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정사와 야사


김성진<함양문화원장>

함양의 아름다운 자연과 값진 문화유산을 위해


역사는 정사가 있고 야사가 있으며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구전 되어오는 전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정사가 가장 정확하다고 인식되어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사가 잘못 기록 될 수도 있고 야사나 전설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함양 지방에는 그러한 전설이 몇 개가 있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의 상림 조림 설이 그렇고 고려 말 낙산재 이억년의 은거설과 목은 이색의 은거설, 이숙번의 유배설, 논개 무덤에 관한 설이 그러한 문제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그 전설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나 물증이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먼저 고운 최치원의 함양 상림 조림 설이다. 이 사실은 가장 오래된 일이지만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정설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한 기록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즉 최치원 선생이 해인사 승려 희랑에게 준 시제(詩題)인 「방노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防虜太監 天嶺郡太守 ?粲 崔致源)」이란 구절 밖에 없다. 그러나 함양 사람들은 누구나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와서 상림을 조림했다는 전설이 천백여년이 넘도록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하고 있으며 정설로 믿고 있다.

다음은 낙산재 이억년의 은거설이다. 고려 충렬왕 11년 문과 급제하여 개성 유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千載紅塵夢外事靑山何處獨掩?」라는 시를 남기고 벼슬을 사양하고 위성 엄천리로 들어가 도정정사를 짓고 공자, 맹자의 도를 강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성 엄천리는 지금의 함양 휴천면 문정리이며 도정부락이 있고 이억년의 무덤이 문정 노루목 고개에 있다.

또한 고려 말 목은 이색의 함양 은거설이다. 고려사에는 함양에 은거했었다는 기록이 전연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정사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고려사는 이성계가 고려의 왕통을 분쇄하고 자신의 왕권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널리 알려져 오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함양에는 여러 곳의 사적지가 있다. 첫째는 제계서재의 유허지인데 이색이 유림면 국계에 제계서재를 지어 우거 했는데 이색의 사후 제계서재가 퇴락해서 성종때 사숙재 강희맹이 중수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유허지에 「제계서재 이목은 소축 강사숙재 중수지 을묘사월(蹄溪書齋李牧隱所築姜私淑齋重修址乙卯四月)」이라 돌에 새겨져 있고 글자가 풍화되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을묘년 사월이면 연산군 원년이기 때문에 강희맹의 사후 10여년 후에 강희맹의 후손이나 혹은 마을사람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돌에 새겨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은은 함양에 연고가 있었는데 큰동서 민근(閔瑾)이 함양에서 살았다. 고려 말 왜놈들이 침입하여 노략질 해갔다는 소식을 듣고 동서에게 써보낸 시가 목은 집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함양의 작은 고을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바다는 멀고 낭떠러지도 만 길이나 되는데/ 도적은 천둥 같아 귀를 가리기 어려웠고/ 몸은 활 맞은 새 같아 아직도 마음 놀라라/ 골짜기 안에 인적 없음은 문득 알겠거니와/ 세밑에 비바람 맞음은 어찌 견딘단 말인가/ 다행히 둘째 아들이 영친연을 올렸으리니/ 기쁨의 눈물이 옷깃 적셨음을 멀리 알겠네/

咸陽小縣亂山深/ 海遠縣崖更萬尋/ 寇似疾雷難掩耳/ 身如傷鳥尙驚心/
谷中頓覺無煙火/ 歲抄那堪窘雨陰/ 幸有二郞能採舞/ 遙知喜淚已霑襟/


다음은 유림면 재궁 마을 북쪽 약 1km 지점에 목은의 묘라고 하는 무덤이 서민들의 무덤보다 큰 형태로 남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600여년간 대대로 목은의 묘라고 구전되어 왔으며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벌초를 해오고 있는 무덤이며 재궁 마을 앞들을 이목들 혹은 목은들이라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강변에 목은의 낚시터로 알려져 오는 바위가 있는데 한두 사람의 입으로 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재궁과 국계 마을 전 동민이 그렇게 믿어 왔고 함양군지에도 기록되어 전해온다. 또한 목은 선생이 동서에게 쓴 시 외에 함양에서 쓴 시가 2수 전해지는데 지리산을 바라보며 회포를 푼 시와 엄천사 승려를 전송하며 쓴 시가 목은 집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지리산 율시를 지어 회포를 풀다.

頭流山最大 두류산(지리산)이 나라 안에서 제일 크기에
羽客豹皮茵 신선이 표범가죽을 깔고 산다 하는데
木末飛雙脚 나무 가지에는 쌍각(새)이 날아다니고
雲間出半身 구름 사이엔 산이 반신을 내어놓았도다
人譏困三武 사람들은 삼무의 제왕들에게 쫓겨왔다고 희롱했고
或說避孤秦 어떤 이는 진나라의 난리를 피해왔다 말하네
豈乏幽棲地 나는 어찌하여 그윽한 은거지가 없어서
風塵白髮新 풍진 속의 세상에 시달려 백발이 새로 났는고.

◎엄천사 혜생 승통을 전송하며
儒釋相非久 유불이 상대를 서로 비난한지 오래 되었는데
誰知我獨親 누가 알겠는가 나만은 친하게 지내는 것을
跡雖爲佛子 혜생 승통의 종적이야 비록 부처의 제자라 하더라도
心不廢人倫 마음으로는 인간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았도다
歲月萱堂靜 흐르는 세월 속에서 고즈넉한 그대 어머니요
雲山紺宇新 구름 낀 두류산에는 새로 지은 불사의 집이로세
講餘時定省 강론하는 틈틈이 자주 정성을 다 한다면
風俗想還淳 미풍양속을 순박하게 되돌릴 수 있으리라.


또 다른 이야기는 이숙번의 유배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숙번은 조선초기 이방원을 왕좌에 앉히기 위해 2차례의 왕자난을 일으킨 태종의 공신으로 함양의 지계동(까막섬)으로 유배를 왔다는 설인데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역시 사근역이라는 시가 함양군지에 전해져 오고 있다. 함양과 전연 연고가 없는 안성이씨인 그가 까막섬(烏島)에서 3km 정도 떨어진 사근역에 대해 시를 썼으니 이 또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객발이 서릿빛 더했구나/ 가는 세월 조금도 지체 없네/ 윤음은 금궐에서 내렸고/ 고우들 우정에서 전송하네/ 집을 둘러 있는 계산 아름답고/ 구름이 흩어지니 송백 푸르구나/ 임금의 은혜 갚기 어려워라/ 어찌 반드시 천정에만 이르리오

客髮添霜雪/ 流年不少停/ 綸音降金闕/ 故友餞郵亭
繞屋溪山勝/ 拂雲松栢靑/ 君恩難可報/ 何必到天庭


다음은 논개묘에 관한 설이다.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 고장뿐만 아니라 전북 장수(논개의 출생지)에서까지도 논개의 시신이 함양에 묻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방지마을 주씨들이 성묘를 했다고 하나 왜놈들의 침략 이후 왜경의 행패가 심해져서 벌초를 하지 못하고 수십년간 방치해 두어서 분묘를 상실 했는데 1970년대에 와서야 함양군에서 무덤을 찾아 헤매었고 장수의 향토사학자 오치황씨도 자신들의 족보에 암시된 기록이 있어 무덤을 찾아 나섰는데 몇 년 동안 옛날의 육십령 고개 길을 더듬어 헤매다가 이 무덤을 찾았는데 주씨 문중의 확인과 마을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함양군의 의견이 오치황씨가 찾은 무덤과 일치하여 다시 다듬어 성역화한 사실이 논개묘인 것이다.
논개묘는 이제 널리 알려져서 전국에서 답사객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나 이억년의 사적과 이색의 사적은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옛 사적들은 많다.

이상의 사실들을 볼 때 지방의 작은 한 고을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일일이 역사에 기록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사에는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고장은 곳곳마다 마을마다 사적이 있고 전설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증하고 연구하여 개발해서 보존해야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함양은 사적지에 대한 관심이 아직도 미미해서 개발하지 못하고 방치된 곳이 많다.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실제로 문화에 투자되는 인력이나 경제력은 미약한 상태에 있다.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자연과 값진 문화유산을 조화 있게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