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남명학

 bong.gif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 1501~2001 chuk.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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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함양 남명 유적

 

二. 함양 남명 문인

 

三. 함양 남명 교유

 

四. 함양 남명 일화

 

五. 함양 남명학파

 

六. 남명집 판본사략

 

七. 남명 팔도 기행

 

八. 남명학파 인명록

 

남명학(南冥學)이란 무엇인가

 

남명학이란 조선 중기 대유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남명은 경의(敬義)를 중시했으니 경은 수양하는 덕목이고 의는 실천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남명의 사상을 경의사상이라고 하고, 경의를 바탕으로 실천을 중시했으므로 실천유학이라고 한다. 남명의 사상적 가르침은 당시 사변주의로 흐르는 유학 정신의 퇴락에 버팀목 역할을 하는 데 공헌하였다. 남명의 문하에서 임진왜란에 구국항일의 의병장이 가장 많이 배출된 것도 의를 중시하는 남명의 정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조에서 성공적인 교육자로 꼽히기도 하니 민족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의 범주는 <남명집>과 관계 인물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하는 한문학, 국문학, 동양철학, 국사학, 교육학, 문헌학 등 다양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남명학회 등에서 남명학을 연구하고 있다.

 

 

 

 

一. 함양 남명 유적

 

1. 안의 화림동(농월정 계곡) 유람 시

 

       유안음옥산동 遊安陰玉山洞

백석운천면 白石雲千面 흰 바위 흰 구름 천 가지 모양

청라직만기 靑蘿織萬機 푸른 덩굴 만 개의 베틀로 짠 듯

막교모사진 莫敎摸寫盡 다는 묘사하지 말게나

내세채미귀 來歲採薇歸 내년에 은거하러 올지니.

 

        유안음옥산동 遊安陰玉山洞

벽봉고삽수여람 碧峰高揷水如藍 푸른 봉우리 깍아세운 듯 물빛은 쪽빛인 듯

다취다장불시탐 多取多藏不是貪 많이 가지고 많이 간직해도 탐욕이 아니네

문슬하수담세사 문蝨何須談世事 이를 잡으면서 하필 세상사 이야기하나 (문 才+門)

담산담수역다담 談山談水亦多談 산 이야기 물 이야기 또한 이야기 거리가 많나니

         又

춘풍삼월무릉환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삼짇달에 무릉도원 돌아오니

제색중류수면관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냇물 수면도 너르구나

불시일유비분사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니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지만

일유인세역응난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노니는 것도 인간 세상에 어렵구나

 

* 남명 66세(1566) 3월에 옥계 노진 댁(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을 거쳐 갈천 임훈 댁(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을 예방하고 함께 안의 삼동(원학동,장수동(심진동),옥산동(화림동)) 유람. 옥계 노진, 개암 강익, 각재 하항, 대소헌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이정이 수행하다.

 

2. 남계서원

남명 63세 때(명종18,1563) 남계서원을 방문하여 하루 묵고 사당을 참배하다. 각재 하항,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이 수행하다. 사당을 참배한 뒤 남명이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동국의 여러 현인 중 일두선생이 거의 흠이 없다고 하였다. 개암 강익이 듣고서 달려와 함께 안의로 가 갈천 임훈의 부친상을 조문하고 귀환하다. 여러 사람이 안의삼동의 명승을 감상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번 행차는 전적으로 상주를 위문하는 것이라서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으니, 공자의 곡한 날에는 노래하지 않는다는 군자 정신을 남명에게서 볼 수 있다.

남계서원은 명종 7년(1552)에 개암 강익이 초창하고 명종 16년(1561)에 준공하다. 광거당, 의방재, 유예헌, 경직재, 애련헌, 준도문 등이 있는데 다 옥계 노진이 명명한 것이다. 명종 21년(1566) 7월에 사액하다. 동국에서 백운동서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이다. 정유재란(1597) 때 왜병에게 불타다. 뒤에 나촌(羅村: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에 옮겨 세웠다가 광해 4년(1612)에 옛터(수동면 원평리)에 중건하였다. <천령지>

 

3. 지리산 엄천강의 장항동과 용유동

 

장항동(獐項洞): 엄뢰(嚴瀨) 아래에 있다. 골짝이 넓고 토지가 기름지니 은자가 소요할 할 곳이다.

남명 조선생이 일찍이 여기를 내방하였고 문효공 노선생(옥계 노진)이 토지를 사서 별장을 지으려다 이루지 못했다.

뒤에 선생 손자  노척(盧脊:호성옹(省翁))이 옛터에 초막을 지었으니 선대의 뜻을 이은 것이다. <천령지(天嶺誌)> 산천조.

천령지: 정수민(鄭秀民)이 효종 8년(1657)에 지은 함양 향토지.

장항동은 지금 함양군 유림면 장항리 노루목이다. 대진고속도로 생초출구로 나와 엄천강 길을 따라 오라오다가 산청군 생초면과 금서면 경계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곳이 장항동이다.

남명이  명종 13년(1558) 4월에 지은 <유두류록>에서 일찍이 지리산에 입산한 회수를 남겼는데 덕산동(산청)에 3번, 청학동과 신응동(하동)에 3번, 용유동에 3번, 백운동(산청)에 1번, 장항동에 1번 도합 11번이다. 남명의 입산 목적은 산수를 탐해서가 아니고 만년에 은거할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찌 지리산 남쪽의 하동군과 동쪽의 산청군만 가고 북쪽의 함양군에는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장항동을 진주 옛 선비의 기록에는 지금의 산청 대원사 계곡이라고 하였는데 함양의 장항동이 맞을 것이다. 남명이 찾은 적이 있는 곳이라 남명의 후배 옥계가 별장을 지으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그 손자 노척이 완수하여 거처했으니 유래가 있는 것이요, 낭설이 아닐 것이다.

용유동(龍游洞)도 엄천강의 용유담(龍游潭) 계곡이라고 본다. 그곳 바위 면에 후인이 새긴 문정조선생(文貞曺先生)장구지소라는 각자가 있는 것이 함양 선비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plate_top_yellow.gif

 

二. 함양 남명 문인

 

 

1. 개암 강익

 

 

       강참봉만사 姜參奉挽詞 명 익(翼) 자 중보(仲輔)

 

의례삼천록 儀禮三千錄 십삼경 중의 <의례>를

심구오십년 尋究五十年 50년 동안 연구했네

극신간훼중 棘薪看훼重 부친은 돌아가셨고  (훼=火+毁)

훤초우상전 萱草又霜顚 모친은 연로하시네

야진제상조 夜盡啼商鳥 밤새도록 부엉이 울고

춘심규두견 春深叫杜鵑 봄 깊도록 두견새 우네

상천호부득 上天呼不得 하느님께 울부짖을 수도 없는데

군자과하건 君子果何愆 군자가 무슨 허물이 있는가

*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은 남명의 문인으로 별세 1년전에 남명을 모시고 안의삼동을 유람한 적이 있다. 일찍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시는 남계서원을 주창하여 창건하였다. 남명보다 먼저 별세하여 선생이 제자의 만사를 쓰게 된 것인데 군자로 표현하며 극도의 슬픔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사랑을 깊이 받은 것이다. 묘소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그 조부 금재(琴齋) 강한(姜漢)과 한곳에 있다.

 

 

강  익

강익선생은 조선 명종조때의 학자로서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성종조때 뛰어난 필법으로 명나라의 사신의 접대를 맡았던 강한의 손자이며, 1523년(중종 8년)에 출생하였다.

유학의 대학자로 지리산에 은거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워 1549년(명종 4년)에 진사가 되고, 특히 성리학의 심오한 진리를 탐구했던 일두 정여창 선생의 성리학을 전수할 만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왼쪽 사진은 개암선생이 설립한 남계서원


그는 1566년(명종 21) 유생 33인을 설득하여 일두 선생의 누명을 벗기고, 선생의 한을 풀겠다고 상소한 바 있으며, 그 후 후학들의 양성을 서둘러 많은 선비를 배출시켰다.

선조(宣組)초기 벼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당시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덕계리로 돌아가 연못을 만들고 연꽃과 고기를 벗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던 덕계(德溪) 오건(吳建)의 추천으로 소격서의 참봉을 받았다.

소격서는 도교(道敎)의 최고 신앙 대상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위하여 성제단(星祭壇)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오른쪽 사진은 개암선생의 묘소


이 곳의 참봉을 지냈고, 학문과 시문을 벗삼아 지내다가 개암(介庵)집을 남기고 수동면에 위치한 남계서원을 건립한 유학자이다. 선생은 1567년(명종 2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689년(숙종 15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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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계 임희무

 

 

 

        욕  천 浴 川

 

 

전신사십년전루 全身四十年前累 온몸에 40년 동안 찌든 때를

 

천곡청연세진휴 千斛淸淵洗盡休 천섬 맑은 물로 씻어 버리고 말리

 

진토상능생오내 塵土상能生五內 만약에 먼지가 속안에 생긴다면  (상=人+尙)

 

직금과복부귀류 直今과腹付歸流 곧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

 

원주: 기유년(1549) 8월 초에 우연히 감악산(紺岳山) 아래서 놀았다. 함양 문사 임희무(林希茂 1527-1577)와 박승원(朴承元)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모시고 같이 목욕하였다.

 

역주: 옛 삼가현 지금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에 포연대(鋪淵臺)가 있고 그 아래가 남명이 목욕하며 욕천 시를 지은 곳이다. 이 시는 남명의 몸을 깨끗이하는 고고하고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여실히 잘 묘사한 걸작이다.

남계 임희무는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망북정을 짓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소요하였다. 그 묘소는 유림면 대궁리 재궁에 있다.

박승원은 반남 박씨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3. 진극인(陳克仁)

 

 

        진극인 만장 진은 본래 천령 사람인데 김해에 장가들어 살았다

 

 

천령미미수로허 天嶺迷迷首露墟 천령에서는 수로왕의 터전이 아득하니

부증생식유신어 不曾生識有神魚 태어났을 땐 신어산이 있는지 몰랐겠지

부운무계창창면 浮雲無繫蒼蒼面 뜬구름은 푸른 하늘에 매이지 않으니

수도군금환불여 誰道君今還不如 그대가 지금 도리어 못하다고 누가 말하는가

역주: 전구에서 뜬구름은 허무의 존재가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된 것이다. 결구에서 작자는 진극인의 요절을 남들처럼 불행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 뜬구름보다 더 자유로운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시를 지을 때 남명의 심정은 뭔가에 매여 답답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가야의 고도 김해에 신어산이 있는데 신어산 자락에 남명이 처가에서 살 때 지어 거처한 산해정이 있고 산해정을 중심으로 남명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다. 진극인은 여흥진씨로 묘소는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에 있다.plate_top_yellow.gif

 

 4. 내암 정인홍

 

정인홍(1535~1623)은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에 살던 구졸재 양희의 사위로 와서 살다가 합천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남인 서계 양홍주(1550~1610)와는 원수지간이 되어  같은 남명의 제자인 양홍주는 서인으로 귀순하여 함양을 떠났고(내암의 제자들이 집을 헐고 쫓아냈다) 선조 말년 상소하여 서로 비방전을 펼쳤다.

 

 

       산해정(山海亭)에 있으며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 뒤어 써서 정군인홍에게 주다

 

일생우락양번원 一生憂樂兩煩寃 일생 동안 근심과 즐거움이 답답하게 하나

뇌유전현위수번 賴有前賢爲竪幡 앞 현인들이 표준을 세운 것에 힘입어 사네

참각저서무학술 慙却著書無學術 책 쓰기는 학술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

강장금포우장언 强將襟抱寓長言 애오라지 회포를 엮어 시조에 부치네

원주: 병인년(명종21,1566) 가을에 선생이 김해 산해정에 계셨다. 인홍이 가서 모시고 반달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귀환할 때 선생이 손수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짓고 또 이 절구 1수를 지어 그 뒤에 써서 주었다.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한 그루 작은 외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가지런하지 않네 塔高松短不相齊
오늘날 외솔이 탑보다 작다고 말하지 마오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松長他時塔反低

 
  디렉토리검색 > 고전국역총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9권 >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정인홍 설화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기(氣)를 불어서 개[犬]를 쏘다
   
정인홍(鄭仁弘)이 어려서 안음(安陰) 임갈천(林葛川 갈천은 임훈(林薰)의 호)에게서 수학(受學)할 때였다. 한번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갈천(葛川)이 여러 제자들과 밤을 새는데 밤중이 되자 모두 잠이 들었으나 인홍(仁弘)만은 정좌(正坐)한 채 밤을 새웠다. 살갗에는 많은 손톱 자국이 나 있고 핏자국이 얼룩얼룩하였다. 이는 몸을 괴롭히면서 잠을 참은 흔적이었다.
갈천(葛川)의 집에는 미모의 계집종이 많았다. 하루는 그 중 가장 예쁜 종을 뽑아서 그를 시켜 인홍이 글을 읽는 방으로 가서 가까이하게 하였으나 인홍은 밤새워 태연히 글만 읽고 한눈 한번 팔지 않았다. 갈천의 생각에 인홍의 이 두 가지 일은 비록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일이기는 하나 인정이 아니니 반드시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마침내 그를 물리쳤다. 그후에 과연 나이 80에 서울 거리에서 처형되었다. 인홍이 이미 늙었을 때의 일이다. 자손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 이제 늙었다. 한번 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니 개 한 마리를 불러오너라."


하였다. 개가 인홍의 면전에서 두서너 발걸음 되는 거리에 주저앉자, 인홍이 잠자코 단정히 앉아서 가만히 정기(精氣)를 뿜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개가 어지러워 비틀비틀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문을 닫더니 이어서,

"개가 죽었느냐?"


하고 묻자, 자손들이,

"개는 이미 달아났습니다."


하니, 인홍이 탄식하기를,

"내가 기(氣)를 불어서 개를 쏘았는데 개가 죽지 않았으니 나도 이제 쇠했구나. 어쩌랴!"


하였다.
세상에서는 인홍을 가야산(伽倻山) 늙은 여우라고 부른다. 합천(陜川)에는 아직도 그의 후손들이 있어서 화상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근세(近世)에 감사로 있던 모(某)가 이 소문을 듣고는 그 후손에게 불사르게 하니 불길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화폭(畫幅)이 서너 번을 나는데 두면(頭面)은 끝내 타지 않았다. 감사가 이를 전해 듣고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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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계 양홍주

 양홍주(梁弘澍, 1550∼1610)의 자는 대림(大霖)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우율문인(牛栗門人)이기도 하고 정인홍의 처남(妻男)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서계유고(西溪遺稿)>가 있다. 벼슬 : 46세 때(1595년, 을미) 4월 23일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다(<宣祖實錄> 28년). 

牛溪先生年譜卷之一

五年丁丑 ○十月。作書與崔永慶, 鄭仁弘。○梁弘澍嘗來謁。推尊南冥。過於退溪。先生曰。退溪深於學。恐南冥043_252a不如也。退溪之學。專宗朱子。法門正當。南冥高節。人不可及。而觀其言論風旨。有不怗怗地。永慶見申應榘。憤嘆曰。推尊退溪過實。輕視南冥過當。豈不爲人心世道之大害耶。仁弘亦委書。言短南冥之非。先生皆報書以諭意。說見本集及遺集。○崔永慶在京城。安敏學稱其孝。先生造焉。永慶自此見重於士林。數往來于坡山。後來狂荒頗僻。辛巳。上疏。附會仁弘之論。蓋與奇大鼎輩爲友。無學識而徒尙氣節故也。事見石潭記。○鄭仁弘爲求禮縣監。入京謝恩。仍訪先生於坡山。先生頗加稱賞焉。梁弘澍喜牧坡州。時弘澍請業于先生。仍出入門下。仁弘卽弘澍姊夫也。後與弘澍有搆怨相圖之事。先生聞之曰。弘澍設有不善。以仁弘爲此事。不亦甚乎。仁弘由是大加憾怒。畢竟攻陷先生。無所不至云。事043_252b見遺集及李貴壬寅年疏。

 6. 유현룡(柳見龍)

 

참판 유공권(柳公權)의 손자요 참봉 경준(景濬)의 아들로서 유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다. 경준이 안동에서 함양군 지곡면 덕곡에 와 살았다. <함성유행록> 유경준은 풍산유씨의 함양 입향조이다.

 

 

 三. 함양 남명 교유

 

 

1. 옥계 노진(1518~1578)

 

        남명이 옥계에게 회답한 서신

 

모는 여러 번 왕명을 받았으니 예의상 한번 궁궐에 나아가 사은해야 할 것이지만 도성에서 어정거린들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명공은 조만간 조정에 들어갈 것인데 만약에 도를 행하는 일이 없이 오래 머무르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한 구차히 녹봉을 탐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원주: 남명이 [명종 21년(1566) 10월에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고] 남쪽으로 돌아온 뒤 당시 함양 집에 물러나 있던 옥계가 서신을 보내 남명이 갑자기 돌아온 일에 대해 물으니 남명이 이리 답한 것이다.

 

 

        옥계의 남명 만장

 

의기횡성두 義氣橫星斗 의기는 북두성까지 뻗치고

심기도사요 心期到사姚 마음은 요순 시절을 기약했네 (사=女+以)

잠영원폐사 簪纓元弊사 높은 벼슬은 원래 헌 신짝처럼 여기고 (사는 산발 사)

등대위청조 登對爲淸朝 임금을 배알한 것은 맑은 조정을 위해서네

사업당년몰 事業當年沒 업적은 당대에 사라졌으나

풍성백세요 風聲百歲遙 명성은 백대에 멀리 전해지리

옥전방장재 屋前方丈在 집 앞에 지리산이 있어

의구용운소 依舊聳雲소 의구히 구름에 솟아 있네 (소=雨+肖)

 

신세원구학 身世元丘壑 일신은 원래 전원 취향이고

청풍일대흠 淸風一代欽 맑은 기풍은 한 시대에 존경받았네

상심경목가 傷心驚木稼 상고대 내린 것을 상심하고

합곡동유림 合哭動儒林 유림이 모여 애도하네

곡리수운월 谷裏愁雲月 골짝에는 구름과 달도 근심하고

상두위검금 床頭委劍琴 책상 머리에는 칼과 거문고만 남았네

종금살수로 從今薩水路 이제부터 덕천강 강변길

인거갱수심 人去更誰尋 사람은 떠났으니 다시 누구를 찾으리plate_top_yellow.gif

 

2. 갈천 임훈

임선생훈(林薰 1500~1584)은 자는 중성(仲成)이요 은진 임씨다. 안음의 갈천동(葛川洞: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서 태어났다. 덕스런 기상이 온전하고 효우가 천생적이었다. 중종 35년(154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하여 판결사에 이르렀다. 진사 유환(兪王+奐)의 문에 장가들어 대관림(大館林: 함양읍 대덕리 죽장마을)에 살았다. 뒤에 안음으로 돌아갔다. 노문효공이 존경하여 상대하여 앉은 적이 없다. 나이 80여에 졸하였다. 용문서원에 배향되었다. <천령지> 인물조. 유환은 뇌계 유호인(1445~1494)의 아들로서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대관림에 살았다. 갈천은 뇌계의 손서인 것이다.plate_top_yellow.gif

3. 구졸재 양희

양희(梁喜 1515~1581)는 자는 구이(懼而)요 양관의 손자이다. 스스로 호를 구졸(九拙)이라 하였다. 중종 35년(154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1년(1546)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당상에 이르렀다. 시문을 잘 지었고 맑은 덕이 있었다. 선조조에 중국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순국하였다.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에 살았고 뒤에 구천서원에 향사되었다. <천령지> 인물조. 양희는 남명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의 장인이다. 김해부사로 재직할 때 사위 정인홍의 요청으로 남명이 연루된 하종악후처사건의 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집안이 영향을 받아 사위 정인홍과 아들 양홍주가 원수지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악화된 관계는 지역에 파급되어 함양 고을이 동서로(북인, 서인) 분열, 상쟁하는 요인이 되었다.

 

 四. 함양 남명 일화

 

 

 1. 연암 박지원의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연암집>

 

경상도관찰사 겸 순찰사 이공 태영 사앙(李公 泰永 士昻)의 행차가 가야산에 들어 해인사에서 묵었다. 선산부사 이채 계량(李采 季良), 거창현령 김유 맹강(金유金+柔 孟剛) 및 지원이 영접하였다. (중략) 지원이 공에게 아뢰었다. 옛날 조남명이 지리산으로 돌아갈 때 보은으로 성대곡을 역방하였는데 그때에 성동주가 고을 수령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남명과는 초면이었는데 남명이 놀리기를 형은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합니다.' 하자 동주가 대곡을 가리키면서 웃으며 변명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에게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년 8월 15일에 해인사에서 보름달을 기다릴 것인데 형은 올 수 있겠습니까.' 하자 남명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어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에 맞춰 갔습니다. 도중에 큰비가 내려 가까스로 앞 시내를 건너 절 문에 들어가니 동주가 이미 누각 위에서 바야흐로 도롱이(띠로 엮은 비옷)를 벗고 있었습니다. 아, 남명은 처사이고 동주는 이미 벼슬을 떠난 처지였는데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민생의 질고이었습니다. 절의 중들이 지금까지 산중의 고사로 이야기합니다.

지원은 해마다 감사를 맞이하여 이 절에 들어왔는데 이미 세 분 관찰사를 겪었으니 또한 내구력 있는 관리라고 할 만하다. 달맞이 해후의 약속이 없으면서도 감히 심한 비바람을 피하지 못했고 매양 절 문에 들어올 때마다 약속하지 않고 모인 수령들이 늘 7~8 고을이었다. 절은 여관 같고 승려는 관기 같고 자리에 임해 시를 지으라 책하는 것은 장기판에서 독촉하는 것 같고 장막 친 것은 구름 같고 퉁소와 북은 새때소리처럼 울린다. 비록 단풍과 국화가 찬란하고 산천이 기이해도 또한 생민의 질고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한번 누각에 오를 때마다 미상불 서글피 옛 현인들의 도롱이를 멀리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이 것을 써서 산 절의 고사로 삼게 한다.

을묘년(1795, 정조 19) 9월 20일 안의현감 박지원 서. plate_top_yellow.gif

 

 

 五. 함양 남명학파

 

 

1. 강응황(姜應璜 1571~?)

 

자는 위서(渭瑞)요 호는 백천(白川)이다. 혜평공의 후손이다. 일찍이 한강 정구(남명의 명제자)에게 배워 칭찬을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에 포의로서 행재소에 문안갔다. 유영경이 그 일로 아뢰어 교관에 임명하였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에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치 않았다. 이윽고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만에 버리고 돌아왔다. 함양읍 백천리 본백마을에 살았고 유림면 옥매리 차의마을 위천 가 솔숲에 취한정(翠寒亭)을 짓고 시와 술로 소일하였다. 동계 권도, 운제 노형필, 용호 박문영의 여러 현인과 서로 종유하며 수양을 쌓았다. <덕천사우연원록> 사숙조.plate_top_yellow.gif

 

2.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부음정(孚飮亭)에서 헌수하다

 

추만계산모경농 秋滿溪山暮景濃 가을은 산천에 가득 풍경 멋들어진데

암암앙기엄추용 巖巖仰企儼秋容 고고하고 고결한 존안을 우러러 뵈네

일배경축천년수 一盃更祝千年壽 한 잔 술로써 천년 장수 축수하오니

여해여송우화숭 如海如松又華嵩 바다 같고 소나무 같고 오악 같으시라 <내암집>

역주: 부음정은 내암 정인홍(남명의 수제자)의 정자이다.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있다. 고대 정경운은 옥계 노진의 향선생 당곡 정희보의 손자로서 내암의 함양 출신 수제자이다. 그의 임진왜란 전후의 일기인 <고대일록>은 당대사의 중요한 사료이다.plate_top_yellow.gif

 

 

 

  七. 남명 팔도 기행

 

 

남명의 여행 범위는 경상남도, 북도, 전라남도(광주광역시 포함), 북도, 충청남도, 북도, 경기도, 서울에만 걸쳐 있고 다른 지역은 발길이 닿지 않았다.

 

 

        포석정 鮑石亭 경주에 있다.

 

 

풍엽계림이개가 楓葉鷄林已改柯 단풍 든 계림은 이미 가지가 바뀌었네

견훤불시멸신라 견萱不是滅新羅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포정자소궁병벌 鮑亭自召宮兵伐 포석정에서 스스로 군대를 부른 것이네

도차군신무계하 到此君臣無計何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군신은 계책이 없었는가  

 

         삼홍소 三紅沼 피아골에 있다.

 

 

흰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조선 중종 때 학자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의 삼홍소(三紅沼)를 보고 이 시를 읊었다. 읊는 이의 마음까지도 붉게 만드는 이 시는 지리산 단풍의 멋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 주고도 남는다.

지리십경중 제2경인 피아골은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골짜기로, 밭을 일구어 농산물로 피를 많이 가꾸었다는 '피밭골'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직전계곡(稷田溪谷)이라고도 부른다. 활엽수의 원시림이 울창하며, 특히 가을단풍이 유명하고 식물이 능선별로 구분되어 분포한다. 산홍(山紅)·수홍(水紅)·인홍(人紅), 즉 산·물·사람 모두가 빨갛다는 삼홍소(三紅沼)가 있으며, 홍류동(紅流洞) 3홍의 명소이다.

선유교에서 2km를 거슬러 오르면 오른편으로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이곳이 유명한 삼홍소(三紅沼)이다.
이곳의 단풍이 짙게 물들 때는 산도 붉고 (山紅),사람도 붉게 물들고 (人紅),물까지 붉게 비친다(水紅)고 하여 삼홍소로 불린다.
그러나 이 삼홍소 앞에 지난 86년 길이 30m의 다리를 가설하는 과정에서 주변 경관이 훼손되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져 벼렸다.
삼홍소를 지난 산길은 다소 투박한 느낌이 들지만, 얼마간 오르면 와폭의 연속인 구계포(九階泡)에 닿는다.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八
 附錄
諸家記述雜錄
先君子嘗曰。而見才氣儘美。而第有忌克之病。不欲與吾同事。吾輩死後。方必施其才耳。壬辰後。西崖擔當國事。每於朝堂。盛稱先君子先見才調。或有以西崖爲追許。牛溪先生聞之。笑曰。而見本如是也。渠豈不知栗谷之賢也。但以勝己者厭之。死後追許。有何益乎。南冥有詩曰。人之好正士。好虎皮045_427c相似。生前欲殺之。死後方稱美。而見近之。
先是。朝論携貳。東人以沈爲外戚。西人以金爲報怨。時金應南負時望。以攻外戚爲士論。公以後進。見金之論議如此。心頗信之。其後。見應南行事少無可取。及讀栗谷文集。知其行己立心。光明正大。卓然爲百代儒宗。然後頓變前日所見。嘗語余曰。栗谷學力高處。雖退溪亦或有未到矣。余因請爲行狀。公曰。吾何敢摹狀大賢。然亦不爲牢拒。尤以打破東西之說爲是。陳箚自訟其前日誤墜一邊之失。而又以無偏無黨。陳戒榻前。終不爲黨論。可見其敬信之深矣。出李貴所撰漢陰遺事

 

月汀先生別集卷之四
 漫錄
南冥以河宗嶽妻失行事。與龜巖論議不同。至於絶交。蘇齋聞之曰。南冥平生不愛官職。高蹈物外。一婦047_382b人失行。有何所關。而乃與朋友絶交。此不可曉。南冥門人柳宗智。以蘇齋之言告南冥南冥曰蘇齋只聽傳聞之言。不深知我之本情。故有是言云。

昔年余承敬差之命。奉使嶺南。題僧軸云。鄕心迢遞047_389a白雲端。南國秋風道路難。馬上逢僧還一笑。滿山蒼翠要人看。南冥甚賞之云。又有贈山人一絶。三峰不見已三年。逢着山僧一悵然。獨鶴孤雲無限意。硯池何日弄潺湲。硯一作影

 

浮査先生文集卷之三
 
答曹漆原次磨書
頭流山兩堂水一歌,秋月曲一章。世人皆謂先生所作。而不知其出於陶丘。故癸亥秋。有榮川友人朴漉投書於我曰。南冥秋月歌。少時好誦而今失其傳。索余書送。余書其歌。其尾曰。是歌也056_097b本李陶丘所作。傳之者誤稱南冥歌云云。而於是記。亦以謂先生平日。以詩荒爲戒。不肯作詩。其肯作歌乎云耳。待得桃花錦浪出洞時。身作漁卽。行尋別有天。而祗恐烟鎖仙區。迷不能尋其路也。在此聞之。神道碑。尊其琢破字面云。然耶。或碎或仆。任他所爲。傍觀而已可也。手自琢字。極爲未安。聞來不勝驚歎。伏惟量察。

 

芝山先生文集卷之五
 雜著
題南冥關西問答辨後 


辨。有嘗恨復古學聖賢之道。而致知不明云云。

中宗末年。已有此兆。而未久昇遐。仁宗卽位。卽有貳公之命。先生進退亦難處。猶無病者不知人之疾痛也。

辨。有大學不言存養云云。

大學欠存養之說。非獨先生之說爲然。先儒亦有言055_511d之者。大學工夫。多在省察上。如戒愼不睹。恐懼不聞一節。則未嘗言也。

辨。有士族女再嫁之論。亦非復古之說云云。

程子但論婦人之節而已。非謂必使婦人不改嫁也。三父之說。已載禮文中。此不必咎先生也。

辨。有其曰耳目口鼻之欲。是私欲者。亦非也云云。

耳目口鼻之欲是私欲云云。先生亦指於不善者言之。此說在中庸輯註中。初學所得知者。曾謂先生不知乎。
南冥嘗譏斥先生者多。而先生若不聞焉。此所謂犯055_512a而不較者也。先生嘗斥忘機堂歸之異端。而南冥之學。與忘機同。退之以孟子闢楊墨。爲功不在禹下。愚亦謂先生之功。不在孟子下。東方理學。雖曰自圃隱倡發。而著述不傳。後學無從而考知。寒暄,一蠧,靜庵。雖其德行事業。如彼之盛。而道學則無傳。退溪雖與先生生並一世。而亦未見其相資之迹。則先生之學。槩自得於心。而爲吾東始有之大賢矣。彼區區浮詖之說。何損於先生之大道哉。
先生以大學物有本末云云一節。移置格物致知章之首。甚切當。所見極高。到前賢所未到處。但格物致055_512b知者。大學敎人最初地頭。其論用功處。未必不如誠意正心修身章之爲者。此節上二句。泛言事物之有本末終始。下知所先後四字。方言工夫。知止一節。專言物格知至以後之事。其論用功處太略。恐又有缺文。恨吾生太晩。未及稟質。

 

芝山先生文集附錄卷之一
 年譜
年譜 


皇明嘉靖二十四年仁宗大王元年乙巳

三十二年甲辰先生六十歲

▣月。除善山府使。不赴。○鄭寒岡來訪。先生南還後。寒055_559a岡陸續書問。復委訪。又遣子樟受業。答李漢陰德馨書。○答鄭愚伏經世書。深相奬詡。有風雨中鷄鳴語。答鄭四震守菴禮說問目。○九月。追贈魯齋公議政府左參贊。朝廷錄先生宣武一等勳。有是追恩之命。書曺南冥關西問答辨後。辨中。譏斥晦齋先生。故先生爲之伸辨。按使李時彦啓薦先生學行。

 

三十三年乙巳先生六十一歲
泰村先生文集卷之五
 效嚬雜記
餘話
[松竹皆後淍而亦有優劣]
南冥先生謂裴景餘曰。松與竹孰優。裵曰。竹似優矣。先生曰。不然。松竹均是後淍。而竹則隨風偃仰。不得自由。松則抗風不屈。不支則顚。豈竹之可及哉。愚以爲竹則不生於苦寒之地。松則無處不生。優劣亦在斯矣。

 

松亭先生續集卷之三
 附錄
年譜
宣祖大王元年戊辰先生十六歲
二年己巳先生十七歲

聘夫人尹氏進士彦禮女

三年庚午先生十八歲

九月。遭王父生員公喪。

生員公素與南冥先生友善。南冥以詩哭之。南冥詩有曰。諸孫好禮書。又曰。秀庭蘭茁是三多。盖先生兄弟三人。學問造詣已有大名於當時。故南冥稱許之以此。

 

琴易堂先生文集卷之五
 
鄭仁弘南冥語辨 


余聞鄭仁弘爲江右巨擘者有年。未知其言行之實062_110c如何。頃因館儒通文後錄。始乃反覆其所謂師集語者。而得其一二。非惟不知退溪先生。於其所師南冥先生。亦不能眞知而善形容。非惟不知義理之眞。於人之言語一節。亦不能盡其意。筆頭到處。無非彰師失而呈心疵耳。南冥嘗撰龜巖先碑。極其褒許。先生改動其僻澁數語而書諸石。則三老道雖不同。交未嘗不素厚也。苟如後來之齟齬。南冥之少許可。肯撰出揄揚人文字耶。龜巖爲人。愚雖未詳。趨附權門。實有其跡。則絶交醜罵。不必待黶然一事。而相知半世。必待交孚之厚。撰碑之后而輕絶久要耶。君子交062_110d絶。惡言不出於口。其交可絶。而其言何太惡耶。出妻令可嫁。絶交令可交。古人之義。不可行耶。知人固未易。然先生之於龜巖。只以同朝之故。有往來之分。其屋漏之事。誠非隃億。若南冥隣居不遠。而覺其爲人何太晚耶。人各有意。其可以不同隱之故而斷定其爲人耶。所可怪者。師之言。一則曰篤學不倦。一則曰己於朴實頭做工。一則曰服中廟仁考兩大王喪。忠孝固職分內事也。弟之言。一則曰趨附權門。一則曰名利場中。頭出頭沒。纔登厥師不虞之筆。旋陷厥弟求全之舌。師之言是則弟之言非。弟之言是則師062_111a之言非。二者必居一於此。設有可絶之罪如鄭之所云。則南冥之不知人。甚於先生。其所以攻先生。乃所以攻其師也。若南冥之素所不言。而一失信之故。致有門徒之分朋。至於三老旣歿之久。方做出人所不爲之事。枉加之罪。必出於捏構陷人之擧。君子之用心。固若是其險陂乎。龜巖負約之過。不至於絶交。絶交之罪。必涉於大故。朋友之間。無大故可絶之罪。而乃以不守硜硜之小信。輕絶半生之舊要。彼當喪之歌。其罪反輕於失信而君子不絶耶。淫奔之事。固著於詩春秋。然聖人不過因其事而筆之於經。以垂世062_111b示懲耳。夫衞宣公。天下之大惡也。東萊呂氏猶有改過之望。君子之處心待人也。嚴而恕如此矣。其果屑屑蓄之心胸之間。移甲怒絶故交而不知變。以爲終身一大業如南冥乎。經筵不講。固宋時執拗者之罪。其曰當講者。非所以勸之。將以戒之也。凡君子於經史。苟遇此等事。當惕然戒懼。若將浼焉之不暇。抑鄭其將玩味甘心。而從事於彼耶。不然。文過飾非。莫甚於斯。心術之差。不啻止於千里之遠也。遯世无憫。經德不回者。雖曰中庸。顧其立脚之地。不可不謂之亭亭皎皎。如不顧千駟萬鍾。而樂堯舜於畎畝者。人或062_111c加之以此言。爲子弟者聞之。必以爲知言。不勃然發怒如鄭也。古人多有斷章取義者。以穉圭而用諸彦倫則爲嘲侮。以君子而用之朋流則爲平實。如爲富不仁之談。陽虎口之則爲賊仁。孟子引之則爲勸仁。況此數語。實有光於南冥者乎。南冥有隱德不仕之名。龜巖有仕宦顯榮之名。名之於出與處也。何殊觀耶。必欲以隱者爲名流。而仕宦者不得爲名流。則皐,虁,伊,呂不爲名流。而老,莊,釋氏方爲名流也。孟子雖不見諸侯。諸侯有禮以先之。亦未嘗不答。何嘗有踰垣閉門過甚之擧。至如莊光之倫。雖有先儒之云云。062_111d實以漢季之有此人爲貴耳。非以爲實有德業無愧於伊,呂也。今乃徑處厥師於莊光之列。而欲免一節之名。不知類甚矣。夫以南冥一生辛苦工夫。不愧於爲己之學。終揆以厥弟之言。其爲事物所累。不能灑然無一事是當合於古人之跡。南冥不至於聖人地位。然竊恐其不應若是之甚也。若吾退溪先生則異於是。其處心也謙。其待人也忠。其與曺徵君一書。足以備見之矣。至於論道則繼往開來。不可不嚴。故言語書尺。必柝秋毫。以求至當之歸。仕止隱見。必務合義。以求吾心之安。其言行氣象。出處行藏。自與南冥062_112a不同。後之人。雖欲强以同之。安可得耶。顧其待人也忠。故不得不以聖賢責之。此在龜巖爲不爲如何。亦何傷於先生耶。朋友之間。亦盡其道而已。不可以一事之差失。便輕絶之。使之不容於我也。嗚虖。鄭之於南冥。尙不能深知有若此。況如先生耶。人之知鄭者。徒見其好議論朝廷得失。人物長短。守令臧否。皆以爲疾惡太甚而已。今也竊覸其氣象。都出於忿懥。其於義理。略無見識。是以。性情不得其正。而發爲言論。如此謬戾。如使南冥有知。當於冥冥中鳴鼓以攻之。使不累師門。不當使之妄託門人之列也。噫。凡人之062_112b患。舍己田而耘人田。鮮不有此等妄作。以貽有識者之嗤鄙。況渠方在堂下。而能辨堂上人曲直耶。此乃吾輩猛省克治處。不可更作剩話。與之鬧爭閒氣也。第其師弟之間。妄相推重者。適足以累師門而不自知。故聊拈出所見。與同志商確爾。

 

訒齋先生文集年譜
 [年譜]
訒齋先生年譜
三十五年丁未 先生四十五歲
二月。以翰苑指揮。取才于議政府講左傳 。三月。薦授藝文館檢閱。○四月。署經入直。○內賜生薑一封。感恩作詩。 詩曰。黃金芽嫩犀角長。去穢通神孔所嘗。謾嚼天香薰入骨。顧何才德荷龍光。答書鄭仁弘辨斥誣賢事。 先生嘗與人語及南冥先生。而仁弘聞之。以爲詆毀南冥。先自抵書。張皇辭說。侵逼退溪先生。故先生據理辨斥。而極言各尊所聞之意以答之。

 

桐溪先生文集年譜
 [附錄]
文簡公桐溪先生年譜

七年丁卯 先生五十九歲 正月金人大擧來侵乘輿向江都二月庚子先生奔詣行在 國家自中興以來。與虜絶和益兵塞上。爲戰守計。又有反間言。姜弘立老母妻子皆戮死。弘立遂深怨之。以爲朝廷於我已負。引虜東犯。平安節度使南以興力戰死之。平壤又潰。報至。上幸江都。世子分朝南下全州。虜兵遂進至平山。時先生在家聞警。卽日赴難行在。道有詩曰。向北趣鞭緣聖主。望南揮淚爲慈親。至鎭川。聞大駕播越。道路相傳賊已塞路。必難得達。從者以爲075_415b分朝近且便。先生曰。君有難觀望。非人臣義。遂疾馳而進。當是時。三南士大夫在散者。皆便道趨分朝。直赴行在者。惟先生一人。人心倚以爲重。先生旣肅拜。退寓城外。壬寅上箚言戰守事 首陳和議之非。弘立之罪。而因論敵與我形勢曰。虜之要和有二焉。懸軍深入。正犯兵忌。安州之戰。殺戮相當。欲善其歸。以此餌之一也。不知我國之虛實。或慮前頭復有如南以興之堅守力戰者。欲怠我師。以此餌之二也。均之二者。皆是愚我之謀。而我不覺悟。僥倖萬一。不修戰守之備。噫。此豈皇天祖宗付托之意。一國臣民所嘗期待於殿下者哉。臣竊料我國之軍。雖不必盡爲精銳。而其數則不下十萬矣。目今六路勤王之兵。幾盡雲集。鄕兵義旅處處蜂起。平安數城。雖已陷沒。黃海一路尙得完全。使江原,咸鏡之兵。繞出賊後。黃海之卒。橫衝其腹。畿甸以下四道之兵。把截臨津。則彼虜前無所進。退無所歸。左右受兵。勢分力弱。隻輪不返之功。庶幾可圖。而所患者。惟殿下無堅定之志。廟堂無擔當之人而已。且四大將所帶軍官其數過千。而皆一國武士之選也。旣免西戍之苦。又有養之恩。而一朝臨亂。任爲私兵。鞭軍砲手。凡幾百千。敎養有素。才藝精熟。禦虜之075_415c用莫過於此。而稱以宿衛。退蹙一隅。嗚呼。內固重也。外固輕也。輕重之權。隨時低昂。今日之外。果可謂輕乎。今有人焉。盜賊欲入其家。窺伺門外。不閉其門。任其闌入。深藏弓矢刀劍於閨內曰。待其掃蕩家財及閨而後用之云。則殿下以爲智乎。不智乎。今之事勢與此相類。臣竊怪之痛之。所謂四大將如金瑬,李貴書生也。固難出征。李曙積失人心。將士必不用命。惟申景禛。名將家也。世受國恩。豈無敢死之心。分鞭砲一半。合兩將軍官。付之景禛。使守一處。則軍情方鬱思欲一戰。師直義壯。何患不敵。此只在殿下一玉音之間。何憚而莫之爲也。答曰。嘉卿忠義。所陳當量處。○是時。朝廷不修戰守之備。惟望和事之成。授弘立子以官。又遣其親屬。見弘立於陣上。言朝廷待之不薄。弘立及朴蘭英與胡差劉海等爲議和。來到津頭。使李廷龜金藎國迎接之。自上引見弘立等。劉海稱以難於拜禮。臥而不動。右議政吳允謙及崔鳴吉強請而來。於是和議遂決。將差送假王子及使臣。以爲質。海等持國書而去。俄而復來。要削去書中天啓二字。朝廷竟不書年號。依揭帖例成給。海等乃還。甲辰。隨駕而還。壬子。兼同知春秋館事。 愼希閔。居昌縣吏也。事母至孝。075_415d母死廬墓三年。鄕里稱之。至是裹足赴亂。先生言乎領相。招致備局。給料調用之。三月。金人退。劉海弘立等以莅盟事又來。月朔。右相吳允謙等用黑牛白馬。與胡差歃血成誓。先生有詩曰。黑牛兼白馬。腥血滿盤殷。相國無胛病。謀臣有喜顏。侏談禮式。犬羊雜衣冠。東海非難蹈。朝門望眼寒。自赴難來隨事。感慨有詩凡二十餘篇。丁丑。除漢城府右尹。己卯。奉命先入京城。金相國尙容爲留都大將。日與共事。壬午。除兵曹參判。丁亥。還詣行在。○庚寅。迎東宮。 完平李元翼,左議政申欽等。奉東宮。自全州至。四月戊申。扈駕還京。壬子。上疏乞歸。不得。 答曰國事至此卿母時無疾病仍留察職五月庚午。迎三殿于南郊。○辛未。告親病歸。傳賜臘藥。 旣還鄕。仍遞職。跋南冥學記類編。○外曾祖姜琴齋手筆童蒙須知。○八月。除都承旨。病不赴。○介菴姜先生075_416a行狀成。 名翼。先生之舅。十一月。除大司諫。病不赴召。上疏。遞付副護軍。 疏中懇陳難進之狀。答曰。累召不來。予甚缺然。從速上來。以副予望。本職。如是懇辭。今姑勉從。○是年。挽韓西平。

 

疏菴先生言行錄
 [言行錄]
疏菴先生言行錄[李植] 
己酉秋。李爾瞻與柳黨相軋。出守義州。廣求贐章以行。公內弟韓定國兄弟。皆其狎客。因此求於公。公以小序應副。末句云。范丹幕貴之譏雖阻前亭之約。孫楚傾城之送。尙吟零雨之詩。明其不肯見也。明年。爾瞻還朝。益肆奸慝。公大悔其作。每於賓友間。自貴矻083_395d矻不已。爾瞻頗聞其語。又因韓輩。諷以湖堂之選。公輒斥罵。爾瞻大怒。公被黜後。爾瞻門客爲史官。摘其序語。以贊爾瞻。蓋欲証公爲重。欺誣後世。小人之計巧矣。
京城北。有曺溪洞。李爾瞻以曺是南冥姓字。欲立廟祀南冥。闢書院。聚其徒。爲己鷹犬。公聞而笑之曰。曺溪祀南冥。孔德里合祀先聖耶。 孔德里。在京城南。爾瞻指此爲謗訕云。

 

靜觀齋先生集卷之十四
 
關西問答錄 


不佞昔從曹南冥遺集中。見其所謂解關西問答者一篇。而竊嘗有疑之者。退溪先生卽我東方之考亭也。其推尊晦齋先生。不啻若考亭之於兩程。而其稱南冥曰。亭亭物表。皎皎霞外。則其所以稱許之者。可知矣。蓋南冥之於晦齋先生。猶伯夷之於夫子。而生並一世。常以道義相砥礪。則不應遽爲此等文字。以遺於後也明矣。仁弘之於南冥。猶陸棠之於龜山而殆有甚焉。仁弘之誣毀晦退兩先生者極矣。而南冥遺集之行。出自仁弘之手。多有以其意担合而裝點130_238d之處。則今於此篇中數段議論。烏能無後人之疑也。第其所謂關西問答者。不行於世。未知其中所論果如何矣。不佞又嘗妄以晦齋先生大學章句補遺一篇。仍加裒集。遂以古今大學改正諸本及格致諸說。倣蘇齋盧相國之所已編錄者而分爲兩篇。以禮記元本及明道,伊川,考亭三先生所改正者與董丞相,黃慈溪,蔡虛齋諸先正之所移易經傳者爲上篇。而以晦齋先生補遺終焉。以王魯齋,宋潛溪,方正學,都南濠,羅整菴,王陽明。以至我朝權陽村,退溪先生,盧蘇齋,栗谷先生與不佞先祖考月沙先生。諸先正之130_239a論格致傳之說爲下篇。以張旅軒之晦齋先生補遺圖終焉。名之曰大學集覽。以爲私自誦玩之資。懼其近於編著。雖不敢出以示人。而第於補遺中以聽訟一節。上係於經文之末者。實遵伊川程夫子之所改正。而退溪先生之與李靜存仲久論補遺書。以此一節。謂爲格致之傳者。殊與補遺本書改定之次序相戾焉。退溪先生於此必不有失於照管。而然不佞未究厥由。嘗以此就質於先覺而猶未能釋然矣。今年秋。不佞病伏城東。杜門謝客。一日。有李生弘炁者來自嶺之南紫玉山中。踵門而求見不佞。不佞與之語。130_239b恂恂有長者風。知其爲大賢之後也。李生仍袖出金斯文玄成所書晦齋先生無極太極說及與忘機堂往復書印本一軸。以示不佞。繼以關西問答錄一冊。請不佞爲語而其意甚勤。蓋李生。卽晦齋先生之玄孫。而其曾祖全仁。從先生於西徼流竄之所。著關西問答。其祖浚。又以金斯文玄成所書晦齋先生太極諸說。受文於漢陰,白沙,西坰,象村諸公。而不佞先祖考月沙先生。亦有所題識於其間者。李生以不佞忝爲月沙先生之孫而亦嘗有志於斯。乃以此見屬。不佞雖愧不敢當。而竊喜得見其所謂關西問答。130_239c論格致傳之說爲下篇。以張旅軒之晦齋先生補遺圖終焉。名之曰大學集覽。以爲私自誦玩之資。懼其近於編著。雖不敢出以示人。而第於補遺中以聽訟一節。上係於經文之末者。實遵伊川程夫子之所改正。而退溪先生之與李靜存仲久論補遺書。以此一節。謂爲格致之傳者。殊與補遺本書改定之次序相戾焉。退溪先生於此必不有失於照管。而然不佞未究厥由。嘗以此就質於先覺。而猶未能釋然矣。今年秋。不佞病伏城東。杜門謝客。一日。有李生弘炁者來自嶺之南紫玉山中。踵門而求見不佞。不佞與之語。130_239d公又嘗出入於退溪先生之門。受其奬勵。至有相從於雲山煙水之語。則亦可謂無忝所生。而其本錄中所論南冥事數條。只是父子間問答之辭。本無譏貶之意。益見責備之重。則縱使南冥而見之。想必服膺而加勉之不暇。則迺反以解關西問答一篇。作爲文字。指摘先生平昔之事。有若因此而詆訾於身後者。豈南冥之所肯爲也。於是而不佞之昔嘗有疑於此者。益信其無疑。而問答本錄之下。又載全仁公之子浚與淳上蘇齋盧相國論大學補遺書一篇。其中詳卞退溪先生之當初以聽訟一節錯認爲格致傳之130_240a由曰。退溪先生初年。未得見先祖更定之書。偶聞人之誤傳。便有此論。晩得先祖更定之書。然後沈潛玩繹。翻然悔悟。服其用意之深。所見之卓。欲作一書以明前日傳聞之誤。而奄遭梁木之壞。此乃斯文之不幸云。而其所援據證引反覆論說者。亦頗有脈絡可觀。似不至於大悖先生補遺之本旨。於是而不佞之昔嘗有疑於此者。亦覺其頓然氷釋。而先生之子若孫。迺能世其業。世世無忝者。於此而益可見矣。不佞因李生而一朝解此兩疑。則其於此錄。豈無見晩之歎。起予之喜。而然其語之托。有不可率爾應命者。130_240b況不佞時有不安於朝者。退屛於郊坰之外。而李生又以蹇衛單奚。見訪於廣陵之僑舍。申前請不已。則其前後丁寧之意。亦有所不可終孤者。遂以不佞之解疑於兩書者。綴次而爲之文。以塞其請焉。知他日之不能無疑於兩書者。抑或因此而渙然釋疑。亦不如今日之不佞也否耶。昔考亭朱夫子之答劉元城之孫曰。苟能誦其言行其行世其家者。孰大於是。惟李生勉之哉勉之哉。仍書此爲關西問答錄

 

明齋先生遺稿卷之四十六
 行狀
大司憲贈領議政松郊李公行狀 癸酉 


本貫。全羅道全州府。

136_477d曾祖浩。故禮賓寺別坐贈司憲府執義。

妣房氏。令人贈淑人。

祖彥師。故洪川縣監贈吏曹參議。

妣洪氏。淑人贈淑夫人。

父愼誠。故司饔院奉事贈議政府左贊成。

妣原州邊氏。恭人贈貞敬夫人。

公諱楘。字文伯。號松郊。系出璿源。

宣祖末年。仁弘倡邪說。構誣牛溪。目之以遺君黨奸。至於追削官爵。光海卽位。公率太學多士。上章訟冤。光海答以先朝已定之論。今難輕議。公又再疏。極陳其誣陷之狀。初疏及第三疏。皆公所自製也。辛亥。仁弘爲南冥。詆毀退溪先生。又上箚言晦齋,退溪兩先生。不宜從享文廟。辭極悖慢。公入太學。會諸生。發聲罪之議。時仁弘威勢方熾。諸生多逡巡退縮。公奮然以身當之。遂取靑衿錄。削仁弘名。仍通文八路。以明其罪。又率諸生陳疏。痛辨邪正。仁弘之徒朴汝樑。時在憲職。訴訐仁弘被削。光海怒。命覈倡議者公待罪。而太學諸生。至於捲堂。光海愈怒。事將136_479b叵測。賴白沙李公恒福,月沙李公廷龜。並陳箚力救。乃得解。壬子夏。登明經甲科。拜司宰監直長。

 

星湖先生全集卷之五十五
 題跋
跋南冥言行錄 


南冥先生。高尙之士也。其言槩多高苦而傷刻。謂鄭圃隱一死可笑。仕恭愍三十年不去。以辛朝爲王出也。則佗日放出。己亦豫焉。十年服事。一朝放殺。後日之死。深可未曉。此廢心論蹟之說。未有得其實也。圃隱爲麗氏死。其於聖朝爲何如。而開國十年。便加褒崇。此聖朝之覩記而心賞199_507b之也。至今世遠事湮之後。依俙立論。臆斷其得失。或者過耶。退溪之言曰世之好議論喜攻發。不樂成人之美者。嘵嘵不已。每欲掩耳而不聞。後圃隱而知其所存者。惟退溪耳。李宏仲記善錄。錄退溪之言曰當時繼立者雖辛氏。而王氏宗社未亡。故猶事之如此。如牛氏繼立而綱目不斥王導。正得此義。此恐記者之誤也。其或先生難於爲說。而微辭託言耶。夫牛繼馬。後來史筆所斷。非當時公誦如此。若眞如晉氏嗣絶則徒諉其宗社之未毁。而區區縻祿於異姓之朝。豈義之當然乎。彼王導特一賊臣。本無與國存亡之志。綱目不貶。未必爲宗社之不亡。安得比而同之。且199_507c楊用修引晉書云初玄石圖。有云牛繼馬。宣帝深忌牛氏。遂爲二榼共一口以貯酒。帝先飮其佳者。而以毒酒鴆其將牛金。而恭王妃竟通小吏牛氏生元帝。今通鑑省其文云云。牛金可謂枉著一死。又負穢名也。此說於金之寃則雪矣。又不能覈牛氏之說。未必爲眞傳也。此事本出沈約宋書。而約只以何承天書爲本。旁採徐爰說。其源不過由於野乘塗聽。未足深信。故王邵謂其善造奇說。以誣前代。如小吏牛金之類是也。後梁武帝知而不以爲非云云。則古之尙論。已有能辨之者也。此雖與麗事。又似有不同。而若但曰導之不去。只爲晉氏雖絶而宗社猶存故也則奚199_507d可哉。此又讀史之所可深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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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淵集拾遺卷之二十八
 日記
嶺南日記 戊子
[三月]

十七日晴。聯鑣至橫步驛。未及樓里嶺數百步分歧。各相回顧。懷不能已。北行二十里。大抵石徑崎嶇。投 中火。越一峻峴至德山書院。前有大川。沖融成潭。可數百步。環之以頭流遠勢。逶迤不迫。潭南茂松百餘株。其外野色蒼然。臨潭有洗心亭。只一間亭。左有彩閣亦佳穩。飯後到亭上。倚軒到暝黑。潭影沈沈。靜聞水碓及松上鸛叫。自爾忘返。
十八日晴。沿川數里。過南冥墳。道上有碣。乃許穆筆167_203c也。又行七八里。路由石磴巖上。刻入德門三字。傍有石壇可坐。下有溪潭頗可觀。行三十里至丹城中火。行五十里至三嘉。
十九日晴留。
二十日寒留。
二十一日。與許弟往觀黃溪瀑布。高可十餘丈。壁勢折陷折補。論之不及落淵。與許弟作別。至太平里中火。過鄭瑜家。鄭瑜兄弟及諸人出候路左。乍坐敍禮起。鄭瑜及從弟某權姓人隨來。盖欲同宿龍巖也。行過古三嘉。乍憇川邊。復行十餘里至龍巖167_203d乃南冥書院也。追至又一人。乃權萬時也。云有世好。欵曲備至。與宿講堂焉。

 

息山先生文集卷之十八
 題跋
讀守愚堂實記 


守愚堂崔公。一忤鄭澈。終罹大禍。至今令人於悒。葢178_401a公之學反躳實踐。不喜著述。然嘉言懿行。必多可傳。當時禍色甚慘。朋友門人無所叙述。今讀實記。僅掇拾一二。不免有踈漏之歎。爲之揜卷太息也。曾考柳文忠公雲巖錄。其中一條。記守愚事。視附錄諸公語。加詳。又三條。記與澈酬酢事。比白沙錄。亦有相發者錄曰。崔某葬親用石槨。旣而家益貧乏。挈妻子。下晉州。依其弟餘慶家。凡事。永慶主之。餘慶趨走承稟於前。見者不知爲餘慶之家人。兩賢之。又云。永慶平時。與成渾交厚。及渾與珥相結。而永慶每誦言澈爲無狀小人。酒後出兩膝。以手自撫曰。此膝當爲澈所考掠。然吾何畏焉。大言不已。以此。與渾交道。亦不終。○又曰。按獄日。余遇澈於闕下。言永慶有高士重名。獄事不可不詳審。澈素輕。又被酒忽以左手自執其項。右手爲衝刺狀。連聲言。此人平日。向我欲如此如此。判府事沈守慶解之云云余正色曰。假使其人實178_401b有是。公今爲獄官。當忘此懷。澈笑曰。吾豈念此。已於推案。極力解之云云。又曰。司憲府啓請更鞠時。尹斗壽爲大憲而發議。掌令具宬實爲之。人疑澈雖外示公議。陽爲解釋。而陰使其黨論之也。又曰。壬辰秋。余在安州。澈自行朝爲體察使南去。見余於百祥樓。酒半忽曰。公謂我搆殺崔某。果然否。余徐答曰。公心不可知。以形迹觀之似然。故有是言。澈怒擲盃於地。起行數步還坐曰。公何爲此言。成浩源救解書尙在於我。我何敢如此。戊戌冬。余在東城。李貴持一紙來示。乃澈按獄時。救解永慶上啓草也。貴言鄭相本心如此。世人不知而疑之大深。故其子弟使之來示云。其後論者追言。渾嗾澈殺永慶。幷奪渾官爵。彼此論議。至今未已云。俱不可見遺於實記。然雲巖錄。本家子孫閟不出。故人罕見之而然也。余又聞。商山故老相傳。守愚堂嘗乘舟泝洛。至洛東江心㙜。李沆亭也。至竹巖。金光準亭也。守愚怫然回棹曰。豈可入蛇蜮窟也。178_401c此則雖不見文字。與不輕接方伯州牧。一般嫉惡氣槩也。余所聞見如此。又豈無此外流傳可取者乎。至於仁弘所制銘收錄焉。則又不能無憾。邢恕雖無狀。猶不至罪關倫紀誅殛以死。恐不可援而證之。仁弘一言。豈足爲輕重於守愚哉。李龜巖刊景賢錄。訂定於退溪南冥兩先生。其後寒岡先生。又加蒐輯。其書可傳。葢發揮前人顯微闡幽。誠不易事也。梁氏之於守愚。可謂志勤誠篤。愚有所疑。幷記以質焉。

 

息山先生文集卷之六
 
答金大集 


書自午嶽傳至。津津之味。有如交臂。幸甚幸甚。然其所推借。皆盛德者所掩耳。而走愚何敢受而有之耶。可愧可愧。守愚卷下文字。初非自附於述作。在華陰時。有人送示新刊遺事。撫玩之餘。適書謏聞一二。以自見而已。不意趙生播傳私藏。廣染衆目。以▼(曰/出/大/㣺)此愚妄之罪也。雖然。貴鄕士友不以爲責。而有此俯詢。其在愚分。愧縮尤深。而亦可見南冥守愚之敎在人心。178_172c至今不泯。與近世澆雜之俗不侔矣。可尙可尙。所示二條。謹悉。蓋朱子之於龜山。師門傳授所自。而龜山帖。稱龜山楊公。且於橫渠。敬服亞於二程。而序語孟集義。稱橫渠張公。以朱子他文觀之。稱龜山先生,橫渠夫子。亦有之。何獨於二文有所忽而然哉。凡作文之法。因其結句之短長。有時通變。而不必深拘。故拙文撰綴。亦不過用此例。何至深疑也。至於景賢錄就質事。不無意焉。請陳其槩。今退陶集中。以錄事。與龜巖往復者。不啻縷縷。龜巖。亦只及退門。而山海遺文。無一語及此。只有補錄數條已。凡著文字。必178_172d據明白著見之籍爲言。然後可無後人之惑。此處擧與不擧。無所輕重於特立之地。則豈可以取舍疑之乎。况龜巖之於南冥。交道未終。此錄之質。雖在全交之時。而到今引彼進此。則有若後人爲之彌縫。追完其交者然。此甚不便。愚意如此。未知如何。此旣來敎所致詰者。故不敢不復。而又諭以士林將用鄙文。附刻于下。是有不可者。其中所記大觸時諱。此書流傳。其弩眼皷吻。忌嫉罵詈者。必不止賤陋之身。而將上累先正。此所以惕然戒懼。不惟僭越未安之嫌而已也。惟望將此意。勸誘吾黨。俾亟停剞劂。幸甚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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