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 僧傳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雪坡大師碑銘


日。余因事偶出郭門外。有弊衲僧如不聞呵道。突黑衣卒伏於前。其色若有悶急者然。余恠問曰。若何爲者。對曰。僧乃湖南沙門名聖淵者。爲法師雪坡和尙。願得大人一言重。以詔十方衆生。有邦禁也。僧不可以入都城。相門又不可以私情導達。乞城外旅店食。夏以秋秋以冬。僵死在朝暮。然不得所願。欲死無歸。余油然感其誠。許令進所爲狀。其狀曰。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236_559c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於喚惺孫也。三十三。因大象固請。陞座於龍湫板殿。師自幼穎悟甚。及參諸名師。三乘五敎。無不言下卽會其玅契神解。於華嚴尤篤。反覆則恒河計沙。講誦則迦陵遍音。卒能正其譌一其歸。以滌近世癡人說夢之見。願學者日以坌集。各示金繩覺路。其說纚纚不竆。在昔淸涼大師有所撰抄中䟽科。其義多隱晦。講解者病之。師一覽。圈而表之。曰疏曰科。各有攸宿。如客得歸焉。頃之。勝濟㫙穎等白師曰。大經抄中所236_559d引。亦無不衍誤。盍移錫海印。證諸本以補同異。師往留之。考較乃已。自是遊金剛者再。妙香者一。頭流常面壁焉。庚寅。澄光寺火。所藏華嚴八十卷板一無遺。師歎曰。於斯而不盡心。其敢頂禮如來。於是鳩財剞劂。人天助力。春始夏訖。其晦䵝者。惟師之口誦是賴焉。板旣完。新建閣峙諸靈覺寺傍。前數日。有虎跑寺後。僧又夢神人告曰。此可藏如來大經云。方經之安於閣也。有瑞光蟠空。會者咸異之。師以爲此偶然也已。是後寓靈覺。一日謂寺主曰。寺不移建。必圮於水。盍圖之。亡何。水大至寺果圮。僧亦有胥溺。衆乃服其236_560a神。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是日也。弟子二十有七人。奉以涅槃。諸龍象奔奏號哭。雖下界衆蚩。亦莫不相告齎咨。師嘗論近世火浴舍利之出。有不慊于心者。及涅槃。雖祥光七夜不減。竟不以一舍利現靈。釋氏觀理。有固未始不爲無也。無亦未始不爲有也。有而謂之無可也。無而謂之有。亦無不可。眞有眞無。又誰能辨之。羣弟子無以寓其誠。豎塔靈源。禪雲僧亦如之。此不忘舊時薙髮也。嗚呼。師一言以蔽之。曰華嚴之236_560b忠臣也。若聖淵。又師之忠臣也。盡心所事。儒與釋道未嘗不同。余不銘。何以勸在後之千劫也。况師臨化飭弟子曰。愼勿碑。又曰。如不得已。非乞銘蔡相國。不可。余不知師。師能知余。義不可相負。乃作銘。銘曰。
佛有華嚴。正法眼藏。誰其抱持。雪坡心長。鬱攸何物。敢爾跳踉。移諸腹笥。登彼文梓。如來色笑。曰余嘉爾。雪坡功德。我聞如是。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영원사 부도군(靈源寺 浮屠群)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영원사 입구에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가운데 육각의 옥개석이 있는 장중한 부도는 조선 후기 화엄학(華嚴學)의 고승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부도이다. 상언스님은『화엄경』 판목을 다시 새겨 영각사(靈覺寺)에 봉안하였고, 영원사에서 10여 년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편을 염송했다고 한다. 그의 부도는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다른 4기는 벽허당[碧虛堂(1.1m)], 영암당[影巖堂(1.2m)], 중봉당[中峯堂(1.3m)], 청계당[淸溪堂(0.9m)]의 부도인데 중봉태여(中峯泰如 ?~1830) 이외는 법명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霜月大師碑銘 


余屛居明德山中。.....日。方丈僧春坡堂義一。袖憕寤所撰霜月大師狀。來請銘。余儒者徒也。師之狀奚爲於余之門。春坡留半載乞食。不獲不歸。試閱其狀。犂然有契余意者。嗚呼。註說之支離。儒與釋奚異。其狀曰。師名璽篈。俗姓孫。順天人也。母金。於浴佛夕。夢梵僧授一顆珠。已而有娠生師。肅宗丁卯也。十一。投曹溪之仙巖寺極俊長老。十六。受具於文信大師。十八。參雪巖和尙。道旣通。衣鉢歸焉。遍參碧虛南嶽喚惺蓮華。皆獲其心印。二十七。歸故山。開演三乘宗旨。四方緇流多歸之。

 

새봉(璽封)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87-1767(숙종13-영조43)
혼미(混迷)
상월(霜月)
시호 평진(平眞)
활동분야 대선사
새봉(璽封)에 대하여
새봉(璽封)
1687(숙종 13)∼1767(영조 43). 조선 중기의 대선사(大禪師). 화엄종사(華嚴宗師)·대흥사(大興寺) 13대종사(大宗師) 중의 1인. 자는 혼미(混迷), 호는 상월(霜月). 성은 손씨(孫氏). 순천출신.
11세 조계산 선암사(仙嚴寺)의 극준(極俊)을 은사로 출가하여 16세 때 화악(華嶽)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18세 때 설암(雪巖)을 참배하고 담론하였다. 설암은 그의 도가 깊음을 알고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그뒤
벽허(碧虛)·남악(南岳)·환성(喚惺)·연봉(蓮峯) 등의 고승들을 찾아 심인(心印)을 얻었다.
1713년(숙종 39) 선암사에 돌아와 개당(開堂)을 하자 수많은 수행자가 법(法)을 구하였다.
또한, 1750년(영조 26) 선교도총섭 주표충원장 겸 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가 되었고, 1754년 선암사에서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었을 때는 모인 사람이 1, 200명을 넘었다.
1767년 10월, 81세의 나이로 “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고 달은 떨어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였으나 사리를 얻지 못해서 문인 탁준(卓璿)이 유골을 가지고 묘향산에 이르러 쇄골을 하려 할 때 갑자기 그 안에서 3매의 공주(孔珠)를 보았다. 하나는 오도산(悟道山)에, 나머지 둘은 선암사와 대흥사에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언제나 문자보다는 계율과 진해(眞解)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공적견(空寂見)에 떨어지는 편협함보다는 화엄정신을 생활화하였고, 일상수행법(日常修行法)의 하나로 매일 1불(一佛)과 5보살(五菩薩)의 명호를 5,000번씩, 그리고 염불을 1,000번씩 일일이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며 외웠다.
그는 계율을 엄정히 지킴으로써 초학자의 귀감이 되었고, 강론(講論)에 임해서는 경의 진수를 밝혀서 대중의 어리석음을 깨우쳤으며, 마음을 가르칠 때는 지혜를 증득함을 법문(法門)의 중심으로 삼아 무명(無明)을 깨닫게 하였다.
언제나 제자들을 대할 때는 부드러움으로 했으며, 학자들에게는 문자를 떠난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본원을 찾도록 권유하였다. 이밖에도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천명하였다.
유가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상(氣像)은 불가의 여여(如如)한 이(理)와 같고, 유가의 태극(太極)은 불가의 일물(一物)과 같으며, 유가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과 같다고 하는 등, 유교와 불교의 차별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매일 자시에 반드시 북두칠성을 향해 절하고 심증실천(心證實踐)의 법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의 고승이 북두숭배(北斗崇拜)한 최초의 사료상의 등장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이라고 보겠다.
저서로 《상월대사시집 霜月大師詩集》 1권이 있다.
참고문헌
東師列傳(覺岸)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渭錫〉

 

지책(旨冊)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721-1809(경종1-순조9)
응문(應文)
충허(冲虛)
활동분야 고승
지책(旨冊)에 대하여
지책(旨冊)
1721(경종 1)∼1809(순조 9). 조선 후기의 고승. 흥양이씨(興陽李氏). 자는 응문(應文), 호는 충허(冲虛).
2세에 어머니가, 13세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1745년(영조 21)에 출가하였다. 노장(老莊)을 즐겨 《도덕경 道德經》 등을 읽었으며, 경론(經論)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이름을 날렸다.
1754년 사람들의 청에 따라 영수사(靈水寺)에서 개강하자 70여명이 모였는데, 10여년을 가르쳤다. 뒤에 자취를 감추어 지리산
벽송사(碧松寺), 성주 불영산 청암(靑庵), 군위 화산의 백암(白庵), 풍기 봉명산의 내원(內院), 문경 희양산의 동전(東殿), 함창 칠봉산의 중암(中庵) 등지에 머물렀다.
시에 능하여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하였고, 역술(曆術) 및 의방(醫方)에도 능통하였으며, 보시를 좋아하여 밥을 남겨 까치와 까마귀를 기르니 새들이 떼를 지어 뒤를 따라다녔다.
그에게는 은사(恩師)인 시원(時垣), 계사(戒師)인
벽허(碧虛), 법사(法師)인 쌍운(雙運) 등 세 스승이 있었으며, 하담(荷潭)·남파(南坡)·보한(普閑)·승필(勝必)·우인(宇仁) 등 뛰어난 제자들이 뒤를 이었다.
저서로는 《충허집》 2권이 있다.

인오(印悟): 1548(명종 3)∼1623(인조 1).그는 청매파(靑梅派)를 개설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선종(禪宗)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법을 이은 제자로는 쌍운(雙運)이 있다. 저서로는 《청매집》 2권이 있다.

의민(義旻)에 대하여
의민(義旻)
1710(숙종 36)∼1792(정조16). 조선시대의 승려. 성은 김씨(金氏), 호는 오암(鰲巖). 아버지는 준(浚)이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어려서부터 유서(儒書)를 공부하였으며, 19세에 어머니가 난치병을 앓자 하늘에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도록 기도하였으나, 22세에 세상을 떠나자 무상을 느끼고 보경사(寶鏡寺)로 출가하여 각신(覺信)의 제자가 되었다.
25세에 휴정(休靜)의 8세손인 수행(守行)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그에게 사교과(四敎科)와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하였다.
그뒤 통도사에서 불경을 연구하다가 팔공산 운부암(雲浮庵)의
쌍운(雙運)에게 화엄교리를 배웠고, 31세까지 고승들을 찾아가 화엄과 전등(傳燈)과 염송(拈頌)을 공부하였다.
32세에 보경사의 강주(講主)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교계에서는 그를 영남종장(嶺南宗丈)이라고 불렀다. 교학을 강하는 여가에 참선을 즐겨하였고, 선시불이(禪詩不二)의 경지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늙은 아버지를 절 가까이에 모시고 봉양하였는데, 그 효성이 지극하였다. 평생 동안 보경사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편, 유생들의 그릇된 불교관을 시정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92년 9월에 진영송(眞影頌)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茶毘)하여 영골(靈骨)을 얻어서 보경사 서운암(瑞雲庵)에 탑을 세웠으며, 이듬해 제자 회관(誨寬)이 비문을 짓고 비를 세웠다.
제자로는 회관·돈선(頓禪)·인문(印文)·우홍(宇洪)·처경(處敬) 등이 있다.
저서로는 회관이 편집한 《오암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鰲巖集, 寶鏡寺의 事蹟과 史話(李鍾益, 甘露堂, 1980). 〈金渭錫〉
참고문헌
冲虛集. 〈金相鉉〉

 

복혜(福慧)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미상
금주(錦洲)
활동분야 승려
복혜(福慧)에 대하여
복혜(福慧)
생몰년 미상. 조선 순조 때의 승려. 성은 권씨(權氏), 호는 금주(錦洲). 나주출신.
일찍이 출가하여 월파(月坡)의 제자가 되었으며, 대흥사(大興寺) 13대강사(大講師)의 아홉번째 인물로서 명성을 날렸다.
원래 성격이 호탕하고 대장부의 기개가 있었으며, 수단이 능하여 가는 절마다 유나(維那)와 주지들이 존경하였으며, 세속의 사대부들도 조심하여 상대했다고 한다.
해남 대흥사에 들렸을 때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미약한 당시의 불문(佛門)을 다시 현양시켜줄 것을 간청하였으므로, 그때부터 대흥사에 머물렀다. 경전을 강설(講說)할 때는 항상 대의를 통달하도록 가르쳤으므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두륜산의 용화당(龍華堂)에서 화엄법회(華嚴法會)를 개설했을 때에는 수백명의 청중이 모였다고 한다.
법맥은
화악(華嶽)벽허(碧虛)―월파―복혜로 이어진다.
참고문헌
東師列傳(覺岸)
大芚寺誌(意恂). 〈李鍾益〉

 

문신(文信)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29-1707(인조7-숙종33)
화악(華岳)
활동분야 승려
문신(文信)에 대하여
문신(文信)
1629(인조 7)∼1707(숙종 33). 승려. 대흥사(大興寺) 13대종사(十三大宗師)의 한 사람. 성은 김씨(金氏), 호는
화악(華岳).
전라남도 해남 화산(華山)출신. 어렸을 때 출가하여 대둔사 고권(顧權)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배운 것이 없어서 경전을 공부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지냈다. 어느날 대둔사 상원루(上院樓)아래 지게를 내려놓고 쉬고 있다가, 누각 위에서 취여(取如)가 강론하는 《화엄경》의 종지(宗旨)를 듣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뒤 취여의 가르침을 따라서 화엄을 배웠으며, 솔방울을 주워서 불을 밝히고 온종일을 독경하며 3년을 공부한 뒤 취여의 법을 전수받았다. 그때부터 전국 각지의 고명한 선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받다가 다시 대둔사로 돌아와서 취여의 뒤를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설법이 있을 때면 언제나 승속(僧俗) 수백명이 참여하였다. 그때 묘향산에 머물렀던 월저(月渚)가 대둔사로 찾아왔는데, 그들은 함께 선지(禪旨)를 담론하고 《화엄경》의 묘의(妙義)를 겨루어 서로의 도력을 인정하였다.
그때 월저가 능히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간파한 문신은 제자와 학인들을 모두 월저에게 위탁하고 뒷방으로 물러나서 두문불출하고 면벽(面壁)참선하였다.
그뒤 월저는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문도들에게, “나는 남방에서 육신보살(肉身菩薩)을 보았다.”고 하면서 문신의 도력을 널리 알렸다.
6월 26일 나이 79세로 죽었으며, 다비(茶毘)한 뒤 사리(舍利) 2과(顆)를 얻어 대흥사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東師列傳, 大芚寺誌(韓致應)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吳亨根〉

 

태율(兌律)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95-?(숙종21-?)
월파(月波)
활동분야 승려
다른 이름 김종건(金從建)
태율(兌律)에 대하여
태율(兌律)
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승려. 성은 김씨(金氏). 속명은 종건(從建). 호는 월파(月波). 전주출신.
15세에 출가할 뜻을 세워 묘향산 불지암(佛智庵) 삼변장로(三卞長老)에게 나아가 《사기 史記》를 배웠다.
1년 뒤 아버지가 죽자 장례를 치르고 다시 출가하여 운봉(雲峰)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였다.
그뒤 혜월(慧月)·
환암(幻庵) 등 여러 스승을 찾아 사교(四敎)·사집(四集)의 경론어록을 수료하여 그 명성이 점점 알려졌다.
29세에 묘향산 안심암(安心庵)에 머물던 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일대사(一大事)인연을 결단하려는 뜻을 굳히고 안릉(安陵)의 원적암(圓寂庵)으로 굉활선사(宏濶禪師)를 찾아가 《기신론 起信論》·《반야경》 등을 배웠다.
그뒤 도반(道伴)3인과 함께 영남과 호남의 여러 절을 순방하며 무각(無覺)·남악(南岳)·호암(虎巖)·
암영(巖影)·상월(霜月) 등으로부터 《화엄경》·《원각경》·《능가경》·《선문염송》을 배웠고 호암의 법을 이었다.
그뒤 묘향산을 중심으로 하여 30여년 동안 교화하였으며, 사람들이 향산(香山)제일의 장로라고 불렀다. ‘불도(佛道)야말로 대장부의 할 일’이라 하여 기개를 보여주는 등 교화에 힘썼으나 뛰어난 제자를 배출하지는 못하였다.
입적시기는 불명하나 팔순에 가까웠으리라고 추정된다.
저서로 《월파집》 1권이 있다.
참고문헌
朝鮮禪敎史(忽滑谷快天, 鄭湖鏡譯, 보련각, 1978). 〈張忠植〉

 

지안(志安)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64-1729(현종5-영조5)
삼낙(三諾)
환성(喚醒)
활동분야 대선사
지안(志安)에 대하여
지안(志安)
1664(현종 5)∼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 성은 정씨(鄭氏). 호는 환성(喚醒), 자는 삼낙(三諾). 춘천출신.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정원(淨源)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7세 때 설제(雪霽)를 찾아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였다.
1690년(숙종 16) 모운(慕雲)이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였는데, 모운이 수백명의 학인(學人)을 그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므로 뒤를 이어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을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지안이 말한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지리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도인이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하여 급히 옮기자, 며칠 뒤 그 절이 불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다가 큰비가 쏟아지는 날 절을 떠났는데,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두막집에서 잤다.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잣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었을 때 학인 1, 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 법회 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의견 때문에 다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도착한 지 7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나이 65세, 법랍 51세였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비가 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喚醒派)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
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 등으로 연결된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 喚醒詩集》 1권이 현존한다.
참고문헌
東師列傳,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渭錫〉

 

정혜(定慧)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85-1741(숙종11-영조17)
회암(晦庵)
활동분야 고승
정혜(定慧)에 대하여
정혜(定慧)
1685(숙종 11)∼1741(영조17). 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김씨(金氏). 호는 회암(晦庵). 창원출신.
9세에 어버이에게 출가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스스로 범어사(梵魚寺)의 자수(自守)에게 가서 중이 되었다.
그의 뛰어남을 안 자수는 충허(冲虛)에게 보냈으며, 충허는 정혜를 데리고 가야산의 원민(圓旻)에게 가서 참학(參學)시켰다.
원민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장경(藏經)을 배웠다.
이때 향산(香山)의 추붕(秋鵬)이 호남에서 강석을 열자, 원민의 허락을 얻어 이에 참석하였다.
추붕의 문하에서 돌아온 뒤 명성을 떨치자 원민이 의발(衣鉢)을 전해주고, 1711년(숙종 37) 율사(栗寺)에서 강석을 열게 하였다.
그러나 일암(一庵)·환성(喚醒) 등의 고승을 두루 방문하여 수업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좌선, 정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청으로 석왕사(釋王寺)·명봉사(鳴鳳寺)·청암사(靑巖寺)·
벽송사(碧松寺) 등의 사찰에서 강석을 열었다.
만년에 청암사에 주석하다가 1741년(영조 17)5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날마다 경을 외우되 한 번 읽어 500행을 외웠고, 특히 화엄에 밝아 이를 수십편 강의하였으며, 역(易)에도 밝았다.
경전을 연구하여 하나하나 철저히 소화하였고, 또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계합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화엄경소은과 華嚴經疏隱科》·《선원집도서착병 禪源集都序著柄》·《별행록사기화족 別行錄私記畵足》·《제경론소구절 諸經論疏句絶》 등이 있다. 불령산(佛靈山) 쌍계사(雙溪寺)에 그의 비가 있다.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寺刹史料. 〈金相鉉〉

 

簡易文集卷之八                   최립(崔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西都錄後
雙運卷二首運乃靜公弟子。靜門多叛去者。惟運尙奉狀鉢。                           휴정(休靜): 1520(중종 15)∼1604(선조37)


文殊卽在妙香山。果見師明弟亦端。應把禪心還着省。上方月落磬聲殘。
曉壑雲深晩始開。山齋不得廢山杯。一醺相强那妨戒。堪喜天眞發出來。

 

관징(琯澄)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582-1685(선조15-숙종11)
본관 수원(水原)
활동분야 승려
관징(琯澄)에 대하여
관징(琯澄)
1582(선조 15)∼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승려. 속성은 수원백씨.
13세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불경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회암(晦庵)·낙암(洛巖)·환성(喚醒)·
쌍운(雙運)·대적(大寂) 등의 지도를 받았다.
1613년 학문을 이루고 강석(講席)을 열었으며, 항상 문하에서 수백인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았다. 불교경전뿐 아니라 외전(外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시문을 잘하기로 당대의 승려 중 으뜸이었다.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朝鮮禪敎史(忽滑谷快天著, 鄭湖鏡譯, 寶蓮閣, 1978). 〈鄭柄朝〉

 

한성(翰醒)에 대하여
한성(翰醒)
1801(순조 1)∼1876(고종 13). 조선 말기의 승려. 성은 김씨. 호는 침명(枕溟). 전라남도 고흥출신.
아버지는 이혁(以爀)이며, 어머니는 맹씨(孟氏)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특하여 출가하기를 원하였다.
16세에 부처가 성을 넘어 출가한 고사를 기억하고, 곧 인근의 팔영산(八影山) 선계암(仙界庵)으로 가서 권민(權敏)을 은사로 하여 삭발하였다. 춘파(春坡)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긍선(亘璇)에게 선과 참법(懺法)을 배운 다음 혁원(奕謜)의 법을 이었다.
그뒤 여러 강원을 다니면서 내외의 전적을 배워 이에 박통하였으며, 강석을 열어 배우러 오는 사람은 누구든 거절하지 않고 가르쳤다. 때로는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에 머무르기도 하고, 때로는 조계산 송광사로 내왕하면서 20년 동안 학인을 지도하였다.
만년에는 선암사(仙庵寺) 대승암(大乘庵)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법을 이은 제자로는 보운(普運)·기준(箕準)·화산(華山)·오선(晤善)·
영암(影巖)·상흔(尙欣)·만암(萬巖)·대순(大淳) 등이며, 세수 75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東師列傳. 〈宋燦禹〉

 

林白湖集卷之一

 五言絶句
成佛菴。邀靜老話。休靜。一代名僧。時住香山。 058_254d

 


一鳥不鳴處。二人相對閑。塵冠與法服。莫作兩般看。

 

春洲遺稿卷之二 淸風金道洙士源著
 
南遊記

 

所謂八萬大藏經板。銅粧塗漆。燐爛嵯峩。噫。糜財如此。其民困可知也。有解行堂。坐希朗塑像。甚黑詭。寺之右有學士臺。軒爽佳絶。上有孤雲手植松。爲大風所落。如虎倒龍顚之狀。余撫之嗟惋。嗚呼。孤雲奇偉人也。仕於大國。年纔十八。爲侍御史。一檄黃巢。聲震天下。及其奉詔東歸也。一麾棲遲於詩山富城之間。而自傷其不遇。遂乃超然高蹈。不與世相聞。其風度格韻。雖219_037b謂之神仙中人可也。但其沉淫左道。不免於後人之疑。豈金濯纓所謂玩世之衰。而與時俯仰。托於禪佛。以自鞱晦者耶。賢哲之生於人國。自有遇不遇幸不幸。而以唐末極亂之世。孤雲猶能一鳴於中區。而顧不容於父母之邦。斯獨非雞林之羞乎。且觀於黃葉靑松之說。其骨鯁忠愛。决知非淪於異敎而爲亂倫之歸者。周景遊陸沉之誚。無乃非原情之論耶。仍擧一爵。酹孤雲之魂。是日欲上奉天臺。僧言路險苦止之。往極樂殿。有老僧圓旻七十九。頗識古事。其上數十步。有知足菴。又左轉十餘步。磴道磅磄。有希朗219_037c堂棲巖隙。如黃鵠抱卵。稍前有小臺。僧云是朗師逍遙處。又行一里。上白蓮菴義訥大師出迎。余先問覺聰消息。往龍興寺未歸云。訥問曰。前因覺聰。聞上舍欲來棲此菴久矣。今行何其晩也。余答曰。世事本來難必。訥曰。近聞上舍以救世自任。何不念自己心上。余解其意。答曰。雖囊中藏兜率天。掌上生須彌山。無益於事。奈何。訥曰。特未到其地位耳。苟到自無是語。遂相與一笑。日晩。下國一菴少坐。又下一里。涉磵入願堂寺。又北渡入弘濟菴。轉往觀音殿。與大師斗慧談老螺和尙鑿池得劒之事。義訥自白蓮來會。談鋒219_037d益長。余謂義訥曰。昔叔向聞堂下之言。不失鬷明。鬷明固有意於人知者人能知之也。若夫含光韜輝之類。惟恐人之或知。故人固朝夕遇之。而視之無如也。前年。余讀書于華山太古寺。有客僧牛尋者乞食久不去。僧徒苦之。至有叱辱者。尋猶蚩蚩笑語。諸僧尤憤。擧杖欲搏之。尋乃走。數日復歸。一日寺僧盡出。余獨與尋在。招尋問曰。汝屢遭辱。能無恚乎。尋率爾答曰。本無榮。安知辱也。余不覺驚歎。尋又多發癡騃之態。欲掩其言。余正色謂尋曰。吾已知汝非常。今日無他人。汝何不爲知己一吐心乎。尋遂斂膝而坐。發言219_038a皆奇。余執手嘆曰。是所謂藐然喪其天下者也。尋笑曰。放勛乃不能喪其身。而獨喪其天下耶。余益驚歎曰。奇才奇才。汝何自棄如草木乎。尋又笑曰。吾旣不知有吾。况知有名迹乎。是日逃去。訥大驚曰。尋也嘗住是山三年。而人不知其爲異僧也。訥因言喚醒堂知安事。安方爲南中宗匠。會上常千餘人。狀貌雄俊有威。士大夫遇之。亦加敬焉。安乃雪霽大師門人也。少時狷狂多氣。傍若無人。雖以雪霽之嚴。猶不能挫其氣。霽嘗據胡牀揮麈尾。說華嚴經。座皆潛心伏聽。無敢讙譁者。獨軒眉抵掌。發難不已。常稱之爲219_038b大器云。大抵負重致遠者。無論儒釋。非拙劣人所可堪也。

 

知守齋集卷之十五
 
游伽倻記 


辛卯冬。家君由地部郞。除開寧縣監。壬辰正月赴任。213_576b余以女病不及從。四月。始往省。處于燕休堂之西室。六月。家君爲會下從叔父監役公葬。請暇上京。七月。歸而伯從兄隨之。與余同室。朝夕怡愉。甚相樂也。吾二人者。夙聞雙溪海印之勝。冠于嶺之南。而又適至近邑。不可以不一觀。遂告于家君。以八月二十六日丁丑。早飯同發。

法堂之西。曰眞常殿。213_577d殿內安毗盧等三佛如法堂。左右有金塔二坐。左二十級。右三十三級。塑佛後掛千佛像。以白錦織成。一軀大可寸許。經歷幾千年。而尙未涴滅。又使題名柱上。殿下有解行堂。安希朗祖師木像。卽高麗名僧云。其下有無說殿。中安毗盧佛。上有大藏經印本。其後有雙運堂,轉生寮。前有窮玄堂,可鑑寮。正門外。有淸虛寮,四雲堂,明鏡堂。又有省行堂。舍病僧處。鍾閣外。有滿月堂,凝香閣。後有堆雪堂。東門曰海淸。寺共可千五百餘間。而僧亦通寺菴爲三百餘云。寺之僧聞佾示其師明詧詩軸。中有農巖繡衣記遊詩五十餘213_578a韻。寺有世祖朝所賜敎旨。曰慶尙道陜川地海印寺乙良。監司守令。曾下傳旨更審。尤加完護。雜役減除者。上書國王安御押。下書天順元年八月十四日。年月安御寶。高麗時。賜希朗祖師謚號敎旨亦有之。書曰贈海印尊師圓融無㝵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下書己酉五月日。安寶而篆以高麗王印。

高麗時。賜希朗祖師謚號敎旨亦有之。書曰贈海印尊師圓融無㝵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下書己酉五月日。安寶而篆以高麗王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