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사의 미나리밭에는 개구리가 없다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태촌집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군자사 시문
佔畢齋集卷之七

 詩集

勸農至馬川。宿君子寺。旱甚。是日雨。贈通上人。 


草樹藹前峯。遙看水墨濃。啜茶聞宿鳥。題竹到殘鍾。雅興須探勝。孤懷只憫農。生公今住錫。可喜夜降龍。

 

뢰谿集卷之六
 七言律詩
宿君子寺。贈玉林禪。 


丹崖萬疊白雲封。住錫天慵自在中。海月微升方丈曉。西風遙遞正陽鍾。早知境界塵塵鬧。已脫形骸念念空。世故明朝各南北。更將何處兩從容。
015_163d勞生宇宙百年浮。何處丘園合退休。君子寺樓三日客。頭流山月半輪秋。芒鞋竹杖身將老。暮靄朝曦眼暫偸。剩把新詩滿靑竹。幾回涼韻共颼颼。

 

뢰谿集卷之二
 七言小詩
同郡守漢侯。往宿智異山君子寺。 


一逕朱陳擁翠微。黃鮐爭挽使君衣。暫時閑莞靑山事。鈴閣還嗔簿領圍。
悟道峯頭快遠眸。頭留萬疊彩雲收。若爲招得無言子。霞佩相隨汗漫遊。
塵勞暫暇偕僧牀。世故令君替戾岡。山叟早知迎皁蓋。德星前夜照光芒。
015_106c二天携我去尋幽。憔悴林間樸馬休。十里彎碚依舊樣。盡將凄咽中孤愁。

 

靑溪集卷之一         양대박(梁大樸)
 [詩]
君子寺圓通殿 


君子知名寺。諸天古道塲。遠尋方丈路。三宿贊公房。桑下寧無戀。雲中久着狂。他時來問法。直欲上慈航。

 

靑溪集卷之一
 [詩]
咸陽途中 


053_529c咸陽天作嶺。沙店水爲籬。百二秦關險。千重蜀棧危。雲霞君子寺。草樹白門祠。老我多詩興。吟鞭故故遲。

 

靑溪集卷之四
 [文]
頭流山紀行錄 


頭流之遊。再也。昔庚申春。省親于昇州鈴閣。將還。由鳳城循江流以下。入花開洞。歷賞雙溪靑鶴洞曁神興擬神而止。後乙丑秋。與申上舍深遠輩。由雲城繞荒山而轉。宿百丈寺。目探外面水石。直上天王峯▣▣神坐高臺等處。又庚辰秋。與孤潭▣▣。從燕谷▣▣▣▣▣▣▣▣▣▣▣▣▣▣▣▣▣▣▣▣053_564c▣▣▣▣▣▣▣▣▣▣▣▣▣▣▣▣▣▣▣▣▣▣▣▣▣▣▣▣▣春花秋葉。魂未嘗不往來于其間。何哉。豈以其雄呑溟海。建摽天地。羣仙所居。龍象所會者歟。適丙戉秋。春澗吳君勲仲名積

抵頭毛潭。一行皆缷馬以憩。雄潭綠淨。深不可測。石勢參差。恠不可狀。石之窪者爲臼。䧟者爲釜。潭053_565d得名以此。而臼之深者或無底。釜之大者或容輪。豈神龍藏珠穴。玉女洗頭盆耶。吾三人鼎坐潭邊。厭觀之。因亂酌數巡而罷。日暮入君子寺。寺在頭流最深處。而平衍坦蕩。無攀援登陟之苦。東西投跡。恣意所如。余昔遊楓嶽。身登小人串。幽深峻險。詰屈廻曲。一步之頃。汗流至踵。其君子之可親。而小人之不可近也如此。兩箇老僧出迎門外。陰廊半頹。佛殿寥落。殊非昔日之君子寺也。余恠而訊之。有僧蹙頞曰。遊人織路。官役如山。僧安得不殘。寺焉能依舊哉。因屈指數其官役之所侵。而備述其所以焉。春澗曰。汝毒之053_566a乎。吾將吿于莅事者。而减汝役。可乎。僧扣頭不已。噫。苛政所及至此耶。山間乞食之流。與編列同科。則剝膚之苦。雖禽獸不得免矣。咨嗟良久。遂會食法堂。夕宿圓通殿。懸燈夜話。初五日丙申陰。早起促飯。將向龍遊潭。梁光祖拂曉而到。無他禮數。以笑相迎。每一言發。坐皆絶倒。此亦一勝友也。薄晩載琴歌鳴邃而行。有一厖眉僧願先導。因與之俱。遂出門。沿溪行十餘里。水益淸。石益瘦。霜林着岸。松檜夾路。騎驢行色。宛若畫圖間也。放轡徐行。不厭遲遲。旣到潭邊。余先下馬。心驚魂悸。可遠觀而不可近也。春澗顧余曰。偉053_566b哉。造物者爲此弄也。雖使韓昌黎李謫仙置此中。必袖手旁觀。喑無一語。况吾輩乎。不如勿吟詩。姑與之飮酒可也。於是絃歌交奏。酒籌無數。極歎而罷。春澗不禁技癢。得一詩。如靈恠千年跡。蒼崖有裂痕之句。雖古人亦難到。豈非善形容耶。還到君子寺。日已曛黒。有童奴自天嶺南村。負紅柹及餅笥來。足以爲明日登上峯㸃心資爾。初六日丁酉。或陰或晴。夜半張燈起坐。理登山行李。只芒鞋竹杖布行纒而已。天未明。出門騎馬。由義村直入初程洞。登上峯者。必由是途焉。入洞未數里。有小村依篁竹間。村上下柹木如053_566c簀。葉盡脫而實累累。照耀一壑。此亦一奇觀也。巗崖爭立。水石壯麗。比之昨日所見。伯仲間也。又山行十餘里。到白門堂或云百巫堂堂卽路旁叢祠。林魈山魅之所依也。越巫吳覡之所聚也。撃缶罔晝夜。鷺翿無冬夏。堂中繪像。眩恠難狀。可唾不可留也。促飯着屐。不顧而出。令蒼頭缷鞍息馬。扶筇信脚。寸寸登險。遙瞻山脊。邈不知何處爲天王峯也。但以不失路爲幸。不以半途廢爲期。登登不已。則早晩必到絶頂無疑也。自此得寸爲寸。得尺爲尺。一擧足則登一級。一側身則跨一層。雖喉喘胸歐而不敢辭也。日午。始到哭巖。僧053_566d云。昔河東倅登上峯。到此力盡。遂慟哭而返。故以名。鄙哉。河東倅之無立志也。不量吾力。輕犯崎嶇。徒貪勝踐。唯入于林中。百里之塗未半。一簣之功旣虧。豈不爲後人所笑者乎。令僕夫汲水。各飮一勺。由此以上。前人踏後人頂上。後人見前人足底。捫蘿攀木。不堪其苦。或拄杖而立。或踞石而休。春澗顧余曰。努力進步。無似河東倅之爲人笑也。相與策倦而行。艱到帝釋堂廢址。

 

玄谷集卷之三
 詩○五言律詩 一百四十一首
君子寺。次性訔上人韻。 


杖錫入三淸。居僧見我驚。開經談色相。誦偈證通明。已識仙爲佛。何論實與名。憑渠發深省。坐到曉鍾鳴。

 

樗村先生遺稿卷之十
 
君子寺山映樓 


傾身踰大嶺。帖息卧高樓。側想藍輿疾。潛驚啣繫憂。懸崖方騁力。平地却回頭。山水浮遊樂。從今老可休。

 

久堂先生集卷之十五
 
遊頭流山記

 路傍有嚴泉倉。且一洞中有廢城。故老相傳稱以防胡城。或稱朴虎城。蓋厥初爲防胡而築。且朴虎爲將築此。故兩稱之云。夕得君子寺。寺本名靈井寺。而新羅眞平王生子於此。改今名云。臺殿房屋。俱極宏麗。寺之西偏。有一新建別殿。金碧焜耀。名曰三影堂。堂中有淸虛,四溟,靑梅三大師眞像。取燭仰視。如接軟語。三像中四溟則不翦鬚。鬚長且美。眞好男子也。

 

於于集卷之六
 雜識
遊頭流山錄

三月丁卯

又蹭蹬抵靈源菴。靈源。靜界也。喬基爽塏。俯臨群木。剖篔簹引飛泉。琮琤鳴玉。㵼下木槽中。淸瑩可以解渇。菴小不063_590a滿三四楹。而淸僻可愛。南對馬耳峯。東望天王峯。北負上無住。有名僧善修居之。率徒第演經。四方釋子多歸之。與詢之頗相善。餉之以松餻蔘餅八味茶湯。是山多竹實柹子栗子。每秋收而舂之以爲粻云。日晩風色颯然。前峯雲氣苒苒而生。知有雨候。遂促行轉獅子項。下長亭洞。牽脩蔓直下絶磴。過實德里。始見野田初決渠。白水決決。暮投君子寺。寺野刹也。埃氛滿堂。獨牧丹對禪房方敷榮。可賞。寺前舊有靈井。號靈井寺。今改以君子。未知取何義也。數日間淸遊雲表。有若羽化淸都。忽一夕擠落黃塵。使人神精逼塞。夜夢將魘。夫子所謂君子居何陋者。恐難服膺也。063_590b壬申。朝發。經義吞村。多感古焉。昔者。佔畢齋從此路向天王峰者也。彼彼我我。吾不必由斯。徑行三四里。至圓正洞。洞天弘敞。去去加勝。至龍游潭。層峯合沓。皆多石少圡。蒼杉赤松所攅聚。復以蘿薜經緯之。亘一大石。劈兩厓成巨峽。東江流其中而奔注之。噴沫舂撞。石爲猛浪所簸磨。或成窪。或成堆。或呀然而成罅。或坦然而成場。高低起伏數百步。萬千殊狀。不可以殫形。釋徒尙誕。指石缺者爲龍抓。石嵌圓者馬龍蟠。石中裂谺谽者爲龍抉穿而行。民之無知。咸以爲信。至此不覺頂禮。爲士者亦曰龍不見石。爲變化所使。余亦目其可駭可愕。想有神物宅玆。豈夸娥巨靈063_590c能斧斤以成之者。試以詩驗之。乃書一絶投之淵。以調戲之。俄而。厓窟中有如煙非煙之氣脈脈而昇。亂峰蒼翠之間。有殷殷之聲。閃閃之光。乍作而乍止。同行者遂褰裳徑渡。略彴走投于荒祠中以竢焉。須臾雨足如銀繩。飛雹大如鳥卵。一䝰驟至。座中年少輩色沮。幾失匙焉。移晷而後宇宙盤駁。日脚漏於雲際。遂緣厓而行迷失路。入灌叢中。草露濡裳。藤梢刺面。推且挽披荒榛。仄轉山腹而登。行行傴僂。折篁笋採蕨芽。行屩爲之滯淹。東過馬跡庵。攅柯挐蔓。故基猶存。夤緣山冢。十步九折。陟降之勞。無不汗顔。酸股繭足。若使被人役使爲也。其怨咨嗔怒。雖呵禁難止。而063_590d群行朋息。嘻笑盈路。豈非賞心之可娛也歟。遂入頭流菴。菴之北有臺。直南而望之。有飛瀑瀉于巖間。如懸玉簾數十仞。雖竟夕坐玩。不覺其疲。而會雨新晴。谷風淒緊。以爲過爽不可久淹。遂入禪房安頓焉。癸酉。侵晨而行掠甕巖。入淸夷堂。穿森木亂石叢。至永郎臺。俯臨陰壑。然昏黒。魄遁眼眩。攀木却倚。愕眙而不能稽。永郎者。花卽之魁也。新羅時人也。率徒三千人。遨遊山海。我國名山水。無不寓名焉。循山脊。指天王峯而東。山多烈風。樹木皆擁腫。枝柯向山而靡。苔髮骨樹。鬖鬖如人被髮而立。松皮柏葉之木。中無腸而榦四披。枝頭下搶干地。山益高而樹益短。山之063_591a下。濃陰交翠。而至此花梢未吐葉。尖如鼠耳。巖罅有積雪盈尺。掬而啗之。可以沃渇喉。有草纔抽芽。靑莖者曰靑玉。紫莖者曰紫玉。僧云此草味甘滑可食。擷之盈掬而來。余曰。僧稱靑紫玉。乃仙家所餌瑤草也。乃植杖手摘之。殆滿囊焉。前登少年臺。仰瞻天王峯。高出雲漢。無雜草木。只蒼柏聯緣而生。被氷霜風雨所侵暴。枯死骨立者十居二三。望之如頒白老人頭。殆不可盡鑷者也。少年云者。或稱永郞之流也。余意天王峯。長老也。此峯。奉承之如少年。故名之歟。下視群山萬壑。衆皺爛熳。此地尙然。而況於第一峯乎。遂飛杖登天王峯。峯之上有板屋。乃聖母祠也。祠中安063_591b一石塑。爲白衣女像。未知聖母是何人。或曰高麗王太祖母。爲其生育賢王。能統三韓。故尊祀之。式至于今。嶺湖之間。要福者歸之。奉以爲淫祠。仍成楚越尙鬼之風。遠近巫覡。憑玆衣食之。登絶頂。俯察儒士官人來。卽雉兔散藏身林薄中。伺其遊覽者。下山還聚焉。環峯腰列板閣如蜂房。將迎祈禠者宿留焉。托以宰殺爲禪家禁。繋牛畜于山下叢祠而去。巫者取以資其生。故聖母祠白母堂龍遊潭。爲巫覡之三窟。誠可憤也。

萬曆三十九年辛亥四月日。默好翁記。

 

東谿集卷之二 豐壤趙龜命錫汝甫著                조구명(趙龜命, 1693~1737)
 
遊龍游潭記 1724


甲辰八月初吉。伯氏發行。向智異。余及遇命,載福從215_028a焉。沙斤督郵權君熻。亦與其子尙經俱。先賞龍游潭。地勢幽邃。石皆犬牙。水十步九折。盤渦激射。其聲若雷。以龍堂之在對岸也。編木橋之。下臨不測。懸危凜慄。不可越也。傍橋躐石而東者百餘武。有大石附岸橫跱。圍若環玦。䨟若樽罍。其後數丈石。痕作蹊。蜿蜒以接之。若龍之抑首而撥尾也者。磨礱瑩滑。狀極詭怪。潭之名所由起也。是夜。與定慧師。宿君子寺。師云昔有馬迹祖師。結夏于潭上。爲水響之妨於聽講。怒其龍。鞭而逐之。其負痛閃挫。而形于石者如此。是說也怳惚不經。人不肯信。余惟天下事有不可以常理215_028b盡之。韓子謂浮屠善幻多技能。安知其無降龍伏虎之術。而龍之性不見石。入石則石爲之透。以爲堅頑難陷者。特人之所見然爾。人之於人。猶或不相測其情狀。况於神龍之變化哉。謂有是事而信之。妄也。謂無是事而不信之。亦妄也。盖水石之離於山北者。玆潭爲最。余喜其氣勢奇壯。使遇命題五人名於石之南壁。自題石抉川駛龍怒神驚八字於下。將使石工刻以識之。詩曰。

地勢陰森最。川流激射來。

風雲龍拔出。巢宅石穿回。

凜若深秋氣。公然白日雷。

危橋跨不測。生路渡方開。

 

櫟泉先生文集卷之十九
 附錄
年譜

 

甲申 先生六十歲。
正月。還授贊善。

大臣筵請。故有是命。

五月。命罷職。尋還收。

上於朴相世采調停之論。有曠世之感。思欲尊禮221_422c其人。聳動觀聽。特命陞祀文廟。不參頒敎蔭官。並罷職。又以抄選亦蔭官。命一體罷職。旋以一邊尊先正而一邊罷儒臣。爲有損事體。命置之。

八月。竪薪洞先考妣墓石儀。
九月。游茂朱前島。
偕渼湖金公。遊俗離山。
十月。遊伽倻山。遂至月城

自俗離。轉向伽倻。遍尋孤雲遺蹟。遊安義三洞。謁星川書院。將遊智異山。至龍游潭日暮。宿君子寺221_422d讀荒山碑。見劉都督題名。至南原。聞外姑黃氏訃。徑往任實衙中哭之。

군자사 사적


 
  디렉토리검색 > 고전국역총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9권 >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군자사(君子寺)                                                                                                                     원문이미지 제1도, 제2도
   
계묘년(정조 7, 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경남 함양(咸陽)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 주D-001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그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충숙왕 4, 1317)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홍무(洪武) 37년 갑신주D-002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19년(숙종 6, 1680) 경신에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갑자년(1684)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숙종10)에 방호(方壺)의 필추(苾芻 비구(比丘)를 말한다) 형곡 복환(荊谷復還)이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自爾厥●' 라고 한 것의 '●' 자는 '后' 자인 듯한데 이 글에 '●'로 썼으니 생각건대, '后'자가 비록 '後'자와 통용되기는 하나 아마도 후왕(后王)의 후(后)자를 혐의쩍게 생각하여 고의로 '口'를 빼고 '●'로 쓴 것인가 보다. 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주 D-001] 내관(內觀) : 불교 용어. 바깥 경계를 떠나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공부를 말한다.
[주 D-002] 홍무(洪武) 37년 갑신 : 홍무는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로서 31년으로 끝나고 37년은 없다. 갑신년은 태조 사후 6년째가 되는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樂) 2년(1404,조선태종4)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