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 사적(事蹟)


사근도 찰방 아정 이덕무의 군자사 사적초

사근역(沙斤驛)의 한죽당(寒竹堂)과 수수정(數樹亭)

 전국 찰방 역명

  

東谿集卷之二 豐壤趙龜命錫汝甫著                조구명(趙龜命, 1693~1737)
 
遊龍游潭記 1724


甲辰八月初吉。伯氏發行。向智異。余及遇命,載福從215_028a焉。沙斤督郵權君熻。亦與其子尙經俱。先賞龍游潭。地勢幽邃。石皆犬牙。水十步九折。盤渦激射。其聲若雷。以龍堂之在對岸也。編木橋之。下臨不測。懸危凜慄。不可越也。傍橋躐石而東者百餘武。有大石附岸橫跱。圍若環玦。䨟若樽罍。其後數丈石。痕作蹊。蜿蜒以接之。若龍之抑首而撥尾也者。磨礱瑩滑。狀極詭怪。潭之名所由起也。是夜。與定慧師。宿君子寺。師云昔有馬迹祖師。結夏于潭上。爲水響之妨於聽講。怒其龍。鞭而逐之。其負痛閃挫。而形于石者如此。是說也怳惚不經。人不肯信。余惟天下事有不可以常理215_028b盡之。韓子謂浮屠善幻多技能。安知其無降龍伏虎之術。而龍之性不見石。入石則石爲之透。以爲堅頑難陷者。特人之所見然爾。人之於人。猶或不相測其情狀。况於神龍之變化哉。謂有是事而信之。妄也。謂無是事而不信之。亦妄也。盖水石之離於山北者。玆潭爲最。余喜其氣勢奇壯。使遇命題五人名於石之南壁。自題石抉川駛龍怒神驚八字於下。將使石工刻以識之。詩曰。

地勢陰森最。川流激射來。

風雲龍拔出。巢宅石穿回。

凜若深秋氣。公然白日雷。

危橋跨不測。生路渡方開。

 

청장관전서 제68권 아정 이덕무 지음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탄보묘(誕報廟)


남원(南原)의 부성(府城) 서쪽에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그런데 신축년(정조 5, 1781) 봄에 금상(今上 정조)께서 어필(御筆)로 탄보묘(誕報廟) 3자를 써서 감서(監書)에게 명하여 가지고 가 걸어 놓게 하였다.
임인년(정조 6, 1782) 가을, 내가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하던 길에 관왕묘에 들러 배알하였다. 관왕의 목상(木像)이 매우 장대한데 금관(金冠)을 쓰고 홍포(紅袍)를 입었고 앞에는 두 장수가 시립(侍立)하고 있었다.
사당의 뜰에 비(碑)가 있는데 만력(萬曆) 기해년(선조 32, 1599)에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세운 것으로 비가 다 깎이고 떨어져나갔다. 비문도 유정이 지은 것인데 말이 매우 졸렬하고 거칠다.

 

유정(劉綎)이 이름을 쓰다


운봉(雲峯)의 서쪽 고개를 여원령(女圓嶺)이라 하고, 동남쪽 고개를 팔량령(八良嶺)이라 하는데, 여원령은 높고도 험준하여 평지와의 거리가 10리나 된다. 그리고 이따금 검은 돌이 병풍같이 서 있는데, 돌 하나의 높이가 한 길 남짓 하였다. 그 돌에,

"만력 21년 계사 여름 5월에 정왜도독인 홍도 성오 유정이 이곳을 지나다.[萬曆二十一年癸巳歲仲夏月征倭都督洪都省吾劉綎過此]"

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손바닥만한데 힘이 있어 볼만하였다. 이 돌을 지나 조금 동쪽으로 가면 길 남쪽에 돌이 깎아세운 듯이 서향(西向)하고 서 있다. 거기에는,

"만력 22년 갑오 봄 2월에 정왜도독 예장 성오 유정이 또 지나다.[萬曆二十二年甲午歲仲春月征倭都督豫章省吾劉綎又過]"

라고 새겨져 있는데, 글자가 앞의 돌에 새긴 것과 비교하면 조금 해정하다.
계사년에 새긴 글씨에는 붉은 색으로 메웠고 돌이 드러나게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데, 갑오년에 새긴 것은 글자와 돌이 모두 검고 돌이 가려져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임인년(정조 6, 1782) 가을, 다시 지날 때에 비로소 발견하였다.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신라가 처음 우역(郵驛)을 둔 해


신라(新羅) 소지왕(炤智王) 9년(487) 정묘 3월에 처음으로 우역(郵驛)을 두고 관도(官道)를 닦았다. 이 해는 바로 제(齊) 나라 영명(永明 무제(武帝)의 연호) 5년에 해당한다.

 

사근역승(沙斤驛丞) 선생안(先生案)


사근역승(沙斤驛丞)의 선생안(先生案)은 예부터 있었는데 중간에 유실(遺失)되었고, 현종(顯宗) 8년(1667) 정미에 찰방(察訪)인 조 상우(趙相遇)가 비로소 수집(修輯)하였다. 이영춘(李榮春)으로 첫머리를 삼고, 그 다음은 심 일장(沈日章)ㆍ이 형(李泂)ㆍ한행(韓行)을 기록했는데, 이 네 사람은 도임(到任)한 일자와 과만(瓜滿 임기(任期)가 다 찬 것을 말한다)의 연월(年月)이 없다.
그리고 이희경(李喜慶) 때부터 비로소 임기의 연월이 기록되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9년(1581), 선조(宣祖) 14년 신사에 도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영춘(李榮春)으로부터 조상우(趙相遇)에 이르기까지 무릇 42인이며, 조상우의 교체승(交遞丞)인 방이원(方以遠)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무릇 65인으로 총 1백 7인이다. 김종무(金宗武)는 선산(善山)에 있다가 만력 경인년(선조 23, 1590) 8월에 도임했다가 임진년(선조 25, 1592) 4월에 상주(尙州)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사간(司諫) 심대부(沈大孚)는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기사년(인조 75, 1629)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감(縣監) 김수징(金壽徵)은 숙종(肅宗) 기미년(1679)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고, 음죽(陰竹) 이인상(李麟祥)은 영종(英宗) 정묘년(1747) 7월에 도임했다가 기사년(1749) 8월에 임기가 차서 돌아갔는데 이들은 다 가장 이름이 나 있어 알아주는 자들이다.
또 지금의 우의정(右議政)인 김익(金熤)이 영종 경인년(1770) 1월에 필선(弼善)의 위패(位牌)를 어긴 죄로 외직(外職)에 보직되었다가 2월에 용서되어 돌아갔다. 역고(歷考)해 보니 선생안(先生案) 속에 제공(諸公)들의 재임(在任)의 연월(年月)은 만력(萬曆) 연간부터 숭정(崇禎) 임오년(인조 20, 1642)에 이르기까지는 4~7년 사이였으며, 이초로(李楚老)로부터 처음으로 재임 기간이 3년이었고 이 뒤로 빨리 교체된 자들이 서로 뒤를 이었으니 승제(乘除)의 이치를 관찰할 수 있다.
찰방(察訪) 변종수(邊宗洙)채무일(蔡無逸)을 선생안의 머리에 추록(追錄)하면서,

"중종(中宗) 임오년(1522)에 생원과(生員科) 제일(第一)로 뽑혔고 사근역 찰방(沙斤驛察訪)으로 있으면서 중종 35년 경자년(1540)에 병과(丙科)의 제일(第一)로 등과하여 벼슬이 헌납(獻納)에 그쳤다."

하였다.

 

상산찬(商山饌)


내가 사근역(沙斤驛) 부임했을 때 우공(郵供)이 충분치 못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의 식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하루는 손님이 나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왜 음식이 그리도 담박하오?"

하기에 내가 장난삼아,

"이것은 상산찬(商山饌)이오."

하였다. 손님이,

"채소만 있고 영지(靈芝)가 없는데 어찌 상산찬이라 하오."

하기에 내가,

"신김치 짠김치에 익힌 나물과 국이 모두 무이니, 이 어찌 사호(四皓)가 아니오?"

하였다. 하루는 또 손님이 나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오늘 음식은 무슨 찬(饌)이오?"

하기에 내가,

"이 음식은 풍년찬(豐年饌)이오."

하였다. 손님이,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어째서 풍년이라 하오?"

하기에 내가,

"이 음식은 신김치ㆍ짠김치ㆍ생채(生菜)가 모두 무이니, 이는 삼백(三白)이오. 옛말에 이르기를 '납일(臘日) 전의 삼백은 풍년의 징조이다.' 했소."

하였더니, 손님이 마침내 껄껄 웃으며,

"동파(東坡)의 효반(皛飯)에 비하면 그래도 뜻이 심오하오."

하였다.


[주D-001]상산찬(商山饌) : 상산사호(商山四皓)가 먹던 음식. 진(秦) 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사람의 백발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기리계(綺里季). 뒤에 모두 한 혜제(漢惠帝)의 스승이 되었다. 여기서는 은자가 먹는 담백한 음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2]동파(東坡)의 효반(皛飯) : 동파는 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호. 효반은 백반(白飯)을 가리킨다. 동파가 유공보(劉貢父)에게 "나는 동생과 과거 공부를 할 때 매일 삼백(三白)을 먹었는데 매우 맛이 좋아서 이후로는 세상에 따로 팔진미(八珍味)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므로 삼백이 무엇인가고 묻자, 동파가 "한 줌 소금과 생무우 한 접시에 백반 한 그릇이다."고 대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琅琊代醉編 皛飯毳飯》

 

모시강의(毛詩講義)


계묘(정조 7, 1783) 중하(仲夏)에 나는 어사(御史) 김기태(金基泰)의 격문에 따라서 초계(草溪)ㆍ고령(高靈) 등의 창고를 조사하러 갔다가 내쳐 감영(監營)에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감사 이공(李公 이병모(李秉模)를 말한다)이 내각(內閣 규장각)《모시강의(毛詩講義)》를 고열(考閱)하고 있다가 나를 별관(別舘)에 머물게 하고 이를 교정케 하였다.
얼마후 우무(郵務 이덕무의 본직인 사근역(沙斤驛)의 업무)가 바빠져서 사근역(沙斤驛)으로 돌아왔다. 이공이 또《모시강의》를 보에 싸서 한죽당(寒竹堂)으로 보내왔으므로 이에 착수하여 6일 만에 끝냈다. 대개 이공은 바로 원임 직각(原任直閣)이고 나는 이때 검서직을 가진 채 영남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여서 한 사람은 감사이고 한 사람은 우승(郵丞)이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이때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각신 방백에 검서 승은/閣臣方伯檢書丞
일찍이 없던 아름다운 일/盛事天涯見未曾
옥국 어느 사람이 승람을 증수할지/玉局何人修勝覽
고적조에 응당 영남(嶺南)의 이 일을 첨가하리/應將古蹟嶠南增
난타가 나더러 눈동자 남다르다더니/蘭坨謂我異人眸
온 서적 교정타가 좋은 세월 다 보냈네/消盡光陰萬帙搜
지금까지 남은 업무 마치지 못해/慧業如今猶未了
이 몸 따라 서국도 남쪽으로 내려왔네/隨身書局又南州
책 한 권 보고 나서 술 한 병 마시니/一卷繙來吸一壺
좋은 안주 감영에서 연달아 보내오네/珍肴繹絡自營廚
우리님 나에게만 잘해 줄 뿐 아니라/我公不獨於余好
규장각 지붕 위 까마귀까지 사랑하네/爲愛奎章閣上烏
연꽃 바람 댓잎 이슬에 새벽 공기 서늘한데/荷風竹露曉泠泠
우거진 숲 속에서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深樹嬌鶯抱膝聽
병상에서 일어나니 흰 모시옷 차가운데/病起晴嵐嫌白苧
두류산 맑은 빛이 책에 비쳐 푸르르네/頭流山色照書靑
앵도는 알알이 석류꽃을 샘내는데/櫻桃顆顆妬榴花
어느덧 천중절(天中節)이라 물화가 아름답네/節屆天中歎物華
모시를 다 읽고 머리 돌려 생각하니/讀罷毛詩回首憶
지난 이때에 어선이 내렸였네/今朝御扇賜臣家
가련하다 동관과 청금을/可憐彤管與靑衿
소서에 어찌 자음시(刺淫詩)라 아니했나
/小序如何不刺淫
주문의 공안을 감히 무너뜨리니/敢壞失門公案了
모신과 이불이 유림을 어지럽혔네
/毛甡李紱鬧儒林


[주D-001]이때에 지은 시 : 이 시는 《청장관전서》 제 12권 아정유고 4, 《국역청장관전서》 Ⅲ, p.81~84에 보이는데 약간 자구(字句)상의 차이가 있다.
[주D-002]옥국(玉局)……증수할지 : 옥국은 옥당(玉堂)으로 홍문관(弘文舘)을 말하고 승람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한다.
[주D-003]동관(彤管)과……아니했나 : 동관은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정녀(靜女)편을 가리키고 청금(靑衿)은 정풍(鄭風) 자금(子衿)편을 가리킨다. 소서(小序)는 한(漢) 나라 위굉(衛宏)이 쓴 것으로 《시경》 각 편의 머리에 붙인 서설을 말한다. 이 소서에는 "정녀는 그 당시의 무도한 임금과 부덕한 부인을 풍자한 것이고, 청금은 난세가 되어 학교가 황폐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하였는데, 주자의 집전(集傳)에는 이 두 시를 음분시(淫奔詩)라 하였다.
[주D-004]주문(朱門)의……어지럽혔네 : 주문은 주자(朱子)를 가리키고 공안(公案)은 공론에 맞는 안건을 말한다. 모신(毛甡)은 모기령(毛奇齡)의 초명. 그는 주자의 학설을 심하게 공격하였고 이불(李紱) 역시 주자의 설에 반대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함양의 방언(方言)


지방의 관장(官長)이 방언(方言)을 알면 그 지방의 속정(俗情)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했을 때, 아전이나 하인들의 말을 얼핏 듣고는 알 수가 없었다. 이는 대개 그들이 신라의 방언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또한 나의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해서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얼마 지나서는 나도 자못 방언을 익혔으므로 드디어 백성을 대하는 데 방언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번은 환곡(還穀)을 거두어 창고에 들일 때 시험삼아 하례(下隷)들에게 방언으로 분부하기를,

"거치(居穉)가 온전치 않으면 나락(羅洛)에 물이 새게 된다. 청이(請伊)로 까분 뒤에 사창귀(沙暢歸)로 단단히 묶어서 정지간(丁支間)에 들여 놓으라."

하였다. 마침 서울에서 온 손님이 옆에 앉아 있다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으면서 무슨 말이냐고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일일이 풀이해 주었다.

"거치(居穉)는 섬(苫)을 말하고, 나락(羅洛)은 벼를 가리키며, 청이(請伊)는 키[箕]를, 사창귀(沙暢歸)는 새끼를, 정지간(丁支間)은 창고를 가리킨다."

 

임 장군(林將軍)의 영정(影幀)


계묘년(정조 7, 1783) 늦겨울에 상(上)이 특명으로 나를 사근역 승(沙斤驛丞)에서 체직(遞職)하여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로 전직시켰다. 내가 아우 공무(功懋)와 함께 대설(大雪)을 무릅쓰고 조령(鳥嶺)을 넘어 단월역(丹月驛) 달천(獺川)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촛불을 켜들고 임 장군의 사당(祠堂 임경업(林慶業)을 모신 곳)을 배알하고 화상을 보니, 타원형의 얼굴에 눈썹은 검은데 빳빳하기가 솔잎 같았고 그 중에는 수호(秀毫)가 서너 개 있는데 강하기가 찌를 듯하였으며, 성글게 난 수염은 자못 길었고 눈은 세모져 있었다.

 

석호집(石湖集)


내가 다시 화산우(花山郵 사근역(沙斤驛)을 말한다)로 돌아갈 때에 강산(薑山 이 서구(李書九)의 호)에게 책을 빌려 주기를 청하니 강산이 범성대(范成大)의《석호집(石湖集)》을 빌려 주었다.

마침 뜰앞의 두 그루 감나무는 푸른 잎이 막 우거지고 집 위의 붉은 빛 죽순(竹筍)은 지붕을 지났고 붉고 누른 장미와 해당화는 눈을 부시게 한다. 매일 공무가 파하고 나서 잠자는 시간 외에 뽑아서 베껴 둔 그의 시 몇 수를 여기에 싣는다.
청식재(請息齋) 6언(言) 10수

 

신(愼)ㆍ권(權) 두 처사(處士)


거창(居昌) 신돈항(愼敦恒)은 향리(鄕吏)이다. 유업(儒業)을 익히어 독서하고 행실을 닦았으며 가죽띠에 포의(布衣)를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훌륭하였다.
집에도 경상도(慶尙道)에서 간행된 서적이 거의 빠짐없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는 함양(咸陽) 권극중(權克中)과 친하게 지냈다. 극중은 집이 매우 한미(寒微)하였으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다. 우도(右道) 인사들이 그들을 칭찬하기를,

"신 처사(愼處士)는 성격이 온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자세하고 착한데다 항상 양보하고 겸허하며, 권 처사(權處士)는 몸가짐이 엄격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다."

하였다. 나는 돈항(敦恒)은 보았으나 극중(克中)은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돈항의 아들 천능(千能)은 이제 겨우 약관(弱冠)을 넘은 나이로 학문과 재예가 숙성했다. 그는 일찍이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한번은 그 시문을 나에게 보여주며 정정을 청하였다. 그의 시에 이런 것이 있었다.
고니와 까마귀도 떼지어 서로 친하는데/鵠與烏群便相親
학이 닭과 어울린다고 성낼 게 뭐 있으랴/鶴隨鷄伴豈相嗔
청하노니 그대는 높은 자세를 낮추게나/爲君暫屈昻藏氣
날 가까이해도 그대 몸 결백하긴 변함 없으니/近我無傷潔白身

 

미타산(彌陀山)


미타산(彌陀山)은 사근역(沙斤驛)의 주산(主山)이다. 산 위에는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7백 96척(尺)이며 성 안에는 연못이 세 군데 있는데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고려(高麗) 신우(辛禑) 6년(1380) 경신에 왜놈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삼도(三道)를 노략질하되 상주부(尙州府)의 창고를 불지르고 경산(京山)을 거쳐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했다.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왜(倭)와 사근역의 동쪽 3리(里)쯤에서 싸우다가 패(敗)하여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裵諺) 두 원수(元帥)가 전사하였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이 5백여 명이나 되어 냇물이 다 붉었으므로 지금까지도 피내[血溪]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싫어서 국계(菊溪)라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때에 감무(監務)였던 장군철(張群哲)이 산성(山城)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도륙당한 바 되었으므로, 왜적이 그로 인하여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산성이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는데 성종조(成宗朝)에서 다시 쌓았고 지금까지 다시는 수리하지 않았다. 이 성을 두고 이첨(李詹)은 이런 시를 지었다.
운봉산 아래 가을 바람 일찍 불어/雲峯山下秋風早
밝은 햇볕 찬 기후에 나뭇잎 말라질 제/日澹天寒木葉槁
섬 오랑캐 우리 군사 패배시켜/是時島夷敗我軍
함양 들판 푸른 풀에 붉은 피를 뿌렸네/血濺咸陽原上草
양부의 원수 진전에서 전사하니/兩府元帥陣前亡
사졸들 미천한 몸 보전하기 어려워라/士卒微軀難自保
슬픈 호드기 두어 소리에 장부 눈물 흘리니/悲笳數聲丈夫淚
맹세코 나라 수치 늙기 전에 씻으리/誓雪國耻及未老
남쪽으로 가는 제장들아 군사 없는 이 그 누구뇨/征南諸將誰無軍
깃발 느릿느릿 정도를 되돌아오네/旌旗緩緩回征道
유호인(兪好仁)은 이런 시를 지었다.
사근성 경계에 음산한 구름 일어나니/沙斤城畔起陰雲
땅 귀신 밤마다 울고 비는 어지럽게 내리네/坤靈夜泣雨紛紛
경신년에 죽은 넋들 흐느껴 우는 소리/庚申萬鬼啾啾哭
당시의 장 사군을 한하는 듯하네/似恨悍當時張使君

 

혜풍시(惠風詩)


무술년에 나는 박재선(朴在先)과 더불어 북경에 들어갔는데 이해 가을에 유혜보(柳惠甫)는 심양(瀋陽)을 유람했고, 경자년에는 박연암(朴燕巖)이 열하(熱河)를 유람했는데 매양 취하면 여담(餘談)으로 유혜보가 중도(中途)에 그친 것을 조롱하였다. 임인년에 남사수(南士樹)와 이성위(李聖緯)가 연경에 들어갔는데 나는 사우(沙郵)로 오게 되어 작별하게 되었으나 이별시를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사천 군수[泗川宰] 김석여(金錫汝)의 맏아들 사현(思玄)이 사우로 찾아와서 혜보(惠甫)가 사수(士樹)와 성위(聖緯)를 이별한 시(詩) 일절(一絶)을 외어 전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해마다 시월 달 오가는 이 많아질 때/年年十月漲行塵
압록강 가 수자리사는 사람들 융의 갈아 입었지/換着戎衣鴨水濱
친구들은 다 북경에 갔는데 나는 심양으로 왔으니/人盡到燕吾到瀋
일천여 리 떨어져 있어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람 일이네/一千餘里不如人

 사근도 역사 1457년(세조3) 9월 12일 / 유곡도와 장수도를 통합하다

  이조에서 병조의 수교(受敎)한 관문(關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중략)… 경상도의 창락도(昌樂道)·안기도(安奇道) 양도의 모든 역을 한 도(道)로 통합하여 안기도(安奇道)라 일컫고, 유곡도(幽谷道)·장수도(長守道) 양도의 모든 역을 한 도로 통합하여 장수도(長守道)라 일컫고, 김천도(金泉道)·사근도(沙斤道) 양도의 모든 역을 한 도로 통합하여 사근도(沙斤道)라 일컫고, 성현도(省峴道)·황산도(黃山道) 양도의 모든 역을 한 도로 통합하여 황산도(黃山道)라 일컫고, 소촌도(召村道)·자여도(自如道) 양도의 모든 역을 한 도로 통합하여 소촌도(召村道)라 일컫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瀶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발행언어 한글 발행국가 한국
문서유형 문화예술자료
 
초록
종목 : 시도기념물 132호
분류 : 석비
수량 : 216㎡
소재지 : 경북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산14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김종무(1548∼1592)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이 터지던 당시 사근도찰방을 맡고 있던 김종무는 후퇴를 하는 도중 상주 지역 순변사 이일의 수하에 들어갔다. 그 후 상주판관 권길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상주 북천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숙종 1년(1675) 충신으로 임명되고, 정조 14년(1790) 이조참의, 고종 8년(1871)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비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문에는 ‘충신김종무지려’라 새겼다. 현판 에는 김종무의 공적과 1675년 이래의 정표와, 상주 충렬사에 위패를 모신 일, 그가 죽은 후 벼슬이 높아진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와 비각의 건립연대는 숙종 1년(1675)이며, 비각은 고종 33년(1890)에 중건된 바 있다.

 

 이 정려비(旌閭碑)가 위치한 고아읍(高牙邑) 원호리(元湖里)(들성)는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300여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로서 전근대 사회에서는 주로 선산(善山) 김씨(金氏)들의 세거지(世居地)였다. 1970년대 후반이래 구미(龜尾)공단의 발전으로 인해 도시지역의 확장과 더불어 외지인(外地人)의 입거(入居)가 심하게 일어나고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으로 급격하게 변모되고 있다.

이 정려비는 임진왜란 때에 상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전몰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함양(咸陽) 지역) 김종무(金宗武)(1548-159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1675년(숙종 1)에 충신(忠臣)으로 정표(旌表) 하면서 건립한 비석 및 비각이다. 비문의 내용은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 ”이고, 현판의 내용은 김종무의 임란 시의 전공과 1675년(숙종 1) 이래의 정표(旌表)및 상주(尙州) 충렬사에의 배향, 중직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인 김종무는 대사간 김취문(金就文)(1509-1570)의 장자(長子)이고, 유성룡(柳成龍)의 말부(말夫)로서 1591년(선조 24)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남원(南原))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한 후퇴의 행렬에서 상주지역에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예하에 들어가 상주판관(尙州判官) 권길(權吉)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상주(尙州) 북천(北川)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공으로 인해 1675(숙종 1) 충신으로 정표되고 그의 향리에 정려각이 건립되고 정려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1721(경종 1)에는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1790년(정조 14)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71(고종 8)에는 다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비 및 정려각은 1675년(숙종 1)에 건립된 것으로서, 그 중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었지만 원형(原形)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는 형식 및 내용면에 있어서는 특별히 주목되는 바는 없지만, 김종무의 임진왜란 시의 전공 및 그와 유사한 전공이 있는 인물들의 비석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문화재로서 지정하여 보존하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