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신라사와 고려사 - 김윤수 편 2005.11.30.

 


 

188-백제의 신라 침입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파진찬 구도의 방어

484-고구려의 신라 침입 나제 연합군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승리

576-신라 진흥왕 서거, 차자 진지왕 즉위, 태자 아들 진평왕 함양으로 피신

579-신라 진평왕이 즉위후 옛 살던 집터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군자사를 창건하다

602-백제의 신라 침입 신라 장군 귀산과 추항이 함양 속현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하다

616-백제의 신라 침입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백제 백기의 공격

624-백제의 신라 침입 속함성 등 6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한 신라 장군 눌최

757-통일신라 경덕왕의 도 단위 행정구역 개편 강주 소속 11군에 천령군이 속하다

822-함양의 통일신라시대 헌덕왕 때 김헌창의 난과 속함군 태수에 임명된 최웅

828-통일신라 견당사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와 흥덕왕의 명으로 지리산 일대에 심다

859-통일신라시대 헌안왕 때 함양 엄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굴산문 낭원대사 개청

876-구산선문의 성주산문 낭혜 무염국사의 제자로 함양 영각사를 창건한 심광대사

877-황소의 난을 피해 통일신라에 귀화한 함양여씨의 시조 여어매

883-통일신라 헌강왕이 천령군 지리산에 결언선사를 시켜 엄천사를 창건하고 행차하다

888-통일신라 말기 함양 영각사의 심광대사에게 수학한 고려 태조 국사 여엄

895-함양의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 혼란기에 천령군 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

898-통일신라 말기 함양 영각사의 심광대사에게 수학한 고려 태조 국사 현휘

915-구산선문의 막내 수미산문의 시조 진철 이엄 함양 영각사에서 수도하다


920-함양의 고려 시대 태조 3년 함양이 소속된 강주 장군 윤웅 고려에 귀부하다

995-함양의 고려 시대 성종 14년 허주도단련사로 승격되다

1012-함양의 고려 시대 현종 3년 함양군으로 개칭되고 군 단위로 환원되다

1018-함양의 고려 시대 현종 9년 합천의 속현이 되다

1117-함양의 고려 시대 무기조사 지리산 영원사를 중수하다

1128-고려 인종 때 고승 성선이 함양군 지리산 엄천사를 중수하다

1129-고려 인종 때 지리산 수정사 낙성법회에서 설법한 함양 엄천사 수좌 성선

1145-함양의 고려 시대 인종 23년 함양군으로 개칭되다

1172-함양의 고려 시대 명종 2년 함양현 감무가 파견되다

1198-함양 상무주암에서 도를 깨달은 고려 십륙국사 제1세 불일 보조국사 지눌

1200-고려 신종 3년 보조국사 지눌 상무주암에서 순천 송광사로 이주하다

1208-함양 금대암에 은거한 고려 십륙국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

1210-고려 보조국사의 입적후 진각국사 계승차 함양 금대암을 떠나 송광사로 귀환하다

1217-고려 후기 명장으로 함양부원군에 봉해진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와 삼성의 전설

1254-고려 문신 최자가 지은 보한집 간행, 무주암 승려 무기의 시화가 수록되다

1259-함양 안의 출신으로 고려 고종 때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은 하천단

1284-함양 상무주암에서 수도한 고려 십륙국사 제6세 원감국사 충지 

1286-원감국사 충지 고려 십륙국사 제6세 계승차 함양 상무주암을 떠나 조계산으로 가다

1298-함양 휴천면 문정리 도정정사에 은거한 고려 원간섭기의 이억년

1344-고려 충목왕에게 《정관정요》를 강의한 함양부원군 박충좌

1374-함양 유림면 국계리 제계서재에 은거한 고려 말의 삼은 목은 이색

1375-고려 문신 쌍매당 이첨 하동 귀양길에 함양현과 사근역을 지나며 시를 짓다

1379-왜구의 함양 침입, 진주목사 박자안 장군의 토벌 

1380-왜구의 함양 침입, 사근산성 함락과 함양현 감무 장군철의 전사

1380-왜구의 함양 침입, 사근내역 혈계 전투와 남원 인월에서의 황산대첩

1388-왜구의 함양 침입 도지휘사 정지 장군의 전승

1389-왜구의 함양 침입, 진주목사 김상 장군의 순국

1389-왜구의 함양 침입, 역승 정인의 처 송씨의 순절

1390-함양의 고려 시대 공양왕 2년 이안현이 감음현에 이속되다

1392-고려의 멸망 후 함양에 귀향하여 은거한 두문동 72현 덕곡 조승숙

 


 

188-백제의 신라 침입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파진찬 구도의 방어


신라 벌휴이사금 5년(188)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 현존하는 아막산성, 천령군의 속현인 운봉현의 옛 이름)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가 방어하다. 백제 초고왕 23년(188) 2월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484-고구려의 신라 침입 나제 연합군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승리


신라 소지왕 6년(484) 7월 고구려가 북방 국경을 침범하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함양 속현, 남원시 아영면 아막산성) 아래에서 격파하다.


576-신라 진흥왕 서거, 차자 진지왕 즉위, 태자 아들 진평왕 함양으로 피신


진평왕은 진흥왕의 적손이다. 그의 부친은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다. 동륜태자가 진흥왕 33년(572)에 서거하였고 진흥왕 37년(576) 8월 진흥왕이 서거하고 차남 진지왕이 즉위하였다. 진지왕이 즉위한 것은 당시 왕위계승의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남이 즉위할 수 없고 적손 진평왕이 즉위했어야 하나 거칠부 등이 주도한 진지왕파에게 찬탈당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그러면 자연 적손인 진평왕의 신분이 위태하게 되므로 함양 지리산 골짜기에 은거한 것은 자연스런 왕권쟁탈전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진지왕이 즉위 4년(579) 7월에 화백회의에서 퇴출당한 뒤 진평왕이 환도하여 즉위한 것이다, 즉위한 뒤 옛 살던 터를 희사하여 절로 만든 것은 실재 일이지 조선 후기에 흔한 날조된 전설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방사의 사료가 국사의 사료를 보충하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진평왕은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인데, 혹은 만내부인(萬內夫人)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그는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579-신라 진평왕이 즉위후 옛 살던 집터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군자사를 창건하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지왕(眞智王) 3년,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진지왕 4년 7월 진지왕이 승하한 뒤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군자사사적기>

청장관 이덕무는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없다. 진평왕의 딸이 곧 선덕여왕이다.


602-백제의 신라 침입 신라 장군 귀산과 추항이 함양 속현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하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이 어렸을 적에 같은 부(部)의 사람 추항(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들이 학문이 있고 덕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양하지 않으면 아마 치욕을 자초할지 모르겠다. 어찌 어진이에게 나아가서 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에 나아가 옷자락을 걷어 잡고[衣]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을 삼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였다.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할 것,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할 것,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할 것, 넷째는 전쟁에 다다라서는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사(師)가 말하였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안되니, 말, 소, 닭, 개를 말하며,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꼭 필요한 것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명을 실추시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진평왕 건복(建福) 19년 임술(진평왕 24년: 602)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阿莫城)<막(莫)자는 모(暮)로도 썼다.>을 포위하니, 왕이 장군 파진간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함께 소감직(少監職)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겨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올 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갈고리로 [무은을] 잡아당겨 떨어뜨리었다.

귀산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다달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며 적 수십 인을 격살하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태워 보낸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모든 군사가 [이것을] 보고 용감히 공격하였다. 적의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몸에 칼을 맞아 중로(中路)에서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함안)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예(禮)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귀산에게는 관등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귀산과 추항의 역전으로 백제 좌평 해수가 이끄는 4만 군대는 전멸하고 해수는 필마로 귀환하였다.


616-백제의 신라 침입 함양 속현 모산성 전투 백제 백기의 공격


신라 진평왕 38년(616) 10월 백제가 모산성(남원시 아영면 아막산성)을 침공하다. 백제 무왕 17년 10월 달솔 백기를 시켜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624-백제의 신라 침입 속함성 등 6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한 신라 장군 눌최


눌최(訥崔)는 사량 사람으로 대나마 도비(都非)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建福) 41년 갑신(진평왕 46: 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내침하여 군사를 나눠 속함(速含)[현재의 경남 함양군], 앵잠(櫻岑), 기잠(기岑), 봉잠(烽岑), 기현(旗懸), 혈책(穴柵)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5군이] 이미 도착하여 백제 군사가 진영을 갖춘 것이 당당함을 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못하였다. 어느 사람이 주장하였다.

“대왕께서 5군을 여러 장군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병가(兵家)의 말에 ‘승리가 판단되면 진격하고, 어려울 것 같으면 후퇴하라.’ 하였으니 지금 강적이 앞에 있으니 계략을 쓰지 않고 직진하였다가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

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을 받아 출동하였으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노진(奴珍) 등 여섯 성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드디어 그 곳에 성을 다 쌓고 돌아왔다.

이에 백제의 침공이 더욱 급박하여져 속함, 기잠, 혈책의 세 성이 함락되거나 또는 항복하였다. 눌최가 남은 세 성으로써 굳게 지키다가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병졸에게 말하였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에는 모든 초목이 꽃을 피우지만 추위가 닥치면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늦게 낙엽진다.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다. 지금이 바로 진실로 뜻있는 병사와 의로운 사람이 절조를 다 바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병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 때 군사들이 거의 다 죽고 몇 사람 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구차히 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눌최에게 종이 한 명 있었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특이한 재주를 가지면 해롭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이 종을 마땅히 멀리하라!” 하였다. 그러나 눌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에 성이 함락되어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은 활을 당기어 화살을 끼워 눌최의 앞에서 쏘는데 빗나가는 바가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어느 적군 한 명이 뒤에서 와서 도끼로 눌최를 쳐 눌최가 쓰러지니 종이 돌아서서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고 눌최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757-통일신라 경덕왕의 도 단위 행정구역 개편 강주 소속 11군에 천령군이 속하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에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전국 9주의 명칭을 모두 개정하였다. 이때 함양 지명도 개칭되었다. 현대의 남원시 운봉읍과 거창군 마리면이 함양 속현이었다.

강주(康州)의 천령군(天嶺郡)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경덕왕 이후도 속함군으로 불린 적이 있다. 지금[삼국사기 편찬시 1145년, 고려 인종 23]의 함양군(咸陽郡)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운봉현(雲峯縣)은 본래 모산현(母山縣)<혹은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마리현(馬利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822-함양의 통일신라시대 헌덕왕 때 김헌창의 난과 속함군 태수에 임명된 최웅


헌덕왕(憲德王) 14년(822) 3월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金)]헌창(憲昌)은, 그 아버지 주원(周元)이 앞서 왕위(王位)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배반하여 국호(國號)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지어 경운원년(慶雲元年)이라 하고, 무진(武珍)[무진:주치(州治)는지금의 광주(光州)]·완산(完山)[완산:주치(州治)는 지금의 전주(全州)]·청주(菁州)[청주:주치(州治)는 지금의 진주(晉州)]·사벌(沙伐)[사벌:주치(州治)는 지금의 상주(尙州)]의 4주도독(州都督)과, 국원경(國原京)[국원경:중원경(中原京)이니 지금의 충주(忠州)]·서원경(西原京)[서원경:지금의 청주(淸州)]·금관경(金官京)[금관경:지금의 김해(金海)]의 사신(仕臣)[사신:소경장관(小京長官)]과 제군현(諸郡縣)의 수령(守令)을 협박하여 자기 소속(所屬)을 삼으니, 청주도독(菁州都督) 향영(向榮)은 몸을 빼어 초화군(推火郡)[추화군:지금의 밀양군(密陽郡)]으로 달아나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우두주:주치(州治)는 지금의 춘천(春川)]·십량주(?良州)[삽량주:주치(州治)는 지금의 양산(梁山)]와 패강진(浿江鎭)[패강진: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북원경(北原京)[북원경:지금의 원주(原州)] 등의 여러 성은 먼저 헌창(憲昌)의 역모(逆謀)를 알고 거병(擧兵) 자수(自守)하였다.


18일에 완산주(完山州)의 장사(長史)[장사:관명(官名), 혹은 사마(司馬)] 최웅(崔雄)과 주조(州助)[주조:관명(官名), 혹은 주보(州輔)]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하여 와 [변(變)을] 고(告)하니, 왕은 곧 최웅(崔雄: 전주최씨)에게 급찬(級飡)의 위(位)와 속함군(速含郡)[속함군:지금의 함양(咸陽)] 태수(太守)의 직(職)을, 영충(令忠)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고, 드디어 원장(員將) 8명을 차정(差定)하여 왕도(王都)의 팔방(八方)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출동(出動)하였다. 일길찬(一吉飡)[일길찬:제7품위)] 장웅(張雄)은 먼저 나아가고 잡찬[잡찬:제3품위] 위공(衛恭)·파진찬(波珍飡)[파진찬:제4품위] 제릉(悌凌)은 그 뒤를잇고, 이찬(伊飡) 균정(均貞)·잡찬 웅원(雄元)·대아찬(大阿飡:제5품위] 우징(祐徵) 등은 3군(軍)[군:좌(左)·우(右)·중군(中軍)]을 통솔하고 나갔다.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문화관문:경주시 외동면(外東面)]을 지키고 명기(明基)·안락(安樂) 두 화랑(花郎)은 각기 종군을 청하여 명기(明基)는 그 도중(徒衆)과 함께 황산(黃山)[황산:지금의 연산(連山)]으로 향하고 안락(安樂)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향하였다. 이 때 [적괴(賊魁)] 헌창(憲昌)은 그 장수를 시켜 요로(要路)에 거(據)하여 관군(官軍)을 기다렸다. 장웅(張雄)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賊兵)을 만나 이를 격파하고 위공(衛恭)·제릉(悌凌)은 장웅(張雄)의 군(軍)과 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삼년산성:지금의 보은(報恩)]을 쳐 이기고 다시 군사를 속리산(俗離山)[속리산:보은(報恩)]으로 보내어 적병(賊兵)을 섬멸하였다. 균정(均貞) 등은 성산(星山)[성산:지금의 성주(星州)]에서 적과 싸워 이를 멸하고 제군(諸軍)이 함께 웅진(熊津)[웅진:공주(公州)]에 이르러 적과 대전(大戰)하여 참획(斬獲)함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때) 헌창(憲昌)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웅진성(熊津城)]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으나 제군관(諸軍官)의 공위(攻圍)가 10일에 이르러 성(城)이 장차 함락되려 하니 헌창은 (화(禍)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자살하니 종자(從者)가 그 머리를 잘라 몸과 각각 파묻었다. 성이 함락됨에 이르러 [관군(官軍)은] 그 몸을 고총(古塚)에서 찾아 다시 베고, 그 종족(宗族)과 당여(黨與) 무릇 239명을 죽이고 그 곳 백성을 놓아주었다. 후에 전공(戰功)을 논하여 작(爵)과 상(賞)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아찬(阿飡)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大阿飡)의 위(位)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삽량주 굴자현(屈自縣)[굴자현:지금의 창녕(昌寧)]은 적지(賊地)에 가까웠으나 난(亂)에 물들지 아니하였으므로 7년간 조세(租稅)를 면제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82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헌창(金憲昌)이 반역을 꾀하니 완산(完山)의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조아찬(助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쳐 와 변(變)을 고하였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지위에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도 급찬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조(助)는 주조(州助)이니 벼슬 이름이다. 최웅이 상변(上變)한 공로로 속함군 태수에 제수되었다고 하면 그 문세가 보기 쉬운데, 《동국통감(東國適監)》에는 이를 상고하지 않고 곧 그대로 완산의 장사 최웅과 속함군 태수 영충이 고변하였다고 썼으니, 이는 영충으로 속함군 태수를 삼은 것이다. 너무나 잘못이기에 이제 본사(本史)를 따른다.


828-통일신라 견당사 김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 흥덕왕의 명으로 지리산 일대에 심다


김대렴(金大廉)이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왔으며, 흥덕왕이 이것을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명령하였다. 차는 이전부터 있었으나 대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며, 그가 차 종자를 가지고 온 이후부터 성하였다. 지금도 하동군과 구례군이 야생차 최초 시배지 다툼을 하고 있는데 당시 지리산의 동서남북에 다 시험 재배하였다. 함양 지역에도 재배되어 공물로 바쳐졌고 과중한 부담으로 황폐되었다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백성들이 이웃 고을에 차를 사서 공물 바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엄천사 북쪽 대밭에서 야생차를 찾아 차밭을 조성하고 재배하여 민간의 공물을 대체하였다. 그런 어진 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 차밭 조성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859-통일신라시대 헌안왕 때 함양 엄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굴산문 낭원대사 개청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의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遊車)이고, 신승(神僧)이 금인(金印)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8세 때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25세(859, 헌안왕 3)에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하여 *정행 스님으로부터 개청이라는 법명을 받고 화엄학을 익혔다.

859년(헌안왕 3)에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일음(玉軸一音)을 듣고 금강삼매(金剛三昧)의 진리를 얻었다고 한다. 구산선문의 사굴산문의 시조 오대산의 통효대사(通曉大師;*범일)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탑비의 원래 명칭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 보물 제192호(최언위 글, 구족달 글씨)이다.

*정행법사(正行法師) :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경문왕 10년(870)에 잡화(雜花:화엄)의 묘지(妙旨)를 전하고 낭원(郞圓)이 청강(聽講)하였다고 하였다.

*범일(梵日 810~889) :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엄천사는 나말여초의 관단(官壇)이 설치된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서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공증 수계 장소인 계단사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했는데 남방의 계단사원은 강주(서부경남지방)에선 엄천사가 유일하였다. 계단사원은 신라의 통일후에 冥州 福泉寺, 康州 嚴川寺, 全州 華嚴寺, 全州 金山寺, 漢州 莊義寺, 白城郡 長谷寺, 熊州 普願寺 등이 그 기능을 하면서 승단의 형성에 계율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선종에서 출발한 승려들도 수계함으로서 신라에서 공적인 역할을 한 사원이었다. 특히 福泉寺, 嚴川寺, 華嚴寺는 官壇이라 명시되어 나머지 수계 기능을 한 사원도 관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사원은 대체로 9州에 망라되어 성립되었다. 주: 韓基汶, 「新羅末 高麗初의 戒壇 寺院과 그 機能」, ꡔ歷史敎育論集ꡕ12, 1988.

 

876-구산선문의 성주산문 낭혜 무염국사의 제자로 함양 영각사를 창건한 심광대사


876년(헌강왕 2) 심광대사(深光大師)가 영각사(靈覺寺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창건, 심광대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의 제자로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은 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에는 심광(心光)이라 표기되어 있고, 제자 국사 비문에는 심광(深光)으로 표기되어 있다.

심광의 스승 낭혜 무염국사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에는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0세에 출가해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의 법성선사 아래서 공부했으며, 이때부터 선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영주 부석사로 옮겨 화엄학을 공부하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했다.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에게서 법을 전수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무염국사는 육조 혜능 - 마조 도일 - 마곡 보철로 이어지는 법맥을 받았으니 선종의 정맥을 그대로 이은 셈이다.

무염의 사조(師祖) 마조도일은 김화상(金和尙 684~762.5.15)으로 불리는 신라 성덕왕의 3남으로 오조 홍인 계통으로 남종선과 북종선 이외 제3의 정중선의 창시자인 중국 사천성 성도시의 대자사의 개산조 무상선사의 실질적 제자이다. 성주산문은 나말 여초에 가장 번창했다. 무염국사는 89세에 입적했으며 여엄·대통·심광·자인·승량·현영·영원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심광은 뒷날 고려 태조의 국사가 되는 두 제자 현휘와 여엄을 문하에 두었는데, 여엄의 비문에 심광에 대해 묘사하기를 "심광화상은 여엄대사의 사형 장로이다. 일찍 마니를 품은 사람 속의 사자로서 숭엄(성주사문)의 후사들이 다 숭앙한다. 그러니 오얏과 복사나무에 절로 길이 나고 그 문하에 시장처럼 사람들이 몰려든다. 아침에 세 개더니 저녁에는 네 개이다. 빈손으로 갔다가 꽉 차서 돌아온다. 여엄대사가 사사하기를 정성껏 하여 몇 년 동안 복응하였다."고 하였으니 심광대사가 무염국사의 수제자인 듯하다. 현휘는 고려 태조로부터 정토사를 제공받아 주지하였고 그의 비문이 여기에 세워졌다. 여엄은 고려 태조로부터 지평군 보리사에 주지하기를 요청받아 종언지지로 삼았으며 그의 비문도 여기에 세워졌다. 그러나 심광대사는 영각사에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으니 고려 태조의 지우를 받지 못해서일 것이다. 지금도 영각사에는 안내판에 창건주로 소개된 것 외에는 어떠한 유적도 없다.


877-황소의 난을 피해 통일신라에 귀화한 함양여씨의 시조 여어매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는 중국(中國) 내주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 학사(韓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77년(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어매(御梅)는 두 아들 임청(林淸)과 광유(光有)를 두었는데, 임청(林淸)의 후손 자열(子列)·자장(子章)·존혁(存赫) 3형제와 광유(光有)의 계통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어매(御梅)의 8세손 공계(公係)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공계(公係)의 손자 칭(稱)은 조선(朝鮮)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칭의 증손 자신(自新)은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거쳐 중종(中宗)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부자(父子)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로 산수(算數)를 잘했고 병조 참판(丙曹參判)을 지낸 유길(裕吉)과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을 지낸 우길(祐吉) 대(代)에서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1481년(성종12) 3월 함양군수 여충보(呂忠輔, 재임 1476~1481)가  함양군삼성족보를 만들고, 뇌계 유호인 선생이 군수 명의로 족보서를 썼다. 여기에 보면 당시 함양군 인구의 3분지1이 함양여씨라고 하였으니 대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함양 토성으로 함양박씨, 함양여씨, 함양오씨가 있었다. 3성의 시조(박선,여림청,오광휘)가 서로 동서간으로서 함양군 함양읍 삼산리 삼휴대에서 쉬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883-통일신라 헌강왕이 천령군 지리산에 결언선사를 시켜 엄천사를 창건하고 행차하다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결언선사(決言禪師) : 865년(신라 경문왕 5년): 화엄대덕(華嚴大德) 결언(決言)이 해인사에서 5일간 경을 강의. 大嵩福寺碑銘: 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해인사는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 10월16일 의상 스님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스님이 지은 화엄 도량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던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83년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불상으로 판명됐다. 

고운 최치원의 친형인 현준대덕(賢俊大德)은 정강왕 1년(886)에 화엄경사(華嚴經社)를 지리산 화엄사에 결성하고 경전의 글을 베껴 썼으며, 현준과 함께 결언대덕(決言大德)도 화엄의 종장(宗匠)들이라 할 연기(緣起), 지엄(智儼), 의상(義湘), 원측(圓測)을 위해 남악(南岳)인 화엄사와 북악(北岳)인 부석사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삼았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엄천사를 창건하였으니 엄천사는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 된 것이다.

결언선사는 헌강왕 9년(883)에 엄천사 창건이라 했는데 낭원대사 개청은 이미 헌안왕 3년(859)에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창건 연대가 오히려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대 기술에 착오가 있은 것이다.

중창기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888-통일신라 말기 함양 영각사의 심광대사에게 수학한 고려 태조 국사 여엄


여엄(麗嚴): 862(경문왕 2)∼930(태조13).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禪僧). 해동사무외(海東四無畏) 중 1인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충청남도 남포(藍浦)출신.

9세 때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여 주종(住宗)의 제자가 되었으며, 《화엄경》을 공부한 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러나 교종(敎宗)의 가르침이 진실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참선(參禪)에 뜻을 두었다. 그뒤 숭엄산 성주사(聖住寺)에서 선법(禪法)을 현양하고 있는 무염(無染)을 찾아가서 수년 동안 수행하였다.

888년(진성여왕 2)에 무염이 입적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영각산(靈覺山)에 있는 심광(深光)의 밑에서 수년 동안 수행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운거(雲居)의 지도를 받았다. 수년동안 정진한 끝에 오도하여 운거의 법맥을 전해받고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란이 심하여 월악(月嶽)과 미봉산(彌峯山)으로 피하였다가 소백산에 은거하였다. 그때 그의 덕을 흠모한 고려의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강훤(康萱)이 태조에게 상문(上聞)하자, 태조는 지평(砥平:양평군)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뒤 후학의 지도에 전념하다가 입적하였다. 태조는 대경대사(大鏡大師)라는 시호와 함께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렸다. 보리사 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 보물 제361호)는 양평군 용문면 보리사터에 있었는데, 경복궁으로 이전되었다. 제자로는 융천(融闡)·흔정(欣政) 등 500여명이 있었다.


895-함양의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 혼란기에 천령군 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말기 학자·문장가·경주(慶州)최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간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라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헌강왕 11)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890년(진성여왕 4) 34세 되던 해 외직(外職)을 원하여 지방관으로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조선시대의 태인현) 태수로 나가게 되었고 다시 893년(진성여왕 7)에 부성군(富城郡:지금의 서산시) 태수로 부임했다. 893년(진성여왕 7)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894년(진성여왕 8) 2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해인사 승려 희랑(希郞)에게 준 시(詩)에 제명(題名)한 ‘방노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防虜太監 天嶺郡太守 遏粲 崔致遠)’이라고 한 데서 알찬이 아찬이니 진성여왕 8년 아찬에 승진한 뒤 천령군 태수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895년(진성여왕 9)에 해인사 묘길상탑기를 지었으니 이때는 천령군 태수이었을 것이다. 898년(효공왕 2)에 아찬 최치원이 면직되었다고 《동사강목》에 기록되어 있으니 기록을 일단 믿는다면 이때쯤 천령군 태수와 함께 모든 벼슬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비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 뒤, 각지를 유랑하다가 만년에는 친형 현준(賢俊) 스님과 도우(道友) 정현사(定玄師)가 있는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는 유교·불교 이외에 도교·노장사상·풍수지리설 등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咸陽)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 불교관계의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그 밖에 <숭복사비(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 비문의 글씨가 남아 있다.


898-통일신라 말기 함양 영각사의 심광대사에게 수학한 고려 태조 국사 현휘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부산 아래 통일신라말에 창건된 정토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으며 법경대사 자등탑비(보물17호), 흥법국사 살상탑(국보 102호), 흥법국사 탑비(보물359호)가 전하여 진다.

법경대사는 신라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친 유명한 승려로써 법명을 현휘, 속성 이(李). 본관 남원(南原). 시호 법경(法鏡). 탑호(塔號) 자등(慈燈). 비문에는 법경대사의 행적이 상세히 적혀 있는데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출생하여 20세(898, 효공왕 2)에 부모의 허락을 받고 영각산사(靈覺山寺)의 심광(深光) 밑에서 승려가 된 후 898년(효공왕 2) 가야산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907년 왜구(倭寇)를 피해 무주(武州:光州)에 있다가, 당나라로 가서 구봉산(九峰山) 도건(道乾)에게서 심요(心要)를 전수받고 10년 동안 각지를 두루 편력하다가 924년(태조 7) 고려가 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태조로부터 국사(國師)의 예우를 받았다. 뒤에 중주(中州:中原郡)의 정토사(淨土寺) 주지로 초청되었으며, 신도들에게 종지(宗旨)를 가르쳐 명성을 떨쳤다.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의 나이로 승려가 된지 41년만에 입적하자 태조는 법경(法鏡)의 시호와 자등(慈燈)의 탑명을 내렸다.

비의 글을 지은 최언위는 태자의 스승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며 글씨를 쓴 구족달은 중국의 명필인 구양순체를 익힌 당대의 명필이고 이 비석의 조각은 다른 비석과는 달리 승려 넷이서 조각하였다. 고려 태조 26년(943)에 세웠다.


915-구산선문의 막내 수미산문의 시조 진철 이엄 함양 영각사에서 수도하다


수미산문은 신라 말 고려 초의 고승(高僧) 이엄(利嚴 866~932)이 황해 해주시 광조사(廣照寺)에 개창한 산문. 9산문 중 가장 늦게 개창되었다. 김해부 지군부사 소율희(蘇律熙)의 후원 아래 지내던 이엄은, 915년 성주산문의 심광이 머문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잠시 머문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 왕건의 요청으로 태흥사에 초청되고, 이듬해 사나내원으로 가며, 932년부터 광조사로 옮겨 후삼국 통일 원년인 936년에 죽었다.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늦게 수미산문(須彌山門)이 세워진 것이다. 광조사는 왕건 및 그의 외척 세력인 황보씨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여엄·경유·형미와 함께 중국 도응(道膺)의 법을 전해 받아서, 이들을 4무외사(四無畏士)라고도 한다.

이엄은 속성 김(金). 시호 진철(眞徹). 탑호 보월승공(寶月乘空). 계림(鷄林:경주) 출신. 12세 때 가야산(伽倻山) 갑사(岬寺)의 덕량(德良)을 따라 출가하고, 886년(정강왕 1)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당(唐)나라의 도응(道膺)에게서 선종(禪宗)의 진리를 배우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여 김해(金海) 승광산(勝光山)에 절을 짓고 4년 동안 선종을 전파하였다.

고려 태조의 소명을 받고 개경(開京)에 들어가 우대를 받다가 태조 15년(932)에 해주만에서 서경으로 가는 길목 초입인 수미산(須彌山)에 광조사(廣照寺)를 세워 이엄왕사 자신이 문도를 거느리고 이주해 가 주지가 되어 선풍(禪風)을 선양, 이로써 이엄왕사는 9산선문 중 최후로 세워지는 수미산문의 개산조가 된 것이다.

이엄은 내포의 서쪽 끝 해변인 태안에서 탄생하고 12세에 내포의 진산인 이산(伊山; 지금의 덕산) 가야사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고 사문(沙門)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인데 드디어 고려국 태조의 왕사가 되어 이제 고려 서북지역의 교화를 총괄하는 수미산문의 개산조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63세 때의 일이다.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비롯한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완성된 것이다. 광조사(廣照寺)에 937년(태조 20)에 최언위(崔彦撝)가 세운 비가 있다.

 


 

920-함양의 고려 시대 태조 3년 함양이 소속된 강주 장군 윤웅 고려에 귀부하다

 

고려 태조 천수 3년(920) 함양이 소속된 강주의 장군 윤웅이 그 아들 일강을 보내 인질이 되게 하니, 일강을 아찬으로 삼고 경행훈의 누이동생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낭중 춘양을 강주에 보내 귀부한 것을 위로하게 하였다.

 

995-함양의 고려 시대 성종 14년 허주도단련사로 승격되다


995년(성종 14) 허주(許州)도단련사(都團練使)로 승격되었다. 전국에 도단련사 고을은 7개 있었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진주 관할을 산남도(山南道)라고 하였다. 예종 1년(1106)에 경상진주도라고 개칭하고 이후 누차 개칭하다가 충숙왕 1년(1314)에 경상도라고 정하고, 1경, 2목, 3부, 30군, 92현을 관할하였다.


1012-함양의 고려 시대 현종 3년 함양군으로 개칭되고 군 단위로 환원되다


현종 3년(1012) 함양군(含陽郡)으로 개칭되고 군 단위로 환원되었다.


1018-함양의 고려 시대 현종 9년 합천의 속현이 되다


1018년(현종 9) 합천(陜川)의 속현이 되었다. 속현으로 전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듯하다. 고려 8대 현종 9년(1018)에 강양군을 합주로 승격하였다. 구 "합천군지"에 현종이 대량원군으로 있을 때 현재 합천읍 옥산동 소재 옥산에서 잠적해 살았으며 그의 조모 "신성왕후"의 고향이 합천이라 하여 주로 승격시키고, 12속현(거창, 함양, 산음, 가조, 신현, 초계, 야로, 가수, 삼기, 단계, 함음, 이만)을 두어 주지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12현을 효숙왕후 친부모의 식읍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종 이후 합천에서는 민란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노비가 상전(주인)을 죽임으로써 강등설이 자주 대두되었다.

12월에 거란군 10만 대군의 침입을 강감찬이 귀주대첩으로 물리쳤다.

 

1117-함양의 고려 시대 무기조사 지리산 영원사를 중수하다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갑신(4, 864) 영원조사 창건, 고려 예종 갑오(9, 1114) 무기조사 중수. <영원사사적표>

최자(崔滋 1186-1260) 보한집(補閑集)을 저술. 여기에 지리산 무주암에 살던 대혼자(大昏子) 무기(無己) 스님 이야기가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無住菴)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산, 습득의 무리인가.” 하였다.


1217-고려 후기 명장으로 함양부원군에 봉해진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와 삼성의 전설


함양의 토성으로는 3성(三姓)이 있다. 함양박씨, 함양여씨, 함양오씨가 있는데 이 3성의 유래를 알아본다. 함양읍 북서쪽에 자리한 천령봉 기슭에 삼수대(三樹臺, 三休洞)마을이 있다.

마을로 형성된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마을 이름이 생겨난 유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함양박씨 중시조 상서공 박선과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 함양여씨 중조 여임청이 여흥민씨의 3동서였는데 3공이 산수간에 소요하며 쉬어간 곳을 삼휴대(읍에서 서북쪽 10여리에 있는 지금의 삼산리 삼휴동)라 하니 지금도 지명으로 일러오고 있다.

상서공의 묘는 읍 남쪽 5리여, 여장군묘는 상서공 묘에서 진주쪽으로 10여리, 오상서공의 묘는 여장군 묘에서 또 10여리 유림면 매동에 있는데, 함양오씨 측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오상서가 지리에 밝아 상서공이 먼저 하세하매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아놓은 옥등괘벽(옥등이 벽에 걸려있는 형국)을 양보하고 또 여장군이 작고하매 노서하전(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의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택지하여 들어간 곳이 화심(꽃술의 형국)이라 하며 삼동서의 서차는 오상서가 맞이이고, 여장군이 가운데, 상서공이 셋째분이라 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여, 오, 박으로 되어있다.

<함양오씨족보>에 의하면 오광휘(1177~1230)는 고려 명종 23년(1193)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산종 2년(1199)에 상장군이 되고 고종 4년(1217) 에 추충정난공신, 금자광록대부,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함양여씨 시조 여어매는 중국 산동성 내주 사람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 황소의 난을 피해 877년(신라 헌강왕 3)에 신라에 귀화하여 경상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아들 여임청과 여광유가 함양과 성주로 관향을 달리하고 여임청의 아들 여자장과 여자열로 이어져 번성하여 함양여씨가 함양의 대성이 되었다.

함양박씨의 중시조 박선은 시대 표기가 없으니 논외로 하고 함양여씨의 시조 여임청은 여어매의 아들이니 적어도 서기 977년 전후 고려 초기 인물이다. 오광휘는 고려 후기 고종 시대 인물이니 간격이 200여 년이 된다.

그렇다면 박선, 여임청, 오광휘 3동서가 삼휴대에서 시국담을 하여 삼휴동이라 한다는 전설은 성립될 수 없다. 역사 기록이 없는 지방 전설과 가문 족보가 역사적 사실로서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128-고려 인종 때 고승 성선이 함양군 지리산 엄천사를 중수하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에 있던 엄천사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1129-고려 인종 때 지리산 수정사 낙성법회에서 설법한 함양 엄천사 수좌 성선


고려 인종 시대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절터에 수정사(水精社)란 절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1123, 고려 인종 1) 계묘(癸卯)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1129, 고려 인종 7) 기유(癸酉)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지리산수정사기>

오대사는 조선 시대에도 절이 건재하였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오대사를 읊은 시도 있다. 지금은 국선도에 팔려 백궁선원이란 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145-함양의 고려 시대 인종 23년 함양군으로 개칭되다


1145년(고려 인종 23)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다. 이때 지리지에는 함양의 지명이 함양군(咸陽郡)으로 되어 있다. 함양은 중국 섬서성 서안시 소속 함양시로 진시황의 도읍이다. 중국 지명을 모방하여 개칭한 것이다.


1172-함양의 고려 시대 명종 2년 함양현 감무가 파견되다


1172년(명종 2) 함양현 감무가 파견되었다. 감무는 조선조 때의 현감이다. 속현에는 전임 지방관이 없었는데 명종 이후 점점 하급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조선초인 1395년(태조 4)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될 때까지 함양현 감무로 있었다.


1198-함양 상무주암에서 도를 깨달은 고려 십륙국사 제1세 불일 보조국사 지눌


고려 후기 최충헌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제(王弟)를 임금으로 세운 신종 1년(1198) 봄 41세의 지눌(知訥)은 다른 선승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자리를 옮겨 경전을 읽으며 참선을 계속하던 중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다 다음 구절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김군수(金君綏)가 지은 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曺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

‘선(禪)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른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으로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먼저 고요한 곳이니, 시끄러운 곳이니, 일상의 인연에 따른 곳이니, 생각으로 분별하는 곳이니 하는 것을 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같지 않은 바에 맞춰 아래에서 편안히 즐길 뿐이다.’

도는 산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를 지눌의 3차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이 깨달음은 그에게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서 중생 속에서 도를 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훗날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년 동안 일찍이 방심한 일 없이 마음에 만족한 수행을 하여왔건만 오히려 정견(情見)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보다 홀연히 눈이 열리어 당장에 안락해졌다.”

지눌의 생애를 이때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기도 한다.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을 향한 줄기찬 자기정진의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정법을 펼친 이타행, 즉 자비의 실천 기간으로 나누는 것이다. 즉 자아의 해탈을 위한 자기수행에서 사회 구원을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이때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1200-고려 신종 3년 보조국사 지눌 상무주암에서 순천 송광사로 이주하다


지눌은 43세때인 신종 3년(1200) 수도하던 상무주암을 떠나 다시 송광산 길상사로 옮기면서 그 이름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바꾸는데 이는 그 근처에 정혜사(定慧寺)라는 곳이 있어 정혜결사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정혜사 대신 수선사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다. 지눌은 여기에서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하고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보각선사어록”을 보조자료로 쓰면서 학승들에게 도를 전하였다. 일부에서는 지눌이 바로 여기에서 조계종을 창립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지눌(1158 ~ 1210)은 조계종(曹溪宗)의 개조(開祖). 속성 정(鄭). 호 목우자(牧牛子).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 황해도 서흥(瑞興) 출생.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1185년 경북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3년간 머물며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1208-함양 금대암에 은거한 고려 십륙국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


이규보(李奎報)가 찬술한 『조계산제이세고단속사주지수선사주증시진각국사비명병서(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住贈諡眞覺國師碑銘幷書)』에 따르면, 국사의 휘는 혜심(慧諶, 1178~1234년)이고, 자는 영을(永乙)이며, 스스로 무의자(無衣子)라고 불렀다 한다. 속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식(寔)인데 나주 화순현 사람이다.


출가 후 그의 수행에 대한 기록으로는 비명에 “그가 일찍이 오산(蜈山)에 거하면서 한 반석 위에 앉아 주야로 항상 선정을 닦고 5경이 되면 매우 큰 소리로 게송을 읊었으며,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거할 때는 대 위에서 연좌하여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각고의 수행을 하여, 그 결과 도(道)와 함께 정신이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형체[육체]를 잊어버렸다[凝神忘形].”고 했다.   “蜈山 坐一磐石 晝夜常習定 每至五更唱偈 〈中略〉 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 雪積沒頂 猶兀坐如枯株不動 〈中略〉 其刻苦如此 非夫與道凝精 外生死遺形骸者 孰至是哉”


31세(1208)에 지눌이 그에게 사석(師席)을 물려주고 규봉암(圭峯庵)으로 물러가려고 하니, 그는 굳이 사양하고 지리산(금대암일 것이다)으로 깊이 은둔하여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종문(宗門)의 명예를 초연히 버리고서 심요(心要)를 닦는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33세(1210)에 지눌이 입적하자, 무의자는 출가한 지 8년 만에 임금의 칙명으로 부득이 수선사 2대 사주(社主)가 되어 공식적으로 지눌의 법석을 이어 개당(開堂)하고 교화를 폈다.


송광사 제2세 국사이신 진각국사<진각혜심 眞覺慧諶: (1178~1234)께서 이곳에 주석(駐錫)하시며 1226년(고종 13)에 종문(宗門)의 최고 저서인 섬문염송집(禪門염頌集) 30권을 펴내어 광원유포(廣遠流布)하였다 하여 그 뒤부터 광원암(廣遠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시호 진각(眞覺). 탑호 원소(圓炤). 1201년(신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계사(曹溪寺)의 지눌(知訥)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寺)에 들어가 그 뒤를 이어 조계종 2세가 되었고,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禪師), 뒤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19년(고종 6) 수선사에 있으면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임하다가 월등사(月燈寺)에서 죽었다. 송광사(松廣寺)에 비가 있다. 저서에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30권, <심요>1권, <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1편, <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2권, <금강경찬(金剛經贊)>1권, <선문강요(禪門綱要)>1권이 있다.


1210-고려 보조국사의 입적후 진각국사 계승차 함양 금대암을 떠나 송광사로 귀환하다


1208년(고려 희종 4)에 지눌이 혜심에게 사석(師席)을 물려주고 무등산 규봉난야로 은퇴하려고 하자 혜심은 고사하였다. 안 되자 드디어 지리산(금대암일 것이다)으로 떠나 몇 해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1210년(희종 6)에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문도들이 임금에게 아뢰어 사석을 잇게 하였다. 혜심은 부득이 송광사에 돌아와 계승하고 설법하였다.


1254-고려 문신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무주암 승려 무기의 시화가 수록되다


최자(崔滋 1186-1260) 보한집(補閑集)을 간행. 여기에 지리산 무주암에 살던 대혼자(大昏子) 무기(無己) 스님 이야기가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無住菴)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산, 습득의 무리인가.” 하였다.


1259-함양 안의 출신으로 고려 고종 때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은 하천단


하천단(河千旦) ?~1259(고종46): 고려의 문장가. 이안현(함양군 안의면) 사람이다. 성질이 곧고 문장에 뛰어나 이수(李需)·이백순(李百順)·이함(李咸)·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당시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지었다. 만년에는 불전(佛典)을 좋아했다. 일찌기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고종이 대사동(大寺洞)에 이어(移御)하려 하자 기거주(起居注) 정의(鄭義)와 함께 대사동은 백호가 입을 벌린 형세이니 군신(君臣)이 호구(虎口)에 들어가서야 되겠느냐고 하여 중지케 했다. 《고려사》 하천단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휘로 인해 아침 조자로 대체하였다. 아예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음현 인물조에는 단자가 바진 하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1284-함양 상무주암에서 수도한 고려 십륙국사 제6세 원감국사 충지


1284년 고려 충렬왕 10년 갑신 3월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1226-1292)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 참선하다.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인형과 같았으며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들이 무릎 위에 앉아서 놀았다.

충지(冲止 1226~1292) 속성 위(魏). 호 밀암(密庵). 초명 법환(法桓). 이름 원개(元凱). 시호 원감국사(圓鑑國師). 탑호 보명(寶明). 정안(定安, 장흥군) 출생. 1284년(충렬왕 10)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한림(翰林)이 되었다.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승려가 되었으며, 제5세 원오(圓悟)의 법을 이었다.



1286-원감국사 충지 고려 십륙국사 제6세 계승차 함양 상무주암을 떠나 조계산으로 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병술 2월 제5세 원오국사가 입적하자 원감 충지는 대중의 추천으로 상무주암을 떠나 조계산에 가서 4월 수선사 제6세 조사가 되었다. <원감국사비명>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고 대도(大都:현 北京)에 가서 빈주(賓主)로 대접받고 금란가사와 백불(白佛)을 하사받았다. 시와 글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저서에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이 있다.


1298-함양 휴천면 문정리 도정정사에 은거한 고려 원간섭기의 이억년


이억년(李億年) :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위성(渭城: 함양)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

《성주이씨세보》에 “또 다른 이름은 영(永)이요 호는 요산재이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문과에 올라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무술년(1298, 충렬왕24)에 위성으로 이거하여 도정정사를 짓고 십재홍진몽외사(十載紅塵夢外事)하니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란 시를 지었다. 묘는 함양 남쪽 휴천면 문정촌 장항촌내 임좌다. 영정은 안산사에 봉안하다. 부인은 경주이씨 용간의 딸이요 묘는 쌍분이다.” 하였으니 묘비문과 족보 행적이 상이하다. 묘비문의 전면은 고려처사(高麗處士)로 표기하였고 비문에선 문과급제하자마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족보는 개성유수를 역임한 뒤로 서술하고 있다. “10년의 홍진을” 하는 시구를 보면 10여 년 벼슬살이를 한 듯하다. 다만 개성유수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처음 설치되었다.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시대까지는 이억년의 문과급제 사실만 알려지고 개성유수 벼슬 사적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1월부터 8월까지 왕위에 올라 재임중 여러 사람을 중경유수나 개성부윤을 시켰는데 이억년의 이름은 없지만 그전에라도 역임했을 수 있다. 이억년은 충선왕파로서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자 산간오지 함양 지리산 도정동으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다시 복위했을 때는 이미 별세하여 복권되지 못한 듯하다.

<연려실기술>(1776, 영조 52년)의 성주 서원조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1602,선조35)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 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1635,인조13)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 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 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 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 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 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 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 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 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 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 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 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 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 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 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우애 이야기- 투금탄(投金灘)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앞 한강여울(지금은 )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1344-고려 충목왕에게 《정관정요》를 강의한 함양부원군 박충좌


박충좌(朴忠佐 1287∼1349)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본관은 함양(咸陽).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왕에게 《정관정요》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함양박씨의 중시조 고려 상서 박선의 후손이다. 시호는 문제(文齊).


1374-함양 유림면 국계리 제계서재에 은거한 고려 말의 삼은 목은 이색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의 원래 지명은 굽개이니 말발굽의 뜻이다. 한자로는 발굽 제자에 시내 계자로 제계이다. 제계로 쓰다가 지명의 아언화(우아한 말로 바꿈) 현상으로 국화 국자 국계로 바뀌었다. 국계리 화장산 아래에 제계서재 터가 있는데 그 표석에 제계서재는 이목은이 건축한 것이고, 강사숙재가 중수한 터란 명문이 있다. 목은 이색이 언제쯤 여기에 살았을까. 고려가 망한 뒤 살았다는 추정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목은 행장에 의하면 모친상 이후 공민왕이 서거한 뒤 7~8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바 그대쯤 함양에 은거한 것으로 추정한다. 살다간 몇 년 뒤 왜구가 함양에 침입하여 목은의 큰 동서 민근(閔瑾)의 집이 왜구에 의해 약탈당하자 위로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제계서재는 사숙재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1444년(세종 26) 겨울에 과거 공부하고 1474년(성종 5) 여름 양부 강순덕(姜順德)의 상을 당하고 겨울에 가족을 이끌고 내려와 살았다. 이때 함양군수 김종직을 따라 제계리를 방문한 뇌계 유호인과 처음 만나 교유하였다. 강순덕은 조선 태종 때의 권신으로 함양 수동 까막섬에 귀양와 산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의 사위다. 강희맹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근재 안축의 후손 안숭효(安崇孝 ?~1460)의 사위다. 제계서재는 강희맹의 둘째 사위 김성동, 사육신을 밀고한 김질의 아들에게 전해졌다. 김성동은 여기에 살다가 묘소도 여기에 있어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나중에 경기도로 이장하였다.

1452년 단종 즉위년 11월 앞서 이숙번(李叔蕃)의 처 정씨(鄭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부처(夫妻)는 노비(奴婢), 전지(田地), 가사(家舍), 재산(財産)을 함께 서명(署名)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맏사위인 전 현감(縣監) 강순덕(姜順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내가 전의 문안(文案)을 고치고자 하여 강순덕으로 하여금 가져오라 하였으나, 강순덕이 이에 따르지 않으므로써 모자(母子)의 의리를 어기었습니다 또 그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수양(收養)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고 칭탁하고, 노비를 마음대로 여러 조카에게 나누어 주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1구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남편의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단종실록.

이색(1328 ~ 1396)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하륜(河崙)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1375-고려 문신 쌍매당 이첨 하동 귀양길에 함양현과 사근역을 지나며 시를 짓다


고려 우왕 1년(1375)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1405) 하동으로 귀양. 함양현과 사근역을 지나며 함양객관(咸陽客館 삼구 太守罷衙來勸酒), 효발함양(曉發咸陽 초구 再過咸陽縣), 차사근역판상시운(次沙根驛板上詩韻 사구 勝地起新亭) 등의 시를 지음. <쌍매당집>

이첨(李詹 1345~1405) 본관 신평(新平). 자 중숙(中叔). 호 쌍매당(雙梅堂). 시호 문안(文安).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에 합격, 136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1369년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375년(우왕 1) 우헌납(右獻納)에 올라 이인임(李仁任) 등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388년 풀려나 내부부령(內部副令)·응교(應敎) 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시를 맡아보다가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관련되어 결성(結城)에 귀양갔다.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기용되어 1400년(정종 2)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태종 2)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했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에 《저생전(楮生傳)》 《쌍매당집(雙梅堂集)》 등이 있다.


1379-왜구의 함양 침입, 진주목사 박자안 장군의 토벌


박자안(朴子安 ?~1408) 시호 양혜(襄惠). 고려 말 · 조선 초의 무인으로 함양인이다. 1379년(우왕 5) 진주 목사로 있을 때 왜구가 함양지방을 노략질하자 윤가관(尹可觀)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왜구 18명을 참하였다. 1389년(창왕 1) 원수(元帥)로서 경상도원수 박위(朴葳)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여, 적선 약 300척을 불사르고, 붙잡힌 고려인 약 100명을 데려왔다. 그해 경기연해절제사(沿海節制使) ·전라도절제사로서 전공을 세웠다. 1393년(태조 2) 좌도수군도절제사(左道水軍都節制使)에 승진, 이듬해 전라도도절제사에 이어 경상 ·전라도도안무사(都按撫使)가 되었다.


1397년 군율(軍律)로 참형을 당하게 되자, 아들 실(實)이 정안군(靖安君:뒤의 태종)에게 애소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삼척(三陟)에 장류(杖流)되었다. 세종(世宗) 때 전라도 수군처리사(水軍處理事)와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했던 실(實)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실(實)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자안이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을 처리하였는데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태조(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실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 안에 잠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에서 뒹굴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조는 실의 효행에 감동하여 구명사절을 보내어 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자안이 구명되었고, 실(實)은 보은의 뜻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1400년(태종 즉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5년 경상도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 중군도총제를 거쳐, 공안부판사로 있을 때 파면되었다. 1408년 다시 등용되어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경기 ·충청 ·전라수군도체찰사(水軍都體察使)를 겸직하였다. 뒤에 공안부판사로서 국장도감판사(國葬都監判事)에 이르렀다.

 

1380-왜구의 함양 침입, 사근산성 함락과 함양현 감무 장군철의 전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했으나, 1380년(우왕 6) 8월에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 지금의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 놓고 상륙하여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여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배로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왜적과의 진포싸움에서는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하여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격렬하였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沃州 : 지금의 沃川)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천 등지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산성(沙斤山城)을 함락시켜 함양현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전사하였다.

함양 사근산성

경남 함양군 수동면(水東面) 원평리(院坪里)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크기  면적 116만 7045㎡. 사적 제152호. 1966년 지정. 면적 116만 7045m2. 함양의 외성(外城)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경상도 서부에서 전라도 중부로 넘어가는 요충지에 있다.

그 이전의 기록은 없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1 〈함양군 성곽조(城廓條)〉에는 사근성의 석축 둘레가 2,796자라 하고, 그 안에 3개의 연못이 있다 하였다. 1380년(우왕 6)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패전하여 왜구에게 성을 빼앗긴 뒤 돌보지 않다가 조선 성종 때 수축하였다고 한다. 또 《함양읍지》에, 성을 친 왜구는 단숨에 함양을 함락시키고 전라도 남원군 인월(引月)에 쇄도하였다가, 때마침 출동한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황산(荒山)에서 격파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의 국경분쟁과 왜구에 시달리던 곳으로 짐작된다.

산성의 성벽은 부분적으로 퇴락해 있으나, 축성상태가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어 규모를 헤아릴 수 있다. 석축의 잔존부분은 직사각형의 편평한 자연석 또는 가공석의 정연한 어금쌓기로 되어 있다. 또 축조상태는 매우 견고하여, 본래의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고, 성내의 산꼭대기에는 물이 가득 찬 연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래 북쪽 물가에는 정여창(鄭汝昌)을 향사(享祀)한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마안산성(馬鞍山城)이 가까이 보인다. 

 

1380-왜구의 함양 침입, 사근내역 혈계 전투와 남원 인월에서의 황산대첩

 

진포 전투에서의 패잔병 왜구 360여 명은 옥주(沃州 : 지금의 沃川)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천 등지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산성(沙斤山城)을 함락시키고 사근내역(沙斤乃驛:지금의 함양군 수동면 소재지)에 집결, 반격하여, 이 당시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裵克廉·金用輝, ?~1388]·池勇奇·吳 彦·鄭 地·朴修敬·裵 彦·都 興·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죽은 군사들의 피로 말미암아 강은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마치 피의 강처럼 붉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피내 즉 혈계(血溪)이다. 함양읍성의 청사가 소실당하고 이후 문필봉 아래로 읍성을 옮기어 토성을 쌓았다.


왜구는 계속하여 다음달인 9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지금의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李成桂)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寓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黃山)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명만아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1388-왜구의 함양 침입 도지휘사 정지 장군의 전승


왜적이 함양(咸陽)에서 운봉(雲峯)ㆍ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니, 도지휘사 정지가 도순문사 최운해(崔雲海), 부원수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 김백흥(金伯興)ㆍ진원서(陳元瑞), 전주 목사 김용균(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都興),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등을 독려하여 쳐서 크게 물리쳐 왜적 58급을 베고, 말 66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밤에 도망갔는데, 정지가 여러 군사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니, 적이 배에 올랐다. 창(昌)이 정지 등에게 궁중의 술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1389-왜구의 함양 침입, 진주목사 김상 장군의 순국


김상(金賞, ?~1389)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언양인이다. 1380년(우왕 6) 8월 사근내역 전투를 지휘한 9원수 중의 1인인 김용휘 장군의 맏아들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87년(우왕 13)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었다. 이듬해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였다. 1389년(창왕 2) 7월 진주절제사 겸 진주목사로서 왜구가 함양에 침입하자 이를 토벌하러 갔으나 패배하고, 관군이 구원하지 않아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심문관 이옹을 보내 관군을 국문하고 부진무 하치동과 배리 파두 등이 일찍이 이빈의 전사 때도 구원하지 않더니 이번에도 또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여 참수하고 도진무 하취동 등 13인은 각각 곤장 1백 대를 쳤다. 1390년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순성익대공신에 책록되었다.


1389-왜구의 함양 침입, 역승 정인의 처 송씨의 순절


고려 창왕 1년(1389) 기사 함양(咸陽) 사람 전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처 송씨(宋氏)가 왜놈의 노략을 당하였는데, 왜놈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송씨는 죽음으로써 맹세하여 좇지 아니하니, 왜놈이 즉시 그를 죽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태종실록>


1390-함양의 고려 시대 공양왕 2년 이안현이 감음현에 이속되다


공양왕 2년(1390)에 신라 천령군의 속현이었던 이안현(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마리면)을 감음현(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에 부속시켰다. 조선 태종 때 안음현으로 고치고 지금 함양군 안의면 지역으로 현청을 옮겨 1914년에 안의삼동에서 원학동을 거창군에, 심진동과 화림동을 함양군에 분속시킨 때까지 존재했다.


1392-고려의 멸망 후 함양에 귀향하여 은거한 두문동 72현 덕곡 조승숙


조승숙(趙承肅 1357∼141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 함양출신. 아버지는 경(璥)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복주(復周)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특별히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어 충하사(充賀使)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귀국하였다.그 뒤 향리에 퇴거할 때에는 임금이 침향궤(沈香궤)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가 마치 이 물건과 흡사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고 하였다.

 1391년(공양왕 3)부여감무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 지곡면 개평리 경남 문화재자료 76호)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그 교수정은 중수를 거듭하여 오면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색(李穡)·길재(吉再) 등과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특히 길재와 함께 수창한 시는 유명하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사람이며, 성종은 그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여 유호인(兪好仁)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 성종 사제문 수양명월 율리청풍 (首陽明月 栗里淸風) 비석이 교수정 옆 자연석 위에 세운 비석에 새겨져 있다. 1701년(숙종27)에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덕곡집》 1권 1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과 길재 야은이 주고 받은시


           산을 등지고 물에 임해 한가하니

           달밤과 안개 아침 흥이 여유롭네

           낙동강변 친구가 나에 대해 묻거든

           대숲 깊은 곳 누어 책 본다 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