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의 월명총月明塚 기우제


 

거칠어진 월명총에서 유래를 설명하고

왼쪽에서 두 번째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 백원철 교수와

세 번째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김윤수

 

 연민 이가원 선생이《조선문학사》에서 원문을 소개한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시를 살펴본다.《태촌집》제 1권에 칠언 절구 <월명총>과 <만덕총>이 실려 있는데 상호 반대되는 소재를 대비하여 지은 작품이다. <만덕총>은 뒤에 고찰하기로 하고 먼저 <월명총>을 본다.

 

금석정심마불린 金石貞心磨不린 금석같이 곧은 마음 갈아도 닳지 않고

곡수이척사동분 穀誰貽戚死同墳 낭군이 근심 끼쳤으나 무덤은 같이 썼네

능교만고부윤기 能敎萬古扶倫紀 능히 만세에 윤리를 세우게 하였고

우향삼농작우운 又向三農作雨雲 또 농사철에는 비가 되어 내렸네

 

태촌 원주 :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남편을 생각하다 병사하여 산꼭대기에 장사하였다. 가뭄이 드는 해에는 그 무덤의 흙을 무너뜨리면 비가 내린다."

이 시의 뜻을 살펴보면 월명의 정심貞心을 단단한 금석에 비유하고 승구承句는 살아 헤어졌지만 죽어서 한 무덤에 있게 된 사연을 묘사하고 전구轉句는 월명의 정열貞烈이 만고에 윤리의 귀감이 됨을 강조하였고 결구結句는 함양지역의 우신雨神이 된 새로운 양상을 표현하였다.

결구結句는 함양의 기우제 민속에 월명이 자리한,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는 역사 자료이다. 월명을 읖은 최초의 시인 점필재는 가뭄이 들면 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용유담龍游潭의 성모묘聖母廟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하였는데 조선 후기 태촌 시대에는 월명이 영험 있는 비의 신이 되어 있었으니, 전승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무덤의 흙을 훼손해야 비가 내리니, 계속 훼손하면 무덤은 사라질 것인바 어떻게 기우제를 지낼 수 있겠는가. 훼손하기 위해선 복구해야 하리니, 무덤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과 보수 유지를 위한 영적 작용일 것이리라.

태촌은 선조 34년(1601)에서 37년(1604)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하여 보고 듣고 체험하고 관심을 기울여 시로 읊고 수필로 기록을 남겼다.《태촌집》제 5권에 있는《효빈잡록 效嚬雜錄》하〈여화餘話〉에 더 자세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이 망부석을 읊은 시에 '산머리에 날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니 행인이 돌아오면 돌이 응당 말을 하리.' 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자가 '망부석에는 저녁마다 바람 불지 않으면 비가 온다. 시의 뜻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령天嶺(함양의 고호)에 부임하고서 두 번씩이나 월명총을 무너뜨리고 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옛사람의 시는 대개 허경虛境이 없음을 알았다. 월명은 사근역 여인이다. 서울 장사치에게 시집가기로 하고 혼례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장사치는 이익을 위해 상경하였다. 여인은 남편을 생각하여 마지않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병이 이미 위중해진 뒤 그 남편에게 편지하니 남편이 듣고서 배를 품고 천리길을 달려 내려왔다. 도착되기 전에 여인은 병이 위독해졌다. 임종시에 그 부모에게 부탁하기를 '서산의 꼭대기에 나를 묻어 주세요. 죽어서도 의식이 있다면 남편이 돌아오는 길을 바라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모가 불쌍히 여겨서 그 말대로 장사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 장사치가 비로소 왔는데 또한 애달파하더니 죽었다. 같은 무덤에 장사하였다. 장사지낸 뒤에 배나무가 무덤위에 생겨났으니 곧 가슴에 품고 온 배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는 늙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함양군에 있은 지 모두 4년이었는데 두 번이나 가뭄이 들었다. 원로들이 월명총을 파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이른 바 판다는 것도 다 파는 것이 아니라 그 흙덩이 10여 개를 무너뜨리는 정도이다. 두 해에 흙을 팠더니 다 단비가 내렸다. 그렇다면 망부석의 비바람도 괴이한 것이 없겠다. 어떤이가 묻기를 '그렇다면 월명총은 어찌 날마다 비바람이 없는가.' 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망부산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월명의 남편은 죽어서 무덤을 같이 하였으니 원한에 있어서도 깊얕이가 있다. 비바람이 어찌 항상 있겠는가' 고 하였다. 어떤이가 위하여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이하 칠언절구 1수는 같은 것이므로 생략함.)

  선조 36년(1603) 경의 함양군수 태촌 시대와 성종 4년(1473) 경의 함양군수 점필재 시대는 140년의 격차가 나는데 설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상세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점필재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월명총 기사와 비교하여 현저히 다르고 새로이 첨가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동경상인東京商人이 경상京商으로 단순화되었고 둘째, 단순히 좋아하고 머문 것에서 정식 혼례를 치른 것으로 변모되었고 셋째, 장사치가 제발로 온 것에서 편지를 받고 온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넷째, 월명이 죽으면서 부탁한 유언이 기록되었고 다섯째, 남편이 돌아올 때 배를 갖고 왔고 그것이 묻히어 무덤에 배나무가 자라났으며 여섯째, 월명총의 흙을 조금 훼손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과 영험이 생긴 것이다.

기록이란 시대가 흘러갈수록 증가되는 경우도 있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월명 이야기의 기록이 증가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남녀간의 애정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김윤수.월명총과 만덕총.함양문학7.

 

뢰谿集卷之二
 七言小詩
咸陽灆㵢竹枝曲十絶 


學士樓頭明月輝。儒仙一去鶴仍歸。鷄林黃葉千年後。誰認當時丁令威。
015_108c城南城北鬧鷄豚。賽罷田神穀雨昏。太守遊春勤勸課。肩輿時入杏花村。
十里柔桑綠漲林。淸明時節已成陰。隔牕夢覺間關鳥。唱得蠕蠕百箔蠶。
秋風一郡烏椑樹。滿眼霜紅似醉鄕。百歲生涯眞樂土。家家不解子孫忙。
沙斤城畔起陰雲。坤靈夜泣雨紛紛。庚申萬鬼啾啾哭。似恨當時張使君。
頭流山上起霱雲。神母霏霏絳彩旂。肅莫椒菜簫鼓沸。顧憑杯珓卜靈威。
015_108d月明塚上但明月。寒食年年宿草多。昨夜遊魂瓊佩冷。東風吹盡杜鵑花。
拋雲鬒髮竝金鈿。愁向梅花意共傳。脈脈蘭心君未會。小孤臺畔水如天。
嬰年總角拜江神。暗禱休爲薄命人。十藏仳離緣最惡。每將釵釧卜郞身。
挾彈郞君白玉膚。雲情不慣拒招呼。殷勤密符黃金贈。奈此羅浮自有夫。

 

泰村先生文集卷之一
 
月明塚月明。沙斤驛女也。念夫病死。葬于山頂。歲旱。隳其塚土則雨。 


金石貞心磨不磷。穀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泰村先生文集卷之一
 
萬德塚萬德。亦驛女也。九嫁九孀。好事者連塋而葬。萬德死。又葬九塚之下。在月明塚下。 


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059_221a在。地下千秋愧月明。

 

泰村先生文集卷之五
 效嚬雜記
餘話

[月明塚]
古人詠望夫石詩曰。山頭日日風和雨。行人歸來石應語。釋之者曰。望夫山每夕不風則雨。詩意指此也。059_270d余初未之信也。及宰天嶺。再隳月明塚得雨。然後始知古人之詩。蓋無虛境也。月明者。沙斤驛女也。許嫁京商。結髪未久。商重利上洛。女念夫不已。專廢餔歠。病已危重。折簡厥夫。夫聞之。懐梨跋涉而下。未到已女疾革矣。將死囑其父母曰。葬我於西山絶頂。歿而有知。當望夫婿歸路也。父母憐之。葬如其言。葬之日。商始來。亦傷悼而死。同墳而葬。葬後有梨生于塚上。即所懐梨也。歲久樹老。今不存焉。余在郡凡四載。再遭旱暵。父老曰。掘月明塚則雨。所謂掘者。非盡掘也。不過隳其土十餘塊而已。兩年掘土。皆得甘雨。則望059_271a夫山之風雨。無足怪也。或曰。然則月明塚何無日日風雨乎。余曰。望夫之夫終不歸。月明之夫死而同穴。怨恨亦有淺深。則風雨豈無時恒乎。人有爲詠一絶曰。金石貞心磨不磷。糓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萬德九嫁而九孀]
萬德。亦沙斤驛女也。娶者輒死。凡九嫁而九孀。驛有好事者。連塋而葬。即月明塚山下也。萬德死。又葬于九塚之下。十塚相次如連珠焉。有人作詩曰。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在。地下千秋愧月明。

 

월명총 (月明塚)

함양의 관문인 수동 삼거리에서 함양읍으로 들어오는 좌측에 한 마을이 있다. 이 곳은 행정 구역상 함양읍 백천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이 월명 부락으로서 월명총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의 수동은 역마가 있었던 역촌으로서 지금의 화산리에 사근역이 있었다. 이 곳 사근역에 월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역녀가 있었다. 역녀란 역에 속한 계집으로 신분이 낮은 여자다.
그런데 이 곳에 삼돌이라는 총각이 있었는데 행상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삼돌은 키가 크며 얼굴도 잘 생기고 성품이 고와서 주위 사람들과 사귐이 좋았고 호평을 받아 오던 젊은이였다. 본래 고향은 경주였지만 고향에 대한 이웃에 살고 있는 월명 처녀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덧, 이 두사람의 사이는 사모의 불꽃으로 뒤덮이게 되어, 고향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삼돌이에게는 월명의 인정어린 손길이 더없이 고마웠으리라, 월명 역시 삼돌이가 믿음직스럽고, 어렵게 행상해 나가는 갸륵한 마음에 동정이 갔고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끊임없는 사랑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삼돌은 월명만 있으면, 이 세상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 낼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두사람은 이웃의 권고로 간단한 절차에 의해 신혼 살림을 차리고 꿈에도 그리던, 포근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아기도 갖고, 알뜰한 살림으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가정에 뜻밖에 날아든 비보가 있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 위급하다는 기별이었다.
삼돌이는 가족을 다 데리고 떠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한 사태가 급박했었다. 그래서 월명을 남겨 두고 삼돌이는 혼자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곧 돌아오겠다고 간 삼돌이는 월명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날이 갈수록 삼돌이가 기다려진다. 한달이 지났다. 불안하고 불길한 마음에 사로잡힌 월명은 천리나 되는 먼 길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만 기다려 보자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월명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몸져 눕게 되었다. 이제 먹는 것조차 싫었고, 물도 먹을 수가 없었다. 몸은 쇠약해 말라지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만 했다. 주위에서도 걱정을 하며 돌보았지만, 남편을 기다리다 생긴 병은 아무런 약도 효과가 없이 날로 더해졌다.
지금 당장 삼돌이가 와 준다면 일어서련만은, 사랑하는 남편의 품속을 애타게 기다리며 허공을 헤맸다.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산울림마저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월명은 끝내 남편의 돌아옴을 보지 못하고 숨졌다.
한편 어머님의 병환이 완쾌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삼돌이의 극진한 간호도 아랑곳없이 삼돌이의 어머님은 끝내 숨을 거두셨다. 삼돌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더 큰 슬픔은 지금 곧 월명에게 달려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자신도 몸져 눕고 말았다. 그러나 온갖 힘을 다하여 겨우 몸을 부지하고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삼돌이는 온갖 고생 끝에 아내의 곁에 왔지만 이미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내의 무덤은 삼돌이의 고향인 경주를 바라다 볼 수 있는 수동 삼거리 맞은 편, 산 중턱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하늘이 꺼지는 듯한 슬픔과 함께 극도로 쇠약해진 삼돌이는 월명의 무덤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끝내 자신도 죽음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망부 (望夫)의 느티나무

함양군 마천면 의중 마을은 1580년 조선조 선조 때에 함양 박씨 중시조 선(善)의 16대손 사신, 사성 두 형제가 마천으로 들어와서 이 마을 동남쪽 3백m부근인 현재의 쉰재들 한 곳에 자리잡아 살다가 한 분은 의중 마을로 한 분은 의평 마을로 들어와 계속 살았다고 한다.
한편 의평 마을에는 동리 한가운데 수명이 6백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의평 마을에는 함양 박씨들로만 모여 살았던 씨족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성실하고 성품이 온화하면서 미래에 큰 뜻을 품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는 가난한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끼니를 이을 양식이 없으면서도 오직 책 읽는 것만을 낙으로 삼고 나날을 보내는 선비였다. 한편 그의 부인은 지성으로 남편의 뜻을 따라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으나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낙방하자 마음씨 고운 아내는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느티나무앞에 가 청명한 보름달이 뜨면 밤새워 기원하니, 그 정성은 이미 온 동네에 퍼져 있었다.
어느덧 과거가 넉 달 앞으로 다가오니 박 선비는 한양으로 행할 차비를 차리고 무거운 발길로 한양을 향했다.
남편을 천릿길 먼 속으로 보내는 부인의 마음은 천길 만길 찢어지는 듯했다. 험준한 산길을 걷고 노천에서 잠을 자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험한 고개를 넘다 선비는 도적들에게 그만 죽음을 당하니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한편 선비의 부인은 길 떠난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느티나무 앞에 정한수를 떠나 놓고 지성으로 기원을 하였다.
한 달 두 달 아니 1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그만 병을 앓아 드러눕게 되었다.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부인마저도 죽게 되었다.
동리 사람들은 이를 불쌍히 여겨 느티나무 앞에서 두 영혼을 위해 큰 제사를 지내고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를 기리기 위해 동리의 젊은 유생들이 모여 시 짓기를 하고, 학식을 서로 겨루었으며 후로는 의평 마을 젊은  선비들은 과거 시험에 수 차례에 걸쳐 장원하여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동리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초 삼일에는 온 동민이 함께 모여서 평화제를 지내고 유생들이 서로 학식을 겨루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상림숲에 읽힌 최치원의 효성

우거진 숲속이나 시냇가에는 뱀이나 개미들의 해충이 있게 마련이고 녹음을 즐기려 숲 속을 찾을 때에는 이러한 해충들을 조심해야 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숲속의 조용한 곳을 찾아서 앉아 있노라면 없던 개미들이 어디서 오는지 모여들고 때로는 풀 속을 지나는 뱀들에 놀라서 흠칫할 때가 많다. 이러한 경험은 숲속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해로운 해충이 전혀 없다. 그런 까닭에 숲속의 어디를 가나 마음 놓고 앉아서 쉴 수가 있다. 상림의 땅이나 숲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같은 지질일 것이고, 수목인데도 상림만이 이러한 해충이 없는 까닭은 신라 때 본군 태수로 계셨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 태수께서는 치수와 농경, 관개를 위해서 상림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꾸었는데 지금 우거진 수목들은 그때 심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최 태수께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어찌나 효성이 지극한 지 흉내도 못내었다고 한다.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고 나갈 때는 출처를 알리고 돌아와서는 고하여 어머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시었다. 어머님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 어머니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그런 효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은 혼자서 바람을 쐬일 겸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가서 풀숲에 앉아 놀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라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뱀을 본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태수는 어머님께 송구함을 금치 못하여 상림 숲으로 달려가서 숲을 향해 '이후로 상림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하고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이후로는 태수의 주문 때문인지 지극한 효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뱀과 개미 등 해충은 사라지고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 태수의 어머님을 위하는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고 그의 효성에 따른 것이라고 하니 과연 효는 하늘을 감동케 했고 태수는 천하에 뛰어난 효도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