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양 고 전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
연암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
태촌 고상안의 <월명총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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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추진회 국역점필재집-임정기 역
 점필재집 문집 제2권
 기행록(紀行錄)
두류산을 유람한 기행록[遊頭流錄]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畫)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경진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육천(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涼)안동(安東)에 있다.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증봉(甑峯)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炕]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戲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 是爲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임오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주D-001]결하(結夏) :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주D-002]우란(盂蘭) :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 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주D-003]나는 불을……다투게 하고 싶다 :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주D-004]선니(宣尼)가……구경했던 일 :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주D-005]한자(韓子)가……유람했던 뜻 :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주D-006]절도사(節度使)……돌아갔으니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주D-007]이미수(李眉叟)는……못 찾았던가 :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주D-008]증과(證果) :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9]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주D-010]중령(中泠), 혜산(惠山) :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주D-011]옥첩 옥검(玉牒玉檢) :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주D-012]승중(升中) :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3]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 :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주D-014]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 :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 《杜少陵集 卷三》

 
 佔畢齋文集卷之二
 
遊頭流錄 012_441b


某生長嶺南。頭流。乃吾鄕之山也。而遊宦南北。塵埃汨沒。年齒已四十。尙不得一遊焉。辛卯春。持左符于咸陽。頭流在其封內。嵬然蒼翠。擧眼斯得。而凶年民事。簿書倥傯。殆二期。又不敢一遊焉。每與兪克己,林貞叔語此。未嘗不介介于懷。今年夏。曺太虛自關東來。從余讀禮。及秋。將返于庭闈。而求遊玆山。余亦念羸瘵日增。脚力益衰。今年不遊。則明012_441c年難卜。況時方仲秋。霒霾已霽。三五之夜。翫月於天王峯。鷄鳴。觀日出。明朝。又周覽四方。可一擧而兼得。遂決策遊焉。乃邀克己。共太虛。按壽親書所云遊山具。稍增損其所齎。十四日戊寅。德峯寺僧解空來。使爲鄕導。韓百源請從。遂歷嚴川。憩于花巖。僧法宗尾至。問其所歷。阻折頗詳。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太虛,百源。上其巓。其下千仞。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訪先涅菴。菴負峭壁而構。二泉在壁底極冽。墻外。水自半巖缺012_441d泐。津溜而落。盤石承之。稍坳處。瀅然渟滀。其罅生赤楊龍須草。皆數寸。傍有磴路。繫藤蔓一條于樹。攀之上下。以往來于妙貞及地藏。宗云。有一比丘。結夏盂蘭。罷後雲遊。不知所向。種小瓜及蘿葍於石上。有小砧杵糠籺數升許而已。訪新涅。無僧。亦負峭壁。菴東北有巖。曰獨女。五條離立。高皆千餘尺。宗云。聞有一婦人。累石巖間。獨棲其中。鍊道沖空。故爲號云。所累石猶存。柏生巖腰。欲上者。梯木挽其柏。廻繞巖闕。肯腹俱盪磨。然後達其頂。然不能辦命者。不能上。從吏玉崑聳山。能上而超足麾012_442a手。予嘗往來山陰。望見是巖。與諸峯角出。若柱天然。今而身跨玆地。毛骨然。恍疑非我也。稍西迤抵古涅菴。日已曛矣。議論臺。在其西岡。克己等後。余獨倚杖于三盤石。香爐峯,彌陁峯。皆在脚底。空云。崖下有石窟。老宿優陁居之。嘗與三涅僧。居此石。論大小乘。頓悟。仍以爲號。少選。寮主僧荷衲來。合掌云。聞使君來遊。何在。空目僧休說。僧面稍赤。余用蒙莊語。慰藉云。我欲煬者爭䆴。舍者爭席。今寮主見一野翁耳。豈知某爲使君。空等皆笑。是日。余初試險。步幾二十里。極勞憊。熟睡夜半而覺。月012_442b色呑吐諸峯。雲氣騰湧。余默慮焉。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減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난001中。大木之自斃者。顚仆于谿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度一岡。空云。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012_442c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度九隴訖。便由山脊而行。行雲低拂篢子。草樹不雨而濕。始覺去天不遠也。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也。煙霧瀰漫。不能眺望。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012_442d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時雲霧消散。日脚下垂。山之東西谿谷開豁。望之無雜樹。皆杉檜松枏。槁死骨立者。居三之一。往往間以丹楓。正如圖畫。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榦皆左靡拳曲。雲髮飄颺。云。海松尤多。土人。每秋採之。以充貢額。今歲。無一樹帶殼。苟取盈。則吾民奈何。守令適見之。是則幸也。有草類書帶。柔韌而滑。可藉以坐臥。在在皆然。淸伊以下。多五味子林密。而到此無之。只見獨活,當歸而已。歷蟹踰嶺。傍有船巖。宗云。上012_443a古海水懷襄時。船繫于玆巖。而螃蟹過之故名。余笑曰。信汝之言。其時生類。盡攀天而活耶。又竝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憩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晡時。乃登天王峯。雲霧蓊勃。山川皆闇。中峯亦不見矣。空宗先詣聖母廟。捧小佛。呼晴以弄之。余初以爲戲。問之。云。俗云如是則天晴。余冠帶盥洗。捫石磴入廟。以酒果告于聖母曰。某嘗慕宣尼登岱之觀。韓子遊衡之志。職012_443b事羈纏。願莫之就。今者仲秋。省稼南境。仰止絶峯。精誠靡阻。遂與進士韓仁孝,兪好仁,曺偉等。共躡雲梯。來詣祠下。屛翳爲祟。雲物饙餾。遑遑悶悶。恐負良辰。伏丐聖母。歆此泂酌。報以神功。致令今日之夕。天宇廓然。月色如晝。明日之朝。萬里洞然。山海自分。則某等獲遂壯觀。敢忘大賜。酹已。共坐神位前。酒數行而罷。祠屋但三間。嚴川里人所改創。亦板屋。下釘甚固。不如是。則爲風所揭也。有二僧繪畫其壁。所謂聖母乃石像。而眉目䯻鬟。皆塗以粉黛。項有缺畫。問之。云太祖捷引月之歲。倭012_443c冠登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復屬之。東偏陷石壘。空等所弄佛。在焉。是號國師。俗傳聖母之淫夫。又問聖母。世謂之何神也。曰。釋迦之母摩耶夫人也。噫。有是哉。西竺與東震。猶隔千百世界。迦維國婦人。焉得爲玆土之神。余嘗讀李承休帝王韻記。聖母命詵師。註云。今智異天王。乃指高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高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君之系。創爲是談。承休信之。筆之韻記。此亦不可▓徵。矧緇流妄誕幻惑之言乎。且旣謂之摩耶。而汚衊以國師。其褻慢不敬。孰甚焉。此不可不辨。日且昏。陰風甚顚。東012_443d西橫吹。勢若撥屋振嶽。嵐霧坌入。衣冠皆潤。四人皆枕藉祠內。寒氣徹骨。更襲重綿。從者皆股戰失度。令燒大木三四本以熨之。夜深。月色黯黮。喜而起視。旋爲頑雲所掩。倚壘四瞰。六合澒洞。若大瀛海之中。乘一小舟。軒昂傾側。將淪干波濤也。笑謂三子曰。雖無退之之精誠。知微之道術。幸與君輩。共御氣母。浮游混沌之元。豈非韙歟。庚辰。風雨猶怒。先遣從者於香積寺。具食。令披徑路來迎。過午。雨少止。石矼滑甚。使人扶携推轉而下。數里許有鐵鎖路。甚危。便穿石穴而出。極力步投香積。無僧012_444a已二載。澗水猶依剖木。潺湲而落于槽。窓牖關鎖及香槃佛油。宛然俱在。命淨掃焚香。入處之。薄暮。雲靄自天王峯倒吹。其疾不容一瞥。遙空或有返照。余擧手喜甚。出門前盤石。望望川蜿蜒。而諸山及海島。或全露。或半露。或頂露。如人在帳中而見其䯻也。仰視絶頂。重巒疊嶂。不知昨日路何自也。祠旁白旆。南指而颺。蓋繪畫僧報我知其處也。縱觀南北兩巖。又待月出。于時。東方未盡澄澈。復寒凜不可支。令燒榾柮。以熏屋戶。然後就寢。夜半。星月皎然。辛巳。曉日升暘谷。霞彩映發。左右皆以余012_444b困劇。必不能再陟。余念數日重陰。忽爾開霽。天公之餉我。多矣。今在咫尺。而不能勉強。則平生芥滯之胸。終不能盪滌矣。遂促晨餔。褰裳。徑往石門以上。所履草木。皆帶氷凌。入聖母廟。復酹而謝曰。今日。天地淸霽。山川洞豁。實賴神休。良深欣感。乃與克己,解空。登北壘。太虛已上板屋矣。雖鴻鵠之飛。無出吾上。時因新霽。四無纖雲。但蒼然茫然。不知所極。余曰。夫遐觀而不得其要領。則何異於樵夫之見。盍先望北而次東。次南次西。且也自近而遠。可乎。空頗能指示之。是山。自北而馳至南原。首起012_444c爲般若峯。東迤幾二百里。至此峯。更峻拔。北蟠而窮焉。其四面支峯裔壑。競秀爭流。雖巧曆。不能究其數。見其雉堞。若曳而繚者。咸陽之城歟。靑黃膠戾。而白虹橫貫者。晉州之水歟。靑螺點點。庚而橫。矗而立者。南海巨濟之群島歟。若山陰,丹谿,雲峯,求禮,河東等縣。皆隱於襞積之中。不得而視也。山之在北而近曰黃石安陰。曰鷲巖咸陽。遠曰德裕咸陰。曰雞龍公州。曰走牛錦山。曰修道知禮。曰伽耶星州。東北而近曰皇山山陰。曰紺嶽三嘉。遠曰八公大丘。曰淸涼安東。在東而近曰闍崛宜寧。曰集賢晉州。遠曰毗瑟玄風。曰雲門淸道012_444d曰圓寂梁山。東南而近曰臥龍泗川。在南而近曰甁要河東。曰白雲光陽。西南而遠曰八顚興陽。在西而近曰荒山雲峯。遠曰無等光州。 曰邊山扶安。曰錦城羅州。曰威鳳高山。曰母岳全州。曰月出靈岩。西北而遠曰聖壽長水。或若培塿。或若龍虎。或若飣餖。或若劍鋩。而唯東之八公。西之無等。在諸山稍爲穹隆也。雞立嶺以北。縹氣漫空。對馬島以南。蜃氣接天。眼界已窮。不復了了也。使克己。志其可識有如右。遂相顧自慶曰。自古。登此峯者有矣。豈若吾曹今日之快也。下壘距磴而坐。酌數杯。日已亭午。望靈神。坐高臺。尙遠。亟穿012_445a石門而下。登中山。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甑峯爲第一。此爲第二。故亦稱中焉。自是。皆由山脊而行。其間奇峯。以十數。皆可登眺。與上峯相埒。而無名稱。克己曰。自先生名之。可矣。余曰。其於無徵不信。何。林多馬價木。可爲杖。使從者。揀滑而直者取之。須臾盈一束。歷甑峯。抵沮洳。原有楓樹當徑。屈曲狀棖闑。由之出者。皆不俛僂。原在山之脊也。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以耕而食也。見溪上草廠數間。周以柴柵。有土炕。乃內廂捕鷹幕也。余012_445b自永郞岾至此。見岡巒處處設捕鷹之具。不可勝記。秋氣未高。時無採捕者。鷹準。雲漢間物也。安知峻絶之地。有執械豐蔀而伺者。見餌而貪。猝爲羅網所絓。絛鏇所制。亦可以儆人矣。且夫進獻。不過一二連。而謀充戲玩。使鶉衣啜飧者。日夜耐風雪。跧伏於千仞峯頭。有仁心者。所不忍也。暮登唱佛臺。巉巉斗絶。其下無底。其上無草木。但有躑躅數叢。羚羊遺矢焉。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山海相重。益爲奇也。空指衆壑之會曰。新興寺洞也。李節度克均。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永己。狗鼠012_445c也。以負險故。李公之智勇。而不能禁遏其奔逬。卒爲長興守之功。可嘆已。又指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也。噫。此古所謂神仙之區歟。其與人境。不甚相遠。李眉叟何以尋之而不得歟。無乃好事者慕其名。構寺而識之歟。又指其東曰。雙溪寺洞也。崔孤雲嘗遊于此。刻石在焉。孤雲。不羈人也。負氣槩。遭世亂。非惟不偶於中國。而又不容於東土。遂嘉遯物外。溪山幽闃之地。皆其所遊歷。世稱神仙。無愧矣。宿靈神寺。但有一僧。寺之北崖。有石迦葉一軀。世祖大王時。每遣中使行香。其項有缺。亦012_445d云爲倭所斫。噫。倭眞殘寇哉。屠剝生人無餘。聖母與迦葉之頭。又被斷斬。豈非雖頑然之石。以象人形而遭患歟。其右肱有瘢。似燃燒。亦云劫火所焚。稍加焚。則爲彌勒世。夫石痕本如是。而乃以荒怪之語誑愚民。使邀來世利益者。爭施錢布。誠可憎也。迦葉殿之北峯。有二巖突立。所謂坐高臺也。其一。下蟠上尖。頭戴方石。闊纔一尺。浮屠者言。有能禮佛於其上。得證果。從者玉崑,廉丁。能陟而拜。予在寺望見。亟遣人叱土之。此輩頑愚。幾不辨菽麥。而能自判命如此。浮屠之能誑民。擧此可知。法堂012_446a有蒙山畫幀。其上有贊。云。頭陁第一。是爲抖擻。外已遠塵。內已離垢。得道居先。入滅於後。雪衣雞山。千秋不朽。傍印淸之小篆。乃匪懈堂之三絶也。東砌下有靈溪。西砌下有玉泉。味極甘。以之煮茗。則中泠惠山。想不能過。泉之西。壞寺巋然。此古靈神也。其西北斷峯有小塔。石理細膩。亦爲倭所倒。後更累之。以鐵貫其心。失數層矣。壬午。早起開戶。見蟾津潮漲。久視之。乃嵐氣平鋪也。食罷。竝寺之西北。憩于嶺上。望般若峯。約六十餘里。而兩足畫繭。筋力已竭。雖欲往觀。不能強也。徑由直旨而下。道012_446b益懸危。攀樹根。履石角。數十餘里。皆此類也。面東而仰視。天王峯若咫尺矣。竹梢或有實。皆爲人所採。松之大者。可百圍。櫛立嵌巖。皆平日所未見。旣下峻趾。二壑之水所合。其聲噴放。振搖林麓。澄潭百尺。遊魚濈濈。余四人掬水漱齒。沿崖曳杖而行。甚可樂也。谷口有野廟。僕人以馬先候焉。遂更衣乘馬。抵實宅里。父老數輩。迎拜道左云。使君遊歷無恙。敢賀。余始喜百性不以優遊廢事罪我也。解空。往君子寺。法宗。往妙貞寺。太虛,克己,百源。往遊龍遊潭。余則踰登龜岾。徑還郡齋。出遊纔五日。而頓012_446c覺胸次神觀。寥廓蕭森。雖妻孥吏胥視我。亦不似舊日矣。嗚呼。以頭流崇高雄勝。在中原之地。必先嵩岱。天子登封金泥玉牒之檢。升中于上帝。不然。則當比之武夷衡岳。博雅如韓昌黎,朱晦菴蔡西山。修煉如孫興公,呂洞賓,白玉蟾。聯裾接踵。彷徉棲息於其巾矣。今獨爲庸夫逃隸竄籍學佛者之淵藪。吾輩今日。蹤得登覽一遭。僅償平素之願。而繩墨悤悤。不敢訪靑鶴歷五臺。遍探幽奇焉。夫豈玆山之不遇耶。長詠子美方丈三轉之句。自不覺神魂之飛越也。歲壬辰仲秋越五日。書。


[난-001]菁 : 菁疑作蒨
연산군 4년 무오(1498, 홍치 11)

 

7월 17일(신해)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전지하기를,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종경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을 경도하였다.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 명을 마치게 하였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狠狼貪)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하였다.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균(李克均)·이세좌(李世佐)·노공필(盧公弼)·윤민(尹慜)·안호(安瑚)·홍자아(洪自阿)·신부(申溥)·이덕영(李德榮)·김우신(金友臣)·홍석보(洪碩輔)·노공유(盧公裕)·정숙지(鄭叔墀)가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자, 스스로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에게 받아들임을 보지 못한다 하여, 마침내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 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
하고, 유지(柳輊)는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불신(不臣)한 그 심리는, 죄가 용납될 수 없사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옵소서.”
하고, 박안성(朴安性)·성현(成俔)·신준(申浚)·정숭조(鄭崇祖)·이계동(李季仝)·권건(權健)·김제신(金悌臣)·이계남(李季男)·윤탄(尹坦)·김극검(金克儉)·윤은로(尹殷老)·이집(李諿)·김무(金珷)·김경조(金敬祖)·이숙함(李叔瑊)·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요사한 꿈에 가탁하여 선왕을 훼방(毁謗)하였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입니다.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변종인(卞宗人)·박숭질(朴崇質)·권경우(權景祐)·채수(蔡壽)·오순(吳純)·안처량(安處良)·홍흥(洪興)은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불신(不臣)한 죄가 이미 심하온즉,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편하옵니다.”
하고, 이인형(李仁亨)·표연말(表沿沫)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
하고, 이극규(李克圭)·이창신(李昌臣)·최진(崔璡)·민사건(閔師蹇)·홍한(洪瀚)·이균(李均)·김계행(金係行)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율문에 의하여 논단해서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 가진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옵소서.”
하고, 정성근(鄭誠謹)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세조를 섬겼으니, 그 흉악함을 헤아리지 못하온즉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고, 이복선(李復善)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 정사년(丁巳年) 10월이었으니, 그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은 것이 오래이었습니다. 그 조문(弔文)을 해석한 말을 살펴보니, 비단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시 눈으로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 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악을 추죄(追罪)할 수 있사오니, 마땅히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하소서. 종직의 귀신이 지하에서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달갑게 복죄(伏罪)할 것입니다.”
하고, 이세영(李世榮)·권주(權柱)·남궁찬(南宮璨)·한형윤(韓亨允)·성세순(成世純)·정광필(鄭光弼)·김감(金勘)·이관(李寬)·이유령(李幼寧)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종직의 글을 보오니,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옵니다. 난역(亂逆)으로 논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이유청(李惟淸)·민수복(閔壽福)·유정수(柳廷秀)·조형(趙珩)·손원로(孫元老)·신복의(辛服義)·안팽수(安彭壽)·이창윤(李昌胤)·박권(朴權)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는데, 문형 등의 의논에 따랐다. 어필(御筆)로 집의(執義) 이유청(李惟淸) 등과 사간(司諫) 민수복(閔壽福)의 논의에 표를 하고, 필상 등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을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정(情)이 없음을 공초하였다.
【원전】 13 집 31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서초 패왕(西楚霸王) : 항우(項羽).
[주D-002]사대(四大) 오상(五常) : 사대(四大)는 천대(天大)·지대(地大)·도대(道大)·왕대(王大)를 이름이요, 오상(五常)은 오륜(五倫)을 이름.
[주D-003]조룡(祖龍) : 진 시황(秦始皇).
[주D-004]웅역(熊繹)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인데 초(楚)의 시봉조(始封祖)임.
[주D-005]건부(乾符) : 천자의 표시로 갖는 부서(符瑞).
[주D-006]미씨(芈氏) : 초(楚)나라의 성.
[주D-007]양흔 낭탐(羊狠狼貪) : 항우(項羽)를 비유함.
[주D-008]관군(冠軍) : 경자 관군(卿子冠軍).
[주D-009]제부(齊斧) : 정벌하는 도끼임. 천하를 정제한다는 뜻에서 나옴.
[주D-010]해석(醢腊) : 젓과 포.
[주D-011]진돈(螴蜳) : 충융(沖瀜)과 같은데, 포외(怖畏)의 기운이 넘쳐서 안정하지 못한다는 뜻임.
[주D-012]노산(魯山) : 단종.

藍溪先生文集卷之二
 
 附錄
史禍首末 015_430a

附畢齋弔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心。爲西楚霸王項籍所弑。沈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啻萬有餘里。世之先015_432d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曰。

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豐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鰌鯢曷自保兮。思網漏而營營。時六國之遺祚兮。沈淪播越僅嫓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以從民望兮。存態繹於015_433a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而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諸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懼。爲醢腊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溢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

015_433b濯纓贊其文曰。以寓忠憤。

子光逐句釋之曰。祖龍。秦始皇也。以比於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者。王。楚懷王孫心也。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以羊狠狼貪指世祖。以擅夷冠軍。指誅金宗瑞。其曰。胡不收云云。指魯山胡不收世祖也。其曰。爲醢腊云云。謂魯山不收世廟。友爲醢腊也。其曰。循紫陽云云。宗直以朱子自處。作賦以擬綱015_433c目之筆云。

 
속 두류록(續頭流錄)


김일손(金馹孫)
선비가 나서 박[匏]이나 외[爪]처럼 한 지방에 매어 있는 것은 운명이다. 이미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장래의 가질 것을 저축하지 못할진대, 제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두루 탐방(探訪)해야 할 것이나, 오직 사람의 일이란 어김이 많아서 노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나는 처음에 진주(晉州)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그 뜻인즉 편양(便養)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구루(句漏)의 원이 된 갈치천(葛稚川)의 마음은 또 단사(丹砂)에 있지 않을 수 없다.
두류산(頭流山)은 진주의 경내에 있다. 진주에 도착하여서는 날로 양극(兩屐)을 준비하였으니, 두류산의 연하와 원학(猿鶴)은 모두 나의 단사(丹砂)인 때문이다. 두 해 동안 고비(皐比)에 앉았으나 한갓 배만 불린다는 기롱을 받을 뿐이므로,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물러가서 자유롭게 노니는 몸이 되었지만 족적(足跡)이 일찍이 한 번도 두류산에 이르지 못했으니 어찌 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랴. 그러나 두류산만은 감히 가슴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매양 조태허(曹太虛) 선생과 더불어 한번 함께 구경하기로 약속했으나 태허는 벼슬살이에 얽매이고 나는 내왕이 막혔다. 몇 날이 안 가서 태허는 내간상(內艱喪)을 만나 천령(天嶺)으로 떠났다. 천령에 사는 진사(進士) 정백욱(鄭伯勗 여창(汝昌))은 나의 신교(神交)였는데, 금년 봄에 도주(道州)에서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되어 마침내 문전을 지나면서 두류산을 구경할 것을 약속했다. 얼마 안 되어 김상국(金相國) 은경(殷卿)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러 나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나가지 못하고 4월 11일 기해에 그 행차를 탐문하여 천령에 가서 뵙게 되었다. 그래서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를 짓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5일이 되었다고 하므로, 드디어 서로 만나보고 숙원이 어긋나지 않음을 기뻐했다. 김상국이 장차 나를 만집하며 자기를 따라 가자고 하므로, 나는 산행의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니 상국은 간청하다 못해 노자를 꾸려 주면서, “공무에 바쁘고 체력조차 약해서 따라가 구경을 못한다.” 하며, 못내 섭섭히 여겼고, 새로 도임한 천령 군수 이잠(李箴) 선생은 바로 내가 성균관(成均館)에서 경서를 문의하던 분이라, 나에게 후한 노자를 주었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淑)이 또한 따라 가겠다고 하여 세 사람의 행장을 마련하였다.
14일 임인에 드디어 천령 남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서쪽으로 20리가량을 가서 한 시냇물을 건너 한 주막집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제한(蹄閑)이다. 제한으로부터 서쪽으로 행하여 뫼뿌리와 언덕에 오르내려 10리쯤 가니 양쪽 산이 대치해 있고, 한 줄기 샘이 가운데서 쏟아져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갔다. 두어 마장을 가서 한 재마루에 오르니 종자(從者)의 말이, “마땅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한다.” 하므로 나는 절해야 할 이유를 물은즉 대답이, “천왕(天王)이라.” 하는데, 천왕이 무슨 물건인지 살피지 아니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지나쳐 갔다. 이날에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안개가 산에 가득하여 종자들이 모두 우장 삿갓을 차렸는데, 진흙이 미끄럽고 길이 소삽하여 서로 짝을 잃고 뒤에 처졌다. 신마(信馬)로 등귀사(登龜寺)에 당도하니 산의 형상이 소복하여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 있다하여 이름이 된 것이다. 옛 축대가 동떨어지게 높고, 축대 틈에 깊숙한 구멍이 있어 시냇물이 북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으로 쏟는데 소리가 골골한다. 그리고 그 위에 동찰(東刹) ㆍ 서찰(西刹)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동찰에 들고 종자를 골라서 돌려보냈다. 비가 밤을 새고 아침까지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절에 머물러 각기 낮잠을 자고 있는데, 중이 갑자기 말하기를, “비가 개어 두류산이 보인다.” 하기로 우리 세 사람은 몰래 일어나 잠든 눈을 부비고 보니 새파란 세 봉이 점잖게 창문에 당하여 흰 구름이 비끼고 푸른 머리구비가 비칠 따름이다. 이윽고 또 비가 내리므로 나는 농담조로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관심을 두는 모양인가. 산악의 형상을 숨기는 것을 시새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산신령이 오래도록 시객(詩客)을 가둬놓을 작정인지 뉘 알겠는가.”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개어 하얀 달이 빛을 발하니 창안(蒼顔 산을 말한 것)이 전부 드러나서 뭍 골짜기에는 선인(仙人) ㆍ 우객(羽客)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백욱은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나 밤기운이 이 지경에 이르면 도시 찌꺼기라곤 없기 마련이라.” 하였다. 나의 조그마한 몸이 자못 피리를 고를 줄 알기로 그를 시켜 불게 하니 또한 족히 공산의 소리를 전할 만하여 세 사람은 서로 대하고 밤이 으슥해서야 바야흐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백욱과 더불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등구암을 떠나 1마장쯤 내려가니 볼만한 폭포가 있다. 십 리쯤 가서 한 외로운 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 중허리를 타고 바른편으로 굴러서 북으로 향하니 바위 밑에 샘이 있기에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시고, 따라서 세수도 하고 나와 한걸음으로 금대암(金臺庵)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이 나와 물을 긷는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무심코 뜰 앞에 들어서니 몇 그루 모란꽃이 피었다. 그러나 하마 반쯤 시들었는데, 꽃빛은 심히 붉다. 그리고 백결(百結)의 납의(衲衣)를 입은 중 20여명이 바야흐로 가사(袈裟)를 메고 경을 외우며 주선하는 것이 매우 빠르므로 내가 물으니 정진도량(精進道場)이라고 한다. 백욱이 듣고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하여 섞임이 없고, 전진이 있고 후회는 없으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나아가서 부처의 공덕을 짓자는 것이다.”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있으면, 그 무리 중의 민첩한 자가 기다란 목판으로 쳐서 깨우쳐 조을지 못하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중노릇하기도 역시 고되겠다. 학자의 성인을 바라보는 공부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가 없겠는가.” 하였다. 암자 내에 육환(六環)의 석장(錫杖)이 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날이 정오가 되자 옛길을 경유하여 돌아와 석간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창일하여 호수와 같으므로 멀리서 상무주(上無住) 군자사(君子寺)를 가리키며 가보고 싶었으나 걸어갈 수가 없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심히 경사져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기로 지팡이를 앞에 세우고 미끌려서 내려가니 안마(鞍馬)가 이미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 타고 가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겨우 한걸음 사이쯤 떨어졌는데, 내가 탄 말은 유독 다리 하나를 절어서 방아를 찌는 것 같으므로 백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는 나귀의 풍경이란 시인은 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였다.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 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못을 경유하여 동으로 나가니, 길이 몹시 험악하여 아래로 천척(千尺)의 절벽에 다달아 몸이 으슥하며 떨어질 것 같으므로, 인마(人馬)가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와서 기슭을 앞에 두고 두류산 동록(東麓)을 바라보니 창등(蒼藤) 고목 사이에 선열(先涅) ㆍ 고열(古涅) 등의 절이 있는데, 그밖에도 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약수(弱水) 하나가 가로막아서 아무리 한걸음을 뛰어서 오르고자 해도 될 수 없었다. 길이 차츰 나직해지자 산도 차츰 평탄하고 물도 차츰 편안히 흐르며,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이 피었는데, 그 아래 수십 호의 민가가 있어 마을 이름은 탄촌(炭村)인데, 앞으로 큰 내를 임해 있다. 백욱은,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 하므로, “나는 문필봉(文筆峯)이 앞에 있어 더욱 좋다.” 하였다. 앞으로 5 ㆍ 6리를 가니 대숲 속에 옛 절이 있는데, 이름은 암천사(巖川寺)이며 토지가 평평하고 광활하여 집짓고 살만하며 절을 경유하여 동으로 1마장을 가니 천 길의 적벽(赤壁)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스듬한 길을 벽 사이로 파 놓고 다닌다. 여기서 1마장쯤 가서 한 작은 고개를 넘어 북으로 가면 정숙의 전장 아래로 나오게 된다. 정숙이 자꾸만 가자고 청하는데 해가 이미 저물었고, 또 비가 더 오면 물이 더욱 창일할까 염려하여 사양해 말하기를, “왕자유(王子猶)가 대안도(戴安道) 집의 문앞까지 가서도 만나보지 않고 돌아섰는데, 하물며 지금 정숙과 더불어 여러 날을 함께 노닐고 있으니, 다시금 집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였다. 정숙은 “발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 하므로 작별을 나누었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에 당도하니 양쪽 다리가 몹시 아려서 다시 한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이튿날에 천령에서 수행을 온 사람과 말을 다 돌려보냈다. 1마장쯤 가니 대천(大川)을 아울러 이남은 모두 엄천(嚴川)의 하류요, 서쪽으로 바라보니 푸른 산이 감싸여 쫑긋쫑긋한데, 모두 두류산의 곁 봉우리가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을 당도하여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써 붙인 정기(亭記)를 일람하고 북으로 맑은 강물을 내려다보니, 유유히 흘러가는 감회가 있어 잠깐 비스듬히 누웠다 깼다. 아, 어진 마을을 선택해서 사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요, 궂은 나무를 피해 깃드는 것은 밝은 행동이다. 고을 이름은 산음현이요, 정자 이름은 환아정이니, 이는 회계(會稽)의 산수를 사모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어찌하여 여기서 길이 동진(東晉)의 풍류(風流)를 계승할 수 있게 되랴. 산음현을 경유하여 남으로 단성(丹城)에 당도하니 지나는 곳마다 계산(溪山)이 청수하고 명려(明麗)하여 모두 두류산의 옛 줄거리이다.
신안역(新安驛) 십 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당도하여 사관을 정하고 나는 단구성(丹丘城)이라 부르며 선경으로 여겼다. 단성 원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히 보내왔다. 화단(花壇) 위에 오죽(烏竹) 백여 개가 있으므로, 지팡이 감이 될 만한 것으로 골라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어 가졌다. 단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준한 고을 지나니, 널찍한 벌이 나오고 맑은 물줄기가 그 벌의 서쪽으로 쏟아진다. 비탈을 타고 북으로 3 ㆍ 4마장을 가니 한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입구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암면(巖面)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획(字劃)이 추경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고운(崔孤雲)의 수적이라 전한다. 5리쯤 가니 대울타리 안에 새로 덮은 집들이 있고, 뽕나무는 우거졌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이는 것이 보인다. 시내 하나를 건너 한 마장쯤 나가니 감나무가 겹으로 둘러 있고, 온 산의 나무는 모두 밤나무뿐이요, 장경(藏經)의 판각(板閣)이 높다랗게 담장 안에 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 ㆍ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 이른다. 강 문경공(姜文景公)의 조부 통정공(通亭公)이 젊어서 여기에와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라, 그 자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한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묵은 덤불 속에 비가 있는데, 바로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憲貞)의 소작인, 중 신행(神行)의 명으로 당(唐) 나라 원화(元和)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추악하고, 그 높이도 대감사(大鑑師)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문자도 읽을 수가 없다. 북쪽 담장 안에 정사(精舍)가 있으니 주지승의 침실이다. 많은 산다수(山茶樹)가 정사를 둘러 있다. 정사의 동편에 허술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한다. 당의 아래 새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극히 높아서 그 밑에다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수 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주지가 거처하는 침실로 돌아와 전의 고사(故事)를 뒤져보니, 세 폭을 연결한 백저지(白楮紙)가 있는데, 정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자문지(諮文紙)와 같다. 그 한 폭에는 국왕(國王) 왕해(王楷)란 서명(署名)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요, 또 한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다. 이는 정조(正朝)에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이다. 또 한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써있는데, 한 군데 황통대덕(皇統大德)이라 하였다. 대덕은 몽고(蒙古)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상고하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皇統)은 금국(金國) 태종(太宗)의 연호다. 인종 ㆍ 의종 부자가 이미 오랑캐의 정삭을 썼고 또 선불(禪佛)에게 정성을 바친 것이 이와 같은데,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의 액을 면하지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한다 해도 사람의 국가에 유익됨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좀 먹다 남은 푸른 김에 쓴 글씨가 있는데, 글 자체가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여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도저히 날개에 붙을 수가 없으니 기묘하기도 하다. 또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가 있는데, 그 자획(字畫)은 푸른 비단에 쓴 글씨만 못하고 모두 단간(斷簡)이어서 그 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또 육부(六部)가 합서(合書) 한 통이 있어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데, 역시 그 절반이 없어졌다. 그러나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서 산에 오르기를 꺼리므로 드디어 하루를 묵는데, 중 해상인(該上人)이란 자가 있어 이야기를 할 만하였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晉州牧使) 경공태소(慶公太素)가 광대 두 사람을 보내어 각기 자기의 기술로써 산행(山行)을 즐겁게 하고, 또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어 필연(筆硯)을 받들게 하였다. 이튿날 여명(黎明)에 가랑비가 살살 내리어 사립(簑笠)을 갖추고 출발하는데, 광대는 피리 젓대를 불며 앞장 서고 중 해상인은 길잡이가 되었다. 동구를 벗어나 돌아보니 물을 안아주고, 산은 감싸주고, 집은 깊숙하고, 지세는 막히어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애석하게도 중들의 장소가 되고, 고사(高士)에게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서쪽으로 십 리를 가서 한 큰 내를 건너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가 살천을 경유하여 남으로 가다가 비스듬히 돌아 서쪽으로 약 20리를 가는데, 모두 두류산의 나머지 줄거리이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직하며 맑은 내와 하얀 돌이 모두 심신을 즐겁게 한다. 구부려져 동쪽으로 향하여 계곡 사이로 향하니 물은 맑고 돌은 날카로우며 또 구부러져 북으로 향하여 시내 하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또 동으로 구부러져서 한 판교(板橋)를 건너니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아무리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길은 점점 높아간다. 6 ㆍ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 섰는데,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다. 문을 들어서니 옛 갈석(碣石)이 있는데 그 액(額)에, “오대산 수륙정사 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 써 있기에 그것을 읽어보니 자못 좋은 글임을 알겠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 권 학사(權學士) 적(適)이 조송(趙宋)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다. 절에 누관(樓觀)이 있어 매우 장엄하고 간가(間架)도 퍽이나 많고 번당(幡幢)도 나열(羅列)해 있다. 고불(古佛)이 있는데, 중의 말이 “고려 인종(仁宗)이 만들어 보낸 것이요, 인종이 가졌던 철여의(鐵如意)도 보관해 있다.” 한다. 해도 저물고 비도 부슬부슬하여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사승(寺僧)이 망혜(芒鞋)를 선물로 주었다. 동구를 나와 북으로 가니 바른편에는 산이 있고, 왼편에는 벌이 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만하다. 또 십 리를 가니 거주민이 나무를 휘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고, 쇠를 달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을 안다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니, 따라온 중의 말이, “이러한 외진 땅에 살면 이정(里正 지금의 구장과 같은 것)의 박해가 없으니, 백성이 과중한 부역(賦役)에 고통을 받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한다. 5리를 나가서 묵계사(黙契寺)에 당도하니 이 절이 두류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데, 친히 와 보니 자못 전에 듣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다만 절집들이 밝고 아름다워 금으로 써 꾸민 것도 있고 청홍색 비단을 섞어서 부처의 가사도 만들었으며, 거주하는 중 20여 명은 입을 다물고 정진하기를 금대암(金臺菴) 중들처럼 할 따름이다. 잠깐 쉬었다가 말 대신 지팡이를 들고 고죽(苦竹)의 도숲을 헤쳐 나가는데, 희미하여 길을 잃고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당도하니 중은 3 ㆍ 4명밖에 없고, 절 앞에 밤나무는 모두 부근(斧斤)의 해를 입어 넘어져 있었다. 궁금하여 중더러,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니 중의 말이, “밭을 만들고자 하는 백성이 있어서 아무리 금해도 하는 수가 없다.” 하였다. 나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태산(泰山)장곡(長谷)에도 역시 농토를 개간하니 우리 국가에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땅히 부유하면 가르쳐 나갈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잠깐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피리 젓대를 불어 답답증을 풀게 하니 떨어진 납의(衲衣)를 입은 중 한 사람이 뜰에서 춤을 추는데, 우쭐우쭐하는 그 기상이 가관이었다. 드디어 함께 앞 고개에 오르니, 나무가 길에 비끼어 있으므로 그 위에 앉아서 앞뒤로 큰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저물어가는 햇볕은 창창한데, 피리 소리가 젓대 소리에 어울려 유량하고 청아하여 산이 울리고, 골짜기가 응하니 정신이 상쾌함을 깨닫겠다. 흥이 다하여 이에 내려가 시냇가 반석에 앉아서 발을 씻었다. 이날도 오히려 음침하여 드디어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유숙하는데, 밤중에 꿈이 깨서 일어나니 별과 달은 맑고도 조촐하고 두견새가 어지러이 울어대는데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아니한다. 나의 서형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명일에는 천왕봉을 올라 실컷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니 일찌감치 행장을 단속하자.” 하였다.
밝은 아침에 행전에 끈을 달아 다리를 단단히 싸매고 숲 속으로 향하는데, 길이 몹시 경삽할 뿐더러 말라 죽은 푸나무들이 쌓여 다리가 빠지고 그 아래는 모두 고죽(苦竹)이 있어 죽순이 땅을 뚫고 나오는데 마구 밟고 지나며, 큰 뱀이 길에 있고, 저절로 넘어진 나무가 서로 앞에 뒤섞였는데, 모두 경남(梗楠) 예장(豫章)의 재목이다. 혹은 몸을 구부리고 아래로 나가며 혹은 기어서 그 뒤를 향하기도 하며, 따라서 그 장석(匠石)을 만나지 못하여 동량(棟樑)으로 쓰이지 못하고, 공산에서 말라 죽은 것을 생각할 때 조물을 위하여 가석한 일이다. 그러나 역시 제 나이대로 다 마친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건장한 걸음으로 먼저 가서 한 시냇가 돌에서 기다리는데, 백욱은 힘이 빠져서 허리에 줄 하나를 매고 중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서서 당기며 가게 하였다. 나는 백욱을 영접하여 말하기를, “중이 어디서 죄인을 구속해 오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산신령이 포객(逋客)을 나포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대개 백욱이 진작 이 산에 노닌 때문으로 농담으로 대답한 것이다. 여기 와서는 몹시 갈증이 심하여 종자(從者)들은 모두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쌀가루를 타서 마셨다. 다시 다른 길이 없고 다만 천 길의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모여 시내 하나를 이루어 산위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은하수가 거꾸로 쏟는 듯하며, 간수(澗水) 가운데 큰 돌이 첩첩이 포개져 다리가 되고, 이끼 흔적이 미끄럽고 윤택하여 밟으면 넘어지기 쉽다. 오고가는 초동(樵童)들이 작은 돌멩이를 그 위에 쌓아올려서 길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섯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고, 열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여, 있는 힘을 다 썼다. 시내가 그치자 점점 북으로 향해서 다시 대 숲 속을 헤쳐 가니 산이 모두 돌이다.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올라가 숨가쁘게 십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를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으므로, 그 별경계를 기뻐하여 꽃 하나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말하여 모두 꽂고 가게 하였다. 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이름은 세존암(世尊巖)이다. 바위가 극히 우람하나 사다리가 있어 오를 수 있기로 올라서 천왕봉을 바라보니 수십 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뻐서 일행에게 일러주고 힘을 써서 다시 한 걸음 더 나가자고 한다. 여기서 길이 점점 나직하여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밖에 없고, 나무 잎이 널찍널찍하여 비로소 자라나고 산꽃은 곱게곱게 바야흐로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라, 잠깐 쉬고 곧 올라가서 돌이 있는데 배 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그 돌을 경유하여 나가는데, 길이 돌고 구부러지고 오목하고 울툭불툭하며 석각(石角)을 붙들고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겨우 봉 꼭대기에 당도하자 곧 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을 구별할 수 없었다. 향적승(香積僧 식사를 맡은 중)이 냄비를 가지고 와서 한군데 평평한 땅을 찾으니,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샘물을 이루었기로 감히 다시 올라가서 곧 쌀을 씻어 밥을 짓게 하였다. 온 산에 다시 다른 재목은 없고, 있는 나무는 삼회(杉檜)와 비슷한데, 중의 말이 비자목이라고 하며, 이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밥맛이 없어진다고 한다. 시험해 보니 과연 그렇다. 옛사람이 밥을 지어 먹을 나무에 애를 썼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과 밤과 잣들이 많아서 가을바람이 불면 열매가 떨어져 계곡에 가득 찬다. 그래서 중들이 주어다 요기를 한다.” 하는데, 이는 허언이다. 다른 초목도 오히려 나서 크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일에 있어서이랴. 매년 관가에서 잣을 독촉하니 거주민이 노상 되려 다른 고을에서 나는 것을 사들여서 공세(貢稅)에 충당한다고 한다. 모든 일에 있어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지 않은 점이 이런 유이다. 저물 적에 봉의 절정에 오르니, 정상에 진루가 있어 겨우 한 칸의 판옥(板屋)을 용납하고 판옥 안에는 여지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고,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 ㆍ 계온(季溫)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曹偉) 태허(太虛)가 성화(成化) 임진 중추일(中秋日)에 함께 오르다.”라는 몇 글자가 씌여 있다. 그리고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내리 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드디어 사우(祠宇)에서 자게 되어 두터운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고 몸을 따뜻이 하는 한편 종자들은 사당 앞에서 불을 피우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에 천지가 청명하고 큰 들은 광막하고 흰 구름은 산골에서 자는데, 마치 한바다에서 밀물이 올라온 것 같고, 여러 군데 포구에서는 하얀 물결이 눈을 뿜으며, 노출된 산은 도서(島嶼)와 같이 점을 찍어놓은 듯하다. 진루에 기대어 내리보고 쳐다보니 심신이 으슥하며, 몸은 홍몽(鴻濛) 원시(元始)의 위에 있고, 가슴속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유동하는 것 같았다.
신해(辛亥)일 여명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나는 것을 보니, 청명한 공중이 마경(磨鏡)과 같다. 서성대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 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뭇 산은 모두 의봉(蟻封)과 구질(蚯垤) 같아서 묘사하기로 들면, 한퇴지(韓退之)의 남산시(南山詩)를 이해할 수 있고, 마음과 눈은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동산(東山)에 오른 때와 부합된다 하겠다. 온갖 회포를 일으키고, 진세(塵世)를 내려다보니 무한한 감개가 뒤따른다. 이 산의 동 ㆍ 남쪽은 옛날 신라의 구역이요, 서 ㆍ 북쪽은 백제의 땅이라. 하루살이 모기떼가 소란을 피우며, 항아리 속에서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격인데, 처음부터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여기에 뼈가 묻혔겠는가. 우리들이 오늘에 아무런 탈이 없어 여기 올라 구경하는 것은 역시 위에서 내려주신 은덕이 아니겠느냐. 망망하고 아득한 태평의 연화(煙火) 속에서도 또한 비환(悲歡)과 우락(憂樂)이 만 가지로 틀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백욱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그대와 함께 악전(偓佺 고대의 신선)의 무리와 짝이 되어 나는데, 홍곡(鴻鵠)을 능가하며, 몸이 팔굉(八紘)의 밖에 노닐고, 눈으로 일원(一元)의 수를 궁리하여 기(氣)가 다하는 때를 볼 수 있겠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인하여 종놈들을 시켜 두 그릇에 제물을 갖추게 하여, 사당에 보고를 드리기로 하고 제문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날 선왕(先王)이 상하의 구분을 제정하여 오악(五岳) ㆍ 사독(四瀆)에 있어서는 오직 천자(天子)만이 제사할 수 있고, 제후(諸侯)들은 다만 자기 봉지(封地) 안에 있는 산천만을 제사하며, 공경대부들은 각각 처지에 해당한 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명산대천으로부터 사묘(祠廟)까지도 무릇 문인(文人) 행객(行客)으로 그 아래를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전제(奠祭)를 드리며 고유(告由)하는 일도 있다. 생각하건대 두류산은 멀리 해국(海國)에 있어 수백여 리를 뻗치어 호남 ㆍ 영남 두 경계의 진산(鎭山)이 되고, 그 아래 수십 고을을 옹위해 있으니,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 운우(雲雨)를 일으키고, 정기가 저축되어 영원토록 백성에게 복리를 끼쳐 주어 마지않을 것이다. 나는 진사(進士) 정여창(鄭汝昌)과 더불어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미워하여, 평생에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아니하고, 지나다가 음사(淫祀)를 발견하면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금년 여름에 마음먹고 산 구경을 나가서 이 산 기슭에 당도하자, 안개와 비가 아득히 내리므로 혹시 이 산의 특이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어제 비구름이 해소되고 해와 달이 광명하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묵묵히 빌면 형산(衡山)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韓愈)씨에게만 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거주민에게 물으니, 신(神)을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삼는데 이는 거짓말이고, 점필(佔畢) 김공은 우리 나라의 박문다식(博聞多識)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고증하여, 신(神)을 고려 태조의 비(妃) 위숙왕후(威肅王后)로 삼았으니 이것이 신필(信筆)이다. 이는 열조(烈祖 태조(太祖))가 삼한을 통일하여, 동인(東人)으로 하여금 분쟁의 고통을 면하게 하였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길이 백성에게 제향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노모(老母)가 당(堂)에 계신데 서산(西山)의 햇빛이 차츰 다가오니, 애일(愛日)의 정성이 일찍이 한발자국을 옮기는 순간에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주문(周文)이 구령(九齡)이 되매 곽종이 나이를 빈 경험이 있으니, 감히 산행(山行)을 위하여 고하고 감히 노모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 백반 한 그릇과 명수(明水) 한 잔일망정 조촐하고도 정성이 들었음을 귀히 여긴 것이다. 상향(尙饗).”이라 하였다. 문이 이뤄지자 술잔을 드리려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방금 마야부인이라 하고 있는데, 그대가 위숙왕후라고 밝혔지만 세상의 의심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니,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위숙왕후냐, 마야부인이냐를 차치하고라도, 산신령에게 잔을 드릴 수 있지 않느냐.” 하니, 백욱은,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보다 못하단 말이냐.”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국가가 향화(香火)를 행례할 적에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매양 성모(聖母)에게나 또는 가섭(迦葉)에게 하는데 그대로서 어찌하랴 한다. 나는 그렇다면 두류산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다. 산신령은 버리고 음사(淫祀)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이야말로 질종(秩宗 예를 맡은 벼슬)의 과실이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니 눈 밑에 펀펀히 깔렸을 따름이다. 펀펀히 깔린 그 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졌을 것이다. 오후가 되니 안갯기가 사방으로 합하기로, 드디어 내려와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향적사(香積寺)에 도착하니 절의 중이 서로 치하하며 하는 말이, “늙은 것이 이 절에 머무른 적이 오래이다. 금년 들어 하고 많은 승속(僧俗)이 상봉을 구경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풍우(風雨) ㆍ 운음(雲陰)이 산을 가리우게 되어, 한 사람도 두류산의 전경을 얻어 본 자가 없었는데, 어제 저녁 나절에 음우(陰雨)의 증세가 있더니, 선비님네가 올라가자 바로 깨끗이 갰으니,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하므로, 나 역시 수긍하였다. 절 앞에 높은 바위가 동떨어져 있는데 이름은 금강대(金剛臺)이다. 이 바위에 올라보면 눈앞에 기묘한 봉이 수 없이 나열했는데, 흰 구름이 항상 둘려 있다. 법계(法界 절[寺])로부터 상봉에 가고 또 향적사에까지 가는 데는, 모두 층층의 비탈을 돌고 돌았었는데, 비탈의 전면은 전부 돌이 깔리고 산도 모두 첩첩의 돌뿐이라, 낙엽이 돌 구멍을 메워 초목의 뿌리가 거기에 의탁하여 살기 때문에, 가지가 짧게 꺾이니 모두 동남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구부러지고 앙상하여 가지와 잎사귀가 제대로 발육되지 못했는데 상봉은 더욱 심하다. 두견화가 비로소 한두 송이밖에 피지 아니하고 벌어지지 않은 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정히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중이 이르기를, “산상의 꽃과 잎이 5월에 한창 성하다가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백욱에게 묻기를, “봉이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마땅히 먼저 태양을 받을 텐데, 도리어 뒤지는 것은 어쩐 까닭인가.”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대지(大地)가 하늘과는 8만 리의 거리인데, 우리가 두어 날을 걸어서 상봉에 당도하였으니, 봉의 높이는 땅과 거리가 백 리도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과의 거리는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태양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특히 외롭고 놀라서 먼저 바람을 받는 것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대범 물(物)의 생리가 높은 데를 꺼리는 것인가. 그러나 높은 데는 충우가 모여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지만 나직한 데는 역시 부근(斧斤) 액을 만나는 법이니, 장차 어디를 택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향적사 곁에 큰 나무 수백 주가 쌓여 있기로 중더러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늙은 것이 호남의 여러 고을을 다니며 구걸하여 배로 섬진강까지 하나하나 실어 와서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것이 하마 6년이 되었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의 학궁(學宮)에 있어서는 그만 못하다. 석가의 교가 서역(西域)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어리석은 남녀들은 신봉하기를 문선왕(文宣王 공자)보다 더하니 백성의 사교(邪敎)에 탐혹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신봉하는 진실성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하였다. 이 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기로, 나는 중에게 말하기를, “천지의 사이에 물이 많고 흙이 적은데, 우리 나라는 산이 맨땅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나날이 불어나서 용납할 곳이 없다. 너는 자비(慈悲)를 좋다하니 중생(衆生)을 위하여 두류산 종래의 근백을 찾아서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흙을 모조리 파내어 남해 바다를 메우고, 만 리의 평야를 만들어 백성의 살 땅을 마련하며, 복전(福田)을 만든다면 도리어 정위(精衛 옛날에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운 새 이름)보다 낫지 않겠느냐.” 하니, 중은, “감히 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높은 언덕도 골짝이 되고, 한 바다도 상전(桑田)이 되는 것이니, 운산(雲山)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을 수련(修煉)해서 너의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그의 장생(長生)의 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짝이 되고, 남해 바다가 상전이 되도록 함께 수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중은, “인연을 맺기 원이라.” 하여 드디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다.
14일 임자에 영신사(靈神寺)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의 앞에는 창불대(唱佛臺)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座高臺)가 있어 천 길이 솟아 올라가면 먼데를 바라 볼 수 있고,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어 쪼개 놓은 흠대 안으로 쏟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중의 말이 매[鷹]가 마시는 물이라고 한다. 북쪽에는 가섭(迦葉)의 적상이 있고, 당(堂)에는 가섭의 화상이 있는데, 비해당(匪懈堂)이 그리고, 짓고, 쓰고, 한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녹았기로 이러한 기보(奇寶)가 공산 속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 너무도 애석해서 빼앗아 가지려고 했는데, 백욱의 말이, “한 사람의 집에 사장(私藏)하는 것이 어찌 명산에 공장(公藏)하여 구안자(具眼者)의 감상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빼앗지 아니하였다. 백성들이 재물을 시주하며 가섭에게 복을 비는 것이 천왕(天王)과 더불어 대등하다. 밤에 법당에서 자는데 침침한 안개와 거센 바람이 창문을 들이친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들면 몹시 해로우니 도저히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5일 계축에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능선 북쪽은 함양(咸陽) 땅이요, 능선 남쪽은 진주(晉州) 땅이다. 한 가닥 나무꾼의 길이 함양과 진주를 가운데로 나눠 놓은 셈이다. 방황하여 오래도록 조망하다가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토산(土山)이요, 길이 있어 찾아갈 만하다. 매를 잡는 자가 많아서 길이 이뤄져 상원사(上元寺)나 법계사(法界寺)의 길처럼 심하지는 않다. 산마루로부터 급히 내려가서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당도하면 절이 평지에 있고, 절벽에는 김언신(金彦辛) ㆍ 김미(金楣)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거주승(居住僧) 30여 명이 역시 정진(精進)하고 있으며, 대밭과 감나무 밭이 있으며, 채소를 심어서 밥을 먹으니 비로소 인간의 세상임을 깨닫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청산을 바라볼 때, 벌써 연하(煙霞)를 이별하고 원학(猿鶴)에게 사과하는 회포를 달게 된다.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 잠깐 쉬고 드디어 떠나는데 높은 데를 오르기 싫어서 이에 시냇물 따라 흰 돌을 밟고 내려가니, 동부(洞府)가 맑고 깊숙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혹은 지팡이 꽂아 놓고 노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신흥사(新興寺)에 당도하니 절 앞에 맑은 못과 반석이 있어 오래 소일만 하고 절집은 시내에 다다라 있어 여러 절에 비해 가장 좋으니, 구경꾼이 족히 돌아갈 줄을 모를 만하다. 어둘 녘에 절 안에 들어서니 여기는 작법(作法)하는 도량으로 종고(鐘鼓) 소리가 시끄럽고, 인물이 번잡하다하여 적이 실망을 했다. 이날에 험악한 산길을 약 10리 가량 걸었는데, 중들은 모두 잘 걷는 걸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우동(郵童) ㆍ 주졸(走卒)이 걸어서 닫는 말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자심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는데, 요즈음 산행(山行)을 해보니 처음에는 걸음이 무거운 것 같았는데, 날이 갈수록 두 다리가 점점 가볍게 놀려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에 매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매일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었는데 26일에야 비로소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운중흥(雲中興) ㆍ 요장로(了長老) 두 중이 서로 전송하여 동구에 나와 한 외나무다리에 당도하자 요장로가 말하기를, “근세에 퇴은(退隱)이란 스님이 있어 신흥사에서 거주하는데, 하루는 그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올 것이니 마땅히 깨끗이 소재하고 기다리라.” 하였는데, 이윽고 어떤 사람이 흰 망아지를 타고 등덩굴로 꼬리를 만들어 쥐고 빨리 행하여 외나무다리를 밟기를 평지와 같이 하니, 뭍사람이라 놀랬다. 그가 절에 당도하자 영접하여 실내로 들어가 밤새도록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들어서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떠나가는데 강(姜)씨의 집 창두(蒼頭)가 절에서 올을 배우다가 그를 보고 이인(異人)인가 의심하여 고삐를 잡고 따라 붙으니 그 사람이 채찍으로써 뿌리치고 가다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떨어뜨렸다. 창두(蒼頭)는 급히 가져가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잘못하다 속세의 노예에게 보이게 되었으니 보배롭게 간직하고, 행여 세상에 보이지는 말라 하고 급히 행하여 다시 외나무다리를 경유해 갔다. 강창두(姜蒼頭)란 자는 지금 백두(白頭)로 아직도 진주 지경에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자가 그 책을 구경하자고 청했으나 주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 사람은 최고운(崔孤雲)인데, 죽지 아니하고 청학동(靑鶴洞)에 있다.” 한다. 그 말이 비록 황당하나 역시 기록할 만하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시험 삼아 그 다리를 건너는데, 겨우 두어 걸음 내딛자 정신이 황홀하여 떨어질 것만 같으므로, 도로 나와 시내의 하류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건넜다. 걸어서 골짝을 벗어나니 산에는 운당(篔簹 전 죽(箭竹))이 많고, 물은 동구 아래로 비껴 흐르는데, 점점 촌락이 보인다. 서산의 기슭에 옛 성루가 있는데 옛날의 화개현(花開縣)이라고 한다. 5리를 가니 시냇물이 어지러이 흐르고, 돌은 쫑긋쫑긋하다. 동으로 1마장쯤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고, 두 돌이 대립하여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글자와 맞추어 보면 더욱 커서 말만큼씩 하나, 글자체가 서로 비교되지 아니하여 아동들의 습자(習字)와 같다. 석문을 경유하여 1마장을 가니 귀룡(龜龍)의 옛 비가 있는데, 그 액(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란 아홉 자가 있고, 방서(傍書)에는, 전 서국도순관승무랑시어 사내 공봉사 자금어대신 최치원 봉교찬(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이라 했다.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인데, 광계는 당(唐) 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다. 햇수는 지금으로 6백여 년 전이니 역시 고물이다. 인물의 존망(存亡)과 대운(大運)의 흥폐가 언제까지라도 서로 잇따른 법인데, 유독 완연한 이 돌만이 홀로 서서 썩지 아니하니 한번 탄식을 일으킬 만하다. 구경한 비갈(碑碣)이 많다.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는 원화(元和) 연간에 세웠으니, 광계(光啓)보다 앞섰고, 오대산(五臺山) 수정사(水精寺) 기(記)를 새긴 갈(碣)은 거의가 권적(權適)의 소작이니 역시 한 세상의 문사(文士)다. 그런데 유독 이 비에 대하여 자꾸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은, 고운의 수택(手澤)이 아직도 남아 있을 뿐더러, 고운이 산수 사이에 소요하던 그 금회가 백 대의 뒤에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내가 고운의 세상에 났다면, 마땅히 그 지팡이와 신발을 받들고 시종하여 고운으로 하여금 외롭게 되어 부처를 배우는 무리와 더불어 짝이 되게 하지 않을 것이요, 고운으로 하여금 오늘날을 당했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를 빛나는 문장으로써 태평의 정치를 꾸며내게 하고, 나도 또한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시봉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석면(石面)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감개(憾慨)를 금하지 못했으나, 그 글을 읽어보니 병려(騈儷)로 되었을 뿐더러 선불(禪佛)을 위하여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니 어쩐 일인가. 아마도 만당(晩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누습(陋習)을 변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초연히 쇠한 세상을 방관하여 때와 더불어 오르내리며 선불에 의탁하여 스스로 숨이 지내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의 북쪽에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이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어 뿌리가 시냇물을 걸앉았는데, 역시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중이 정원에서 불을 놓다가 잘못되어 회화나무에 불이 붙어 용호(龍虎)가 거꾸러진 나머지, 그루터기의 썩어 있는 것이 길이 넘고, 중들은 아직도 뿌리 위를 밟고 왕래하며, 이름을 금교(金橋)라 부른다. 아, 식물(植物)이란 역시 생기(生氣)를 지닌 것이라. 돌처럼 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절 북쪽에 고운이 올라 노닐던 팔영루(八詠樓)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중 의공(義空)이 재목을 모아 누를 다시 세우기로 한다고 한다. 의공과 더불어 잠깐 앉아 쉬는 사이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기로 물으니, 관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많아서 그물을 칠 수 없고, 천초(川椒) 껍질이나 잎으로 고기를 잡아야 되겠다하며, 절중에서 독촉하여 얻어오라는 것이다. 중의 말이, “살생(殺生)하는 물건을 가져오라니 어쩌자는 것인가.” 했고, 나 역시 한참동안 빈축하였다. 오대산(五臺山)의 백성이 이미 이장[里正]의 포학을 면하지 못했는데, 쌍계사 중이 또한 장차 고기를 잡는 물건을 제공하게 되었으니, 산중도 역시 불안한 곳이다.
이튿날 을묘일에 비로 인하여 출발을 중지하였다. 28일 병진에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석등(石磴)을 더위잡고 위잔(危棧)을 곁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하나의 동부(洞府)가 나오는데 자못 너그럽고 평평하여 경작(耕作)을 할만하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걸어 나가 동떨어진 골짝을 내려다보며 잔도(棧道)를 지나니 암자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불일암(佛日庵)이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을 내려다보면 땅이 없고, 사방의 산이 기묘하게 솟아서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서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암자 중이 말하기를,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는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 내려와 못물 마시고 바로 간다.” 한다. 여기 사는 중들이 자꾸 보는데,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잡아다가 거문고와 함께 짝을 만들 수 있으랴. 암자 동편에 비천(飛泉)이 있어 눈을 뿌리며, 천 길을 내리 떨어져 학연(鶴淵)으로 들어가는데 이거야 말로 경치 좋은 곳이다. 등구(登龜)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후 16일이 걸렸는데, 곳마다 천암(千巖)이 다투어 뻗쳐나고 만 골짝의 물이 어울려 흘러 기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하나였다. 또 학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수가 찾던 곳이 거기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골짝이 워낙 높고 동떨어져서 원숭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으니, 처자(妻子)와 우독(牛犢)이 용납할 곳이 없다. 엄천(嚴川)이나 단속(斷俗)은 모두 불자(佛者) 장소가 되어버리고 청학동마저 끝내 찾지 못하니 어찌 하랴. 백욱이 말하기를, “솔과 대가 둘 다 아름답지만 차군(此君 대의 이칭)만 같지 못하고, 바람과 달이 둘 다 맑지만 중천(中天)에 온 달 그림자를 대하는 기경(奇景)만 같지 못하고, 산과 물이 모두 인자(仁者) ㆍ 지자(智者)의 즐기는 것이지만, 공자께서 칭찬하신 「물이여 물이여.」만 같지 못하니, 명일에는 장차 그대와 더불어 악양성(岳陽城)을 나가서 대호(大湖)의 물결을 구경하도록 하자.” 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자.” 하였다.


[주D-001]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 녹명편(鹿鳴篇)〉를 말한 것인데, 아름다운 손님을 잔치하는 시다.
[주D-002]이조부(二鳥賦) :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젊었을 적에 서울에 갔다 실의(失意)에 차서 국문(國門)을 나와 동으로 가는 길에서 어떤 사자(使者)가 귀한 새 백오(白烏) ․ 백구욕(白鸜鵒) 두 마리를 가지고 천자에게 진상 가는 것을 보고 느껴서 이조(二鳥)를 두고 부(賦)를 지었음. 대의(大意)를 들면 무지한 새는 오직 깃과 터럭이 이상하다 해서, 천자의 빛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새만 못하다는 뜻임.
[주D-003]단구성(丹丘城) : 옛날 신선이 살던 곳으로 단대(丹臺)라고 칭함. 이백(李白)시집(詩集)에 서악(西岳) 운대(雲臺)에서 단구자(丹丘子)를 보내는 노래와 원단구(元丹丘)를 보내는 노래가 있음.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암집- 김명호 역

 연암집 제 1 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열녀 함양 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병서(幷序)


제(齊) 나라 사람의 말에, “열녀는 지아비를 둘로 바꾸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를테면 《시경》 용풍(鄘風) 백주(柏舟)의 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정직(正職)에는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과 무지한 평민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랴.
마침내 우리 왕조 400년 동안 백성들이 오랫동안 앞장서 이끄신 임금님들의 교화에 이미 젖어, 여자는 귀하든 천하든 간에, 또 그 일족이 미천하거나 현달했거나 간에 과부로 수절하지 않음이 없어 드디어 이로써 풍속을 이루었으니, 옛날에 칭송했던 열녀는 오늘날 도처에 있는 과부들인 것이다.
심지어 촌구석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와 같은 경우는 친정 부모가 과부의 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개가하라며 핍박하는 일도 있지 않고 자손이 정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니건만, 한갓 과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개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하여, 왕왕 낮 촛불을 스스로 꺼 버리고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빌며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낙토를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예전에 이름난 벼슬아치 형제가 있었다. 장차 남의 청환(淸宦)의 길을 막으려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이를 의논하자, 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이를 막으려 하느냐?”

하고 물었다. 아들들이 대답하기를,

“그 윗대에 과부된 이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바깥의 논의가 자못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그 일은 규방의 일인데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하자, 아들들이 대답하기를,

“풍문(風聞)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어머니는 말하였다.

“바람이란 소리는 있으되 형체가 없다. 눈으로 보자 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손으로 잡아 봐도 잡히는 것이 없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서 능히 만물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무형(無形)의 일을 가지고 들뜬 가운데서 사람을 논하려 하느냐? 더구나 너희는 과부의 자식이다. 과부의 자식이 오히려 과부를 논할 수 있단 말이냐? 앉거라.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게 있다.”

하고는 품고 있던 엽전 한 닢을 꺼내며 말하였다.

“이것에 테두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드리우며 말하였다.

“이것은 너희 어미가 죽음을 참아 낸 부적이다. 10년을 손으로 만졌더니 다 닳아 없어진 것이다. 무릇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에 모이며, 그리운 생각은 고독한 데서 생겨나고, 슬픔은 그리운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다. 과부란 고독한 처지에 놓여 슬픔이 지극한 사람이다. 혈기가 때로 왕성해지면 어찌 혹 과부라고 해서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만약에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며, 낙엽 하나가 뜰에 지고 외기러기 하늘을 울고 가며, 멀리서 닭 울음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그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 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앉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10년 사이에 해마다 그 횟수가 점차 줄어서 10년이 지난 이후에는 때로는 닷새 밤에 한 번 굴리고, 때로는 열흘 밤에 한 번 굴렸는데, 혈기가 쇠해진 뒤로는 더 이상 이 엽전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것을 열 겹이나 싸서 20여 년 동안이나 간직해 온 것은 엽전의 공로를 잊지 않으며 때로는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마치고서 모자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야말로 열녀라고 이를 만하다.”

고 했다.
아! 그 모진 절개와 맑은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이름이 묻혀 후세에도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부가 의를 지켜 개가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온 나라의 상법(常法)이 되었으므로, 한번 죽지 않으면 과부의 집안에서 남다른 절개를 보일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정사를 보던 이듬해 계축년(1793, 정조 17) 의 어느 달 어느 날이다. 밤이 새려 할 무렵 내가 잠이 살짝 깼을 때, 마루 앞에서 몇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다가 또 탄식하고 슬퍼하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급히 알릴 일이 있는 모양인데, 내 잠을 깨울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를 높여,

“닭이 울었느냐?”

하고 묻자 좌우에서,

“이미 서너 머리 울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느냐?”

“통인(通引) 박상효(朴相孝)의 조카딸로서 함양(咸陽)으로 출가하여 일찍 홀로 된 이가 그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약을 먹어 숨이 끊어지려 하니, 와서 구환해 달라고 급히 연락이 왔사옵니다. 그런데 상효가 마침 숙직 당번이라 황공하여 감히 사사로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가 보라고 명하고, 늦을녘에 미쳐서

“함양의 과부가 소생했느냐?”

고 물었더니, 좌우에서

“이미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탄식하며

“열녀로다, 그 사람이여!”

라고 하고 나서 뭇 아전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본시 안의(安義) 출신이라니 그 여자의 나이가 방금 몇 살이나 되고, 함양의 뉘 집에 시집갔으며, 어려서부터 심지와 행실은 어떠했는지 너희들 중에 아는 자가 있느냐?”

그러자 뭇 아전들이 한숨지으며 아뢰었다.

“박녀(朴女)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입니다. 그 아비 이름은 상일(相一)이온대, 일찍 죽었고 이 외동딸만을 두었습니다. 어미 역시 일찍 죽어서 어려서부터 그 조부모에게서 자랐사온대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자 출가하여 함양 임술증(林述曾)의 처가 되었는데, 그 시댁 역시 대대로 고을 아전입니다. 술증이 본디 약하여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년이 채 못 되어 죽었습니다. 박녀는 지아비상을 치르면서 예(禮)를 극진히 하였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도 며느리된 도리를 다해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이 그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이러한 일이 있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어느 늙은 아전이 감개하여 말하였다.

“박녀가 아직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술증의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부부 관계를 맺을 가망이 만무하다 하니 어찌 혼인 약속을 물리지 않느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조부모가 넌지시 박녀에게 일러 주었으나 박녀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혼인 날짜가 박두하여 여자의 집에서 사람을 시켜 술증의 상태를 엿보게 하였더니, 술증이 비록 용모는 아름다우나 노점(勞漸 폐결핵)에 걸려 콜록콜록거리며 버섯이 서 있는 듯하고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므로, 집안에서는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다른 중매쟁이를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녀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전날 재봉한 옷들은 누구의 몸에 맞게 한 것이며, 누구의 옷이라 불렀던 것입니까? 저는 처음 지은 옷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하기에 집안에서는 그 뜻을 알고 마침내 기일을 정한 대로 사위를 맞이했으니, 비록 명색은 혼례식을 치렀다 하나 사실은 끝내 빈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얼마 후 함양 군수인 윤광석(尹光碩) 사또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고 느낀 바가 있어 열부전(烈婦傳)을 지었고, 산청 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사또도 박녀를 위해 전(傳)을 지었으며, 거창(居昌)의 신돈항(愼敦恒)은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고자 하는 선비였는데, 박녀를 위하여 그 절의의 전말을 엮었다.
생각하면 박녀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길이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아! 슬프구나. 성복(成服)을 하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 지내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요, 장사를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이 있었기 때문이요, 소상을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大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상이 끝이 났으니 상기(喪期)가 다한 것이요, 한날 한시에 따라 죽어 마침내 처음 뜻을 완수했으니 어찌 열녀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하였으니 : 제 나라의 현자 왕촉(王蠋)이 제 나라를 침략한 연(燕) 나라가 자신을 장수로 기용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여자는 지아비를 둘로 바꾸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2]백주(柏舟) :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고 그의 아내인 공강(共姜)이 절개를 지키려 하였는데, 그녀의 부모가 이를 막고 재가를 시키려 하자 공강이 자신의 의지를 노래한 시라고 한다.
[주D-003]《경국대전(經國大典)》에 …… 하였으니 : 정직(正職)은 문무반(文武班)의 정식 벼슬을 가리킨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에 “실행(失行)한 부녀와 재가(再嫁)한 부녀의 소생은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규정은 정조(正祖) 9년(1785) 《경국대전》과 《속대전(續大典)》 등을 통합하여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주D-004]오랫동안 …… 교화 : 원문은 ‘久道之化’인데, ‘久道’는 ‘久導’와 같다.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 등에는 바로 위의 ‘우리 왕조〔國朝〕’ 앞에 공백을 둠과 동시에 이 구절에서도 ‘久道之 化’라 하여 중간에 공백을 두어 경의를 표했다.
[주D-005]낮 촛불을 스스로 꺼 버리고 : 당시 풍속에 과부는 외간 남자와 접촉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하는 방에 대낮에도 촛불을 켜 두었다. 죽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이상 그러한 구차스러운 조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주D-006]청환(淸宦) : 봉록은 많치 않으나 명예롭게 여겨졌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의 하위 관직을 가리킨다. 학식과 문벌을 갖춘 인물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주D-007]제 그림자 위로하며 : 원문은 ‘弔影’인데, ‘형영상조(形影相弔)’라 하여 아무도 없고 자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의지할 데 없는 외톨이 신세를 표현한 말이다.
[주D-008]제(齊) 나라 ……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열녀 함양박씨전의 서문에 해당된다.
[주D-009]통인(通引) :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아전을 말한다.
[주D-010]빈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 부부 관계가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D-011]이면제(李勉齊) : 원문은 ‘李侯勉齊’라고 되어 있는데, 후(侯)는 고대 중국의 제후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사또에 붙이는 경칭이다. 원문에는 이면제의 ‘齊’ 자가 ‘齋’ 자로 되어 있으나, 여러 이본들에 따라 바로잡았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이면제는 1743년생으로, 1783년 진사 급제하였다.

 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煙湘閣選本○傳
烈女咸朴氏傳 幷序 252_028d


齊人有言曰。烈女不更二夫。如詩之柏舟是也。然而國典。改嫁子孫。勿252_029a叙正職。此豈爲庶姓黎甿而設哉。乃國朝四百年來。百姓旣沐久道之化。則女無貴賤。族無微顯。莫不守寡。遂以成俗。古之所稱烈女。今之所在寡婦也。至若田舍少婦。委衖靑孀。非有父母不諒之逼。非有子孫勿叙之恥。而守寡不足以爲節。則往往自滅晝燭。祈殉夜臺。水火鴆繯。如蹈樂地。烈則烈矣。豈非過歟。昔有昆弟名宦。將枳人淸路。議于母前。母問奚累而枳。對曰。其先有寡婦。外議頗喧。母愕然曰。事在閨房。安從而知之。對曰。風聞也。母曰。風者。有聲而無形也。目視之而無覩也。手執之而無獲也。從空而起。能使萬物浮動。奈何以無形之事。論人於浮動之中乎。且若乃寡婦之子。寡婦子尙能論寡婦耶。居。吾有以示若。出懷中銅錢一枚曰。此有輪郭乎。曰。無矣。此有文字乎。曰。無矣。母垂淚曰。此汝母忍死符也。十年手摸。磨之盡矣。大抵人之血氣。根於陰陽。情欲鍾於血氣。思想生於幽獨。傷悲因於思想。寡婦者。幽獨之處而傷悲之至也。252_029b血氣有時而旺。則寧或寡婦而無情哉。殘燈吊影。獨夜難曉。若復簷雨淋鈴。窓月流素。一葉飄庭。隻鴈叫天。遠鷄無響。穉婢牢鼾。耿耿不寐。訴誰苦衷。吾出此錢而轉之。遍模室中。圓者善走。遇域則止。吾索而復轉。夜常五六轉。天亦曙矣。十年之間。歲减其數。十年以後。則或五夜一轉。或十夜一轉。血氣旣衰而吾不復轉此錢矣。然吾猶十襲而藏之者二十餘年。所以不忘其功。而時有所自警也。遂子母相持而泣。君子聞之曰。是可謂烈女矣。噫。其苦節淸修若此也。無以表見於當世。名堙沒而不傳何也。寡婦之守義。乃通國之常經。故微一死。無以見殊節於寡婦之門。
余視事安義之越明年癸丑月日夜將曉。余睡微醒。聞廳事前有數人隱喉密語。復有慘怛歎息之聲。蓋有警急而恐擾余寢也。余遂高聲問鷄鳴未。左右對曰。已三四號矣。外有何事。對曰。通引朴相孝之兄之子252_029c之嫁咸陽而早寡者。畢其三年之喪。飮藥將殊。急報來救。而相孝方守番。惶恐不敢私去。余命之疾去。及晩爲問咸陽寡婦得甦否。左右言聞已死矣。余喟然長歎曰。烈哉斯人。乃招群吏而詢之曰。咸陽有烈女。其本安義出也。女年方幾何。嫁咸陽誰家。自幼志行如何。若曺有知者乎。群吏歔欷而進曰。朴女家世縣吏也。其父名相一早歿。獨有此女而母亦早歿。則幼養於其大父母盡子道。及年十九。嫁爲咸陽林述曾妻。亦家世郡吏也。述曾素羸弱。一與之醮。歸未半歲而歿。朴女執夫喪盡其禮。事舅姑盡婦道。兩邑之親戚鄰里。莫不稱其賢。今而後果驗之矣。有老吏感慨曰。女未嫁時隔數月。有言述曾病入髓。萬無人道之望。盍退期。其大父母密諷其女。女默不應。迫期。女家使人覸述曾。述曾雖美姿貌。病勞且咳。菌立而影行也。家大懼。擬招他媒。女斂容曰。曩所裁縫。爲誰稱體。又號誰衣也。女願守初製。家知其志。遂如期迎婿。雖名合巹。其252_029d實竟守空衣云。旣而咸陽郡守尹矦光碩。夜得異夢。感而作烈婦傳。而山淸縣監李矦勉齋。亦爲之立傳。居昌愼敦恒。立言士也。爲朴氏撰次其節義始終。其心豈不曰弱齡嫠婦之久留於世。長爲親戚之所嗟憐。未免隣里之所妄忖。不如速無此身也。噫。成服而忍死者。爲有窀穸也。旣葬而恐死者。爲有小祥也。小祥而忍死者。爲有大祥也。旣大祥則喪期盡。而同日同時之殉。竟遂其初志。豈非烈也。

 泰村先生文集卷之一
 
月明塚月明。沙斤驛女也。念夫病死。葬于山頂。歲旱。隳其塚土則雨。 059_220d


金石貞心磨不磷。糓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泰村先生文集卷之一
 
萬德塚 萬德。亦驛女也。九嫁九孀。好事者連塋而葬。萬德死。又葬九塚之下。在月明塚下。 059_220d


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059_221a在。地下千秋愧月明。

 泰村先生文集卷之五
 效嚬雜記[下]
餘話 059_270a
 

[月明塚]
古人詠望夫石詩曰。山頭日日風和雨。行人歸來石應語。釋之者曰。望夫山每夕不風則雨。詩意指此也。059_270d余初未之信也。及宰天嶺。再隳月明塚得雨。然後始知古人之詩。蓋無虛境也。月明者。沙斤驛女也。許嫁京商。結髮未久。商重利上洛。女念夫不已。專廢餔歠。病已危重。折簡厥夫。夫聞之。懷梨跋涉而下。未到而女疾革矣。將死囑其父母曰。葬我於西山絶頂。歿而有知。當望夫婿歸路也。父母憐之。葬如其言。葬之日。商始來。亦傷悼而死。同墳而葬。葬後有梨生于塚上。卽所懷梨也。歲久樹老。今不存焉。余在郡凡四載。再遭旱暵。父老曰。掘月明塚則雨。所謂掘者。非盡掘也。不過隳其土十餘塊而已。兩年掘土。皆得甘雨。則望059_271a夫山之風雨。無足恠也。或曰。然則月明塚何無日日風雨乎。余曰。望夫之夫終不歸。月明之夫死而同穴。怨恨亦有淺深。則風雨豈無時恒乎。人有爲詠一絶曰。金石貞心磨不磷。糓雖貽戚死同墳。能敎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雨雲。

[萬德九嫁而九孀]
萬德。亦沙斤驛女也。娶者輒死。凡九嫁而九孀。驛有好事者。連塋而葬。卽月明塚山下也。萬德死。又葬于九塚之下。十塚相次如連珠焉。有人作詩曰。隨嫁隨亡過此生。九爲孀婦幾傷情。山腰十塚累累在。地下千秋愧月明。

망부총과 월명총의 차이 

【번역문】
옛 사람의 다음 영망부석시(詠望夫石詩)가 있다.
산꼭대기에는 날마다 비바람 불어 / 山頭日日風和雨
나그네가 돌아오면 돌이 대답한다네 / 行人歸來石應語
이 시를 해석한 사람이 다음 말을 했다.
"망부산(望夫山)은 매일 저녁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가 온다. 시의(詩意)는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나는 이 말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천령(天嶺) 태수일 때 두 번 월명총(月明塚)을 팔 때마다 비가 내린 이후에야 비로소 옛 사람의 시가 과연 헛된 경우[虛境]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월명(月明)이란 사람은 사근역(沙斤驛)에 사는 여자이다. 서울 상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머리를 묶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상인은 장사를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갔다. 그 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염려로 식음을 전폐했다. 병이 위중해지자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남편이 소식을 듣고 배[梨]를 품에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시골로 내려갔다. 남편이 도착하기 전에 아내의 병이 더욱 나빠졌다. 아내는 죽기 전에 부모에게 유언을 남겼다.
"제가 죽거든 서산 꼭대기에 묻어주세요. 죽어서라도 지아비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모는 이 말을 듣고 가엾게 생각하여 딸의 말대로 해주었다. 장삿날에 남편이 비로소 도착했다. 그런데 그도 너무 슬퍼한 나머지 죽자 부모는 봉분을 같이 하여 묻어 주었다. 장사지낸 후 무덤 위에 배나무가 자랐다. 곧 남편이 서울을 떠나며 품에 안고 온 배였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나무도 늙어 지금은 없다. 내가 천령군에 근무한 것이 도합 4년인데 두 번 가뭄을 당하게 되자 부로(父老)들이 말했다.
"월명총(月明塚)을 파면 비가 온답니다"
이른바 판다[掘]는 것은 모두 다 파는 것이 아니었다. 불과 십여 군데만 팔 뿐이었다. 가뭄이 든 두 해 무덤을 팠는데 그때마다 단비를 얻었다. 이것은 모두 망부산의 비바람임이 틀림없었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월명총(月明塚)은 왜 날마다 비바람을 내려 주지 않는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망부(望夫)한 여자의 지아비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월명(月明)의 지아비는 죽어서 같은 무덤 속에 묻혔다. 원한도 깊고 얕음이 있는데 비바람이 어찌 시간의 일정함[時恒]이 없겠는가?"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한 절구를 읊었다.
쇠와 돌의 곧은 마음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 金石貞心磨不璘
곡식은 비록 근심을 끼치지만 죽어 무덤을 같이 하네 / ▣雖詒戚死同墳
만고토록 윤리강상을 부지해 주고 / 能敎萬古扶倫紀
또 농민을 위해선 비구름을 만들어 주네 / 又向三農作雨雲 

【출전】寒皐觀外史v40 效顰雜記下 

【원문】
古人咏望夫石詩曰山頭日日風和雨行人歸來石 
應語釋之者曰望夫山每夕不風則雨詩意指此 

也余初未之信也及宰天嶺再隳月明塜得雨然 
後始知古人之詩果無虚境也月明者沙斤驛女 
也許嫁京啇結髮未久啇重利 上洛 女念夫不已 
專廢餔歠病已危重折簡厥夫夫聞之懷棃跋涉 
而下未到而女疾革矣將死囑其父母曰葬我於 
西山 絶頂殁而有知當望夫婿歸路也父母憐之 
葬如其言葬之日啇始來亦傷悼而死同墳而葬 
葬後有棃生于塜上卽所懷棃也歲久樹老今不 
存焉余在郡凡四載再遭旱暵父老曰掘月明塜 
則雨所謂掘者非盡掘也不過隳其十餘塊而已 

兩年掘土皆得甘雨則望夫山之風雨無足怪也 
或曰月明塜何無日日風雨乎余曰望夫之夫終 
不歸月明之夫死而同穴怨恨亦有淺深則風雨 
豈無時恒乎人有爲咏一絶曰金石貞心磨不磷 
穀雖詒戚死同墳能教萬古扶倫紀又向三農作 
雨雲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여기 안의와 서부경남 일원에 길이 역사적 기념물이 될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지원 선생은 조선(朝鮮) 후기의 탁월한 실학파(實學派)학자이며 우리 역사상 최대의 문학가(文學家)의 한분이시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비롯하여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편편이 경세제민(經世濟民)과 이용후생의 뜻을 담고 있어서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특히 우리 고장에서 기념하게 되는 까닭은 선생이 우리 고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오년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縣監)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 깊은 이 고을에서 실천에 옮겨 볼 수 있었으며 작품활동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저작(著作)의 대부분을 이 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 선생이 이 고장에 남긴 뚜렷한 자취를 대강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생이 저작활동(著作活動)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낸 점이다. 선생이 이 곳에 있을 때 지은 저작으로 선생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만도 40여 편이 된다. 그 가운데는 국계민생(國計民生)에 관련한 중요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치정치민의 과정에서 쓰여진 것 그리고 안의를 비롯한 함양 거창 합천등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산수와 문물에 구체적으로 연관된 내용 등이 그 대부분이다. 또한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編題)에 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와 같이 이곳 관아(官衙) 건물의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저작(著作)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일류문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 결과 우리 고장이 당시 우리나라 문학의 중심지로 여겨지게까지 하였다. 다음은 선생이 평소에 깊이 연구하였던 과학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接木)시킨 점이다. 

이용후생의 학에 특히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부임하자 곧 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공장(工匠)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쳐 풍구직기용미수전윤전(風具織機龍尾水轉輪輾) 즉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창안에 의한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관아의 부속건물로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새로 짓고 연지(蓮池)를 만들었던 바 이 역시 자신이 북경에서 배워온 벽돌 만드는 기술을 그 건축물에 실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선생이 이 고장 주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민생에 특히 힘을 기울렸던 행정적 자취이다.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리(流離)하는 기민(飢民) 일천사백여명을 구휼(救恤)했으며 함양땅의 상습 수해지구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경로에 힘써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특히의 옥사(獄事)의 판결에 신명(神明)해서 이웃고을과 도내의 어려운 옥사를 여러 건 해결하였다. 다음으로 선생은 이 고장의 문화와 예속(禮俗)을 존중하여 이를 찬양하였다. 지방의 문헌을 발굴하고 학술을 진작(振作)하였던바 예전에 속천(凁川) 우여무(禹汝楙)선생이 지은 홍범우익(洪範羽翼)이라는 방대한 저서의 학술사상적 가치를 발굴하여 드러내었고 이 고장의 선현(先賢) 임갈천(林葛川) 노옥계(盧玉溪) 정동계(鄭桐溪) 유언일(劉彦一)선생 등이 남긴 학창의와 관객등 유제(遺制)와 미풍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의 자제들에게도 따르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지방문화를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이와같이 남다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선정비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은 선생 자신이 떠나면서 지방 사람들의 계획을 극력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은 호를 연암(燕岩) 자(字)를 미중(美仲)이라 하였고 1737년 영조 33년 당시 서울의 명문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논구(論究)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41세때 황해도 연암협(燕巖峽)으로 옮겨 지내다가 44세때 사신(使臣)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였다. 이 때에 새로운 사상과 과학문명의 세계적 조류를 여러면에서 직적 체득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이 여행의 체험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참신한 문체로서 당시 문단에 커다란 피문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선생의 실학사상이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값진 민족문화유산이 되었다. 50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어 55세에 지방관직으로서는 처음 안의고을 현감이 되었으며 안의를 떠난지 9년 후인 1805년 69세로 일기를 마쳤다. 선생은 안의를 거쳐 면천군수(沔川郡守) 양양부사(襄陽府使) 등을 잠깐씩 지내기는 했지만 첫 부임지로써 가장 오래 있었던 우리고장이야말로 선생의 사상과 포부를 실천해보고자 온 정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선생의 생애는 18세기 말의 낙후된 조국을 문명화하기 위하여 특히 이용후생의 학문연구와 새로운 기운의 문학운동에 오로지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유통의 확대와 기술의 혁신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러한 신기운의 형성과 함께 나타나는 근대적 체질이 새로운 인간형들을 소설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선생은 일찍부터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상인 수공업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실학을 가지고 서민들에게 이바지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선비(士)로서 자기 임무를 자각한 때문이었다. 또한 선생은 중세적 권위주위와 고식적(姑息的)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모든 사람들이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훌륭한 문학작품들로 그려 놓았던 것이다. 이들 작품은 신선한 구성과 사실적 수법을 그리고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으로 깊이 서민적 정취를 묘사하여 정통문학의 완강한 성벽에 도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선생은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자기 시대를 개척해나간 사상가요.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생의 생장지인 서울에는 격심한 변천으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으며 선생의 묘소도 휴전선 북쪽에 있어 가 볼 수가 없으니 선생의 거룩한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우리 안의뿐이다. 이에 선생이 재임시에 손수 지은 관아(官衙)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옛터 이곳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선생을 통하여 민족사의 선진대열에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일깨우고 다시 이 시대의 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힘의 줄기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여기 이 돌에 우리고장 전체 주민들의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1986년   O월  O일 

여주(驪州) 이 우 성(李佑成) 삼가 지음 

진양(晉陽) 하 한 식(河漢植) 삼가 씀 

전면대자(前面大字)는 안동(安東) 김 응 현(金膺顯)이 썼음 

진단학회(震檀學會). 국어국문학회(國語國文學會).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 한국한문학연구회(韓國漢文學硏究會).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 연암 박지원선생 사적비 건립추진위원회(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建立推進委員會)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