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서원(灆溪書院)은
문헌공(文獻公)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그 봉사손(奉祀孫) 덕제(德濟)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의 호)이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大姓)과 사족(士族)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열서(列書)하면서 회재 선생(晦齋先生 회재는 이언적(李彦廸)의 호)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本菴)의 과실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덕제의 허물도 따졌다.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改撰)을 청하자, 본암이
드디어 제현(諸賢)을 차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져서 노씨
선국(盧氏宣國)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냈다. 정씨(鄭氏)는 감사에게 고소하였고 이어 선국(宣國)은 함양(咸陽) 옥에 갇혔다.
지금까지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씨의 말에 의하면,
"마을 사족(士族)의 조상들 가운데 이 서원(書院)의 창건에 공이 있는 이가 많은데
비문에는 다만 강개암(姜介菴 개암은 강익(姜翼)의 호)만을 일컫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쟁론(爭論)의 단서가 생긴
것이다." 하고, 사족(士族)들의 말에 의하면,
"정씨가 사림(士林)들과 의론하지 않고 밤중에 비를 세웠으므로 공론들이 좋지
않다." 하였다. 그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미개한 나라[夷狄]를 문명국[中華]으로 만든 이후 2천여 년
동안에 유학(儒學)은 존재가 없었다가 고려(高麗)에 와서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한 사람이 있었으나 논자(論者)들은 그의
충절(忠節)만을 말하고 유학은 덮어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대체로 유학을 높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에 우뚝이 사도(斯道)를 위하여 땅에 떨어진 유학의 실마리를 중국에서 이어온 이는 실로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金先生)과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을 필두로 하여 이를 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ㆍ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ㆍ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제선생(諸先生)이 대대로 일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빛나서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에 돌아왔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김(金)ㆍ정(鄭) 두 선생은 모두 화를
입어주D-001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모하고 가슴아파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鄭先生)은 함양(咸陽)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개암(介菴) 강익(姜翼) 선생이 발론하여 남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고, 병인년(명종
21, 1566)에 사액(賜額)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이 있게 된 것은 주무릉(周武陵 무릉은 주세붕(周世鵬)의
별호)의 죽계서원(竹溪書院) 주D-002이 최초이고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다. 아, 선생은 학자의 모범이고 남계는 서원의 으뜸이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창건한 지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 선비들이 돌을
다듬고 비문을 새겨 세울 것을 의론하고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짓기를 청하므로 종후는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의 대체(大體)는 《실기(實紀)》주D-003에 대략 나타나 있다. 그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행실은 보고들음에 모두 탄복하겠으니, 이는 진실로 대현(大賢)의 일절(一節)이라 하겠으며, 경(經)ㆍ자(子)를 연구하고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명백히 분석한 것 등은 추강 남공(秋江南公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찬술(撰述) 주D-004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떠서 말하겠는가?
공을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한 것은 정암(靜庵) 선생에서부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계속 건의하여 마침내 만력(萬歷) 경술년(광해군 2, 1610)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이는 모두 여러 선비들의 소청(疏請)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介菴)은 젊어서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으나 자라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도(道)로
들어가서 마침내 순후(醇厚)하게 되었다. 타고난 효성에다 학문은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렀고 법도를 세움에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천거에 의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임명되고 나서 곧 죽었다. 이때
겨우 40여 세였으나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들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높였다.
동계(桐溪) 선생의 휘는 온(蘊)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었다. 얼마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엄정한 태도로 곧은 말을 잘하였고 폐주(廢主 광해군) 때에는 아우를 죽이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하는 의론을 반대하다가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았다.
그후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되지 않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할복(割腹)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은퇴하여 산속에서 세상을 마침으로써 천하 만대의 막중한 강상(綱常)을 한 몸에
짊어졌다. 아, 정 선생의 도는 높기도 하였고 강ㆍ정(姜鄭 강익ㆍ정온) 두 선생은 하나는 독학(篤學)으로, 하나는 높은 절의로써 모두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후세에 썩지 않을 만하다. 어찌 비석을 세워야만 전할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이후로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를
보는 사람들이 이 비로 해서 여러 선생들의 도덕과 절의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마을에서 공순하며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면 이 비를 세우는 것 또한 도움됨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여,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가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