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인연 맺은 고려의 선비 - 이억년


 

김용규  사진, 설명

고려말 두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을 주웠으나 그 금덩어리로 인해 필요 이상의 갈등이 일어남을 알고 금덩어리를 강물에 버린 유명한 일화(이조년과 이억년의 일화)로 그 주인공 무덤이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마을 뒷산에 있습니다. 문정리 백연마을도 이들 형제와 관련된 이름인데 이들 형제(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중 이조년과 이억년은 황금과 관련된 주인공이고 첫째였던 이백년과 넷째였던 이억년 두형제가 휴천면 백연마을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억년의 무덤도 있습니다.

옛날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형제간의 우애에 흠이 될까 봐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고려 시대의 두 선비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기 교양 TV프로그램 스펀지 39회의 소재 중 하나인

⊙ 고려 문인 이조년은 우애를 위해 (황금) 을 던졌다. (★★★☆)
<형제의 우애를 다룬 유명한 이야기, 고교 한문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형제투금'>

: 두 형제가 길에서 황금 두 덩이를 우연히 발견, 하나는 형이 갖고 다른 하나는 동생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느닷없이 동생이 물 속으로 황금을 던져버렸다. 형이 깜짝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황금을 본 순간, 형의 황금도 탐하려는 마음이 생겨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에 형도 감동하여 형 역시 황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조년과 그의 형 이억년이다. 이 형제가 황금을 던진 곳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바로 강서구 두암공원의 한 연못이다.

고려시대때 이억년 이조년 형제간의 아름다운 일화이지요. 이 일화와 함양과의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개성유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남도 함양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의 동생 이조년은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차 두 사람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도중에서 금 두뭉치가 땅에 떨어져 있어 이를 주워서 두 형제가 한 뭉치씩 나누어 가집니다. 그리고 당시 양천(김포군내)강 나룻터 양화도(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안에 당시 나룻터 현장이 있음)에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습니다.

배가 중간에 이르렀을때 아우인 이조년이 주운 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인 이억년이 그 연유를 물으니 아우가 대답하기를

"저는 평소에 형님을 공경 하는 마음이 깊었는데, 황금 뭉치를 주어서 둘이 나누어 가진 순간부터 홀연히 시기하는 싹이 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황금이란 즉 착하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인 이억년이 "너의 말은 참이로구나, 나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도다." 하며 그 또한 가졌던 황금 뭉치를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 일화는 [고려사 절요] [고려사 열전] [양천읍지] [동국여지승람]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그 연대는 대략 고려 충렬왕 20년(1294년)경이며 그 이후 이 나루터 강을 투금강(투금강)또는 투금탄(탄, 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내에 당시의 나룻터를 나타내는 표지와 함께 공원 안내문 가운데 고려 중,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간의 고사라고 밝힌 투금탄의 전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형제의 이야기와 함양과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요?

이억년이가 어수선한 정치 세계가 싫어 지리산으로 갈려고 할 때 동생 이조년이 배웅을 하게되고 이때 생겨난 투금강 일화가 생겨난 것이 됩니다. 후에 이억년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가 정착하려고 한 곳의 정확한 위치를 표현하면 휴천면 문정리 백연마을이 됩니다.

백연 마을은 용유담에서 약 1km 아랫쪽, 문정 마을에서 마천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견불동 마을과도 가까운 곳입니다.

이들 형제중 이억년은 그의 형님인 이백년과 지리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맏형이었던 이백년의 이름에 유래되어서 현재 마을 이름이 백연마을이 되었으며 이억년의 무덤은 백연 마을과 가까운 문정 마을의 뒷산(노루목) 양지 바른 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백년, 이억년 형제가 지리산에 은둔 생활을 하게 된 셈이지요. 함양의 지명 책자에도 언급이 되어 있고, 마을 이름이 백연이며, 문정 마을 뒷산에 이억년의 무덤도 함께 있는 것을 보면 막연한 설이 아닌 사실로 인지 될 수밖에 없더군요. 직접 현장을 답사하여 비에 새겨진 이억년의 비문도 확인을 했으니까요.

이들 형제를 살펴보면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 모두 다섯 형제가 되는데 이들중 이백년, 이억년이 고려때 이 지리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가 왜 함양의 지리산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연관이 되었으리라 짐작을 해 봅니다만 이백년 이억년이가 살았던 때는 고려 제25대 충렬왕(1274∼1308)때였으며 71년 원(元)나라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 돌아와 원종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10월 원나라의 강요로 고려-원나라 연합군을 편성,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파견하였으나 패퇴하게 됩니다. 원나라의 지나친 내정간섭이 매우 심하였고, 재위 동안 관제는 원나라의 속방처럼 격하되고 6부는 폐합, 변경되었으며 영토의 일부도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던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몽고 풍습의 유입 등으로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공주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점유하여 많은 농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였는데, 무신정권(정중부, 최충헌, 최우등)이 득세를 하고 난 이후 매우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이백년 이억년 두 형제가 이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는 듯 추측만 할 뿐이지요. 아울러 고전문학에서 옛시조의 백미라 일컫는 이조년의 그 유명한 시조도 함께 나열해 봅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