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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포광 김영수(1884~1967)
 
어려운 환경극복...현대불교학 기틀 마련
 
“여러분, 불교는 철학적 공리를 설한 것도 아니고 우주의 본체가 진여라고 보는 우주관을 설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인생에서 몸뚱이는 공(空)이고 무상이며, 무아며 허망한 것이라는 인생관을 설했을 뿐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심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없어지면 이것이 곧 안락정토임을 명심하세요.”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 ‘포광 선생님’으로 더 잘 알려진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 그는 한국의 근.현대불교학을 일군 학자였다. 그와 함께 근대불교학이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교양종’논문 등 한국불교 종파 연구 맥 잡아

평생 공부만…유식학.불교논리학 분야 독보적



열두 살에 출가해 사문의 길을 걷다가 돌연 환속, 불교학자로 한국불교학 연구에 열정을 쏟아 부었던 포광. 근현대 한국불교학의 토대를 마련한 그가 말하는 정토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포광은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창진(昌辰), 족보에는 용수(容修)라 올라있다. 영수는 법명인데, 그는 일생 동안 이름대신 법명을 사용했다. 포광이 출가한 계기는, 놀랍게도 한 점쟁이 때문이다. 어머니는 포광의 형인 둘째가 어려서 죽자, 허전함을 달래지 못해 점쟁이를 찾아갔다. “다음 태어날 아이를 낳기 위해 3년간 불공을 올리고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을 독송하라”는 말을 듣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포광. 그러나 그가 세살 때 아버지가 세연(世緣)을 다했고, 다섯 살 때 집안이 궁핍해졌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다시 점술가를 찾았다. “천문으로 보아 공부할 팔자인데 공부시키기도 어려운 사정이고 타고난 단명살(短命殺)을 피하기 위해서는 출가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포광을 사찰로 데려갔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함양 영원사에서 환명정극(煥明正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득도 후 여러 스님으로부터 불교학을 배웠다. 1896년부터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다음해 〈치문경훈〉 〈서장〉 〈선원제전집도서〉를 차례로 공부했다.

이어 금파(琴巴) 전재룡(田在龍)스님에게 〈능엄경〉과 〈기신론〉, 천은사 진응(陣應)스님과 영원사 서응(瑞應)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같은 해 겨울 포광은 해인사 재봉(齋峰)스님에게 〈화엄경〉을, 범어사 혼해(混海)스님으로부터 〈화엄경현담〉을 습득했다. 다시 재룡스님 밑에서 〈선문염송〉을 수학한 그는 1906년 영화사에서 강주(講主)소임을 맡게 된다. 강주로 명성을 날리던 포광은 1913년 남원 실상사 주지, 1916년엔 보은 법주사 주지를 역임했다. 또 불교중앙학교 교수로 취임 〈능엄경〉 〈사분율〉 불교사 등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 즈음 그는 불교청년단체 대표로 선출,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던 포광은 40세 되던 해인 1923년 돌연 환속, 남원 산내면의 윤여지(尹如脂)와 결혼한다. 원광대 양은용 교수는 “당시 일제는 일본불교의 제도와 같이 스님의 결혼을 권장하고 있었고, 불교의 개혁 흐름 가운데는 그 당위성이 주장되기도 했었다”며 “어떤 연유에서 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일본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학자로 다시 태어난 포광에게 전성기가 찾아왔다. 마흔 다섯 살인 1928년 동국대의 전신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부터다. 중앙불교전문학교는 당시 불교의 거성인 이능화.박한영스님 등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 여기서 포광은 이들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 불교학의 토대를 마련해갔다. 해방 이후 동국대, 전북대, 원광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포광은 불교연구와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만년에 동국대 명예교수로 초빙된 그는 불교경전의 한글번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불교학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한 동국대는 포광이 83세인 1966년 학술공로상을 수여했다.

끊임없는 그의 연구 덕에 한국불교학은 기틀을 잡아나갔다. 한국불교학에 있어 그의 학문이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을 정도.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한국불교사를 정리해 놓은 책이 아직도 대학에서 강의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1937년 〈진단학보〉에 발표한 ‘오교양종에 대하여’는 한국불교 종파사의 맥을 잡아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산선문의 개념 역시 포광이 1938년 〈진단학보〉에 발표한 ‘조계선종에 대하여’란 논문에 의해 정립됐다. 양은용 교수는 “포광 선생은 이런 문제제기를 통해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줬다”고 평가했다.

 
 
사진설명: 포광의 저서인 〈조선불교사〉(왼쪽)와 〈불교요의경〉. 동국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밖에도 그는 한 편의 논문으로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논문집〉에 실린 ‘화엄사상의 연구’(1959)가 바로 그것. 여기서 포광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라훌라를 낳았다’고 주장해 비난을 샀다.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상에 대한 그의 해박한 분석은 오늘날 한국의 화엄학 연구의 기반이 됐다. 유식학, 불교논리학 분야에도 남다른 학구열을 발휘했다. 원광대 노권용 교수는 “유식학에 대한 포광 선생의 식견은 당시 독보적이었으며, 당시 불교계 일반에서는 소홀히 취급했던 불교논리학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것이 바로 선생이었다”고 지적했다. 사실 그의 사상은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고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을 연구하던 중 후백제 연호를 발견, 한국사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60여년에 달하는 오랜 시간동안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쳤기에, 한국 불교학계의 많은 석학들이 슬하에서 배출됐다. 백성욱, 김법린, 조명기, 김인식, 황성기, 홍정식, 류병덕, 한종만, 한기두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제자였던 고(故) 조명기 박사와 전 원광대 류병덕 교수 등은 포광이 남긴 학문적 업적을 기리며 1984년 〈포광 김영수 박사 전집 - 한국불교사상논고〉를 발간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논문들은 불교학자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할 ‘필수’가 됐다. “나는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번 공부를 해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꾸준히 걸어오다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박사학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꾸준한 노력, 그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일흔여덟의 나이로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포광이 후배들에게 한 이 말의 의미는 각별하다. 후학들이 끈기를 갖고 공부해 주기를 바랐던 것. 이는 금방 싫증내고 쉽게 포기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팔십 평생 부처님 가르침을 오롯이 실천한 포광. 불교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비록 ‘점쟁이의 예언’ 때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격랑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늘 자신의 신념을 좇아 행동했고, 결국 그는 한국불교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야말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한 삶이라고 하겠다. 한국불교는 아직 포광을 ‘거사’라 해야 할 지 ‘스님’이라고 불러야할 지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불교학 연구를 통해 구도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임엔 틀림없다. 포광이 평생을 불교연구에 전념했던 덕에 오늘날 많은 불교학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은 한국불교학 연구의 나침반이, 그의 삶은 한국불교사의 일부가 됐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112호/ 3월15일자]



포광의 학문세계

한국 선종 ‘중국아류 아닌 독창적’ 주장

“아직까지 그의 주장 능가할 논문 없어”



포광이 남긴 대표적 논문으로는 ‘오교양종에 대하여’와 ‘조계선종에 대하여’가 있다. 1937년과 1938년 〈진단학보〉에 각각 발표된 것으로, 한국불교학에서는 ‘고전’으로 통한다. 거시적 시각에서 한국불교사를 정리한 주목할만한 논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진단학보〉 8권(1937)에 발표한 ‘오교양종에 대하여’는 한국불교 종파사를 다룬 논문이다. 신라시대에 오교양종이 성립됐다는 내용인데 오교양종은 교종을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등 5개 종(宗)으로, 선종을 조계종, 천태종으로 각각 구분해 놓은 것. 〈진단학보〉 9권(1938)에 실린 ‘조계선종에 대하여’는 실상산, 동리산, 봉림산, 성주산, 사자산, 수미산, 희양산, 사굴산, 가지산 등 구산선문이 신라시대에 형성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포광이 논문을 발표한 이후 이 설(說)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수용됐다.

포광의 논문 발표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사료가 발견되고 연구가 진척됐다. 그 결과 30년대 포광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측면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사 정리에 큰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두 논문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크다. 목포대 최연식 교수는 “한국불교를 종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구를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또 “그가 한국불교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가 한국불교의 종파는 선교양종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발의 의미가 크다”며 “포광은 한국의 선종은 중국의 임제종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신라 때부터 구산선문을 통해 독자성을 갖고 발전한 것임을 밝혀 한국불교만의 독창성을 설명하려 했다”고 보충했다.

동국대 고영섭 교수도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연속이라는 일본사학자의 시각이 주류를 이룰 때 포광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한국 선교(禪敎)의 종파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위계를 정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고 교수는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불교를 오교양종으로 바라본 것은 포광의 탁견”이라는 중앙승가대 김상영 교수는 “1930년대와 2000년대의 학적기반이 다른 만큼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구산선문과 오교에 대한 설은 오늘날까지 유용하다”고 밝혔다.

반면 동국대 김영태 명예교수는 ‘오교구산에 대하여 - 신라대 성립설의 부당함을 밝힘’을 통해 포광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통불교시대였던 신라에는 아직 종파가 성립되지 않았고 종(宗)의 개념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이후인 고려 중기에나 사용됐다”며 현존사료를 봐도 신라시대에 다섯 종이 성립됐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구산선문 역시 포광의 주장과 달리 신라 때가 아닌 고려대에 완성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본의 13종파를 의식해 오교구산을 주장, 조선불교는 일본보다 종파 하나가 더 많은 14종파임을 내세우기 위한 결과란 지적도 있다.

“두 편의 논문을 세부적으로 보면 검토할 사항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덕성여대 남동신 교수는 “그러나 포광의 논문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주장을 능가할만한 연구가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능화, 권상로, 포광을 필두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학계는 종파를 통해 한국불교를 체계화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지금도 포광의 주장은 학계에 통용되고, 한국불교사 정리에 큰 틀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112호/ 3월15일자]
 
2005-03-14 오전 8:58:3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