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전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제7권 왕성순(王性淳) 집(輯) ○ 이기소(李箕紹) 참정(參訂) ○ 공성학(孔聖學) 참정(參訂) |
한 연암 박지원 문[韓朴燕巖文] 하 |
이 처사 묘갈명(李處士墓碣銘) |
《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1권에, ‘내사(內賜)
고(故) 사인(士人) 이성택가(李聖擇家)’라 쓰고, 윗머리에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찍혀 있다. 대개 무신년(1728, 영조4) 3월은 바로
우리 영조대왕(英祖大王)이 무위(武威)를 드날려 난(亂)을 평정한 해와 달로, 우리 성상(聖上 정조)께서 등극하신 지 12년 1주갑(周甲)이 다시
돌아온 때이다. 그 감회 배나 더 북바치시어 크게 윤음(綸音)을 펴시어 국내에 두루 깨우치신 것이다. 이 처사(李處士) 같은 이는 평생 동안
스스로 공로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 표창의 기록이 간책(簡策)에 실려 있고 그 위문하고 돌봐 주심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성하지
아니한가?
처사의 초휘(初諱)는 이성시(李聖時)이고, 자는 집중(執中)이었으니, 성택(聖擇)은 고친 이름이다. 고려 예부 상서
이거(李琚)가 하빈(河濱)에 봉해져서 그곳이 본관이 되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휘 이책(李策)이란 이가 있어 평강 현사(平康縣事)가
되었으며, 대대로 거창(居昌)에 살다가 처사의 고조 때부터 비로소 안의인(安義人)이 되었는데, 그는 호를 농월담(弄月潭)이라 했다. 동춘(同春)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이웃 마을에 와서 살면서 실상 그 주인이 되었다. 증조는 모(某), 조부는 모(某)이고, 아버지는 휘가 이만령(李萬齡)이며,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 참봉(參奉) 송규창(宋奎昌)의 따님이다. 처사는 숙종 12년 병인년(1686) 11월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더니 장성해가면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비록 먼 시골에서 생장했으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사대부의 길흉 예제의 어려운 부분들을
밝게 익혀 원근에서 물어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잇달았다. 약관에 북쪽으로 유학하여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ㆍ이도암(李陶庵 이재(李縡))
여러 선생들에게 최고로 인정을 받았으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은 모두 그를 국사(國士)로
인정하였다. 상국(相國) 조도빈(趙道彬)이 그가 재주 있고 행실이 바른 것으로 조정에 천거를 했는데, 신축년(1721, 경종1)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드디어 세속을 떠나 산택(山澤)에서 묻혀
살았다.
영조 4년에 흉적(凶賊) 정희량(鄭希亮)이 안의(安義)에서 일어나 연달아 여러 이웃 고을을 함락시켰는데, 이 처사를 가장 꺼려
다급히 찾아내려 하였다. 이 처사는 곧장 한밤중에 도망해서 서울로 급히 달려가다가 길에서 말을 달려 오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새로 부임해
오는 현관(縣官)이었다. 적중에 달려 들어가는 참에 요령을 모르다가 이 처사를 만나자 크게 기뻐하고는 적을 토벌할 계책을 비밀히 모의하였다.
현(縣)에 당도하자 적은 이미 처형되고, 잔당들은 산골 숲속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현관을 도와 그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적을 평정하고 나자
상(上)은 안의현이 역적을 낸 것을 몹시 미워하여, 고을을 폐하여 그 땅을 거창(居昌)과 함양(咸陽)에 분속(分屬)시켰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안의현의 하류(下流)에 있어 지난날 논에 물을 댈 때 항상 위에서 대고 난 나머지 물을 빌어 가고, 산에 와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 갈
때에도 도끼 같은 도구는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땅이 두 고을에 부속되자 공공연하게 먼저 제방부터 터서 물을 내렸고, 대낮에 마구
나무를 베 가고 남의 묘에 심은 나무를 베어 가도 입을 다물고 서서 바라볼 뿐 아무도 감히 따지질 못했다. 입술만 약간 움직여도 오히려
역적이라고 몰아댔다. 부역에 종사하는 이례(吏隸)들은 종놈처럼 고통스럽게 부려먹고, 군정(軍丁)을 조사할 때에도 사족(士族)까지 포함시켰다.
고초가 뼈에 사무쳐도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모두들 고을을 되찾을 것을 생각했으나,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현(縣)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처사에게 나아가 청하자, 처사는 즉시 일어나 서울에 가서 만여언(萬餘言)의 소(疏)를 올려 5천 호(戶)의 생명을 보전해 줄 것을 청했다.
몇 해 동안 대궐을 지켜보았으나 유사(有司) 중 아무도 안의(安義)의 일을 위로 알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을 아주 더럽게 보아 더럽혀지기라도
할 듯이 여겼고, 영남에서 온 사람은 얼굴을 대해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사(旅舍)를 방황하며 피로로 인해 초췌해졌으나 발을 들여놓을 길이
없었다. 이 처사는 상국(相國) 김재로(金在魯) 공과 알고 지낸 사이라 김공에게 말했다.
“저희 고장의 산신(山神)과 수귀(水鬼)가 미련하고 신령스럽지 못해 악독한 기운을 품어 역적 정희량이 태어나게 했으니, 벌에 걸려 성황신(城隍神)이 굶게 된 것도 진실로 당연합니다. 역적이 나면 그 집을 웅덩이로 만들어 불모지가 되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고장은 우물도 마을도 이전 그대로인데 그 읍치(邑治)를 폐지하고 그 사직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는 백 리 일대를 웅덩이로 만든 격입니다. 그러면서도 부세로 내는 곡식과 베는 안의의 토산(土産)이라 하여 그 국세(國稅)를 없애지 않으니, 후토 구룡씨(后土句龍氏)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선성 선사(先聖先師)에 석전(釋奠)을 맡아 할 사람이 없으니 희생이 늙어버리고, 글을 읽는 곳에는 풀이 우거져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성교(聲敎) 안에서 자립할 길이 없게 하였습니다. 사직(社稷)이 폐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것도 원통한데, 게다가 그 학교까지 함께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는, 이어 백성들의 질고(疾苦)
10여 가지 조목을 들어 말하고, 느껴 울며 말하였다.
“조가(朝歌)와 승모(勝母)란 지명(地名)은 우연히 지은 것이지마는 군자는 그래도 그곳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향 마을에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길쌈의 터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조상들의 무덤을 마음에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을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모두 오욕을 씻으려고 스스로 떠나갔을 뿐입니다. 장차 다시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게 되면 이곳이 드디어 도깨비로 어지러워지고 여우와 뱀들의 소굴이 될까 우려됩니다.”
그러자 김공은 크게 감동하고 깨달아,
“좋소. 당신을 위해 힘껏 진달하리다.”
라고 말하고는, 그 이튿날 상(上)을
뵙고 안의를 폐치(廢置)해 둘 수 없는 실정을 극력 간했는데, 모두 처사가 조목조목 말한 그대로였다. 상(上)께서는 가련하게 여기시어 드디어 그
고을을 회복하여 이전대로 원을 두라고 명하셨다. 고을이 폐지된 지 9년 만에 회복되어, 이에 현(縣)의 사직(社稷)이 사방으로 닦여지게
되었으며, 이례(吏隸)로서 두 고을에 나뉘어 속해 있던 자들도 모두 이전 직분으로 돌아왔으며, 성황당, 여려(旅厲)의 귀신들도 제사를 받아 먹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 처사는 임술년(1742, 영조18) 9월 모일에 돌아갔으니, 향년 57세였다. 그달 모일에 현(縣)의 남쪽
엄전동(嚴田洞)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정씨(鄭氏)와 혼인하여 1남을 낳았는데, 이정전(李廷銓)이고, 1녀는 모(某)에게 출가했다. 다시 민씨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이택전(李宅銓)이고, 2녀는 모모(某某)에게 출가했다.
아, 예부터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가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으로써 희열을 삼지 않았던가. 한 현(縣)의 일을 미루어 천하 국가도 알 수 있다. 비록 그 제터[墠壝]의
제도와 제물의 수량에는 차이가 있으나 신(神)과 인간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애초에 현이라고 해서 천하 국가와 다를 것이 없다. 진실로 폐망한
뒤에 그 존립을 도모했다면 어찌 고을이 작다고 해서 그 충성과 신의를 과소 평가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저 무신년에 /
粤昔戊申
안의의 사직이 망했지 / 安陰社亡
역적이 나왔기 때문에 / 凶渠之故
그 고장 기를 죽이려 했네 / 癉厥胎鄕
땅이
드디어 더러워지니 / 土壤遂醜
백성들에겐 이 무슨 재앙인가 / 凡民何殃
사람도 신도 의지할 곳 없이 / 人神無依
9년이나
흘러갔네 / 九換星霜
왕께서 패연히 은택을 내려 / 王降沛澤
한 바탕 비린내를 씻어 내었네 / 一滌腥
산은
높아지고 물은 맑아지고 / 山高水淸
풀도 나무도 제 빛을 되찾았네 / 草樹回光
사직의 제단은 새로이 쌓아져 / 靈壇改築
다시금
하늘 볕을 받아들이네 / 復受天陽
현가(縣歌) 소리 더욱 울려 퍼지고 / 絃歌增蔚
향기로운 제물 또한 바치네 / 亦奉苾薌
이
모두 누구의 공인가 / 云誰之功
처사 집중씨의 공일세 / 處士執中
태수가 그 명을 지어 / 太守作銘
이 영광 함께하네 / 亦與有榮
[주D-001]난(亂) :
이인좌(李麟佐)ㆍ정희량(鄭希亮)의 난을 가리킨다.
[주D-002]증조는
모(某), 조부는 모(某) : ‘모(某)’ 앞에 《연암집(燕巖集)》에는
‘휘(諱)’가 있다.
[주D-003]신축년 무옥(誣獄) :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말한다. 경종 1년(1721) 8월에 노론파(老論派) 김창집 등의 주장으로 왕제(王弟)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처음 봉호)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게 되자 소론파(少論派) 조태구(趙泰耈) 등이 시기상조라 하여 상소하여 일어난
당쟁(黨爭)의 화옥(禍獄)이다.
[주D-004]후토 구룡씨(后土句龍氏) : 구룡씨는 염제(炎帝)의 11세 손으로 9주(州)를 평정하고 토지의 성질을 잘 알아 전욱(顓頊)의 토정(土正)이
되었다. 후세에 그를 후토(后土)의 신으로 제사하면서 후토씨로 불리었다.
[주D-005]조가(朝歌)와 승모(勝母) :
묵자(墨子)는 음악을 싫어하여 고을 이름이 조가(朝歌)라 하자 들어가지 않았고,
증자(曾子)는 지명이 승모(勝母)라 하므로 어머니를 이긴다는 글자의 뜻이 좋지 않아서 떠나갔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06]임술년 9월
모일 : 이 부분이 《연암집(燕巖集)》에는 ‘임술일(壬戌日)’로 되어
있다.
[주D-007]정씨(鄭氏)와 …… 출가했다 : ‘정씨(鄭氏)와 …… 출가했다.’까지가 《연암집(燕巖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초취는 정
문헌공(鄭文獻公) 후예로 1남을 낳았다. 이정전(李廷銓)이 그인데, 일찍 죽었다. 1녀는 사인(士人) 모(某)에게 출가했다. 후취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그 사이에 1남을 낳았는데, 이택전(李宅銓)이 그이다. 금년 80세이다. 상이 나라 안에 추은(推恩)하여 사민(士民)으로 고령(高齡)인
자에게 작위를 하사하자 이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얻었다. 2녀는 사인(士人) 모모(某某)에게 출가했다. 이택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종한(李宗漢)은 이정전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차남은 이천한(李天漢)이다. 손자는 모모(某某)이다.[初娶鄭文獻公後 生一男廷銓早歿 一女適士人某
後娶驪興閔氏 生一男宅銓 今年八十 上推恩國中 賜士民高年爵 於是得階通政大夫 二女適士人某某 宅銓二子 宗漢后廷銓 次天漢孫某某]’
[주D-008]태수(太守) : 박지원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당시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재직 중이었다.
燕巖集卷之二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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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表忠綸音一卷。題內賜故士人李聖擇家。上首安奎章之寶。蓋戊申三月。卽我英宗大王揚武勘亂之年若月也。洪惟我聖上御極之十有二年。曆紀重回。宸感倍激。誕宣寶綸。渙諭方域。若李處士者。平生不自言功。而褒錄獲列於簡策。存恤至及於子孫。豈不盛歟。處士初諱聖時。字執中。聖擇其改諱也。高麗時禮部尙書琚。得封于河濱。因氏焉。入我朝有諱策。知平康縣事。世居居昌。自處士高祖。始爲安義人。號曰弄月潭。同春宋文正公來寓隣洞。則寔爲之主。曾祖諱某。祖諱某。考諱萬齡。妣恩津宋氏。參奉奎昌之女。以肅宗丙寅十一月廿八日生。幼有異質。稍長。才識過人。雖生長遐陬。明習國朝掌故。士大夫吉凶禮疑。遠近考質者。踵相接焉。弱冠北學。最受知於金三淵李陶菴諸先生。而閔文忠公鎭遠李奉朝賀秉常。皆許以國士。趙相國道彬嘗薦其才行于朝。及辛丑誣獄起。遂謝世自放山澤之間。英宗四年。凶賊鄭希亮起安義。連陷傍數郡。最忌處士。跡之甚急。處士直夜半逃去。疾趨京師。道逢鞭一騎來者。乃新尉也。方馳入賊中。而莫知要領。及得處士大喜。密謀討賊。旣到縣。賊已就誅。而餘黨假息巖藪中。遂贊尉悉捕斬。賊旣平。上深疾惡縣之出大懟也。乃革其邑。以其地分屬居昌咸陽。兩邑俱在縣之下流。往時漑田。常丐餘波。卽山樵蘇。毋帶斧斨。地旣附庸。則公先決堤下水。白晝取薪。赭人邱木。而立視噤嗄。莫之敢詰。卽微動唇。反罵以賊。吏隷之從役者。虜奴苦使之。括丁籤軍。侵及士族。楚痛入骨。無所告訴。咸思復邑。無可任其事者。縣之父老咸造請處士。處士立起之京師。䟽萬餘言。爲五千戶請命。守闕數歲。有司莫有以安義事上聞者。視其地衊然若凂之也。自嶺中來者。不欲對面語。彷徨旅邸。困頓憔悴。無可以投足。處士甞有舊於相國金公在魯。說之曰。敝鄕之山神水鬼。頑愚不靈。胎獍卵梟。化爲逆亮。底罰城隍。餒固當也。夫亂逆之生。汚潴其環堵之室。使不毛焉。今敝鄕井泉不改。聚落如故。乃廢其邑治。墟其社稷。是環百里而潴澤之也。然而糓粟之賦。絲麻之供。不以土產而曠其惟正。則后土氏何辜焉。勾龍氏何辜焉。先聖先師釋奠無主。牲齒已老。絃誦之地。鞠爲茂草。使其子弟無以自立於聲敎之中。社稷廢而不祀。尙猶寃矣。矧又坐廢其學校乎。因條民之疾苦十餘事。感慨泣下曰。朝歌勝母。地名偶爾。君子猶不蹈焉。故非不戀其鄕井。重其桑麻。懷其塚墓。而居者思遷。遷者不還何也。皆欲湔洗自拔耳。將見其無復居人。則吾恐玆土之遂迷魑魅而爲狐虺之所藏也。於是金公大感悟曰。諾。當爲子力陳之。明日謁上。極言安義不可廢置狀。悉如處士所條。上惻然憐之。遂命復其邑。置倅如故。邑革凡九年而復。於是縣社縣稷。四封修矣。吏隷之分屬者。悉還舊職矣。城隍旅厲之鬼。無不從食矣。處士以壬戌九月日終。壽五十七。以其年九月日。葬于縣南嚴田洞午坐原。初娶鄭文獻公後。生一男廷銓。早歿。一女適士人某。後娶驪興閔氏。生一男宅銓。今年八十。上推恩國中賜士民高年爵。於是得階通政大夫。二女適士人某某。宅銓二子宗漢。后廷銓。次天漢。孫某某。噫。自古忠義之士。曷甞不以社稷爲悅哉。一縣之推而天下國家可知已。雖其墰壝之制有等威。牲幣之數有隆殺。而神人之所依附。未始不同也。苟能圖存於旣亡之後。則寧或以邑之十室。而小其忠信也哉。銘曰。
粤昔戊申。安陰社亡。凶渠之故。癉厥胎鄕。土壤遂醜。凡民何殃。人神無依。九換星霜。王降沛澤。一滌腥衁。山高水淸。草樹回光。靈壇改築。復受天陽。絃歌增蔚。亦奉苾薌。云誰之功。處士執中。太守作銘。亦與有榮。
櫟泉先生文集卷之三 |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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搜勝老松石。重來似故人。映溪羞白髮。樹屋負靑春。佳約疑神助。淸談味道眞。何時茅棟就。絃誦百年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