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사地藏寺


다음글은 지리산 아흔아홉골 홈피에서 자료를 퍼온 글입니다.
이글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코스를 확인하는 지리 99 탐구 산행팀의 과정이 잘 묘사 되어 있는데, 서울에서 엄천골의 노장대까지 직접 현장 답사하는 노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엄천골 사람들은 그냥 산 골짜기로만 알고 있었던 노장대에 엄청난 규모의 절터가 있었고 그 이름이 지장사였다는 것을 재 확인시켜 주는 글이며, 이와 함게 엄천골짜기의 역사 한페이지가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특히 가객이라는 분은 지리산 연구에 30년 경력이 있으며 특히 김종직의 유 두류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금도 지리산 연구에 몰두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그 가객님의 글입니다.



( 지장사를 찾아서 )


지리산 동북자락의 운암 골짝에 위치한 폐사지 지장사는 엄청난 규모의 절터이다.

절의 자세한 역사를 가늠하는데 자료가 될만한 불적 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지천으로 널부러져 있는 석질이 다르고 문양이 다른 각종 기와조각과 토기,
상감문양의 청자파편, 백자파편, 군데군데 박혀있는 건물의 기단석이나 석등 석탑의 유구석으로 보이는 초석들,
여기 저기에 원형 그대로 아니면 무너진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대한 자연석으로 축소한 석축들이 지장사가 그냥 암자 수준은 아닌 큰 절 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안타까운 사실은 폐사지의 규모로 봐선 유명한 고서들에 등재되어 한 줄의 흔적이라도 있을법한데 그렇지가 않다.
"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등 이름난 고서에도 지장사의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곳이 지장사라고 고증할 만한 근거는 오직 인근 주민들의 구전에 의해서 이다

절터 부근에는 부도골이 있어 그 곳에는 지금부터 50여년전 까지만 해도 부도 3기가 있었고, 빈대가 많아서 절이 없어졌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온다.

절터의 능선하나 넘어에 있었던 노장동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지장절터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의 유일한 경작지 였다고 한다.

절터에는 유난히 수수나 밀 농사가 잘되어 한해에 몇섬씩을 거두기도 했어며, 일부 주민들은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도 몇해를 더 그곳에 드나들며 농사를 지어 왔다 한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탐구해온 과정을 기록하면서 굳이 지장사를 서두에 언급하는 이유는 선생이 4박5일간의 지리산 산행을 시작한 첫날 산길을 가면서 거론한 여러 곳의 지명 중에 가장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 독바위와 함께 지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장사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만 함양관아에서 출발하여 천왕봉까지 어디로 어떻게 올랐는가를 고증할 수가 있으며,
지장사 이후로 등장하는 여러 지명들을 찾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아흔아홉골 두류록 탐구팀 .이하 우리라고 지칭))가 근 일년동안 유두류록의 역로 추정을 하면서 지장사를 찾고 부터는 하나하나 슬슬 매듭이 잘 풀려 나갔다.

몇몇 선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김종직 선생은 함양관아에서 출발하여 의탄으로 해서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다고 되어있다. 또 어떤 기록에서는 오봉리 화림사를 지나 천왕봉을 갔다고도 기술해 놓았다.

조선 선조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은
1661년에 인월쪽에서 백장암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대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도중에 의탄촌을 지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 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

조선 정조때의 학자 이동항은 1790년 지리산을 가기위해 엄천사를 지나면서
"옛날 김종직이 지리산을 오른 것은 이 엄천사의 앞산에 있는 화림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1964년 전인미답의 칠선계곡 등로를 개척하신 지리산의 대가이신 김경렬선생은
그의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에
"김종직은 엄천에서 휴천계곡 50리를 거슬러 오르는 길목 법화산 중턱 고열암에서 첫 밤을 묵고 의탄 마을에 이르는 벼랑길을 타고 마천으로 가고 있다....."

위의 분들이 지장사의 위치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김종직 선생이 그 일행들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때의 등로는 결코 의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 .....

안타까운 마음에서 위의 글들을 인용을 한 것이고 결코 그 분들의 기록을 비하해서 심판 하고져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선인들이 남긴 두류록은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가 기록자들의 땀과 숨결이 함께하는 지리산역사 보고서 이다.
허기에 역사의 오류는 바로 잡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4년 7월 31일

오늘은 정말 지장사를 찾을 수 있을라나.

<꼭대>님과 <하얀파도>님, <나>, 세 사람이 운암 골짝을 찾았던 작년 7월의 마지막날은 가히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 이었다.

평소에 여간해서 땀을 흘리지 않는데 운암에서 노장동 까지 불과 40여분 평지 수준의 산길을 걷는데 땀이 비오듯하고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네킹 조형물이 있는 양민 주거지를 지나서 오리나무에 노장대 이정표를 메어놓은 곳,
산아래 여러 사람들께 들은 바에 의하면 이쯤에서 정상적인 등로를 버리고 지장사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노장동 마을 초입에 있는 거대한 돌배나무


풀무간의 당근 질 같은 무더위는 계곡물에 아예 머리를 내맡겨도 시원한 줄을 모르겠다.

더위 핑계대고 이 곳에서 왕복 30여분 거리에 있는 환희대(이 부분은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를 두 사람만 다녀오게 하고
혼자서 더위에 힘부쳐 헝클어진 생각들을 정리 해본다.

한국동란 때까지 열두 가구의 양민들이 삶을 꾸려 왔다는 노장동 마을.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곳.
그놈의 전쟁 때문에 또 하나의 잃어버린 지리산 마을.

마침 최근에 <꼭대>님이 소개한 노장동에 관한 기록을 옮겨 봅니다.

[ 아마도 진주민란(1862년)이 일어나기 전이 아닌가 합니다.
함양에 재법 많은 재산을 가지고 거주하던 A씨 집안 사람들이
함양독바위 아래의 지역을 하늘로 올라가는 길지라 지명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들어가 살면서
[노장대마을]의 유래가 시작됩니다.
정감록 같은 어떤 비결서를 믿고 이상향을 찾아 나선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기는커녕 산골짜기에서 정리하고 온 재산은 점점 없어지니
함양에서 이웃하던 B씨 집안 사람들을 유인할 계책을 마련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살기 힘들어 지니 그 마을로 이주를 하면 안심할 수 있는 땅이라 유인을 합니다.
그리고 사전 조사차 B씨 집안 사람들이 방문을 할 때면
[상대굴]로 데려가서 손을 굴속에 집어 넣으면 방문한 사람의 수만큼의 쌀이 나오도록 만들어 두었습니다.

어수선한 전쟁 통에 그렇지 않아도 피난처를 찾던 B씨 집안으로서는
쌀이 절로 나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이상향이라 믿고
가산을 정리하여 [노장대마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노장대마을]은 A씨와 B씨의 집안으로 형성된 집성촌이 되었는데
이후 B씨 집안 사람들이 속은 것을 알고는 마을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두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

지리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전설같은 청학동의 설화가 노장동에도 있었나 봅니다.

육이오 전쟁이 나고 당국의 소개령에 의해 노장동을 떠나왔던 휴천면 남호리에 거주하는 손종만씨(66세)의 얘길 들어본다.

" 아! 글쎄 면에서 내 보통학교 취학통보서가 나왔다 해서 그걸 받으러 면에 갔다오니까
부모님들이 피난짐을 지고 이고 벌서 마을아래 꺼정 내려오고 있더라고..
나는 집에 발도 못디러 놓고 그길로 노장동을 떠난기라."

지리산이 서럽고 그리운 사람만이 안고있는 역사의 질곡과 아픔들의 편린이다.

이 곳을 봄철에 와 보면 허물어진 담장 아래로 머위 싹들이 밭을 이루고 있다.
어느 땐가는 오늘처럼 여름에 여기를 지나다가 시골집 우물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노오란 당국화가 무더기로 피어있어 걸음을 멈춘 채
척박하기만한 벽항궁촌에서 아금받게 살아갔을 민초들의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십 여 년 전 함양 독바위를 문수사 쪽에서 오르려고 시도 하다가 문수사 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디 친 끝에 출발점을 바꾸어서 빙 둘러서 들어와 본 골짝이 운암골이고, 노장동과의 만남이 그 때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는 두류록에 관심이 없던 때였다.

그 뒤 몇년 후 민족문화회에서 발간한 "국역 점필재집"과 돌베개 간행 "선인들의 지리산 유
람록"을 만나면서 지리산 산행방식의 각도를 틀어버린다.

그래! 이제부터는 기왕에 가는 지리산,그 분들의 발자국만 따라 가 보자.

지장사가 운암골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몇번을 더 와봐도 이렇다 할 절터는 찾을 수 없어 노장동이 옛날 지장사 터가 아닐까? 라고 생각을 굳힐 즈음에
"지리99"를 알게되고 <꼭대>님을 만나게되고, <하얀파도>님도 만나고, 우리는 유두류록을 탐구하자고 의기투합을 하고...

그리해서 이 염천에 지장사를 찾아서 우리는 오늘 노장동에 왔다.

두 사람이 환희대를 다녀와서 라면을 끓여먹고,
등로에서 좌측계곡을 건너서 10여분 가량 진행한 지점에서 절터를 찾기 위해 각자 흩어져서 주위를 수색한지 10분이나 지났을까?

<꼭대>님이 누님! 이리 와 보시라고 불러서 가보니
그리 크지 않은 입석대아래 기와조각이 널려있고 건물의 기단석같은 장방형의 돌도 몇 군데 박혀있다.

절이 터잡은 주변형세로 봐선 그리 큰절은 아니라도 암자수준은 충분했겠다.


우리는 이곳이 지장사라 단정을 짓고
<꼭대>님과 <하얀파도>님이 디카를 누르고 좌표를 찍는 동안 내는 기와조각 몇점을 주워서 배낭에 담아 그곳을 떠난다.

독바위를 가야 하는데 ....덥기도 하고 막상 염원하던 지장사를 찾고나니 기분도 느슨해져
김종직 선생 일행이 엄천을 지나 지장사까지의 등로로 추정되는 한쟁이골로해서 하산하기로 진로 수정을 한다.

짐승 길인지 사람 길인지
절터에서 동쪽으로 있다 마다한 길을 따라 작은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아마 이 작은 능선은 함양독바위 뒤에서 생성되어 운암마을로 이어지는 상대날등에서 갈라진 지능으로 짐작되며
끄트머리에 집채만한 바우가 버티고 있으면서 소멸되고 있다.
.
두 사람은 숙달된 조교로부터 빡시게 훈련받은 수색대출신 인가?
수색장교 한 사람에 선임하사 한 사람-

그들은 바우하나 나무하나도 그냥 놓치지 않는다.

족히 5.60미터나 되는 벼랑 아래로 수색차 다녀 오는데 내는 올라올 일이 끔찍해서 실도랑가에 앉아서 메모정리를 한다.

수량이 시원찮은 실도랑을 건너 길가 작은 바우 걸터막에
거의 마모가 안된 숯돌 하나가 얹혀져 있어 숯돌의 정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이쯤에 뭐가 있겠다는 감이 와서 주위를 휘둘러보는데 길 위쪽이 숲이 성글고 훤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의 발길이 저절로 그 쪽으로 향해서 발을 들여 놓자마자 탄성이 나온다..

세상에~~! 발에 밟히는게 기와조각이다.


절터의 면적은 본당 건물이 서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기단석이 박혀있는 석축 위의 평지를 기준해서 사방으로 대강 짐작을 해도 1000여 평이 넘어 보인다.





주민들의 증언대로 농사지은 흔적도 역력하다.
그들이 밭을 일구면서 기와조각들을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곳을 들추니 청자나 백자파편도 수두룩하다.




지장사를 옳게 찾은 것 같다.

절터를 감싸고 흐른 동쪽 능선에는 독바위로 올라가는 날등길과
우리가 온 노장동 가는길이 뚜렸하게 나누어진다.

김종직 선생은 지장사에서 갈림길이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 이곳에서 100m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장사라 단정지은 아까 본 그 절터는..?
지장사를 찾았다고 하느님까지 부르며 깨방정을 떨기까지 했는데-

군데군데 박혀있는 주춧돌의 흔적과 정교히 쌓은 석축들, 절터의 규모 등으로 봐선
이곳이 본당이 있었던 곳이라 추정이 되고 그 곳은 산신당이나 칠성각 같은 부속 건물이 있었던 자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우리는 그곳에서 탐구산행의 기초상식을 까먹는 우를 범했음을 인정한다.

어떤 탐구 대상지를 만나면 먼저 그곳을 기록한 문장과의 대조 선상에서 결정을내리고 단정을 지어야 함에 그저 절터를 찾았다는 들뜬 기분에 실수를 한것이다.

지나와 생각해 보니 그쪽에는 갈림길도 없었고 농사를 지을만큼 터도 너르지 않았다.

이 곳이 지장사 폐사지가 분명한데 무수한 기와나 자기파편, 석축과 기단석 외에는 이렇다할 불적들은 찾아볼 수 가 없다

노장동 사람들이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다는 경작지에서 불상이나 탑신이라도 기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산아래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육이오 동란이후 이 골짝에 도굴꾼들이 무수히 드나들었다한다.
실제로 60년도 중반에 도굴꾼들은 운암골의 초입에 위치한 가래점 마을에 있었던 "가래사" 폐사지의 불상을 마을 주민을 담배 값 정도로 매수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상은 반토막이되어 지금도 "가래사"터에 방치되다시피 해 있다

도굴꾼들이 이렇게 큰 절터를 모를리 없었을 터이고 그렇다면 이곳에 지금까지 무엇하나 남아있을 수가 없다는 답이 나온다.

절터가 앉은 산세가 유적지 특유의 을시년스러운 느낌도 없이 참으로 유순하고 아늑하다.

김종직 선생도
"이곳을 지나니 숲이 우거진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 빼어난 경치를 느끼게 한다"고 기록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느낌은 같은 모양이다

함양 옥계(지금의 지곡면 개평리)가 고향인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노진(盧振 1518-1578)선생도 지장사에 와서 도인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 밤에 지장사에서 묵으며.>

山中無俗物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새벽 베개 단꿈을 놀래 깨우네


오매불망 지장사에 왔음에도 글 끝이 무딘 탓에 시 한 수도 못 남기고,

500년 전 김종직 선생은 어떤 길로 이 지장사까지 오셨을까?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도 풀리지 않을 수 도 있는 숙제를 안고 골짝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