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근역의 한죽당과 수수정

凌壺集卷之一 完山李麟祥元靈著
 
沙驛雜述。次金元博韻寄贈。 


沙城春酒醉無醒。午夢偏長數樹亭。多愧微官難報國。三年不解馬醫經。

其二
萬竿篁竹繞欄生。卧處凉風自古城。遙憶蘆溪嘉木下。攤書搗藥有閒情。

其三
風雨南溪夜若何。藏書千卷憶山家。慵婢和睡看屋225_478d漏。老婦嗔燈卧沉痾。

 

凌壺集卷之一 完山李麟祥元靈著
 
惺岸禪師。師在方丈山碧松菴。 


吾道已長熄。禪敎聞猶廢。莫通狗子性。硬誦栢樹在。南僧淨惠者。始倡華嚴會。細剖玅嚴品。微茫功德海。奧旨潛析毫。豪談或緩帶。有時騎駿馬。走赴達官待。弟子多聰明。臨死受玄戒。采晴貌深淳。惟善氣亢介。余愛岸師高。由樸入脫解。冷官呼不至。難經讀便罷。225_478c過余寒竹館。抗言在義禮。移阡營父葬。訟官爲門弟。出家篤人倫。中心誠愷悌。無以儒釋分。贈詩戒衰世。

 

凌壺集卷之一 完山李麟祥元靈著
 
仲秋月色甚明。上驛舘南樓。聽鼓數檛。老婢持酒來勸。連倒四五杯。南來後戒飮。始一醉也。步到長街。溝水淪漣。四顧人聲寂然。戱招隷人牽二白馬鉤百于庭。又步到數樹亭廵篁菊。有懷宋士行。漫書一詩。 


高樓擊鼓卧淸宵。古木荒溪響遠霄。明月漸升寒水靜。天王峰逈片雲收。牽回白馬當軒立。笑傍黃花把酒澆。老友文山能劇醉。脩篁書屋有誰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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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
수수정(數樹亭)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이 사근역 찰방이 되었을 때에 설치(設置)한 것이 많고 마음가짐을 공명하고 염직(廉直)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50~60년 내려오는 동안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고 물으니 그 아전이 능호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서화(書畫)와 문사(文詞)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事務)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 미전(米顚 미불(米芾)의 별칭)과 예오(倪傲)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호는 이치(吏治)를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아의 동헌에 건
한죽당(寒竹堂)이라는 편액을 대전(大篆)으로 팠는데 자못 강하고 굳세게 보였다. 마루 동쪽 모퉁이에 두충(杜沖)ㆍ홍매(紅梅)와 고송(古松)ㆍ수죽(脩竹) 등속이 심겨져 있으며, 능호가 조그마한 기와 정자를 나무 사이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하당(荷塘)을 내려다보아 소연(蕭然)한 풍치가 있으며, 그 정자에 걸린 수수정(數樹亭) 세 글자의 편액은 문의 현령(文義縣令) 송문흠(宋文欽)이 쓴 팔분체(八分體)였다.
그리고 북쪽 기둥에는 능호의 자서(自書)를 걸었는데 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거만한 관리가 아니었는데/古人非倣吏
스스로 세상 경영하는 사무를 빠뜨렸네/自闕經世務
우연히 하나의 미관에 기탁되어/偶寄一微官
두어 그루 나무 아래 거닐고 있네/婆娑數株樹
마힐(摩詰 왕유(王維)의 자) 시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숭정(崇禎) 기사년(인조 7, 1629) 늦봄에 쓴다.
(崇禎再己巳季春書)

* 숭정 기사년은 인조 7년(1629)이 아니고 영조 25년(1749)이다.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
사근역승(沙斤驛丞) 선생안(先生案)


사근역승(沙斤驛丞)의 선생안(先生案)은 예부터 있었는데 중간에 유실(遺失)되었고, 현종(顯宗) 8년(1667) 정미에 찰방(察訪)인 조 상우(趙相遇)가 비로소 수집(修輯)하였다. 이영춘(李榮春)으로 첫머리를 삼고, 그 다음은 심 일장(沈日章)ㆍ이 형(李泂)ㆍ한행(韓行)을 기록했는데, 이 네 사람은 도임(到任)한 일자와 과만(瓜滿 임기(任期)가 다 찬 것을 말한다)의 연월(年月)이 없다.
그리고 이희경(李喜慶) 때부터 비로소 임기의 연월이 기록되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9년(1581), 선조(宣祖) 14년 신사에 도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영춘(李榮春)으로부터 조상우(趙相遇)에 이르기까지 무릇 42인이며, 조상우의 교체승(交遞丞)인 방이원(方以遠)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무릇 65인으로 총 1백 7인이다. 김종무(金宗武)는 선산(善山)에 있다가 만력 경인년(선조 23, 1590) 8월에 도임했다가 임진년(선조 25, 1592) 4월에 상주(尙州)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사간(司諫) 심대부(沈大孚)는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기사년(인조 75, 1629)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감(縣監) 김수징(金壽徵)은 숙종(肅宗) 기미년(1679)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고, 음죽(陰竹) 이인상(李麟祥)은 영종(英宗) 정묘년(1747) 7월에 도임했다가 기사년(1749) 8월에 임기가 차서 돌아갔는데 이들은 다 가장 이름이 나 있어 알아주는 자들이다.
또 지금의 우의정(右議政)인 김익(金熤)이 영종 경인년(1770) 1월에 필선(弼善)의 위패(位牌)를 어긴 죄로 외직(外職)에 보직되었다가 2월에 용서되어 돌아갔다. 역고(歷考)해 보니 선생안(先生案) 속에 제공(諸公)들의 재임(在任)의 연월(年月)은 만력(萬曆) 연간부터 숭정(崇禎) 임오년(인조 20, 1642)에 이르기까지는 4~7년 사이였으며, 이초로(李楚老)로부터 처음으로 재임 기간이 3년이었고 이 뒤로 빨리 교체된 자들이 서로 뒤를 이었으니 승제(乘除)의 이치를 관찰할 수 있다.
찰방(察訪) 변종수(邊宗洙)가 채무일(蔡無逸)을 선생안의 머리에 추록(追錄)하면서,

"중종(中宗) 임오년(1522)에 생원과(生員科) 제일(第一)로 뽑혔고 사근역 찰방(沙斤驛察訪)으로 있으면서 중종 35년 경자년(1540)에 병과(丙科)의 제일(第一)로 등과하여 벼슬이 헌납(獻納)에 그쳤다."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
이능호(李凌壺)


이능호(李凌壺 능호는 이인상(李麟祥)의 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함양(咸陽)에 일찍이 친하게 지내던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하루는 서생에게

"내가 그대의 집을 찾고 싶지만 길이 남인(南人)의 촌(村)을 지나게 되므로 찾지를 못하네."

하였다. 또 일찍이 한 서생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앉아 얼마 동안 이야기하는데 어떤 손님이 와 당(堂)에 올랐다. 그러자 능호는 주인(主人)에게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 가버렸다. 서생이 괴이하게 여겨 그 후에 그 까닭을 물으니 곧 말하기를,

"지난번 그 손님은 남인(南人)이므로 내가 더럽혀질 것 같아 피하였던 것이네."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서생(書生)을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서생이 좌간(坐間)에서 우연히 책을 집어 보았다. 그러자 능호가 정색하고 꾸짖기를,
"어른의 책을 젊은 사람이 어찌 감히 갖다 보는가?"
하고, 그로 인하여 사이를 멀리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이 말은 함양 사람 진생(陳生)이 전에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이인상(李麟祥)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710-1760(숙종36-영조36)
본관 전주(全州)
원령(元靈)
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활동분야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에 대하여
이인상(李麟祥)
1710(숙종 36)∼1760(영조 36). 조선 후기 시·서·화를 갖춘 대표적인 문인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경여(敬輿)의 현손이다.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출신으로 영조 11년(1735)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증조부 민계(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본과에 이르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북부참봉(北部參奉)이 되고, 음죽현감, 지리산 사근역(沙斤驛)찰방을 지냈으나, 몸이 쇠약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가슴앓이로 고생하며 지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으로 탐관오리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끝내는 관찰사와 다툰 뒤 관직을 버리고 평소 좋아하던 단양에 은거하여 벗들과 시·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비록, 서출이었지만 명문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학통은 김창흡(金昌翕)과 이재(李縡)로 이어지는 이기절충론(理氣折衷論)을 이어받고, 이윤영(李胤永)·송문흠(宋文欽)·황경원(黃景源)·오재순(吳載純)·윤심형(尹心衡)·김무택(金茂澤) 등과 가까이 지냈다.
글씨 중 해서체는 안진경(顔眞卿)을 따랐으나, 전서체는 마음내키는 대로 호기있게 써서, 당시에도 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 하였으나 김정희(金正喜)는 그 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상찬하였다.
유품으로는 〈원령첩 元靈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능호첩 凌壺帖〉(개인 소장)이 전한다.
그림은 그의 곧은 지조와 강개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색감과 깔끔한 멋과 함께 단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문인화풍의 소재를 즐겨 그려 〈송하독좌 松下獨坐〉(일본 개인 소장)·〈수석도 樹石圖〉·〈설송도 雪松圖〉·〈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검선도 劍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수하한담도 樹下閑談圖〉·〈강상초루도 江上草樓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으며, 사인풍(士人風)의 풍속화로 〈송하수업도 松下授業圖〉(개인 소장), 진경산수도는 금강산을 그린 〈옥류동 玉流洞〉·〈은선대 隱仙臺〉(이상 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화법은 엷은 먹으로 바림을 하고 농묵으로 굴곡과 윤곽을 짓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예서체를 응용한 필법을 특기로 하였다.
사승(師承)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으로 배우고, 특히 17세기 중국 안휘파(安徽派)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당대의 이윤영(李胤永), 후대의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정수영(鄭遂永)·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의 화풍도 이에 연결되어, 조선 후기 문인화풍의 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행장은 오희상(吳熙常)이 적었으며, 문집인 《능호집》의 발문은 김종수(金鍾秀)가 썼다.
참고문헌
凌壺集, 丹陵遺稿, 丹陵散人遺集, 閒靜堂集, 江漢集, 醇庵集, 瓛齋集, 夢梧集, 阮堂集, 李麟祥手簡(任昌淳譯, 美術資料 14, 國立中央博物館, 1970)
李麟祥畵派의 硏究(兪弘濬, 弘益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3). 〈兪弘濬〉

 

이인상 [ , 1710.4.26~1760.8.15 ]
  인물 > 미술 > 한국미술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조선시대



  요약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 : 전주
호 : 능호()·보산자()
별칭 : 자 원령()
주요저서 : 《능호집》
주요작품 : 《설송도()》 《노송도()》 《산수도()》 등
 


 

본문

 

    본관 전주(). 자 원령(). 호는 능호()·보산자()이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보산자는 천보산()에서 따왔다. 능호관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였지만, 그는 서출()이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 북부참봉()을 거쳐 음죽현감()이 되었으나 뒤에 관찰사와의 불화로 사직하고 단양()의 구담()에서 지냈다.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 했고, 그림에는 산수(), 글씨에는 전서()·주서()에 뛰어났으며, 인장()도 잘 새겼다.

    * 영조 23년(1747) 7월~25년(1749) 8월에 함양의 사근도 찰방을 지냈다.

    저서에《능호집》, 그림에 《설송도()》 《노송도()》 《산수도()》 《옥류동도()》 《검선도()》 《송석도()》 《송하관폭도()》 《한림수석도()》 등이 있고, 글씨에 《대사성김식표()》가 전한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