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선정

 

1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자료

 

 

 

신암(愼菴) 노응규(盧應奎)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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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3. 15∼1907. 1. 4)

 

 

1. 선정배경

   ● 순국 90주기

   ● 진주의병장으로 무력항쟁하다가 피체되어 옥사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 주요공적

 

   ● 1896.  경남 안의에서 거의 진주성 점령

             부산진공계획의 일환으로 김해까지 진출

   ● 1906.  최익현 의병진 가담

             충북 황간에서 재거의

             일본군척후대 일제시설물 공격하는 등 전과 올림

   ● 1907.  옥중 순국

 

 

 

신암(愼菴) 노응규(盧應奎) 선생

(1861. 3. 15∼1907. 1. 4)

 

  나라에 난신 적자가 있으되 임금이 토벌하지 못하고 방백이 토벌하지 못할 경우에는 비록 미천한 선비라도 토벌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 대개 적을 토벌하는 대의가 임금의 명령을 받는 것보다 더 급하기 때문입니다.

 

-1897년 10월 올린 선생의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 중에서-

 

 

  선생은 1861년 3월 15일 경남 안의군(安義郡; 현 咸陽郡) 안의면 당본리(堂本里) 죽전동(竹田洞)에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字)는 성오(聖五), 호(號)는 신암(愼菴)이다.

 

  본디 총명했던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특히 김해부사를 역임한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학문에만 매달리지 않고, 1876년 개항 이후 일제와 외세가 밀물 듯이 밀려와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30세 전후하여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당시 유림의 중망을 받고 있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찾아 사사(師事)하고, 그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수용하면서 성리학적 민족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또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으로 절개있는 학자로 명망있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충군애국 사상을 고양시켜 갔다.

 

  이 시기 일제는 1894년 7월 경복궁에 난입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갑오왜란(甲午倭亂)을 일으키고, 곧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反)외세·반(反)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봉쇄하고,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화하여 갔다. 따라서 개항 이후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하던 양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제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승전의 도취감도 잠시뿐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요동(遼東)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같은 일제의 위약성을 간파한 정부는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이이제이식(以夷制夷式)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여 갔다. 이에 일제는 세력 만회와 확대를 위하여 1895년 10월 배일파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뒤따라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을 강제 시행하여 갔다.

 

  위정척사사상을 갖고 있던 선생은 평소부터 일제의 침탈에 분노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침략의 만행이 국모를 시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단발령으로 인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고, 나아가 성리학자로서 자존의 상징인 상투까지 잘리게 될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거의(擧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선생은 경남 안의에서 거병(擧兵)하여 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삼고,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 등 문인, 임경희(林景熙)·성경호(成慶昊) 등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경상남도의 행정·교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지리적 요충지인 진주(晋州)를 공략하기 위해 무기를 싣고 남행(南行)하여 그날 저녁 진주성(晋州城)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일시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당시 진주부 관찰사와 경무관은 대구로 도주하였고, 또 참서관은 성을 탈출하여 삼가(三嘉)로 도주하였다.

 

  선생의 의진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뒤 성내에 주둔하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진주부민들 또한 봉기하여 정한용(鄭漢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성외에 포진하였다. 이어 전 찰방(察訪) 오종근(吳鍾根)·전 수찬(修撰) 권봉희(權鳳熙)·정재규(鄭載圭)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함으로써 진주의병진의 규모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라 선생을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진은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즉 선생은 2월 27일 선봉장 서재기를 파견하여 단성(丹城)을 장악하게 하였고, 뒤이어 하동(河東)·고성(固城)·함안(咸安) 등으로 세력을 뻗쳤다. 그리고 대구로 도망가 있던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진위대 병사들과 일본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이를 두 차례에 걸쳐 격퇴하는 등 의세를 드높였다.

 

  특히 진주의병진은 일본인과 결탁한 친일파는 물론 단발자 등을 처단함으로써 봉기의 목적인 반일·반침략 위정척사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같은 선상에서 진주의병진은 행정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시키고, 초현관(招賢館)을 설치하여 "경륜(經綸)이 뛰어난 자, 도략(圖略)이 과인(過人)한 자, 문학에 능한 자, 주술(籌術)에 능통한 자, 비력(臂力)이 과인한 자" 등을 선발하여 좌수(座首)·이방(吏房)·호장(戶長)·형리(刑吏) 등 지방 행정관리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인근의 여러 고을에도 전령을 보내 향리 등의 관속을 새로 임명하여 공무를 평상시처럼 집행하게 하면서 민심의 동요를 막는 등 관할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의병이 그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이처럼 조직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담당한 경우는 결코 흔치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진주의병진은 일제 침략의 관문(關門)이고, 경제침탈의 거점인 부산(釜山) 개항장을 공략하기 위해 동진(東進)하여 갔다. 그리하여 진주의병진은 문산·반성·군북·함안·마산·진영 등을 거쳐 3월 29일 부산에서 불과 70여 리 떨어진 김해(金海)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대오를 이루어 김해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잠입한 뒤 한 곳에 모여 일시에 관아를 습격하고, 이방·형방·책방(冊房) 등 관리들을 포박함으로써 김해를 장악하였다.

 

  그 뒤 진주의병진은 구포(龜浦)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여 괴멸시키고, 부산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기 위해 4월 11일 김해에서 구포로 건너가는 선암(仙岩)나루터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김해로 귀환하던 차에 일본군수비대 정찰분대의 선제 공격을 받았다. 이 날 진주의병진은 그들의 공격을 격퇴하였지만, 다음 날인 4월 12일 일본군수비대가 증원군을 파견하여 다시 공격해 오자 창원 방면으로 일시 퇴각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김해에서 구포로 돌아가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김해평야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적군 4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진주의병진도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하는 전력 손실을 당하여 부득이 부산진공계획을 포기하고 진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진주의병진은 호남을 거쳐 4월 중순 진주에 도착한 적군과 진주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진주의병진 가운데 정한용 휘하의 의병은 진주 북방에 위치한 합천(陜川) 삼가로 이동하여 있었고, 또 서재기가 거느린 다수의 의병은 진주의병의 발상지인 안의에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주성에는 선생만이 불과 50∼60명의 의병과 함께 있을 뿐이었다.  4월 24일 밤 700여 명의 적군이 성벽을 부수고 발포하면서 쳐들어 오자, 중과부족을 인식한 선생은 부득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성을 탈출하여 정한용 의진과 합류하기 위해 삼가로 향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삼가에 당도하기도 전에 정한용은 의진을 해산하였고, 안의에 있던 서재기마저 친일파 서리(胥吏)들의 흉계에 빠져 살해되고 휘하의 의병도 흩어졌으므로 선생 또한 의병을 해산하고 새로운 항전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와중에 선생은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칠순 노령의 부친과 형 응교(應交)가 피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등 멸문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름을 바꾸고 호남지방으로 피신하여 광주의 종가인 노종룡(盧鍾龍)에게 잠시 의탁하기도 하고, 또 순창(淳昌)의 이석표(李錫杓)의 집에 머물기도 하는 등 여기 저기를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1897년 여름 상경하여 각방으로 노력한 결과,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그해 10월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주선으로 궐내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렸다.

 

  아, 신(臣)은 국수(國讐)를 갚고자 나섰다가 국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에 환란만 초래했으니, 위로 임금에게 불충하고 아래로 부모에게 불효한 것이므로 신의 죄가 하나이다. 관군이 다가오던 날 신은 비록 화살 하나 쏘지 않았으나 감히 자수하지 않고 망명 도주했으므로 신의 죄가 둘이다. 부형(父兄)이 죽었으되 아직도 성복(成服)하지 못해 자식된 도리를 저버렸으므로 신의 죄가 셋이다. 옛적에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비록 칼날을 밟고 물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는데, 신은 지금까지 구차히 살면서 한가지 계책도 세움이 없이 침식과 언어를 범인(凡人)과 같이 하고 있으므로 신의 죄가 넷이다.

 

  우국충정이 배어 있는 이같은 상소로 선생은 광무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안의의 서리들은 자신들에게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선생의 귀향과 부형의 장사(葬事)를 방해하고, 나아가 선생까지 살해하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다시 상경하여 활동한 결과, 신기선의 주선 아래 조병식·이유인(李裕寅)·민영준(閔泳駿) 등의 협조로 왕명을 받아 1898년 4월 부형을 살해한 안의의 서리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99년 3월에야 비로소 부형의 장사(葬事)를 제대로 거행함으로써 불효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이후 선생은 선대의 세거지였던 합천 청계(淸溪)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을 모아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한편, 강학을 통해 문인들과의 정의를 두텁게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02년 10월 규장각(奎章閣)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 경상남도 사검(査檢) 겸 독쇄관(督刷官)·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동궁 시종관(東宮 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국왕을 보위하고, 국권을 수호하는데 헌신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한국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침략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나라 영토 점유의 길을 열어 갔고,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여 갔다. 그리고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국망(國亡)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재차 거의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즉각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때 광무황제는 비밀리 선생에게 시찰사(視察使)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거의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족손(族孫)이며 문인인 노공일(盧公一)과 함께 광주에 있는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재차 거병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사부(師父)인 최익현이 1906년 6월 4일 거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최익현 의진은 거의 당일 태인읍을 점령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고, 뒤이어 정읍(井邑)·순창(淳昌)을 공략하여 의세를 크게 떨쳐 갔다. 하지만 6월 12일 순창에 주둔하고 있다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고, 최익현 의병장을 비롯한 13명의 의병지도부가 피체됨에 따라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부득이 노공일의 향리인 경남 창녕군(昌寧郡) 이방면(梨房面) 석리(石里) 용배동(龍背洞)으로 피신하여 재차 거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 다음 1906년 늦가을 충청·경상·전라 3도의 경계인 충북 황간군(黃澗郡) 상촌면(上村面) 물한리(勿閑里) 직평(稷坪)에서 다시 거의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의진의 통수(統帥)가 되었고, 중군장에는 서은구(徐殷九), 선봉장에는 엄해윤(嚴海潤), 종사관에는 노공일, 수종(隨從)에는 김보운(金寶雲)·오자홍(吳自弘) 등이 임명되어 의병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같은 선생의 황간의진은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곳 주민들도 이러한 의병활동에 협조해 무기를 제조 운반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군량미를 조달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황간의진은 경부철도와 열차, 그밖에 일제 시설물 등을 주요 파괴대상으로 삼아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척후대(斥候隊)를 괴멸시키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장차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타도하고, 일본인을 비롯한 국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일본군 밀정에게 누설되어 1906년 12월 8일 선생을 비롯한 서은구·엄해윤·김보운·오자홍 등 의병지도부가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에게 피체됨에 따라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경무청 감옥서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일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가 1907년 1월 4일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