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제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또는 해운(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기록의 전함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장차 바다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할 때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 하였다.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학문을 배우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경문왕 14: 874)에 예부시랑 배찬(裴瓚) 아래에서 한번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에 임명되었고 그 치적의 평가에 따라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 무렵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치원을 불러 종사관을 삼고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장·서·계((表狀書啓)가 지금[고려]까지 전한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지자 희종(僖宗)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憲康王 11: 885)에 조칙을 가지고 사신으로 보내었다. [신라 왕이] 붙들어 두려고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로 삼았다.

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왕조]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太山郡)[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치원은 부성군(富城郡)[현재의 충남 서산시]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 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 황제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토벌하니 고구려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 지방의 전난 평정에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을 계속 짓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顯慶) 5년(태종 무열왕 7: 660)에 이르어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사와 범선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고 이어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는데 성향이 서로 달라 반란을 일으키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겼습니다. 총장(摠章) 원년(문무왕 원년: 668) 영공(英公) 서적(徐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右)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습니다.

[발해는] 개원(開元) 20년(발해 무왕 14: 732)에 중국을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칠 때 저희 왕 김모를 태위(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으나 깊은 겨울 눈이 많이 쌓이고 양국 군대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00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평화로우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유학의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표(表)를 받들고 이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함에 무릇 극도로 간청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태풍을 만나 명주(明州) 해안에 다다랐을 때, 절동(浙東)의 어느 관리가 호송하여 서울에 들어갔고, 중화(中和) 2년(헌강왕 8년: 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은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 마침내 초주(楚州) 해안에서 배를 내려 빙돌아서 양주(楊州)에 이르러 황제가 촉(蜀) 지방에 행차하신 것을 알았는데, 고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보내 서천(西川)에까지 호송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증을 내려 주시고 지방 관서로 하여금 선박과 식사 및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말과 사료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장졸을 파견하여 어전에 이르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 편지 중의 태사 시중이라고 한 사람의 성명을 또한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당나라[大唐]를 섬기다가 동쪽의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면서 스스로 위로하였고,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예컨대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현재의 경남 마산시]의 별장 등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

처음 서쪽으로 유학하였을 때 강동의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나은은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함께 합격한 고운(顧雲)과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려 하자 고운(顧雲)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내 들으니 바다에 금자라가 셋이 있어

금자라 머리에 이고 있는 산 높고도 높구나

산 위에는

구슬과 보배와 황금으로 장식된 궁전이 있고,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의 큰 바다라

가에 찍힌 한 점 계림이 푸른데

자라산 수재를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쓰기를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한 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고 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중국에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전에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고서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라.』는 귀절이 있었다. 그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와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계실 때 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1022)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崔致遠 字孤雲 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致遠爲從事 以委書記之任 其表狀書啓 傳之至今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太山郡太守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太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入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右 高句麗殘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末學 海外凡材 謬奉表章 來朝樂土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金張廉 風飄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太尉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已前事例分明 伏乞太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貝闕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林碧 鼈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 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 有鷄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太平二年壬戌五月 贈諡文昌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