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진동


banzak.gif 장수사(長水寺)와 문곡대사(文谷大師)

banzak.gif 덕유산 심진동 장수사 용추암 연혁

banzak.gif 유장수사기 - 옥계 노진 찬

banzak.gif 지우산 은신암

  banzak.gif 장수사략

  banzak.gif 용추폭포

遊尋眞洞記

 

東谿集卷之二 豐壤趙龜命錫汝甫著
 
遊尋眞洞記 丙午


伯氏與安陰宰兪君。約會長水寺爲別。余亦欲賞尋眞泉石。同行抵安陰邑底。登光風樓。主人方試射帿。215_031b伯氏仍設餞遲留。余與德老叔先發。寺僧持輿。待于洞口。凡石冗流崎嶇。過涉者十餘里。路傍有小巖。刻尋眞洞三字。過此石。始有盤陀。而水始有滙涵者。行五六里。抵釜潭。大石彌亘。中爲絶崖。漫流忽束下墜深潭。崖左。刻噴玉瀨。又數里爲菜甕。巖石遜釜潭。而水勢益峻。崖左右。俱刻龍吟瀨。有石凹呀然。深可丈餘。寺僧稱古有異僧來住。殺虎淹葅于此。故名菜虎巖。余漫應而已。歸考玉溪記。有菜甕之號。然後知甕轉爲虎。愚髡從而傅會耳。行數百步抵寺。處勢奧隘。略似海印。乃中間移建。非舊基也。暫憇法堂。伯氏與215_031c安陰宰追到。日已暝。同就東上室宿。時仲夏小望。月色極明。山空夜靜。淸磬發省。去年定慧師之移錫此寺也。與之有一宿談禪之約。師今入金剛坐禪。聲響不可接。而其門徒。亦散寄他菴矣。所宿適其講室。撫迹惆悵者久之。翼朝輿出寺後。逶迤到龍湫上流。盤石瑩滑。流波散布。近崖石益傾瀉可走丸。與德老。捨履以防蹉跌。促足擇步。挨至崖右。有石罅。劣容半身。垂身緣下。抱樹據石。以臨瀑布。心戰魄動。毛髮盡竪。不可留也。復遷延由石罅而上。回望前岸平衍。宜於俯瞰。遂涉川而西。卸輿小歇。步尋水源。其上百餘武215_031d之間。石之呈露於水面者。如鷺之集。而星宿之麗。水縈懸蹙。放跬步百變。兩岸雜樹。交蔭幽敻。淒寒失去朱炎。仰見對岸。梵宇隱暎。盖浮屠殿云。而力疲不能尋。水石之觀。窮于此。還由右逕。入八相殿。卽舊基重建。而東有千丈全石之峰。跱立特雄。促輿至龍湫前岸。排茵列坐。大抵瀑布。上作三節。下垂百餘尺。飛沫如雪。聲震一洞。亦生平奇觀也。八相石峰。正鎭瀑頭。若助其雄奮之氣。小瀑一條。橫射右落。未及潭數尺。崖石突起。宛然成一佛軀。髡頭擁緇。側立以承之。瀑抵佛頂。劃分爲二。若流頭也者。不假斧鑿。奇巧天215_032a成。余念佛法起於中古。而山川開闢之初。已有此象。豈亦天數之先定者耶。安陰三洞。名於嶺表。右爲花林。左爲猿鶴。中則尋眞也。甲辰秋。余從伯氏遊。入自花林。迤出猿鶴。領略二洞之景。而尋眞以路迂遺焉。常自耿耿如子瞻之見韓,富。而不及見希文爲恨。今三載而始獲償願。若取三洞而定甲乙之次。松臺之奇壯。月城之幽絶。葛川之靚曠。搜勝之關鎖。殆可謂僊區福地。猿鶴宜爲第一。花林六十里淸川白石。曲曲可亭。尋眞一區之勝。似不能以抗之。而抑如孫興公之評潘陸文章。花林則所謂爛若披錦。無處不善。215_032b尋眞。乃排沙簡金耳。還寺。朝飰而歸。

 


息山先生別集卷之三
 地行錄[八]
尋眞洞記


自月淵。轉出縣治之後水交處。有鄕校。茂林喬松。煙霞自留。北行二十餘里。水石益富。石有偃立而礙者。水與激而爭。石有隆而斷者。水與凌而落。石有嵁而深者。水與讓而留。名其最曰風流巖。曰龍吟㙜。曰彩虎巖。上下數百步。躡石亂流。入長水寺。厥山曰智雨。亦祖於德裕。北谷叢薄。中窺龍湫。東上崱屴。登兜率㙜。下臨無地。爽然不可久。尋眞之勝。亦盡於此矣。

 

유심진동기 (遊尋眞洞記)  

 

『유심진동기(遊尋眞洞記)』는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 1852~1898)이 안음현의 심진동(尋眞洞)을 유람하고 기록한 것이다. 안음현의 화림(花林)과 원학(猿鶴), 심진(尋眞) 세 동중에서 심진이 가장 산수가 뛰어나다고 소개하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며 답사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읍의 북쪽 15리 쌍림촌의 심원정(尋源亭)에서 물이 굽이돌아 흘러 동입구에 이르면 두개의 바위가 있으니 탄금(彈琴)과 취적(吹笛)이다. 예부터 여러 선비들이 이 바위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그 아래로 암혈처에 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은데 물의 깊이는 알 수가 없으며 물과 돌이 한빛깔이 되어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이루고 또 몇 리를 내려가면 암벽들이 마치 서적을 수 만권 쌓아놓은 형상이고 그 속에 굴이 있으니 가히 수천명을 수용하며, 장수사 뒤에는 용추폭포이며 산의 절정은 은신암(隱身菴)이고 뒤는 덕유산의 남쪽기슭과 호남 무주의 경계이며 산세의 깊고 중후함이 수 십리를 이어져 여행하면서 피로함을 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건창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이다.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하였으며, 강위(姜瑋)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김택영(金澤榮)ㆍ황현(黃玹)과 가까웠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등용이 연기되어 1870년에 홍문관에 들어갔고, 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학적으로 김택영에 의해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저서로 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과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을 개관하고 평가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