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를 지낸 남몽뢰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가 간행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

     1. 남몽뢰(1620-1681)가 지은 『구소수간초선』의 발문

  이상은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서간집이다. 누가 뽑아 엮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뽑은 것을 보면 가장 그 요체를 얻었다고 하겠다. 대개 그 작은 편지의 간요하면서도 또 간요한 것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옛날 서울에 있으면서 이 책을 친구 집에서 빌려 보다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책 주인이 독촉해 돌려주었으므로 늘 한스러워하였다.
  신해년(1671,현종12) 가을에 나의 벗 진사 정홍현(鄭弘鉉 1621-?)이 나를 함양 임소로 찾아와 이 책을 소매 속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완연히 옛 상태 그대로여서 완상하여 마지 않았고 책 상자 속에 간직하며 관심을 놓지 못하였다. 동호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널리 전할 길을 도모하였지만 또 그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양촌문집 陽村文集』 중간 역사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각수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구양공 편지는 모두 47 편(문집 9;21에는 49편이라 함)이고 소동파 편지는 모두 95 편이니 합계 142 편(문집에는 144편이라 함)이다. 어떤이가 그것이 너무 적다고 탓하므로 내가 응수하기를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절조(折俎:조각구이)가 비록 체천(體薦:통구이)에 미치지 못하나 사금도 반드시 모래를 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문단의 .일례이니 어찌 많은 것을 추구하겠는가." 하니 어떤이가 내 말을 그렇다고 여기며 나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감히 평론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갑인년(1674,현종15) 3 월 초하루 영양(英陽) 남몽뢰는 적다.

     2. 남몽뢰의 생애와 저술

  이계(伊溪) 남몽뢰는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 본관은 영양으로 저서에 『이계집 伊溪集』과 『이계속집 伊溪續集』이 있다. 광해군 12 년(1620)에 의성군에서 태어나 숙종 7 년 (1681)에 별세하였다. 이계는 23 세 때인 인조 20 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 세 때인 효종 2 년(165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52 세 때인 현종 12 년(1671) 4 월에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흉년으로 아사하는 유민들을 진휼하여 이듬해 봄에 구황 치적 제일로 준직(準職)의 명을 받았다. 준직이란 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54 세 때인 현종 14 년(1673) 2 월에 진주목사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구소수간초선』을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숙종 1 년(1675) 겨울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인이 몰락한 경신환국(1680,숙종6) 3 월 61 세 때 의금부에 하옥되고 이듬해 겨울에 전남 고흥군에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 월 15 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별세하였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계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구소수간초선』을 전해준 정홍현(1621-?)은 『사마방목 司馬榜目』에 보면 인조 26 년(164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자는 원길(元吉), 본관은 동래, 성주군에 살았다. 이계는 함양에 있으며 흉년을 구제하느라 이 책을 간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계는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그 1 년전(1670,현종11)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대전시 동구 중리동의 유형문화재 송애당(松崖堂) 주인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문인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의 아들인 김진수(金震粹 자는 晦叔)와 초면으로 친해져 자주 왕래하였다. 현종 13 년(1672) 5 월에 안음현 관아 밖 대숲 속에 관덕정(觀德亭)을 짓자 같이 활쏘기도 하며 그 기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해 9 월에는 자기의 외삼촌인 권창업(權昌業 1600-1663)의 묘표를 우암선생에게 부탁하여 짓게 (송자대전 198권 번곡처사樊谷處士 권공창업묘표, 이계집 5권 처사권공묘광명墓壙銘) 하였고, 함양의 선비 양석번(梁錫蕃)이 춘와(春窩)란 서실을 짓자 그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계집』은 6권 3책, 목판본으로 증손 남성천(南聖天) 등에 의하여 정조 2 년(1778)에 간행되었고, 『이계속집』은 3권 2책, 목판본으로 10세손 남우룡(南佑龍) 등에 의하여 1937 년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윤암동에 있는 이계의 유적지인 이계당(伊溪堂)에서 간행되었다. 다만 이 문집에는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교류한 사적은 기재하지 않았다.

     3. 함양군수 남몽뢰에게 보낸 우암선생의 답신 --임자(1672,현종13) 9월 10일

  권처사(權處士 명은 昌業)의 묘표는 당시에 매우 참람한 짓인 줄 알면서도 또한 감히 부탁하신 정중한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억지로 초하여 바쳐서 취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하교하신 뜻을 받드니 칭찬이 실제에 지나치고 표현이 너무도 겸손하기에 내 자신 부끄럽고 송구함이 더욱 더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인하여 잘못을 지적하며 새로 고치도록 하시니 또 어진 군자의 두터운 마음씀을 볼 수 있었는바 일자지사(一字之師)일 뿐만이 아닙니다. 깊이 명심하여 다시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삼가 분부에 따라 개정하겠습니다. 그밖에 고친 것도 여러곳입니다.
  대개 당시에 바쁘고 어지러워 전혀 자세히 못하였습니다. 『소학 小學』 선행편(善行篇)에서 장관(張觀)이 말한 "바삐 하면 그릇된다"는 경계를 가슴에 새기지 않아서입니다. 송구합니다. 묘표의 초본은 행장과 함께 반납합니다. 그 초본은 뒤에 안음현감 편에 도로 보내주시거나 따로 한 본을 베끼어 돌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대개 집에 초고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애들이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4. 『구소수간』에 얽힌 이야기

  『구소수간 歐蘇手簡』은 세종대왕이 세자 시절에 많이 읽은 책이다. 세종이 책을 좋아해서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자 태종은 명을 내려 책을 전부 치워버리게 했다. 그런데 『구소수간』이 우연히 책상 옆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이 책을 1천 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실려 있다. 이 『구소수간』은 임진왜란 이전에 청주, 홍주, 곡산, 예천 등지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울대 등에 남아 있는데 4 권 1 책이고 분량은 78 장이다. 그런데 남몽뢰가 간행한 책은 같은 목판본이라도 불분권이고 50 장이며 간(簡)자도 간(柬)으로 되어 있고 초선(抄選)한 것이니 원본에서 뽑아 엮은 것인데 남몽뢰도 초선자를 알지 못하였다. 산기 이겸로 저 『통문관책방비화』 참조. 산기선생은 임란 이전본과 현종 진주간본을 언급했는데 이 외에도 다른 판본이 있다.
  무신년(1908?)에 활인된 『구소수간초선 歐蘇手柬抄選』은 부계 예씨(芮氏)들이 간행한 것이다. 옥주(沃州:옥천)에서 『구소수간』 사본을 예병기(芮丙基)가 구해오자 예대훈(芮大塤)이 인행하고 예대희(芮大僖)가 발문을 지었다. 이 발문에선 세종대왕이 이 책을 만 번을 읽었다고 하였다. 예대훈이 약간 편집을 가하였다. 일본에서도 『구소수간 歐蘇手簡』이 간행되었다. 1780 년의 축상(竺常) 서문본은 4 권 1 책으로  두인걸(杜仁傑)의 원서가 있다. 1797 년에는 일본의 송본유헌(松本幼憲)이 후편을 엮어 경조(京兆)의 방각본 서사(書肆)인 임권병위(林權兵衛)가 간행하였는데 또 축상이 서문을 지었다. 이 2 책이 한 질이 된다. 한국에서 임란 이후에 유행한 『구소수간초선』은 함양군수 시절에 구해놓고 간행하려다 못한 남몽뢰가 진주목사로 전임한 뒤 간행한 것이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책이라고 하겠다.

<한국인산의학회보 199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