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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엄천사는 인목대비의 원찰- 인목대비 아우 천도문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엄천(嚴川)의 고적
   
계묘년(정조 7, 1783) 6월에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들으니 '법신(法身) 주D-001은 원만하여 사람을 비춰 주는데 마치 거울을 대할 때 피로를 잊는 것과 같고 혜력은 두루 통하여 만물을 이끌어 주는데 마치 큰 거리에서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주D-002과도 같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면 얼굴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구분되고 술잔을 들면 그릇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듯이, 교화하는 방편이 치우침이 없고 수행하는 중생이 의탁할 데가 있어, 죽어서는 억울함을 풀게 되고 살아서는 고액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물론, 능히 효제(孝悌)의 정성을 다하면 쉽게 자비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한다면 부처가 어찌 제자를 속이겠습니까? 제자의 자매는 일찍이 불행한 화난으로 깊은 한을 안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뒤 믿을 데 없어 마음이 무너지고 의지할 데 없어 피눈물을 짓는 데다가 형제까지 잃은 슬픔을 더하였으니 그리는 정 갑절이나 더합니다. 하늘의 꾸짖음을 피할 길이 없고 땅속으로도 피할 길 없습니다. 어찌 유경(劉景)이 주대(周代)의 종통을 밝히고 이홍(李弘)이 위조(魏朝)의 예를 가리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제자가 궁중에서 여공(女功 방직ㆍ재봉 등의 여자들의 일)을 힘쓰고 왕가(王家)에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왔으나 이제는 기국(杞國)의 근심주D-003이 깊어지고 초(楚)……(원문 2자 빠졌음)……그만되었으니, 우두커니 홀로 있음에 내 몸이 있는 듯 없는 듯 정신이 아득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충정을 진술할 수 없으므로 부질없이 비녀를 뽑고 채색 옷을 벗고는 죄인으로 자처할 뿐입니다.


집안의 박복함을 돌아보건대, 이는 실로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슬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제 여생은 한이 있고 원한은 다함이 없으니, 의해(義海 불법(佛法)을 말한다)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어떻게 전생의 인연을 밝히겠으며 법림(法林)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승의 공덕(功德)을 짓겠습니까?


이제 죽은 아우를 엄천사(嚴川寺)에 추복(追福 죽은 자를 위해 공덕을 지어 복을 얻게 함)하기 위하여 삼가 강원(講院) 증축 비용으로 벼 1천 섬을 희사합니다. 또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주D-004은 옛 성인이 말씀한 바이고 후생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감히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여러 법류(法流)들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 한 줌 흙으로 태산에 보태는 것과 같아 비록 부끄럽사오나 이로 말미암아 법해(法海)에 귀의하여 넓은 법당에 학승(學僧)을 모아놓고 청정한 자리에서 상외(象外)의 종지(宗旨)를 설(說)하기를 원합니다.


또 삼가 원하옵기는 죽은 아우가 번뇌의 굴레를 해탈하고 법회(法會)에 올라서 공덕은 사중(四衆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말한다)에 나눠주어 장자(長者)의 좋은 손님이 되고 법(法)은 대승(大乘)을 체득하여 불가(佛家)의 좋은 벗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시방 세계(十方世界)의 용렬한 근기(根器)와 만겁(萬劫)의 혼탁한 무리들이 아우와 함께 반야(般若)의 배를 타고 보리(菩提)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주 D-001] '법신(法身) : 3신(身)의 하나. 법은 진여(眞如). 법계(法界)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眞身)을 말한다.
[주 D-002] 큰 거리에서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 큰 거리에 술동이를 놓아두고 지나는 사람들이 따라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는 성인(聖人)의 도(道)를 비유한 말이다.《淮南子 卷十 繆稱訓》
[주 D-003] 이제는 기국(杞國)의 근심 : 기(杞) 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하였다는 고사. 기우(杞憂).
[주 D-004]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 :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