 다시 촛불을 잡는다(雨今雲古更秉燭).”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두보(杜甫)의 글에서 “묵은 비는 오는데 새비는 오지 않네(舊雨來今雨不來).”라 한 데서 옛벗[舊友]을 구우(舊雨)라 적고 새벗[今友]는 금우(今雨)라 하므로, 새로운 벗에 대한 기대를 표방한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박지원은 이러한 여러 운치 있는 이름 중 하풍죽로당, 연상각, 공작관, 백척오동관 등을 안의에 세운 중국식 건물에 붙였다. 하풍죽로(荷風竹露)는 맹호연의 <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懐辛大)>에서 “연꽃에 바람불어 향기를 보내오고, 대나무에 이슬 맺혀 맑은 소리 울린다(荷風送香氣, 竹露滴清響.)”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홍대용(洪大容)의 「건정동필담속(乾淨衕筆談續)」(『담헌서』)에 실린 육비(陸飛)의 편지에 의하면 <하풍죽로초당도(荷風竹露草堂圖)>가 육비의 집 하풍죽로초당을 그린 것이라 하였으므로, 박지원이 홍대용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집 역시 이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암협에 있을 때 하당과 죽각을 지었다고 하였으니 연꽃과 대나무를 좋아한 것은 틀림없을 듯하다. 또 백척오동(百尺梧桐)은 양거원(楊巨源)의 <최부마에게 주다(贈崔駙馬)> “백 척 오동이 고운 누각과 가지런한데, 피리소리 떨어지는 곳에 푸른 구름 나직하다(百尺梧桐畫閣齊, 簫聲落處翠雲低.)”에서 온 듯하지만, 왕무린(汪懋麟)의 문집이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이니 여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연상각, 공작관 등도 청대 문인의 기이한 호에서 나온 것 같지만, 자세한 연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지원은 옛이름에다 건물의 실재한 모습, 그리고 자신의 뜻을 더하였다. 백척오동관은 정당 서북쪽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중수한 객관이다. 12칸 건물이었지만 마루에 난간이 사라지고 계단에 놓인 돌이 흩어져 있었다. 풀과 넝쿨로 뒤덮여 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박지원은 강가에서 다양한 모양의 돌들을 주어 와서 계단에 쌓고, 앞쪽 기둥을 베어내고 긴 난간을 만들었다. 널따란 뜰을 만들고 못도 팠다. 연꽃을 심고 물고기 새끼를 넣었다. 이에 바람을 쐬고 달빛을 구경할 만한 곳이 된 것이다. 담장 너머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어 높이가 백 척이 넘었는데 그 짙은 그늘이 난간을 덮었다. 이에 그 이름을 백척오동관이라 한 것이다. 이곳에 앉으면 붉은 오동꽃 향기가 퍼져나가고 이따금 백로가 훨훨 날아오기도 하였다. 공작관 역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백척오동 남쪽 마루가 공작관이다. 남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정수리가 호리병처럼 마주하고 있는 것이 하풍죽로당이다. 가운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나무로 담을 만들고 그 가운데 구기자와 해당화, 찔레꽃, 자형화(紫荊花) 등을 심었다. 긴 가지와 부드러운 넝쿨이 촘촘하게 이어져 서로 가리게 되었다. 봄과 여름철이면 병풍이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울타리가 되었다. 병풍이라 여러 종류의 꽃이 어울렸고, 울타리라 쌓인 눈이 어울렸다. 그 틈을 헤아리니 천연의 문으로 삼을 만했지만 사립문을 두지는 않았다. 북쪽 담장을 뚫어 개울물을 끌어들여 북쪽 못으로 흘러들게 하였다. 또 북쪽 못에서 넘쳐나서 그 앞을 지나 굽이 흐르게 되는데 연잎을 따서 술잔을 올리면 둥실둥실 떠서 흘러간다. 이것이 공작관이 집과 같지만 모습이 다른 까닭이라 자리를 옮겨 볼거리를 다르게 한 것이다.

박지원, <공작관기(孔雀館記)>(『연암집』)


박지원은 나이 18-9세 때 꿈에 한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윽하고 텅 빈 집이었는데, 관아나 불당처럼 생겼다. 좌우에 비단으로 덮은 상자와 옥첨(玉籤)으로 꾸민 서첩이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구불구불 지나가니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가운데 몇 척의 푸른 병이 있고 두 개의 푸른 깃이 꽂혀 있었다. 높이는 지붕과 가지런하였다. 한참을 배회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후 박지원이 중국에 들어가서 공작을 세 마리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마리는 학보다 작되 백로보다는 컸다. 꼬리는 2척 몇 자쯤 되고 붉은 정강이는 뱀처럼 허물이 벗겨졌고 검은 부리는 매처럼 구부정하였다. 온 몸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불빛처럼 밝고 금빛처럼 고왔다. 그후 박지원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중국에 갔다가 전당(錢塘)의 문인 조설범(趙雪帆)이 ‘공작관’이라 쓴 글씨를 가지고 왔다. 조설범은 박지원과 일면식이 없었지만 풍문으로 박지원에 대해 듣고 보내준 것이었다. 박지원은 이를 공작관에 붙였다. *근거자료?

박지원의 공작관은 자신의 개성적인 글과 관련이 있다. 박지원은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에서 글쓰기를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한 바 있다. 이명은 남이 들을 수 없는 소리요, 코고는 소리는 자신이 들을 수 없는 법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박지원은 “아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아는 것을 싫어한다. 어찌 다만 코와 귀에만 이같은 병통이 있겠는가? 문장 또한 이보다 심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자신의 처신이나 창작이 남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고 개성대로 하겠다는 뜻을 표방한 것이라 하겠다.

하풍죽로당은 더욱 운치 있는 집이었다. 원래는 오물로 뒤덮인 더러운 곳이었지만, 박지원은 연꽃 향기가 바람에 날리고 대숲에 이슬이 맑은 집으로 바꾸었다.


정당(正堂)의 서쪽 행랑에 있는 버려진 창고가 허물어진 채 마구간과 목욕간에 이어져 있었다. 몇 걸음 너머에 하수와 재가 썩은 흙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어 처마보다 높았다. 온 관아 한복판에 여러 더러운 것이 다 모였다. 봄철 눈이 녹고 바람이 따스해지자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마침내 매일 종들을 시켜 삽과 들것으로 치웠다. 꼬박 열흘이 걸려 빈 땅으로 만들었다. 가로가 25장이 되고 세로가 그 1/3쯤 되었다. 도랑물을 빼고 묵은 풀을 불 베어내었으며 튀어나오거나 우묵한 곳은 평평하게 하였다. 여물통을 다른 곳으로 치우니 땅이 더욱 넓고 시원하였다. 아름다운 나무를 줄지어 심으니 벌레와 쥐들이 멀리 숨었다. 이에 땅을 가운데로 나누어 남쪽에는 남지(南池)를 만들었다. 버려진 창고의 재목을 가지고 북쪽에 북당(北堂)을 지었다. 북당 동쪽으로 가로 기둥 넷을 달고 세로 기둥 셋을 세워 상투처럼 대마루가 모이게 하였다. 호리병 모양으로 지붕을 덮었다. 가운데는 연실(燕室, 居室)로 삼고 동방(洞房, 골방)을 이어 만들었다. 앞쪽에는 왼편에 옆쪽에는 오른편에 높은 마루를 만들었는데 높아서 누각처럼 되었다. 빙 둘러 걸어다닐 수 있는 난간으로 만들고 성글게 밝은 창을 내고 둥그스름하게 풍호(風戶)를 만들었다. 굽은 개울물을 끌어들이니 푸른 병풍을 둘러치고 그림 같이 이끼가 끼었다. 뜰에는 흰 돌을 까니 개울물이 흘러 어리비치었다. 소리를 내면 산간계곡의 개울이 되고 부딪치면 물을 뿜는 폭포가 되어 남지로 흘러들었다. 벽돌을 올려 난간으로 만들어 못둑을 보호하였다. 앞에는 긴 담장을 둘러 바깥뜰과 구획을 지었다. 가운데 각문(角門)을 만들어 정당과 통하게 하였다. 남쪽을 덧대고 꺾어지게 하여 못의 끝자락에 붙게 하였다. 가운데 구름다리를 놓아 연상소각(烟湘小閣)과 통하게 하였다.

대저 건물의 빼어남은 담장에 있다. 어깨 윗부분은 다시 두 개의 기와를 합하여 쓰러질 듯 거꾸로 세우고, 육각형으로 각이 지도록 하고 쌍가락지가 사슬을 이루도록 하였다. 한쪽이 터져 노전(魯錢)처럼도 만들고 잇대어 설전(薛牋)처럼도 만들었다. 구멍이 파인 곳은 영롱하고 깊숙한 곳은 화려하였다. 담장 아래 한 그루 붉은 복사꽃을 심고 못에는 두 그루 오래된 살구나무를 심었다. 누 앞에는 배꽃 한 그루를 심고 당 뒤에는 만 그루 푸른 대나무를 심었다. 못에는 천 그루 연꽃을 심고 뜰 가운데는 파초 열한 그루를 심었다. 밭에는 인삼 아홉 그루를 심고 화분에는 설중매 한 그루를 심었다. 이 집을 나서지 않아도 사시사철의 경관이 다 구비되어 있다. 정원을 거니노라면 만 그루 대나무가 구슬을 엮어놓은 듯한 것은 맑은 이슬 내린 새벽의 일이요, 난간에 기대어 천 그루 연꽃이 향기를 보내는 것은 햇살이 비치는 아침의 일이요, 속이 답답하고 마음이 어지러우며 두건이 축 처지고 눈꺼풀이 묵직해질 때 파초 소리를 듣고 정신이 문득 맑아지는 것은 한낮 통쾌하게 비가 내릴 때의 일이요, 아름다운 손님과 누각에 올라 고운 나무가 깨끗함을 다투는 것은 ㅎ밝은 달이 뜨는 저녁의 일이요, 주인이 휘장을 내리고 매화와 함께 수척한 것은 살짝 눈이 내린 새벽의 일이다. 이것이 또한 때를 따라 사물에 흥을 깃들이는 것이니, 하루에 각기 그 빼어남을 차지할 수 있다.

박지원,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연암집』)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으면서 중국풍의 신식 건물을 짓고 살았다. 호리병 모양의 지붕을 씌운 것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담장을 특이하게 만들었다. 마름모와 유사한 육각형 문양이나 사슬 형태의 고리 문양을 담장에 넣는 것이 그러하거니와, 각문(角門)이나 홍교(虹橋)를 만든 것 역시 중국풍이다. 게다가 박지원은 하풍죽로당에서 안의에 살았던 임훈(林薰)과 노진(盧禛)이 주자(朱子)의 평상복을 본떠 만든 흰 옷에 감은 가선을 두른 옷을 입고 살았다. *근거자료? 이와 함께 안의의 선배 문인인 정온(鄭蘊)이 병자호란 후 낙향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총각머리인 쌍쌍투를 틀게 하였는데, 박지원 역시 이를 배워 아이들로 하여금 쌍쌍투를 틀게 하였다. 옛 제도를 따른다고 표방하였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함양군수로 있던 윤광석(尹光碩)이 이를 두고, 박지원의 선정을 시기하여 박지원이 오랑캐 옷을 입고 백성들을 다스린다고 서울에까지 소문을 내었다. *근거자료? 유한준(兪漢雋)은, 박지원이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지 않자 박지원과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열하일기』가 오랑캐 연호를 쓴 글이라 비난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할 때 『열하일기』가 문체를 변화시킨 장본임을 지적하고 남공철(南公轍)을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자송서(自訟書)를 지을 것을 명하였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대목에서 청언소품(淸言小品)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정조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러한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풍류를 즐겼다. 1793년 박지원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고사를 본떠 처남 이재성(李在誠), 사위 이종목(李鍾穆), 이겸수(李謙秀) 등과 술을 마시며 글을 지었다.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이 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계공 이재성과 김기무(金箕懋), 큰 사위 이종목(李鍾穆), 작은사위 이겸수(李謙秀)를 초대하여 물가에서 술을 마시며 글을 짓는 자리를 가졌다. 계축년(1793) 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술자리를 마련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다. 세상사람들은 당시 아버님이 지은 시를 외워 전했으며 그 모임을 멋진 일로 생각했다. 지계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화림(花林)에 도착해서 40일 동안 하풍죽로당에 거처했소. 당시 풍년이 든 데다 관아에 일이 없어 한가했소. 사또께서 일찍 공무를 끝낸 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객관으로 찾아왔다오. 그곳에는 예스러운 거문고와 운치 있는 술동이, 잘 정리된 책, 아담한 칼이 놓여 있었소. 그 곁에는 종종 시에 능한 승려와 이름난 기생이 있었소.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지요. 당시의 즐거움은 백 년 인생과 맞바꿀 만했소. 내가 훗날 화림과 같은 아름다운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암과 같은 손님은 얻을 수 있겠소?”

그 때 온 사람들 중 이희경과 윤인태(尹仁泰)는 아버님 문하에 출입하던 선비였고, 한석호, 양상희 등 여러 사람은 모두 연암골에 계실 때의 문하생이었다. 아버님께서 때때로 별관에다 기악(妓樂)을 베풀었다. 아버님께서는 반드시 먼저 돌아오시고 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놀게 하였다. 지계공은 안의에 세 차례 오셨다.   

박종채,『과정록』


박지원은 풍악을 좋아하여 서울에 살 때에도 김억(金檍) 등의 악공을 불러 연주를 하게 하였는데, 홍대용이 죽은 후 지음(知音)이 없다 하여 악기조차 남들에게 주어버린 바 있다. 그러다가 안의로 와서 아름다운 산수를 보고 다시 풍악을 즐겼다. 장악원(掌樂院)에서 은퇴한 악공을 불러 보수를 주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이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에 당시 의의 음악이 경상도에서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지원이 안의에서 풍류만 즐긴 것은 아니다. 박지원은 위에서 인용하지 않은 <하풍죽로당기>의 마막 대목에서, “그러나 저 백성들이 여기에 함께 할 수 없으니, 이 어찌 태수가 집을 지은 뜻이겠는가? 아, 훗날 이 집에 머무는 자는 연꽃이 아침에 피어나 못을 뒤덮고 있는 것이 넓어지는 것을 보면, 바람이 따스한 것처럼 하고, 대나무가 새벽에 촉촉하게 두루 젖어있는 것을 보면 이슬이 담뿍 내린 듯이 하라. 이것이 내가 이 집에 이름한 까닭으로, 뒷사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게다가 청렴하기까지 하였다. 박지원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책 5-6백 권, 붓과 벼루, 향로, 다기 등 4-5바리의 짐밖에 없었다 하니 그 청렴함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이러한 박지원을 두고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도 한 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 데 급급할 것이라 여겼더니,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친구를 불러 모은다 하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는 어렵다. 또 들으니 고을원으로서의 치적 또한 매우 훌륭하다 하는구나.” 하였다. *근거자료?


박규수가 그림으로 전한 연암의 자취

박지원은 1796년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군직(軍職)을 받아 상경하여 제생동(濟生洞))으로 돌아왔다. 제생동의 집은 1788년 마련한 것으로, 종제인 박수원의 소유였는데 그가 선산부사로 나감에 따라 집이 비게 되어 그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제생동은 창덕궁 서쪽, 오늘날의 계동인데, 계동(桂洞), 계산동(桂山洞), 계생동(桂生洞) 등으로도 불렸다. 현대그룹 본사와 중앙고등학교 인근이다. 당시 이곳은 과수원이었는데, 박지원은 1796년 이곳에 집을 하나 더 지었다. 가마에서 굽지 않고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서쪽에 다락을 얹은 건물을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계산서숙(叢桂書塾)이라 하였다. 그래서 박지원이 죽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1824년 한 거지가 계산서숙에 와서 보고 안의의 관아에 있는 정자와 똑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제생동의 집 역시 중국식 벽돌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지원의 본가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재동(齋洞)에 있었는데 곧 오늘날 헌법재판소 인근으로, 아름다운 백송(白松)이 서 있다.

그러나 계동과 재동의 서울집에서 박지원은 오래 살지 못하였다.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령(懿陵令)을 지내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로 나가면서 이 집은 남들에게 맡겨졌다. 박지원은 면천에서도 안의에서처럼 실학자적 면모를 유지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798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교서에 응해 지어 올린 <과농소초(課農小抄)>가 이 때의 것이기도 하다. 또 버려진 땅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하였다. 향교 앞에 버려진 언월지(偃月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박지원은 백성들을 모아 연못을 준설하고 개울물을 끌어 들인 다음,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6각 초당을 만들었는데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이름하였다. 두보(杜甫)의 <늦봄 양서의 새로 빌린 초가에 쓰다(暮春題瀼西新賃草屋)>에서 가져온 구절이지만, 벗 홍대용이 고향에 건곤일초정주인(乾坤一草亭主人)을 자처하였으니, 벗과의 옛 일을 떠올린 것이기도 하다. 

그 후 박지원은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왔다. 목민관으로서 한계를 인식했다. 당시 양양의 천후산(天吼山) 신흥사(神興寺)의 승려가 궁속(宮屬)들과 결탁하여 역대 임금의 필적을 봉안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침탈하였는데, 박지원이 이를 막으려 감사에게 보고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병을 핑계대 물러나 버린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1802년 문생 이광현(李光顯)과 함께 다시 젊은 날의 추억이 서린 연암협으로 들어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그해 겨울 부친의 묘를 포천(抱川)으로 이장하려다 유한준(兪漢雋)과 산송(山訟)이 생기자 양주(楊州) 성곡(星谷)으로 이장하였다. 이로 인해 병이 위중했고, 말년에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다가 1805년 10월 20일 제생동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12월 5일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부친을 빛내기 위하여 『연암집』과 『과정록』을 편찬하였으며, 손자 박규수는 조부를 빛내기 위하여 조부가 살던 곳을 그림으로 그려두었다. 연암협의 모습은 정철조가 그렸음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박규수는 정철조의 그림을 칭송하였지만 자신의 붓으로도 연암협을 그려두었다. 박규수의 벗 신석우(申錫愚)는 1844년 박규수가 직접 그린 <연암산거도(燕巖山居圖)>에 발문을 쓴 바 있다. 신석우는 박지원을 무척 좋아하여 박지원을 대신하여 <연암기(燕巖記)>를 제작하였는데 『연암집』에 산견되는 연암협에 대한 박지원을 글을 엮어 만든 독특한 것이다. <연암산거도발(燕巖山居圖跋)>(『海藏集』 권12)에는 이 기문이 실려 있다.


나는 일찍이 연암(원문에는 朴燕巖이라 되어 있으나 ‘朴’은 衍文이다)을 사모하여 화장산(華藏山) 속에 집을 정하여 늙어 죽을 계획을 하였다. 처음 집터를 볼 때 산이 깊고 길이 막혀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갈대밭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구획 지으면서 말하였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곡식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쇠를 쳐서 불을 놓으니 바람에 불이 번졌다. 꿩이 소리 내어 울면서 놀라 날아오르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나 숨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쫓았지만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그 깎아지른 절벽과 나뭇단을 세워놓은 듯한 협곡에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여 처음에는 길이 없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산자락이 모두 감추어지고 갑자기 면세가 바뀌었다. 언덕이 평평해지고 기슭이 예쁘장하며, 흙이 희고 모래가 밝아, 훤하게 트여 있다. 남쪽으로 집을 얽어매었다. 앞쪽 왼편으로 푸른 절벽이 깎은 듯 서 있어 그림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갈리진 바위틈이 입을 벌리고 있어 절로 집 모양처럼 되어 있는데 그 안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암이다. 집 앞 백여 보에 평평한 둔대와 굽은 개울이 있는데 그 아래가 조대(釣臺)다. 개울을 따라 흰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먹줄을 쳐서 잘라놓은 듯하다. 어떤 곳은 평평한 호수가 되고 어떤 곳은 맑은 못이 되는데, 매번 서산의 석양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바위 위에까지 어린다. 이곳이 엄화계(罨畫谿)다. 손수 가시덤불을 베고 나무에 붙여서 지붕을 이었다. 담장 둘레로 천 그루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었다. 3무(畝)의 못에는 한 말의 새끼 물고기를 풀었다. 바위벼랑에는 백 통의 벌을 치고 울타리 사이에는 소 세 마리를 묶어두었다.


신석우는 박지원이 백동수, 홍대용, 형수를 위해 쓴 글을 엮어 이렇게 기문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신석우는 박규수의 <연암산거도>와 자신이 엮어 놓은 박지원의 글을 비교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산이 겹겹이고 물이 이어지는데 풀과 갈대가 울창한 것은 선생이 말을 세우고 노루를 쫓았다고 한 것이겠지. 꽃이 곱고 버들이 무성한데 담과 지붕이 들쑥날쑥한 것은 선생이 나무를 심고 과일나무를 기르는 땅이라 한 것이리라.  파란 논과 푸른 밭의 어린 나락과 여린 뽕나무는 선생의 경륜을 시험해본 것이다. 휘도는 못과 고인 호수에 비단같이 빛나는 개울, 울긋불긋 벼랑에 소나무 그림자가 바위를 쓸고 있는 것은 선생이 밤낮으로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면서 배회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사각의 처마를 단 둥근 정자, 이중으로 된 전각과 긴 회랑, 뚫어서 창을 내고 아자(亞字)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수차의 바퀴에 물이 튀기고 우물에 도르래로 물을 긷는 것은, 또한 산속의 집에 마땅히 있는 것이지만 채 만들지 못한 것인데, 환경(瓛卿, 박규수)이 마음속으로 만들어 보충한 것이다.        

신석우, <연암산거도발(燕巖山居圖跋)>(『海藏集』)


박규수는 조부가 살던 연암협의 실경에다, 조부가 감탄한 청나라 벽돌집을 그리고, 수차와 도르래 등을 이용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는 농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박규수는 정철조의 그림을 극구 칭송하였지만, 은자로서가 아닌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새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박규수는 조부가 세운 안의의 중국식 건물에 대한 그림도 그린 바 있다. 1856년 신석우는 박규수가 그린 하풍죽로당의 그림을 보고 안의 관아를 찾아갔다. 그리고 박지원의 기문과 박규수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하풍죽로당 등 박지원이 세운 건물에 대한 답사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고을로 들어가니 고을원 김재현(金在顯, 德夫)이 광풍루(光風樓)에 내 숙소를 잡아주었다. 광풍루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창건한 것으로 탁 트여 훤하였다. 앞에 큰 하천을 임하고 있고 하천 남쪽에 느티나무와 버들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았는데 들판이 광활하였다. 마침 단비가 내려 보리가 새파란 빛을 띠었다. 한밤이 되자 베갯가에 여울의 물소리가 비로소 커졌다. 아침에 고을의 재사(齋舍)로 들어가 연암의 옛 자취를 물었다. 연상각은 재사 남쪽의 작은 정자로 곁에는 못이 있었지만 못은 마르고 섬만 있었다. 하풍죽로당은 못 북쪽의 건물인데 그 제도가 환경(瓛卿)이 그려서 보여준 것과 똑 같았다. 공작관은 하풍죽로당 북쪽의 관사인데, 아마 관아에 예전부터 있던 재사에 편액을 걸어둔 듯하다. 마루에는 공작관이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방에는 하풍죽로당이라는 편액을 또 걸어두었다. 내가 그 편액을 떼서 돌아가 정자를 하나 짓고 걸려 하였다. 문 옆에 작은 집이 있는데, 둥근 창이 반쯤 드러나게 벽돌로 쌓고, 바람이 들어오도록 기와로 노전(魯錢) 문양으로 세워놓은 것이 통인청(通印廳)이다. 나는 이곳이 반드시 관자오륙동자육칠당(冠者五六童子六七堂)일 것이라 하였다. 오동각은 객사의 협실(夾室)에 이 이름을 걸어놓았지만 고을원이 모르는 것인 듯하다. 뜰의 오동나무를 가리키면서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고 하였다. 뜰에는 붉은 살구와 흰 매화, 대숲이 있었다. 공작관 북쪽에도 대숲과 가지가 천 개 달린 소나무가 있었다.

신석우, <안의현치기(安義縣治記)>(『海藏集』)


박지원이 안의를 떠난 후 한 갑자 겨우 지난 시간에 이미 안의 관아에 박지원이 세운 건물은 잊혀졌다. 고을원조차 박지원이 이름붙인 건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논어』에서 공자(孔子)도 함께 하고자 한, 증점(曾點)의 풍류를 박지원이 과시하려 ‘관자오륙동자육칠당’이라는 긴 이름의 건물을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박지원의 글에 이것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니 신석우가 찾아간 때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에 안의 관아터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박지원이 남긴 글은 고전 중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지만, 그가 살던 자취는 어디에서 찾을 수 없다. 중국풍으로 만들었던 안의현 관아의 여러 건물이나 제생동 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시기조차 말해주는 데가 없다. 한국 역대 최고의 문인으로 내세울 만한 박지원이건만, 그의 자취를 더듬을 곳이 이 땅에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가원 선생의 『연암소설연구』 앞에 실린 화보에 실은 희미한 연암협의 그림이 있지만 그조차 이제 찾기가 쉽지 않다. 박규수가 그린 연암협과 안의현의 그림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할 뿐이다.

 

제1장 젊은 날의 고민과 연암협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서소문 바깥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1767년 삼청동(三淸洞) 백련봉(白蓮峯) 아래 이장오(李章吾)의 별장에 세 들어 살았고 1768년 백탑 인근으로 이사하였으며, 1772년에는 백탑의 서쪽 전의감동(典醫監洞)의 집에서 살았다. 탑골에는 이 무렵 이서구(李書九), 이덕무(李德懋),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 재주 있는 후배들이 있어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史記)』를 배우고, 이윤영(李胤永)에게 『주역(周易)』을 배웠으며,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상당한 학문이 이루어졌겠지만, 성균관시(成均館試)에는 여러 차례 실패하였다. 이후 스물다섯 살 때 북한산(北漢山)의 암자에서 독서하였고 드디어 1770년 감시(監試)에 장원을 차지하였다.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시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권(試券)을 제출하지 않았다.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에 따르면 과거시험을 치를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이가 합격시키려 하였으나 박지원은 그 때마다 응시하지 않거나 답지를 제출하지 않았고, 한 번은 과거답지에 고송(古松)과 괴석(怪石)을 그려, 과거에 뜻이 없음을 보였다고 한다. 

박지원이 과거 대신 뜻을 둔 것은 산수 유람이었다. 1756년 유언호(兪彦鎬)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였거니와, 1771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이덕무, 이서구 등과 송도(松都) 유람을 나섰다. 이때 연암골을 발견하고 은거하기를 기약하여 ‘연암(燕巖)’이라 자호하였다. 『과정록』에 따르면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딸려 있는데 개성에서 30리 떨어져 있는데, 이색(李穡), 이제현(李齊賢) 등이 살았지만 그 후에는 황폐해져서 사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박지원이 처음 연암골을 대면하였을 때의 기록이다. 


영숙(永叔, 白東修의 字)이 일찍이 나를 위해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집을 잡아준 일이 있었다. 산이 깊고 길이 막혀 종일을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함께 더불어 갈대밭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구획 지으면서 말하였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곡식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쇠를 쳐서 불을 놓으니 바람에 불이 번졌다. 꿩이 소리 내어 울면서 놀라 날아오르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나 숨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쫓다가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서로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백년도 못되는 인생이 어찌 답답하게 목석처럼 살면서, 낱알을 주어먹고 사는 꿩이나 토끼처럼 살 수 있겠는가?”

박지원, <기린협으로 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글(贈白永叔入麒麟峽序)>(ꡔ燕巖集ꡕ)


연암협은 짐승이 살 곳이지 사람이 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1778년 가족을 이끌고 연암협으로 들어가야 했다. 박지원보다 아홉 살 연상이었지만 평생의 벗이었던 유언호는 박지원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洪國榮)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 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서 늦추어온 것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과정록』). 벗 백동수 역시 그의 도피를 권하였다. 이에 가족을 거느리고 연암으로 은거하게 된 것이다.

박지원이 연암으로 들어오자 유언호도 개성유수를 자청하여 왔다. 그리고 박지원을 찾아 연암협으로 와서 “산수는 퍽 아름답네만, 흰 돌을 삶아먹을 수야 없지 않은가?” 하고 개성으로 들어와 살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박지원은 양호맹(梁浩孟)의 별서를 구하여 거처하게 되었다. 29살 때 유언호와 함께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이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하니, 그 인연이 오래된 것이라 하겠다. 양호맹의 별서는 금학동(琴鶴洞)에 있었고 그 집의 이름을 만휴당(晩休堂)이라 하였는데, 박지원이 기문을 지어준바 있다. 박지원은 유언호와 만휴당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 지은 시문을 평가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거니와, 이때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유언호가 몰래 장만해 준 것이었다.

박지원은 1778년 여름 유언호가 개성유수를 마치고 이조참판으로 복귀하자 다시 연암협으로 돌아가 살았다. 유언호를 박지원을 위하여 칙수전(勅需錢) 천 냥을 내어주었다. 칙수전은 중국 사신 접대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에 빚을 놓던 돈인데, 유언호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자신이 갚기로 하고 돈을 준 것이다. 양호맹과 함께 박지원을 따르던 진관(崔鎭觀) 등이 이 돈을 갚아주었으니, 박지원은 인복이 있다 하겠다. 물론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나갔을 때 그 돈을 갚았으니 도리를 다 한 것이다. 양호맹은 이러한 일에 탄복하여 석벽에다 이 사실을 새겨놓고 계를 만들어 봄가을의 명절에 노닐곤 하였다. 박지원은 연암협의 생활을 벗 홍대용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아우가 언덕 하나 골짜기 하나를 경영한지 이제 9년이나 오래되었습니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그저 양 주먹을 부질없이 꽉 쥐었지만, 마음만 수고롭고 재주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무슨 성취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자갈 밭 몇 뙤기에 초가삼간을 지어놓았을 뿐입니다. 매달린 듯 좁은 협곡에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처음에는 길도 없었습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산기슭이 모두 숨겨져 있더니 갑자기 면세가 바뀌어 언덕이 평평해지고 기슭이 예쁘장하였으며, 흙이 희고 모래가 밝아 훤하게 트여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집을 얽어매었는데, 그 얽어맨 것이 매우 작지만 어정거리면서 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앞쪽 왼편으로 푸른 절벽이 깎은 듯 서 있어 그림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데, 바위틈이 입을 벌리고 절로 집 모양을 형성하고 있어 그 안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연암입니다. 집 앞 백여 보에 평평한 대가 있어 모두 층층 바위가 포개어져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아래 개울이 굽어 도는 곳이 조대(釣臺)입니다. 개울을 따라 흰 바위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먹줄을 쳐서 잘라놓은 듯합니다. 어떤 곳은 평평한 호수가 되고 어떤 곳은 맑은 소가 됩니다. 노니는 물고기들이 매우 많습니다. 서산의 석양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바위 위에까지 어립니다. 이곳이 엄화계(罨畫谿)입니다. 산이 돌아들고 물길이 겹쳐지는데 사방으로 마을과는 끊어져 있습니다. 대로로 나가자면 7-8리를 가야 비로소 닭이나 개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작년 가을 이 때문에 모여서 호구를 이룬 것이 불과 서너 집이었고, 모두 누더기에 귀신 얼굴을 하고 소란스럽게 떠들면서 오로지 숯 굽는 일만 하고 농사는 짓지 않습니다. 개울가나 골짜기의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범이나 승냥이와 이웃해 있고 다람쥐와 벗을 삼습니다. 그 험하고 외딴 것이 이와 같지만, 마음으로 이곳을 좋아하여 이것과 바꿀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미 형수를 집 뒤에 장사 지낸 뒤 다시 옮길 수 없는 땅이라 여겨, 초가로 지붕을 이고 소나무로 처마를 대어 겨울이면 구들을 놓아 따스하게 하고 여름이면 마루를 갈아 시원하게 하였습니다. 좁쌀과 보리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살쪄 있으니, 한 줌에 한 광주리가 됩니다.          박지원, <홍덕보에게 답하는 편지(答洪德保書)>(『연암집』)


엄화계(罨畫谿)는 박지원이 이름한 계곡이다. 박지원의 문집을 이루는 하나가 『엄화계수록(罨畵溪蒐逸)』인데, ‘엄화(罨畵)’라는 말은 채색이 아름다운 그림을 이르는 말이다. 소동파의 <차운장영숙(次韻蔣頴叔)>이라는 시에 “옥돌로 된 숲의 화초에는 두런거리는 말소리 들리는데, 그림을 덮은 듯한 개울과 산은 뒷날의 기약으로 가리킨다(瓊林花草聞前語, 罨畫谿山指後期).”라 한 데서 용례가 보인다. 그 주석에 따르면 유상은(劉商隱)이 의흥(義興)의 엄화계(罨畫溪)를 좋아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곧 엄화계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연암협의 집 이름은 고반정(考槃亭)이라 하였다. 『시경(詩經)』 “은둔할 집이 언덕에 있으니, 뛰어난 분이 쉬는 곳이네. 홀로 자고 깨어 노래하나니, 영원히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리(考槃在阿, 碩人之薖. 獨寐寤歌, 永矢弗過).”에서 따온 말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고반재아(考槃在阿)’를 “반(槃)은 반(磐)과 통해 쓰는 글자이다. 앉아 놀 만한 반석이란 것인데, 세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반석 위를 다니면서 마음대로 논다는 뜻이다. 고(考)는 무릎을 손으로 치고 노래하면서 마음을 스스로 너그럽게 한다는 뜻이다.”라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 말을 희학적으로 사용하였다. 어주빈(魚周濱)이 박지원에게 보낸 편지에는 박지원의 말이 실려 있다.


나의 고반(考槃)은 이와 『시경』에서 이른 고반과 다르다오. 왜 그런가 하면 이렇소. 꽁보리밥을 흰 사발에 담아 서양금(西洋琴) 위에 올려놓으면 서양금이 쟁반이 되지요. 내가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드리니, 이것이 고반이라 할 만하다오. 이에 내 정자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라오. 당신을 이를 아시는가?  

어주빈, <박미중에게 보내는 편지(與朴美仲)> (『弄丸堂』)


곧 고반(考槃)을 고반(叩盤)으로 풀이하여 서양금을 쟁반으로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드린다고 하였다. 은자의 거처라는 뜻을 살리면서도, 자신의 풍류를 더하였던 것이다. 박지원은 연암협 개울가 벼랑에 고반정을 세운 외에도 하당(荷堂)과 죽각(竹閣)이라 이름붙인 건물을 못 북쪽에 세웠다. 손자 박규수(朴圭壽)의 <이호산장도가(梨湖山莊圖歌)>(『莊菴詩集』 성균관대대동문화원에서 간행한 『瓛齋叢書』에 수록되어 있다)에 “우리집에도 산장도가 있으니, 조부 연암선생께서 지은 곳이라네. 고반정이 물가의 벼랑에 임해 있고, 하당과 죽각이 못 북쪽에 있었지. 단청을 하지 않아도 산골짜기가 훤하였으니, 정석치 공이 이를 그림으로 그렸다네(我家亦有山莊圖, 皇考燕巖先生之所築. 考槃之亭臨礀崖, 荷堂竹閣在池北. 雖不丹雘燦山谷, 鄭公石痴爲之圖).”라 하였으니, 박지원이 벗 정철조(鄭喆祚)로 하여금 자신의 연암협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연암협을 가꾸고 박지원은 그곳에서 상당한 저술을 하였다. 『과정록』에 따르면 매번 시냇가의 바위에 앉아 나직이 글을 읊조리고 천천히 산보하다가 갑자기 멍하니 모든 것을 잊은 듯이 행동하기도 하고, 때때로 묘한 생각이 떠오르면 붓을 들어 잔 글씨로 써둔 것이 상자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훗날 박지원을 이를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연안협을 떠난 후 10여 년 벼슬을 살다가 다시 연암협으로 들어가 이 메모쪽지를 찾았지만, 눈이 어두워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박지원은 “안타깝다. 벼슬살이 10여 년에 좋은 책 하나를 잃어버렸구나.”라 탄식하고 시냇물에 세초(洗草)해버렸다고 한다.

박지원에게서 연암협은 은둔과 자조의 땅이면서, 통곡의 장이기도 하였다. 박지원에게 어머니같은 형수 이씨가 박지원이 연암협으로 들어오던 그 무렵 세상을 떠났다. 박지원은 형수와의 일화를 영화처럼 그 묘지명에서 재현하고 있다.


지원이 새로 화장산(華藏山) 연암동(燕巖洞)에 새로 집을 정하였을 때 그 산수를 사랑하여 손수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나무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다. 공인(恭人) 백수(伯嫂)를 대하여 말하였다. “제 백씨가 늙었습니다. 마땅히 아우와 함께 은거를 해야겠지요. 담장 둘레 천 그루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에 천 그루 밤나무를 심으며, 문 앞에 천 그루 배나무를 접을 붙이며, 개울에는 천 그루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겠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못을 파고 한 말 물고기 새끼를 풀겠습니다. 바위벼랑에는 백 통의 벌을 치고 울타리 사이에는 소 세 마리를 묶어두겠습니다. 처는 길쌈을 하고 형수님은 그저 여종을 감독하여 기름을 짜시지요. 밤에 시숙이 고인의 책을 읽도록 도와주시지요.”

이때 공인께서는 질병이 심하였지만 당신도 모르게 넘어질 듯 일어나서 머리를 잡고서 한 바탕 웃고 사례하였다. “이는 내가 예전부터 가졌던 뜻인지라, 이 때문에 밤낮으로 바랐던 것이지요. 함께 올 사람이 매우 많겠지요.”

벼가 익지 않아 공인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마침내 널에 실려 돌아왔으니 그 해 9월 10일이었다. 집 뒤쪽 동산 해좌(亥坐)의 혈(穴)에 장사를 지냈으니, 공인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박지원, <공인 백수 이씨의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연암집』)       


형님 내외를 모시고 농부로서 살겠다는 뜻을 말하였고, 이에 형수는 아픈 머리를 감싸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놓고 채 가을이 되기 전에 이승을 떠났다. 박지원은 형수가 꿈꾸던 연암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라도 누리라고 집 뒤쪽 동산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