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7호 -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2005/11/30 01:24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법경대사 자등탑비.
지정번호 보물 제17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
시대 943(태조 26)
크기 높이 3.15m, 폭 1.45m, 두께 31cm
종류 탑비

 

보물 제17호. 높이 3.15m, 폭 1.45m, 두께 31cm. 943년(고려 태조 26) 최언호()가 비문을 짓고 구족달()이 글씨를 썼으며 승려 4명이 각자()하였다. 귀부() ·이수()는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법경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승으로 비문에 의하면 이름 현휘(), 속성은 이씨()이다. 879년(신라 헌강왕 5) 출생, 영각산사()의 심광()에게 사사하였다. 906년(효공왕 10) 당나라에 유학하고 924년(경애왕 1) 귀국하여 국사()로 존경받았다. 정토사 주지가 되기를 청하여 대중교화에 힘쓰다가 941년(태조 24)에 좌멸()하였다

 

 
종   목   보물   17호
명   칭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1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충주시


 

이 비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위)가 짓고 글씨는 명필(名筆)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新羅)·고려시대(高麗時代)의 고승(高僧)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정토사(淨土寺)를 창건(創建)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태조(太祖)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고 태조(太祖) 24년(941)에 63세로 입적(入寂)하니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시대
고려
연대
943년(태조26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보물 - 17호
크기
세로 322cm, 가로 150cm, 두께 31cm
출토지
정토사지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1
소재지
(한국)정토사지-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1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최언위(崔彦僞) / 구족달(仇足達) / 승(僧) 광예(光乂), 승(僧) 장초(壯超), 승(僧) 행총(幸聰), 승(僧) 행초(行超)
 

 

정토사 터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법경대사 현휘[法鏡大師 玄暉, 879(헌강왕 5)~941(태조 24)]의 비.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제액은 태조가, 비문은 구족달(仇足達)이 비면에 정간(井間)을 치고 해서로 써서 광예(光乂)·장초(壯超)·행총(幸聰)·행초(行超)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년 후인 943년(태조 26)에 세웠고 음기는 944년에 썼다. 원 비의 자리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인근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양식이며 비신은 상태가 양호하나 군데군데 총자국이 패여 있다. 비문은 41행에 1행 89자의 구성으로 된 대형 비이다. 비문 내용은 법경대사가 전주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당에 건너가 도건(道虔)의 법을 받고 돌아와 태조에 의해 국사 대우를 받고 정토사에 머물며 이 지역 호족 유권열(劉權說)의 귀의를 받고 활동하다 입적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음기에 도속(道俗)의 많은 사람들을 열거하여 대덕, 대통 등 승려와 좌승, 원보, 원윤, 좌윤, 그리고 지방 자체의 집사부, 병부, 창부 등의 조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에 원주, 전좌, 사, 직세, 도유나의 확대된 삼강직이 보인다

 

 

有晉高麗中原府故開天山淨土寺 敎諡法鏡大師慈鐙之塔碑銘幷序」
     太相檢校尙書左僕射前守兵部侍郎知翰林院事臣崔彦撝奉 敎撰」
     沙粲前守興文監卿賜緋銀魚袋臣足達奉 敎書」
原夫曉月遐昇照雪於四方之外春風廣被揚塵於千嶺之旁然則木星著明散發生之玄霧靑暈廻耀浮芳序之法雲或沍色凝寒或陽和解凍聚此太平之美激于離日之暉所以二氣相承三光助化可謂麗天之影明望所宗此」
則弘之在言拾此於實甞試論之尺壁非寶亡羊則唯貴寸陰宏珠是珍罔象則眞探秋露故知儒風則詩惟三百老敎則經乃五千孔譚仁義之源演玄虛之理然而雖念忘□敢言得理此則域中之敎方内之譚曷若正覺道成」
知一心之可得眞如性淨在三際之非殊故知澡慧六通不生不滅凝情三味無取無行盖因方便之門猶認秘微之義事情善誘心在眞宗然而至道希夷匪稱謂之能鑒元宗杳邈非名言之所鈐於是各守一隅難通三返筌蹏之」
外慧業所資而又雖渴鹿趣炎謂至淸池畔盲龜遊沼猶逢浮木之中則知法本不 生因生起見見其可取法則常如然則淨零法雨之滋便淸熱惱虔謁微塵之衆俄濟迷流菩提湟槃法性常住用此莊嚴佛土成就衆生度天人」
敎菩薩方思妙用可謂周勤然則昔者如來爲五比丘說三乘敎化緣已畢尋以遷儀臨涅槃之時以無上法寳密傳迦葉流布世間曰護念勤修無令斷絶自大迦葉得其法眼付屬阿難祖祖相傳心心共保爰有應眞菩薩同覺大」
師東□中□非人不授至唐承襲者竊惟六人摩傳可可傳璨璨傳信信傳忍忍傳能能其後分而爲二其一曰讓其一曰思其下昭昭此則何述焉洎于像末逾益澆訛大道云喪微言且絶則非探奇上士契理眞人何以一匡頹俗」
再□法輪必有涉進元郷心行靜處時時間出代有其人者焉」
大師法諱玄暉俗姓李氏其先周朝閟德柱史逃榮苦縣地靈如有猶龍之聖郡鄕天寳昔聞歎鳳之君故言匪魯司寇無以知之者也遠祖初自聖唐遠征遼左從軍到此苦役忘歸今爲全州南原人也父諱德順尤明老易雅好琴」
詩當白駒棲谷之時是鳴鶴在陰之處高尙其事素無宦情 母傅氏假寐之時須臾得夢阿姿布施證鳩摩羅䭾之祥聖善因緣呈鶴勒夜郍之瑞歿賢曾爾唯我亦然況又在孕之時十有三月免懷之際元正伍時以乾符六年
孟陬之朔誕生 大師生有聖姿幼無兒戱行惟合掌坐乃趺跏晝墁堆砂必模像塔分飡汲水須給蟲魚然則因覩牛埁冀游龞壑潜辭塵世實欲出家聞於二親志切且慊父母謂曰今思前夢宛若同符始覺曩因猶如合契汝」
前佛所度汝亦度之任徐東西早登佛位導師慈父便是其人所以永遂離塵尋山陟嶺東去獲投靈覺山寺謁 深光大師傾盖如新忻然自得追念東山之法實謂得人倍切歡娛寧知昏旭闡揚吾道不在他人所以仰惟祖宗」
仍是崇嚴之子猶認先系亦爲麻谷之孫也足見聖道所傳曹溪爲祖代代相契至于大師所以來自江西派於海左海隅聖住天下無雙於是許其探玄殷勤學佛不出蓮宇常住草堂 大師實勞我心談不容口後生 可畏」
其德維新自非宿植善芽生知靈性其孰能至於此乾寧五年受具於伽耶山寺旣而戒珠更淨油盈彌堅修善逝之禪靈臺不動契文殊之慧照境無爲演三藏之文解行相應闡四分之律勤修兩存所以問詰絶命吐言尊道口不」
談俗身猶蘊眞然則窮理在三體元含弌必能興仁壽域拯物阽危此時雖聖運三千而艱期百六火辰照地金虎司方此際風聞南在武州此中安處可能避難修保殘生所以 大師與同侶十一人行道茫茫至于其所果然群」
黎翕集所在康寧然則竊承南海多有招隄實堪駐足不久往於彼處謂云何以棲遲者爲焉居無何忽遇綠林潛侵元室便爲郤剝俱然同行訖次至 大師大師臨白刃而神色怡然志靑雲而目光榮尒唯無悚懼自若從容魁首」
觀其風度怡怡語聲切切投劍羅拜請師事焉至於豺狼革心寇賊知禮譬如玄奘三藏抛西域之爲牲慧忠大師免南陽之遇禍夫先聖之遭難也如彼我 大師之化人也若斯萬里同風其歸一揆 大師其後謂曰終居此」
地必滯前程天祐三年獨行㳂海尋遇乘槎之者請以俱西以此寓載凌洋達于彼岸邐迤西上行道遲遲路出東陽經過彭澤遂至九峯山下虔謁 道乾大師 大師廣庭望座膜拜方半大師問曰闍梨頭白對曰玄暉目不知」
闍梨自己爲什勿不知對曰自己頭不白追思別汝稍似無多寧期此中更以相遇所喜昇堂覩奧入室叅禪纔留一旬密付心要受玆玄契如瀉德缾若備中和易直之心而得升降周旋之節於義爲非義於人爲半人恭惟世間出」
世間皆歸佛性體無分別俱會一乘所以一托松缾門十經槐律獨提 錫四遠叅境之幽兮往遊山之秀兮留駐所以天台仰異地境觀風嶺外擔登虔禮祖師之塔湖南負笈遠投禪伯之居其後況復北抵幽燕西臻邛蜀或假
諸道或偸路百城以此偶到四明忽逢三島只賷音信至自東方竊承本國祁山霧収漸海波息皆鎖外難再致中興迺於同光二年來歸舊國國人相慶歡響動天可謂交趾珠還趙邦璧返唯知優曇一現摩勒重榮 上乃特遣」
便臣奉迎郊外寵榮之盛冠絶當時翌日延入 九重降於三等虔心鑚仰待以國師大師披霧之時頻揺塵尾 上乃望風之際甚悅龍顔所以 大師語路風流言泉境絶得所無得玄之又玄忽聽玄譚盡去煩襟之」
悶仍承雅況終懷瑩慮之規然則 大師曰群緣體無衆法歸一若靈藥毒草同在林中甘泉淤泥共生泉下能令分別不有迷之 上事佛精勤深求親近仍于中州淨土蘭若請以住持 大師自此纔涉滄溟每思幽谷捨玆」
爰適適我願兮於是便挈山裝尋凌漢廣悠悠騫嶺往以居之境地偏佳山泉甚美當州聞風而悅詣者百千 大師暫駐慈軒尋鋪禪榻四方來者皆滿茅堂森若稻麻誨之不倦所以先難後獲霧集雲歸 大師誘引學流敷」
陳宗旨理妙詞簡幾深義精六度之龜麟人天之海嶽也爰有佐丞劉權說者殷傅說之流也於國忠臣在家弟子鑚仰尼父必同顔氏之徒服膺釋迦須並阿難之頰特趁禪境敬禮 慈顔便申避席之儀深展摳衣之懇其後下」
國之賢求仁所聚中原之士慕德成群祗奉儀形者白蓮開於眼界敬聞言說者甘露降於心源然則可謂主僧子天君法兄曰禪林御衆開道入天子之軒寶樹居尊施澆季法王之化者也而又知上法易行上法難修上法易證上」
法難或間萬行皆空云何故行對曰本無苦樂妄習爲因衆生妄除我苦隨盡更於何處猶覓菩提然則朝廷士流銜命來往路出中府終年幾千萬弌之流忙於王事不踐門闖以爲大羞若及虔謁禪關仰承一眄每聞曉誨如洗朝」
飢及其撞鍾大鳴入海同味觀法無本觀心不生惟最上乘止於中道凉風旣至百實皆成汝能惣持吾亦隨喜由是無上覺路分爲此宗 大師謂大衆曰曾修香火之因於 大王殿下永言付囑虔託 王臣所以老僧忽」
病趍風貪程就日冀於一訣不在它求以此卽到上都親申誠懇 上答曰灋由國興誠不虛語實願 大師安心道念久護生靈弟子牆壍法城金湯袛樹 大師對曰菩薩弘誓上乘發言護法爲心流慈是務正應如是今」
窺 聖朝又問修行功用遠近當殊答曰滴水下巖卽知朝海又問了言相信先會暗同爭奈童蒙如何觀發曰兒喉旣閉乳母奚爲夫金韞於山則山稱寳嶽珠藏於水則水號珍川其道念玆亦同於此此情何已倶在前言此際」
宴坐禪牀經行慧菀演心法元元之話論性根切切之譚然則眞空無象實際絶言豈惟慧日光沈方感泥洹之早慈雲色歛忽牽滅度之悲而已矣哉天福六年十一月二十六日詰旦告門人曰去留有期來往無住於焉示化所在」
如然汝勉旃奉行遺誡不隳宗旨以報吾恩也未示滅之前夕弟子問和尙欲去付囑何人 師曰燈燈自有童子點問彼童子如何示展曰星布靑天裏於中郍得知言竟坐滅俗年六十有三僧臘四十有一于時雲日慘凄風泉」
鳴咽山川震動鳥獸悲啼諸天唱言人無眼目列郡含憾世且空虛天人感傷斷可知矣聖感靈應豈誣也哉弟子闊行等三百餘人號奉以其月二十八日窆于北峰之陽遵像敎也臨終之際奉表告辭云老僧不遂素懷永辭聖代」
矣  上乃披覽皇情悼焉乃贈 諡曰法鏡大師塔名慈燈之塔則知尊師之道焯然追遠之儀賅矣於是乎在莫之與京惟 大師惟岳降靈哲人生世敷揚釋敎闡示禪宗然則爲物現生憂人弘道貎和言寡飢至飽歸所」
以心樹花鮮法流水淨月明江闊木落山高故能薝蔔神香醍醐勝味正道無說權機有言由是四方施捨之緣歸於大衆一世有無之屬瞻彼窮人然則可謂問道楞迦尋師印度求深斷臂志切傳心遂使一國歸仁實助帝王之化」
千門入善偏霑黎庶之心下臣忽捧 芝泥令修苞臼臣才非呑鳥學謝聚螢強措菲詞式揚 禪德所冀垂于不杇永示無窮 國主追哀鳳喙彰亡師之慟門人感慕龜文表絶學之悲銘曰」
懿歟大覺愚我群生休飮炎水莫越化城色則非色名惟假名知惟眞實試是慧明悼哉至人麻谷孫子具體則圓猶如顔氏道冠憐鷹慈超救蟻□悟眞宗潜傳悶旨紹隆三寶祀接四依玄情乘運妙用息機智流激爽心路知歸聞」
所未聞得其無得法無去來宗判南北靡見聖心誰尊禪德佛戒恆行師言不忒心傳靈器道賛聖朝化被群惑威摧衆妖初從宴坐屢赴嘉招惟思惟慮匪斯匪雕服煩緹廣食甘禪悅大君感傷眞宰思渴唯喜學人並無中輟」
 天福八年歲次癸卯六月丁未胸五日辛亥立」
    鐫字僧 光乂 壯超 幸聽 行超」
  (陰記)
  開天山」
維天福九秊歲次甲辰六月一日」
辛丑立碑記事」
爰有中原府道俗二官公卿夫老」
黎人士庶共是歸仰虔爲」
大師弟子□載此碑略題名字」
弘琳大德景孚大純法譽大統」
談弘大德嚴信和尙釋訪和尙」
帝弘和尙訓乂和尙能珠儀娘」
權說佐丞堅書佐丞遵讓元輔」
弼良元輔龍希元尹朴謙元尹」
舒兢元尹崔律元尹義貞佐尹」
孔融佐尹俊弘佐尹張希阿粲」
奉希阿粲萱直阿粲崔儒阿粲」
新城阿粲崔忠奈春一
崔貞國奉仁鏡
乂奉官訓侍郎龍偘侍郎」
堅訓侍郎奉立侍郎金偘侍郎」
仁往侍郎夐儒侍郎彦猶侍郎」
聰明侍郎直奉侍郎夐奉卿」
□寶卿崔讓卿居律卿門偘卿」
由信卿必奉卿聽讓卿信興卿」
漢乃達卿金達卿」
執事郎中□□□□玄魏」
史秀貞兵部卿忠式卿□□卿」
倉部卿彥書卿孔律卿幸規」
大師門下僧聰芮闊行」
聰信貞裕仁一慶修法言」
□悟法郎等三百餘人」
院主僧行周典座釋悟」
史僧行裕直歲僧孝行」
都唯那僧行璘」
諭德山人靑州釋希侍郎」
元州仁人員外當城幸璘卿」
目竹縣聰乂村主」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서 있는 이 비의 글은 최언위라는 사람이 짓고, 구족달이란 사람이 썼으며 고려 태조 26년(943)에 세웠다. 법경대사는 신라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친 유명한 승려로써 법명을 현휘, 속세의 성은 이(李)씨이다. 대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출생하여 영각산이란 절의 심광대사에게 배워 승려가 된 뒤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고려 태조7년(924)에 귀국하여 국사의 대우를 받았다.(국사란 학식과 덕망이 높아 국가의 모범이 되는 승려에게 주던 최고의 승직으로 국왕의 스승인 왕사보다 높은 지위이다.) 후에 정토사의 주지가 되어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불교의 뜻을 가르치는데 힘쓰다가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의 나이로 승려가 된지 41년만에 입적하였다. 시호를 법경,탑명을 자등이라 내렸다. 비의 글을 지은 최언위는 태자의 스승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며 글씨를 쓴 구족달은 중국의 명필인 구양순체를 익힌 당대의 명필이고 이비석의 조각은 다른 비석과는 달리 승려 넷이서 조각하였다. 이 비석은 화강암으로 높이 3.15m,  폭 1.45m이다.

 

 

정토사터에 전하고 있는 비(碑)로, 신라말·고려초의 승려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토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태조 24년(941)에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비는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비받침에 새겨진 거북조각이나 머릿돌의 용조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앞면의 중앙에는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비의 몸돌에는 대사의 행적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교의 법을 배워 20세에 불가에 입문하였다. 90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정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하자 태조는 시호를 ‘법경’, 탑이름을 ‘자등’이라 내렸다. 태조 26년(943)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고,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가 지었으며, 유명한 서예가였던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함께 서 있었을 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

 

 

 이 탑비는 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고승 법경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거북돌, 빗돌, 머릿돌이 완전하게 남아 잇는데 6.25 동란시 이 지역에서 격정을 치러 빗돌에는 많은 총탄자국이 남게 되었다. 네모진 머릿돌과 돌거북을 한 굴에 조각하였는데 머리의 모습은 부릅뜬 눈과 우뚝한 코가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입에는 여의주를 몰고 있다. 목줄기에는 비늘주름이 두 줄로 새겨지고 뱃가죽은 활엽수와 같은 형상으로 도안화 되었다. 등 가죽의 무늬는 긴 육각형 으로 무늬 안에 꽃무늬 장식이 있다. 등가운데 마련된 빗돌받침은 둘레에 구름무늬를 장식하고 옆면에는 안상을 배치하였으며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덮었다. 빗돌은 앞면에 본문이 새겨지고 뒷에는 이 비석의 건립에 공을 들인 제자 및 신도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머릿돌은 잡작한 제모꼬로 아랫면 주위에 연꽃무늬를 돌리고 윗면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중앙에는 전액을 내어 제목을 적고 꼭지에는 보주장식이 있다.

 

 

본래는 수몰 지역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84년도에 옮겨 세웠다. 높이 3.15m,폭 1.45m의 거대한 비석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귀부와 쌍룡을조각한 이수를 얹어 놓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초기의 석조미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법경대사는 신라말부터 고려초기에 살았던 고승이다. 헌강왕 5년(879)에 태어났으며 성은 이씨이다. 17세때에 삭발하고, 가야산에 입산수도 하였으며 효공왕 10년 (906)에 당나라로 들어가 각 사원을 순회수도한 후 효공왕 16년(912)에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와서 포교에 힘썼다. 고려 태조 왕건이 국사로 추대하였으며 63세의 나이로 태조 24년(941)에 입적하였다. 시호를 법경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가 구족달이 쓰고 태조 26년(943)에 이 비석을 건립하였다. 주변의 정토사지는 수몰 지역내의 문화유적으로 1983년도 여름에 발굴하여 당시의 사찰규모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그 주초가 원형대로 이곳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절터에서는 명문이 있는 기와와 연화문 및 귀면와 등이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있었던 국보 제102호인 홍법국사 실상탑과 탑비는 1915년에 서울 경북궁으로 옮겨졌다. 이 부도는 독특한 조각을 하여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법경대사자등탑은 일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에는 길이 180cm, 두께 30cm 정도의 잘 다듬어진 초층 기단석이 있으며 흥법국사실상탑이 있던 위치에는 140cm 길이에 폭 50cm의 연화문석등 대석이 있다. 흥법국사실상탑의 건립은 고려 현종 8년(101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