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양 고 전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
연암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
태촌 고상안의 <월명총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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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추진회 국역점필재집-임정기 역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畫)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두타 제일이 /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 是爲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주D-001]결하(結夏) :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 ||||||
佔畢齋文集卷之二 |
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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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生長嶺南。頭流。乃吾鄕之山也。而遊宦南北。塵埃汨沒。年齒已四十。尙不得一遊焉。辛卯春。持左符于咸陽。頭流在其封內。嵬然蒼翠。擧眼斯得。而凶年民事。簿書倥傯。殆二期。又不敢一遊焉。每與兪克己,林貞叔語此。未嘗不介介于懷。今年夏。曺太虛自關東來。從余讀禮。及秋。將返于庭闈。而求遊玆山。余亦念羸瘵日增。脚力益衰。今年不遊。則明年難卜。況時方仲秋。霒霾已霽。三五之夜。翫月於天王峯。鷄鳴。觀日出。明朝。又周覽四方。可一擧而兼得。遂決策遊焉。乃邀克己。共太虛。按壽親書所云遊山具。稍增損其所齎。十四日戊寅。德峯寺僧解空來。使爲鄕導。韓百源請從。遂歷嚴川。憩于花巖。僧法宗尾至。問其所歷。阻折頗詳。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太虛,百源。上其巓。其下千仞。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訪先涅菴。菴負峭壁而構。二泉在壁底極冽。墻外。水自半巖缺泐。津溜而落。盤石承之。稍坳處。瀅然渟滀。其罅生赤楊龍須草。皆數寸。傍有磴路。繫藤蔓一條于樹。攀之上下。以往來于妙貞及地藏。宗云。有一比丘。結夏盂蘭。罷後雲遊。不知所向。種小瓜及蘿葍於石上。有小砧杵糠籺數升許而已。訪新涅。無僧。亦負峭壁。菴東北有巖。曰獨女。五條離立。高皆千餘尺。宗云。聞有一婦人。累石巖間。獨棲其中。鍊道沖空。故爲號云。所累石猶存。柏生巖腰。欲上者。梯木挽其柏。廻繞巖闕。肯腹俱盪磨。然後達其頂。然不能辦命者。不能上。從吏玉崑聳山。能上而超足麾手。予嘗往來山陰。望見是巖。與諸峯角出。若柱天然。今而身跨玆地。毛骨然。恍疑非我也。稍西迤抵古涅菴。日已曛矣。議論臺。在其西岡。克己等後。余獨倚杖于三盤石。香爐峯,彌陁峯。皆在脚底。空云。崖下有石窟。老宿優陁居之。嘗與三涅僧。居此石。論大小乘。頓悟。仍以爲號。少選。寮主僧荷衲來。合掌云。聞使君來遊。何在。空目僧休說。僧面稍赤。余用蒙莊語。慰藉云。我欲煬者爭䆴。舍者爭席。今寮主見一野翁耳。豈知某爲使君。空等皆笑。是日。余初試險。步幾二十里。極勞憊。熟睡夜半而覺。月色呑吐諸峯。雲氣騰湧。余默慮焉。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減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난001中。大木之自斃者。顚仆于谿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度一岡。空云。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度九隴訖。便由山脊而行。行雲低拂篢子。草樹不雨而濕。始覺去天不遠也。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也。煙霧瀰漫。不能眺望。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時雲霧消散。日脚下垂。山之東西谿谷開豁。望之無雜樹。皆杉檜松枏。槁死骨立者。居三之一。往往間以丹楓。正如圖畫。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榦皆左靡拳曲。雲髮飄颺。云。海松尤多。土人。每秋採之。以充貢額。今歲。無一樹帶殼。苟取盈。則吾民奈何。守令適見之。是則幸也。有草類書帶。柔韌而滑。可藉以坐臥。在在皆然。淸伊以下。多五味子林密。而到此無之。只見獨活,當歸而已。歷蟹踰嶺。傍有船巖。宗云。上古海水懷襄時。船繫于玆巖。而螃蟹過之故名。余笑曰。信汝之言。其時生類。盡攀天而活耶。又竝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憩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晡時。乃登天王峯。雲霧蓊勃。山川皆闇。中峯亦不見矣。空宗先詣聖母廟。捧小佛。呼晴以弄之。余初以爲戲。問之。云。俗云如是則天晴。余冠帶盥洗。捫石磴入廟。以酒果告于聖母曰。某嘗慕宣尼登岱之觀。韓子遊衡之志。職事羈纏。願莫之就。今者仲秋。省稼南境。仰止絶峯。精誠靡阻。遂與進士韓仁孝,兪好仁,曺偉等。共躡雲梯。來詣祠下。屛翳爲祟。雲物饙餾。遑遑悶悶。恐負良辰。伏丐聖母。歆此泂酌。報以神功。致令今日之夕。天宇廓然。月色如晝。明日之朝。萬里洞然。山海自分。則某等獲遂壯觀。敢忘大賜。酹已。共坐神位前。酒數行而罷。祠屋但三間。嚴川里人所改創。亦板屋。下釘甚固。不如是。則爲風所揭也。有二僧繪畫其壁。所謂聖母乃石像。而眉目䯻鬟。皆塗以粉黛。項有缺畫。問之。云太祖捷引月之歲。倭冠登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復屬之。東偏陷石壘。空等所弄佛。在焉。是號國師。俗傳聖母之淫夫。又問聖母。世謂之何神也。曰。釋迦之母摩耶夫人也。噫。有是哉。西竺與東震。猶隔千百世界。迦維國婦人。焉得爲玆土之神。余嘗讀李承休帝王韻記。聖母命詵師。註云。今智異天王。乃指高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高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君之系。創爲是談。承休信之。筆之韻記。此亦不可▓徵。矧緇流妄誕幻惑之言乎。且旣謂之摩耶。而汚衊以國師。其褻慢不敬。孰甚焉。此不可不辨。日且昏。陰風甚顚。東西橫吹。勢若撥屋振嶽。嵐霧坌入。衣冠皆潤。四人皆枕藉祠內。寒氣徹骨。更襲重綿。從者皆股戰失度。令燒大木三四本以熨之。夜深。月色黯黮。喜而起視。旋爲頑雲所掩。倚壘四瞰。六合澒洞。若大瀛海之中。乘一小舟。軒昂傾側。將淪干波濤也。笑謂三子曰。雖無退之之精誠。知微之道術。幸與君輩。共御氣母。浮游混沌之元。豈非韙歟。庚辰。風雨猶怒。先遣從者於香積寺。具食。令披徑路來迎。過午。雨少止。石矼滑甚。使人扶携推轉而下。數里許有鐵鎖路。甚危。便穿石穴而出。極力步投香積。無僧已二載。澗水猶依剖木。潺湲而落于槽。窓牖關鎖及香槃佛油。宛然俱在。命淨掃焚香。入處之。薄暮。雲靄自天王峯倒吹。其疾不容一瞥。遙空或有返照。余擧手喜甚。出門前盤石。望望川蜿蜒。而諸山及海島。或全露。或半露。或頂露。如人在帳中而見其䯻也。仰視絶頂。重巒疊嶂。不知昨日路何自也。祠旁白旆。南指而颺。蓋繪畫僧報我知其處也。縱觀南北兩巖。又待月出。于時。東方未盡澄澈。復寒凜不可支。令燒榾柮。以熏屋戶。然後就寢。夜半。星月皎然。辛巳。曉日升暘谷。霞彩映發。左右皆以余困劇。必不能再陟。余念數日重陰。忽爾開霽。天公之餉我。多矣。今在咫尺。而不能勉強。則平生芥滯之胸。終不能盪滌矣。遂促晨餔。褰裳。徑往石門以上。所履草木。皆帶氷凌。入聖母廟。復酹而謝曰。今日。天地淸霽。山川洞豁。實賴神休。良深欣感。乃與克己,解空。登北壘。太虛已上板屋矣。雖鴻鵠之飛。無出吾上。時因新霽。四無纖雲。但蒼然茫然。不知所極。余曰。夫遐觀而不得其要領。則何異於樵夫之見。盍先望北而次東。次南次西。且也自近而遠。可乎。空頗能指示之。是山。自北而馳至南原。首起爲般若峯。東迤幾二百里。至此峯。更峻拔。北蟠而窮焉。其四面支峯裔壑。競秀爭流。雖巧曆。不能究其數。見其雉堞。若曳而繚者。咸陽之城歟。靑黃膠戾。而白虹橫貫者。晉州之水歟。靑螺點點。庚而橫。矗而立者。南海巨濟之群島歟。若山陰,丹谿,雲峯,求禮,河東等縣。皆隱於襞積之中。不得而視也。山之在北而近曰黃石安陰。曰鷲巖咸陽。遠曰德裕咸陰。曰雞龍公州。曰走牛錦山。曰修道知禮。曰伽耶星州。東北而近曰皇山山陰。曰紺嶽三嘉。遠曰八公大丘。曰淸涼安東。在東而近曰闍崛宜寧。曰集賢晉州。遠曰毗瑟玄風。曰雲門淸道。曰圓寂梁山。東南而近曰臥龍泗川。在南而近曰甁要河東。曰白雲光陽。西南而遠曰八顚興陽。在西而近曰荒山雲峯。遠曰無等光州。 曰邊山扶安。曰錦城羅州。曰威鳳高山。曰母岳全州。曰月出靈岩。西北而遠曰聖壽長水。或若培塿。或若龍虎。或若飣餖。或若劍鋩。而唯東之八公。西之無等。在諸山稍爲穹隆也。雞立嶺以北。縹氣漫空。對馬島以南。蜃氣接天。眼界已窮。不復了了也。使克己。志其可識有如右。遂相顧自慶曰。自古。登此峯者有矣。豈若吾曹今日之快也。下壘距磴而坐。酌數杯。日已亭午。望靈神。坐高臺。尙遠。亟穿石門而下。登中山。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甑峯爲第一。此爲第二。故亦稱中焉。自是。皆由山脊而行。其間奇峯。以十數。皆可登眺。與上峯相埒。而無名稱。克己曰。自先生名之。可矣。余曰。其於無徵不信。何。林多馬價木。可爲杖。使從者。揀滑而直者取之。須臾盈一束。歷甑峯。抵沮洳。原有楓樹當徑。屈曲狀棖闑。由之出者。皆不俛僂。原在山之脊也。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以耕而食也。見溪上草廠數間。周以柴柵。有土炕。乃內廂捕鷹幕也。余自永郞岾至此。見岡巒處處設捕鷹之具。不可勝記。秋氣未高。時無採捕者。鷹準。雲漢間物也。安知峻絶之地。有執械豐蔀而伺者。見餌而貪。猝爲羅網所絓。絛鏇所制。亦可以儆人矣。且夫進獻。不過一二連。而謀充戲玩。使鶉衣啜飧者。日夜耐風雪。跧伏於千仞峯頭。有仁心者。所不忍也。暮登唱佛臺。巉巉斗絶。其下無底。其上無草木。但有躑躅數叢。羚羊遺矢焉。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山海相重。益爲奇也。空指衆壑之會曰。新興寺洞也。李節度克均。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永己。狗鼠也。以負險故。李公之智勇。而不能禁遏其奔逬。卒爲長興守之功。可嘆已。又指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也。噫。此古所謂神仙之區歟。其與人境。不甚相遠。李眉叟何以尋之而不得歟。無乃好事者慕其名。構寺而識之歟。又指其東曰。雙溪寺洞也。崔孤雲嘗遊于此。刻石在焉。孤雲。不羈人也。負氣槩。遭世亂。非惟不偶於中國。而又不容於東土。遂嘉遯物外。溪山幽闃之地。皆其所遊歷。世稱神仙。無愧矣。宿靈神寺。但有一僧。寺之北崖。有石迦葉一軀。世祖大王時。每遣中使行香。其項有缺。亦云爲倭所斫。噫。倭眞殘寇哉。屠剝生人無餘。聖母與迦葉之頭。又被斷斬。豈非雖頑然之石。以象人形而遭患歟。其右肱有瘢。似燃燒。亦云劫火所焚。稍加焚。則爲彌勒世。夫石痕本如是。而乃以荒怪之語誑愚民。使邀來世利益者。爭施錢布。誠可憎也。迦葉殿之北峯。有二巖突立。所謂坐高臺也。其一。下蟠上尖。頭戴方石。闊纔一尺。浮屠者言。有能禮佛於其上。得證果。從者玉崑,廉丁。能陟而拜。予在寺望見。亟遣人叱土之。此輩頑愚。幾不辨菽麥。而能自判命如此。浮屠之能誑民。擧此可知。法堂有蒙山畫幀。其上有贊。云。頭陁第一。是爲抖擻。外已遠塵。內已離垢。得道居先。入滅於後。雪衣雞山。千秋不朽。傍印淸之小篆。乃匪懈堂之三絶也。東砌下有靈溪。西砌下有玉泉。味極甘。以之煮茗。則中泠惠山。想不能過。泉之西。壞寺巋然。此古靈神也。其西北斷峯有小塔。石理細膩。亦爲倭所倒。後更累之。以鐵貫其心。失數層矣。壬午。早起開戶。見蟾津潮漲。久視之。乃嵐氣平鋪也。食罷。竝寺之西北。憩于嶺上。望般若峯。約六十餘里。而兩足畫繭。筋力已竭。雖欲往觀。不能強也。徑由直旨而下。道益懸危。攀樹根。履石角。數十餘里。皆此類也。面東而仰視。天王峯若咫尺矣。竹梢或有實。皆爲人所採。松之大者。可百圍。櫛立嵌巖。皆平日所未見。旣下峻趾。二壑之水所合。其聲噴放。振搖林麓。澄潭百尺。遊魚濈濈。余四人掬水漱齒。沿崖曳杖而行。甚可樂也。谷口有野廟。僕人以馬先候焉。遂更衣乘馬。抵實宅里。父老數輩。迎拜道左云。使君遊歷無恙。敢賀。余始喜百性不以優遊廢事罪我也。解空。往君子寺。法宗。往妙貞寺。太虛,克己,百源。往遊龍遊潭。余則踰登龜岾。徑還郡齋。出遊纔五日。而頓覺胸次神觀。寥廓蕭森。雖妻孥吏胥視我。亦不似舊日矣。嗚呼。以頭流崇高雄勝。在中原之地。必先嵩岱。天子登封金泥玉牒之檢。升中于上帝。不然。則當比之武夷衡岳。博雅如韓昌黎,朱晦菴蔡西山。修煉如孫興公,呂洞賓,白玉蟾。聯裾接踵。彷徉棲息於其巾矣。今獨爲庸夫逃隸竄籍學佛者之淵藪。吾輩今日。蹤得登覽一遭。僅償平素之願。而繩墨悤悤。不敢訪靑鶴歷五臺。遍探幽奇焉。夫豈玆山之不遇耶。長詠子美方丈三轉之句。自不覺神魂之飛越也。歲壬辰仲秋越五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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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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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畢齋弔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心。爲西楚霸王項籍所弑。沈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啻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曰。
濯纓贊其文曰。以寓忠憤。
子光逐句釋之曰。祖龍。秦始皇也。以比於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者。王。楚懷王孫心也。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以羊狠狼貪指世祖。以擅夷冠軍。指誅金宗瑞。其曰。胡不收云云。指魯山胡不收世祖也。其曰。爲醢腊云云。謂魯山不收世廟。友爲醢腊也。其曰。循紫陽云云。宗直以朱子自處。作賦以擬綱目之筆云。
[주D-001]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 녹명편(鹿鳴篇)〉를 말한 것인데, 아름다운 손님을 잔치하는
시다. |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암집- 김명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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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 |||||||
煙湘閣選本○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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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人有言曰。烈女不更二夫。如詩之柏舟是也。然而國典。改嫁子孫。勿叙正職。此豈爲庶姓黎甿而設哉。乃國朝四百年來。百姓旣沐久道之化。則女無貴賤。族無微顯。莫不守寡。遂以成俗。古之所稱烈女。今之所在寡婦也。至若田舍少婦。委衖靑孀。非有父母不諒之逼。非有子孫勿叙之恥。而守寡不足以爲節。則往往自滅晝燭。祈殉夜臺。水火鴆繯。如蹈樂地。烈則烈矣。豈非過歟。昔有昆弟名宦。將枳人淸路。議于母前。母問奚累而枳。對曰。其先有寡婦。外議頗喧。母愕然曰。事在閨房。安從而知之。對曰。風聞也。母曰。風者。有聲而無形也。目視之而無覩也。手執之而無獲也。從空而起。能使萬物浮動。奈何以無形之事。論人於浮動之中乎。且若乃寡婦之子。寡婦子尙能論寡婦耶。居。吾有以示若。出懷中銅錢一枚曰。此有輪郭乎。曰。無矣。此有文字乎。曰。無矣。母垂淚曰。此汝母忍死符也。十年手摸。磨之盡矣。大抵人之血氣。根於陰陽。情欲鍾於血氣。思想生於幽獨。傷悲因於思想。寡婦者。幽獨之處而傷悲之至也。血氣有時而旺。則寧或寡婦而無情哉。殘燈吊影。獨夜難曉。若復簷雨淋鈴。窓月流素。一葉飄庭。隻鴈叫天。遠鷄無響。穉婢牢鼾。耿耿不寐。訴誰苦衷。吾出此錢而轉之。遍模室中。圓者善走。遇域則止。吾索而復轉。夜常五六轉。天亦曙矣。十年之間。歲减其數。十年以後。則或五夜一轉。或十夜一轉。血氣旣衰而吾不復轉此錢矣。然吾猶十襲而藏之者二十餘年。所以不忘其功。而時有所自警也。遂子母相持而泣。君子聞之曰。是可謂烈女矣。噫。其苦節淸修若此也。無以表見於當世。名堙沒而不傳何也。寡婦之守義。乃通國之常經。故微一死。無以見殊節於寡婦之門。
余視事安義之越明年癸丑月日夜將曉。余睡微醒。聞廳事前有數人隱喉密語。復有慘怛歎息之聲。蓋有警急而恐擾余寢也。余遂高聲問鷄鳴未。左右對曰。已三四號矣。外有何事。對曰。通引朴相孝之兄之子之嫁咸陽而早寡者。畢其三年之喪。飮藥將殊。急報來救。而相孝方守番。惶恐不敢私去。余命之疾去。及晩爲問咸陽寡婦得甦否。左右言聞已死矣。余喟然長歎曰。烈哉斯人。乃招群吏而詢之曰。咸陽有烈女。其本安義出也。女年方幾何。嫁咸陽誰家。自幼志行如何。若曺有知者乎。群吏歔欷而進曰。朴女家世縣吏也。其父名相一早歿。獨有此女而母亦早歿。則幼養於其大父母盡子道。及年十九。嫁爲咸陽林述曾妻。亦家世郡吏也。述曾素羸弱。一與之醮。歸未半歲而歿。朴女執夫喪盡其禮。事舅姑盡婦道。兩邑之親戚鄰里。莫不稱其賢。今而後果驗之矣。有老吏感慨曰。女未嫁時隔數月。有言述曾病入髓。萬無人道之望。盍退期。其大父母密諷其女。女默不應。迫期。女家使人覸述曾。述曾雖美姿貌。病勞且咳。菌立而影行也。家大懼。擬招他媒。女斂容曰。曩所裁縫。爲誰稱體。又號誰衣也。女願守初製。家知其志。遂如期迎婿。雖名合巹。其實竟守空衣云。旣而咸陽郡守尹矦光碩。夜得異夢。感而作烈婦傳。而山淸縣監李矦勉齋。亦爲之立傳。居昌愼敦恒。立言士也。爲朴氏撰次其節義始終。其心豈不曰弱齡嫠婦之久留於世。長爲親戚之所嗟憐。未免隣里之所妄忖。不如速無此身也。噫。成服而忍死者。爲有窀穸也。旣葬而恐死者。爲有小祥也。小祥而忍死者。爲有大祥也。旣大祥則喪期盡。而同日同時之殉。竟遂其初志。豈非烈也。
泰村先生文集卷之一 |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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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石貞心磨不磷。糓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泰村先生文集卷之一 |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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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在。地下千秋愧月明。
泰村先生文集卷之五 |
效嚬雜記[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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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明塚]
古人詠望夫石詩曰。山頭日日風和雨。行人歸來石應語。釋之者曰。望夫山每夕不風則雨。詩意指此也。余初未之信也。及宰天嶺。再隳月明塚得雨。然後始知古人之詩。蓋無虛境也。月明者。沙斤驛女也。許嫁京商。結髮未久。商重利上洛。女念夫不已。專廢餔歠。病已危重。折簡厥夫。夫聞之。懷梨跋涉而下。未到而女疾革矣。將死囑其父母曰。葬我於西山絶頂。歿而有知。當望夫婿歸路也。父母憐之。葬如其言。葬之日。商始來。亦傷悼而死。同墳而葬。葬後有梨生于塚上。卽所懷梨也。歲久樹老。今不存焉。余在郡凡四載。再遭旱暵。父老曰。掘月明塚則雨。所謂掘者。非盡掘也。不過隳其土十餘塊而已。兩年掘土。皆得甘雨。則望夫山之風雨。無足恠也。或曰。然則月明塚何無日日風雨乎。余曰。望夫之夫終不歸。月明之夫死而同穴。怨恨亦有淺深。則風雨豈無時恒乎。人有爲詠一絶曰。金石貞心磨不磷。糓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萬德九嫁而九孀]
萬德。亦沙斤驛女也。娶者輒死。凡九嫁而九孀。驛有好事者。連塋而葬。卽月明塚山下也。萬德死。又葬于九塚之下。十塚相次如連珠焉。有人作詩曰。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在。地下千秋愧月明。
여기 안의와 서부경남 일원에 길이 역사적 기념물이 될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지원 선생은 조선(朝鮮) 후기의 탁월한 실학파(實學派)학자이며 우리 역사상 최대의 문학가(文學家)의 한분이시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비롯하여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편편이 경세제민(經世濟民)과 이용후생의 뜻을 담고 있어서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특히 우리 고장에서 기념하게 되는 까닭은 선생이 우리 고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오년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縣監)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 깊은 이 고을에서 실천에 옮겨 볼 수 있었으며 작품활동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저작(著作)의 대부분을 이 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 선생이 이 고장에 남긴 뚜렷한 자취를 대강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생이 저작활동(著作活動)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낸 점이다. 선생이 이 곳에 있을 때 지은 저작으로 선생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만도 40여 편이 된다. 그 가운데는 국계민생(國計民生)에 관련한 중요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치정치민의 과정에서 쓰여진 것 그리고 안의를 비롯한 함양 거창 합천등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산수와 문물에 구체적으로 연관된 내용 등이 그 대부분이다. 또한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編題)에 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와 같이 이곳 관아(官衙) 건물의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저작(著作)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일류문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 결과 우리 고장이 당시 우리나라 문학의 중심지로 여겨지게까지 하였다. 다음은 선생이 평소에 깊이 연구하였던 과학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接木)시킨 점이다.
이용후생의 학에 특히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부임하자 곧 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공장(工匠)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쳐 풍구직기용미수전윤전(風具織機龍尾水轉輪輾) 즉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창안에 의한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관아의 부속건물로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새로 짓고 연지(蓮池)를 만들었던 바 이 역시 자신이 북경에서 배워온 벽돌 만드는 기술을 그 건축물에 실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선생이 이 고장 주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민생에 특히 힘을 기울렸던 행정적 자취이다.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리(流離)하는 기민(飢民) 일천사백여명을 구휼(救恤)했으며 함양땅의 상습 수해지구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경로에 힘써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특히의 옥사(獄事)의 판결에 신명(神明)해서 이웃고을과 도내의 어려운 옥사를 여러 건 해결하였다. 다음으로 선생은 이 고장의 문화와 예속(禮俗)을 존중하여 이를 찬양하였다. 지방의 문헌을 발굴하고 학술을 진작(振作)하였던바 예전에 속천(凁川) 우여무(禹汝楙)선생이 지은 홍범우익(洪範羽翼)이라는 방대한 저서의 학술사상적 가치를 발굴하여 드러내었고 이 고장의 선현(先賢) 임갈천(林葛川) 노옥계(盧玉溪) 정동계(鄭桐溪) 유언일(劉彦一)선생 등이 남긴 학창의와 관객등 유제(遺制)와 미풍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의 자제들에게도 따르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지방문화를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이와같이 남다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선정비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은 선생 자신이 떠나면서 지방 사람들의 계획을 극력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은 호를 연암(燕岩) 자(字)를 미중(美仲)이라 하였고 1737년 영조 33년 당시 서울의 명문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논구(論究)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41세때 황해도 연암협(燕巖峽)으로 옮겨 지내다가 44세때 사신(使臣)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였다. 이 때에 새로운 사상과 과학문명의 세계적 조류를 여러면에서 직적 체득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이 여행의 체험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참신한 문체로서 당시 문단에 커다란 피문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선생의 실학사상이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값진 민족문화유산이 되었다. 50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어 55세에 지방관직으로서는 처음 안의고을 현감이 되었으며 안의를 떠난지 9년 후인 1805년 69세로 일기를 마쳤다. 선생은 안의를 거쳐 면천군수(沔川郡守) 양양부사(襄陽府使) 등을 잠깐씩 지내기는 했지만 첫 부임지로써 가장 오래
있었던 우리고장이야말로 선생의 사상과 포부를 실천해보고자 온 정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선생의 생애는 18세기 말의 낙후된 조국을 문명화하기 위하여 특히 이용후생의 학문연구와 새로운 기운의 문학운동에 오로지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유통의 확대와 기술의 혁신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러한 신기운의 형성과 함께 나타나는 근대적 체질이 새로운 인간형들을 소설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선생은 일찍부터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상인 수공업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실학을 가지고 서민들에게 이바지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선비(士)로서 자기 임무를 자각한 때문이었다. 또한 선생은 중세적 권위주위와 고식적(姑息的)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모든 사람들이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훌륭한 문학작품들로 그려 놓았던 것이다. 이들 작품은 신선한 구성과 사실적 수법을 그리고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으로 깊이 서민적 정취를 묘사하여 정통문학의 완강한 성벽에 도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선생은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자기 시대를 개척해나간 사상가요.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생의 생장지인 서울에는 격심한 변천으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으며 선생의 묘소도 휴전선 북쪽에 있어 가 볼 수가 없으니 선생의 거룩한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우리 안의뿐이다. 이에 선생이 재임시에 손수 지은 관아(官衙)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옛터 이곳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선생을 통하여 민족사의 선진대열에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일깨우고 다시 이 시대의 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힘의 줄기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여기 이 돌에 우리고장 전체 주민들의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1986년 O월 O일
여주(驪州) 이 우 성(李佑成) 삼가 지음
진양(晉陽) 하 한 식(河漢植) 삼가 씀
전면대자(前面大字)는 안동(安東) 김 응 현(金膺顯)이 썼음
진단학회(震檀學會). 국어국문학회(國語國文學會).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 한국한문학연구회(韓國漢文學硏究會).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 연암 박지원선생 사적비 건립추진위원회(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建立推進委員會)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