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함양 서상 노천 유적


                 

          안음 노천에 동춘선생이 심은 큰 고목이 있는데 보고 느끼어 짓다

 

                     돈재 유상대(1864-1935)

 

아래로 푸른 들판 덮고 위로 하늘에 닿은 채

온갖 풍상을 겪으며 수백 년 세월을 지냈네

지금까지 나무꾼과 목동들이 서로 보호하니

모르겠어라 이 마음 누가 그리 하게 하는가

 

안음노천 유일대고목 내동춘선생수식야 감부일절

安陰蘆川 有一大古木 乃同春先生手植也 感賦一絶

 

돈재 유상대 敦齎 柳相大

 

하부청교상접천

下覆靑郊上接天

풍상열진포경년

風霜閱盡飽經年

지금초목근상호

至今樵牧勤相護

불식자심숙사연

不識玆心孰使然

 

돈재 유상대는 진주 유씨로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에서 태어나 노백헌 정재규와 경승재 유종원 및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 등에게 수학하였다. 화림동과 원학동을 유람하며 이 시와 함께 영각사, 월성초당, 모리, 수승대 시를 지은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6월23일에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음으로 피병(避兵)하고 그곳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향리로 귀환하여 학도들을 가르쳤다.  "丙子…是冬 避兵至安陰 愛其山高水淸 居一年 始還鄕里 學徒日衆" 《同春堂集 송시열이 지은 墓誌文》. 안음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안의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보면 북상면(北上面)이 있고 그 소속 촌에 "월성(月星);문정공 송준길이 일찍이 우거하였다."라고 하였고 서상면(西上面)이 있는데 그 소속 촌에 "노천(蘆川);문정공 송준길이 잠시 우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월성은 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이고 그곳 내계마을에는 송준길이 은거했던 송여산기(宋礪山基)에 다시 세운 월성초당이 남아 있고,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황점(黃店)마을 가는 중간 월성1교 옆 길가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는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어서 송대(松臺)라 하기도 한 송준길의 유적이다. 노천은 현재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大南里) 대로(大蘆)마을(구명 노천동蘆川洞)이다. 거기에 모은정(慕隱亭)이 있다. 모은정 아래 반석에는 반암(磻岩)이라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동춘장구소 同春杖구所 동춘선생이 산책하던 곳

노천화석정 蘆川花石亭 노천의 화석정이라네

영사구초엄 永思舊草엄 영사선생의 옛 초가집

가포대은병 稼圃大隱屛 가포의 대은병이라네

이란 절구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예전 동춘당이 소요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석정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로 율곡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대은병은 중국 주자가 은거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율곡선생은 은거한 황해도 해주의 석담구곡이 그와 비슷하여 은병이라 이름하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다. 영사선생은 효자 서준(徐儁)의 호이고 동시에 그의 묘각의 이름이다. 영사재는 대로마을 아래 마을인 오산에 있다. 가포는 미상이다. 동춘당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북쪽의 월봉산을 넘어 거창 북상의 월성으로 옮겨가 초당을 짓고 8개월 정도 기거하다가 귀향하였다.

동춘당이 이곳 노천과 월성에 산 것을 기념하여 안음현감 정중만(鄭重萬)이 안음 유림과 함께 숙종 29년(1703)에 화림동 계곡의 하류인 함양군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을 건립하고 동춘당 송준길을 제향하였다. 헌종 10년(1844) 경에 거창군 북상면 월성으로 이건되었다가 고종 9년(1872)에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77년에 초당계에서 서원 터에 동춘송선생월성초당유허비(同春宋先生月星草堂遺墟碑)를 추연 권용현이 비문을 짓고 강암 송성용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여기에서 영조 18년(1742)에 서원을 월성으로 옮겼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동춘당은 현종 6년(1665)에 고려대장군 여림청(呂林淸)의 묘표음기를 지었는데 그 비석은 현재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마을의 여장군 묘소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