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암

 玉溪先生續集卷之一
 詩○七言絶句
     訪靈觀于隱神庵。次浣溪韻。


道成枯木世徒驚。誰識鍾聲在不鳴。此日細推渠說話。中間暗了兩頭明。

무학대사

춘정속집 제1권
 명(銘)
조선국(朝鮮國) 왕사(王師) 묘엄 존자(妙嚴尊者) 탑명(塔銘) 병서(幷序). 경인년(1410)


우리 태조 원년 10월에, 사(師)는 부름을 받고 송경(松京)에 왔다. 태조는 이달 11일이 탄신일인 것을 계기로 법복(法服)과 기물(器物)을 갖추어, 사(師)를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과 오교(五敎)의 여러 절 승려들이 다 있었다.
왕사가 좌석에 올라 향을 사르고 복을 빌기를 마친 뒤에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워 대중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말하지 않았으며,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들이 전하지 않았는데, 대중들이 도리어 알 수 있을까. 심사(心思)와 구설(口舌)로써 계교(計較)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 선종(禪宗)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고, 태조에게 아뢰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말하지만, 그 용(用)은 한가지입니다. 갓난아이를 돌보듯 백성을 보호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고, 지극히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성수(聖壽)는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창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개국한 초창기인 지금 형법(刑法)에 걸린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다 용서하셔서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인수(仁壽)의 영역에 이르게 하소서. 그러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듣고 좋게 여겨, 즉시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 당시에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시를 지어 왕사에게 보내왔는데, ‘성주는 용이 되어 하늘에 날고, 왕사는 부처로 세상에 나왔네.[聖主龍飛天 王師佛出世]’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상은 회암사(檜巖寺)의 나옹(懶翁) 스님이 거처하던 대도량(大道場)에 들어가 지내라고 왕사에게 명하였다. 정축년(1397, 태조 6) 가을에 절의 북쪽 벼랑에 탑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왕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浮屠)가 있는 곳이었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가 용문사(龍門寺)에 살았다. 임오년(1402, 태종 2) 5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또 왕사에게 명하여 회암사에 들어가 지내라고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또 사임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더니, 을유년(1405, 태종 5) 9월 11일에 입적(入寂)했다.
3년 만인 정해년(1407, 태종 7) 12월에 왕사의 유골을 회암사 탑에 안치하고, 또 4년 만인 경인년(1410, 태종 10) 7월에 상왕(上王)이 태조의 뜻으로 주상에게 말하니, 주상이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그 탑에 이름을 붙이게 하고 또 명(銘)을 짓도록 하였다.
신 계량이 삼가 그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왕사의 휘는 자초(自超), 호는 무학(無學),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했고, 향년은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였다. 속성(俗姓)은 박씨(朴氏)로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부친의 휘는 인일(仁一)이니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문하 시랑(門下侍郞)이고, 모친은 고성 채씨(固城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 햇살이 품속에 비치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 14) 9월 20일에 왕사를 낳았다.
왕사는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었을 때부터 곧 청소를 했으며, 글을 배우게 되어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했다. 18세가 되어서 훌쩍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에게 법을 물었다. 국사가 법을 가르쳐 주고 나서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을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屠菴)에 살게 했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왕사가 홀로 정좌(靜坐)하여 나무 인형처럼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병술년(1346, 충목왕 2) 겨울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잠도 자지 않고 밥먹는 것도 잊은 채 참구(參究)에만 전념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진천(鎭川)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다.
임진년(1352, 공민왕 1) 여름에는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에 머물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전되었다. 간혹 졸게 되면 마치 종이나 경쇠를 쳐서 깨우는 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때에 환하게 깨닫는 바 있어서 스승을 찾아 질의(質疑)하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였다.
계사년(1353, 공민왕 2) 가을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연도(燕都)로 달려갔는데, 서천(西天 인도(印度))의 지공(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3800리를 와서 화상(和尙)의 면목을 친견했습니다.” 하니, 지공이 “고려 사람을 모두 죽였구나.” 하였는데, 대개 허여하는 뜻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이듬해 갑오년(1354, 공민왕 3) 1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 나옹에게 참례하È, 나옹이 한 번 보고서 큰 그릇으로 여겼다. 무령(霧靈)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거듭 나옹을 만나보고 몇 해를 머물렀다. 왕사가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에는 밥먹을 때가 되어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나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였느냐?” 하자, 왕사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옹이 하루는 왕사와 함께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가 말하기를, ‘어느 곳에 먼저 손을 대었겠느냐?’ 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하였다. 왕사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나옹이 말을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왕사가 나옹의 방에 가니, 나옹이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를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였다. 뒤에 왕사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을 이루었구나.” 하였다. 또, “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코끼리에게 상아(象牙)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네가 어찌 남에게 앞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왕사가 깨달은 바를 질정(質正)함에 있어서는 거의 의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찾아 나설 뜻은 거두지 않았다. 장차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방을 유람하려 했으나, 마침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진년(1356, 공민왕 5) 여름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나옹이 손수 한 장의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기를, “일상 생활의 모든 기틀을 보니 세상 사람과 다른 데가 있다. 선악(善惡)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에 따르지 않는다. 말을 함에 있어서 기운을 토해내는 것은 화살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는 것은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빈주구(賓主句)를 삼키고, 몸으로 불조(佛祖)의 관문을 투과했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송(偈頌)을 지어 송별(送別)하노라.” 하였다. 그 게송에,

이미 주머니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알겠노니 / 已信囊中別有天
동서로 삼현을 쓰도록 일임해 둔다 / 東西一任用三玄
누가 너에게 선(禪)의 뜻을 묻는 이 있거든 / 有人問爾參訪意
면전에서 쳐서 거꾸러뜨리고 다시 말하지 말라 / 打倒面門更莫言

하였다. 왕사가 돌아오고 나니, 나옹도 지공으로부터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있는 곳에 머물면 불법이 흥성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물렀다.
기해년(1359, 공민왕 8) 여름에 왕사가 가서 만나니 나옹이 불자(拂子)를 주었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게 되어 왕사도 갔으나, 나옹의 무리 중에 왕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왕사가 알고 떠나가니, 나옹이 왕사에게 이르기를, “법맥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왕사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과 나를 구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녕되게 시비를 말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이 다음의 네 구절 게송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어주노라.” 하였다. 그 게송에,

작별에 임하여 특별히 헤아릴 것 있으니 / 分衿別有商量處
누가 알랴 그 가운데 다시 현묘한 뜻을 / 誰識其中意更玄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 任爾諸人皆不可
내 말은 공겁 이전을 투과했다 / 我言透過劫空前

하였다. 왕사는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신해년(1371, 공민왕 20)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는데, 나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면서 의발(衣鉢)을 왕사에게 전하니, 왕사가 게송을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1376, 우왕 2)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로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落成會)를 열었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어 왕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座)를 맡기려 하였다. 왕사가 극력 사양하니, 나옹이 말하기를, “일을 많이 맡는 것이 많이 물러나느니만 못한 것이지. 옛적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은 수좌를 하지 않았었다.” 하고,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나옹이 세상을 떠나니, 왕사가 여러 산에 노닐면서 자신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전조의 말기에 명리(名利)로써 왕사를 불러 왕사로 봉하고자 했으나, 왕사가 모두 가지 않더니, 마침내 임신년(1392, 태조 1)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왕사의 거취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계유년(1393, 태조 2)에 태조가 지리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왕사에게 명하여 행차를 따르게 하니, 왕사가 사양하였다. 태조가 왕사에게 이르기를, “예나 지금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인(世人)이 터를 잡는 것이 어찌 도인의 안목만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계룡산(鷄龍山)과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왕사가 모두 호종(扈從)하였다.
그해 9월에 왕사가 선사(先師)인 지공ㆍ나옹의 두 탑의 명칭에 관한 일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교지(敎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진영을 거는 불사(佛事)를 크게 열었다. 손수 나옹의 진영찬(眞影贊)을 짓기를,

지공의 천검과 평산의 할을 받고 / 指空千劍平山喝
어전에서 승려들 공부를 시험했네 / 選擇工夫對御前
최후에 신령한 빛 사리를 남기시니 / 最後神光留舍利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토록 전해지리 / 三韓祖室萬年傳

하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옮겨 보관한 데 대한 불사를 연복사(演福寺)에서 개설하고 왕사에게 명하여 주석(主席)하게 하였다. 왕사가 무인년(1398, 태조 7)에 사퇴한 뒤로부터는 대중을 대하는 데 뜻이 없어, 비록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회암사로 갔으나 곧이어 금강산 진불암(眞佛菴)으로 들어갔다.
을유년(1405, 태종 5) 봄에 병세가 약간 있어 모시는 자가 의약(醫藥)을 드리고자 하니, 왕사가 물리치며 “나이 여든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왕사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왕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왕사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약이 없습니다. 후일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하기를, “머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더니, 얼마 뒤 과연 입적하였다.
왕사의 병이 위독해지자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흩어짐에 어느 곳을 향해 갑니까?” 하니, 왕사는 “모른다.” 하였다. 또 물으니, 왕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왕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肉身)이라는 것은 본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일 뿐이니 모두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는데, 어느 것이 곧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왕사가 두 팔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그것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당시에 화엄종(華嚴宗)의 승려 찬기(贊奇)가 송경(松京)의 법왕사(法王寺)에 있었다. 꿈에 왕사가 공중(空中)의 부처 정수리 연화(蓮花) 위에 서 있는데 부처와 연화의 크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절 사람들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니, 듣는 이들이 그것은 심상한 꿈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고가 왔는데, 왕사가 입적한 시간이 바로 그 꿈을 꾼 때였다.
왕사가 지은 저서로 《인공음(印空吟)》이 있는데,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첫머리에 서문(序文)을 썼으며, 인간(印刊)한 대장경은 용문사(龍門寺)에 봉안했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왕사는 질박함을 숭상하여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은 매우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8만 가지 행(行) 중에서 영아행(嬰兒行)이 제일이다.” 하면서, 모든 행위를 그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사람을 대하는 공손함과 사물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억지로 힘써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탑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명명하고, 또 명(銘)을 붙인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왕사의 도 우뚝이 높으심이여 / 師之道卓
보통 사람 생각할 바가 아니니 / 匪夷所思
선각 의 적통이요 / 禪覺之嫡
태조의 스승이었네 / 祖聖之師
왕사가 평상시엔 / 師在平居
어린아이와 같다가 / 嬰兒之如
안목을 갖춘 사람 만나면 / 具眼之遇
화살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았네 / 箭鋒相柱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로 / 一鉢一衣
지극히 겸손하게 스스로 낮추었으나 / 謙謙自卑
더할 나위 없이 존숭을 받아도 / 尊崇無對
마치 본디 그러한 듯 자연스러웠네 / 若固有之
자신의 거취에 있어서 / 或去或就
선견지명으로 구차히 하지 않았으니 / 先見不苟
하늘이 주신 수명 / 天錫佛壽
일흔 아홉이었네 / 七旬有九
어디에서 오셨던가 / 來也何從
햇살이 품속에 비쳤고 / 日射懷中
어디로 가셨는가 / 去也何向
부처의 정수리 연화 위였네 / 蓮花之上
곳곳의 많은 제자들 / 處處其徒
왕사의 행적 드러내길 도모하니 / 圖表厥跡
천지 사이에 견고하기로는 / 兩間之堅
돌보다 오래가는 것 없기에 / 無久惟石
비석에 명을 새겨 / 刻此銘章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垂示罔極


[주D-001]빈주구(賓主句) : 임제(臨濟)가 제창한 4구(句)의 빈주 구조를 말한다. 빈간주(賓看主), 주간빈(主看賓), 주간주(主看主), 빈간빈(賓看賓)이 그것으로, 이를 통해 선기(禪機)를 제시하였다.
[주D-002]삼현(三玄) : 임제종(臨濟宗)의 법을 나타내는 세 강령으로, 현중현(玄中玄)은 그것으로서의 진실(眞實)을, 구중현(句中玄)은 말이나 인식상에 나타나는 진실을, 체중현(體中玄)은 실천 속에 나타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臨濟錄》
[주D-003]교지(敎旨)를……새기고 : 이 부분은 뜻이 통하지 않아 초간본에, “봉지각탑명(奉旨刻塔名)”이라 되어 있는 것을 참고로 하여 번역하였다.
[주D-004]지공(指空)의……할(喝) : 나옹이 평산(平山)을 찾아갔을 때, 평산이 나옹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자, 지공에게서 왔다고 한다. 평산이 지공의 일상생활을 묻자, “지공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쓴다.”고 했다. 평산이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을 가져오라.” 하니, 나옹이 방석으로 평산을 쳤다. 평산이 거꾸러지면서 크게 외치기를,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하니, 나옹이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한다.” 하였다. 이에 평산이 크게 웃었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5]어전(御前)에서……시험했네 : 홍무 경술년(1370, 공민왕 19) 9월에 나라에서 공부선(功夫選)을 베풀고 양종 오교의 여러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나옹에게 주맹(主盟)이 되도록 하였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6]사대(四大) : 육신(肉身)을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가지 요소를 말한다.
[주D-007]영아행(嬰兒行) :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오행(五行)의 하나이다. 자리(自利)의 뜻으로 해석하면, 보살의 대행(大行)은 분별을 여읜 영아와 같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이타(利他)의 뜻으로 해석하면, 인천(人天),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제승(諸乘)이 영아와 같은데 보살이 이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비심(大悲心)으로 이들과 같이 소선(小善)을 시현(示現)한다는 것이다.
[주D-008]선각(禪覺) : 스승인 나옹(懶翁)의 시호이다.

 

春亭先生續集卷之一
 
朝鮮國王師妙嚴尊者塔銘 幷序○庚寅 


我太祖之元年冬十月。師以召至松京。太祖以是月十一日誕晨。具法服若器。封爲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礙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兩宗五敎諸山衲子皆在焉。師升座。拈香祝釐已。豎起拂子。示大衆曰。這箇是三世諸佛說不到。歷代祖師傳不底。大衆還會麽。若以心思口舌。計較說話者。何有吾宗。復於上曰。儒曰仁。釋曰慈。其用一也。保民如赤子。乃可爲民父母。以至仁大慈莅邦國。自然聖壽無疆。金枝永茂。社稷008_175c康寧矣。今當開國之初。陷於刑法者非一。願殿下一視同仁。悉皆宥之。俾諸臣民共臻仁壽之域。此我國家無疆之福也。上聞而嘉之。卽宥中外罪囚。時韓山牧隱李文靖公以詩贈師。有聖主龍飛天王師佛出世之句。上以檜巖寺懶翁所居大道場。命師入焉。丁丑秋。命造塔于寺之北崖。師師指空浮屠所在也。戊寅秋。以老辭歸。居于龍門。壬午五月。今我主上殿下又命入檜巖。明年正月。又辭入金剛山。以乙酉九月十一日示寂。越三年丁亥冬十有二月。厝師骨于檜巖之塔。又四年庚寅秋七月。上王以008_175d太祖之志。言於上。上命臣季良名其塔。且爲銘。臣季良謹按其弟子祖琳所撰行狀。師諱自超。號無學。所居曰溪月軒。壽七十九。法臘六十一。俗姓朴氏。三岐郡人也。考諱仁一。贈崇政門下侍郞。母固城蔡氏。夢見初日射懷中。遂有娠。以泰定丁卯後九月二十日生。始免襁褓。便行掃除。及就學。人莫敢先。年十八。脫然有出世之志。依慧鑑國師上足弟小止禪師。薙髮具戒。至龍門山。咨法于慧明國師法藏。國師示法已。乃曰。得正路者。非汝而誰。遂令居浮屠菴。一日。菴中失火。師獨靜坐。如木偶人。衆異之。丙戌冬。因看008_176a楞嚴經有悟。歸以告其師。師加稱歎。自是廢寢忘飡。專於參究。己丑秋。抵鎭川吉祥寺居焉。壬辰夏。住妙香山金剛窟。功益進。或睡則若有擊鍾罄以警焉者。是時釋然了悟。汲汲有求師就質之意。癸巳秋。挺身走燕都。參西天指空禮拜。起云。三千八百里。親見和尙面目。空云。高麗人都殺了。蓋許之也。衆乃大驚。次年甲午正月。到法泉寺。參懶翁。懶翁一見而深器之。遊霧靈歷五臺。再見懶翁於西山靈巖寺。留數載。其在定也。至有當食而不知者。翁見之曰。汝卽死了耶。師笑而不答。翁一日與師坐階上。問曰。昔趙州與首008_176b座看石橋。問是甚麽人造。首座答云。李膺造。州云。向甚麽處先下手。首座無對。今有人問。爾如何祇對。師卽以兩手握階石以示之。翁便休去。其日夜分。師入翁室。翁云。今日乃知吾不汝欺也。後謂師曰。相識滿天下。知心能幾人。爾與我一家矣。又曰。道之在人。如象之牙。雖欲藏之。不可得也。他時爾豈爲人前物乎。師之質其所得。殆無可疑。然而遊歷山川。參訪師友之志。蓋未已也。將遊江浙。適南方有變。路梗乃止。丙辰夏。欲東還告辭。翁手書一紙送行曰。觀其日用全機。與世有異。不思善惡聖邪。不順人情義理。出言吐008_176c氣。如箭鋒相拄。句意合機。似水歸水。一口呑却賓主句。將身透過佛祖關。俄然告行。予以偈送云。已信囊中別有天。東西一任用三玄。有人問爾參訪意。打到面門更莫言。師旣還。懶翁亦以指空三山兩水授記。還國。住天聖山元曉菴。己亥夏。師往見。翁以拂子與之。翁在神光寺。師亦往焉。翁之徒有忌師者。師知而去之。翁謂師曰。衣鉢不如言句。以詩遺師云。閒僧輩起人我心。妄說是非甚不然也。山僧以此四句之頌。永斷後疑。分衿別有商量處。誰識其中意更玄。任爾諸人皆不可。我言透過劫空前。師入高達山卓菴自008_176d守。辛亥冬。前朝恭愍王封懶翁爲王師。翁住松廣。以衣鉢付師。師以偈謝。丙辰夏。翁移錫檜巖。大設落成會。馳書召師。以充首座。師力辭。翁曰。多管不如多退。臨濟,德山。不做首座來。俾居便室。翁逝矣。師遊諸山。志在晦藏。不欲人知。前朝之季。召以名利。至欲封爲師。師皆不至。卒有壬申之遇。師之去就。豈偶然哉。癸酉。太祖欲相土建都。命師隨駕。師辭。太祖謂師曰。古今相遇。必有因緣。世人所卜。豈若道眼。巡幸鷄龍山及新都。師皆扈從。其年九月。師以先師指空,懶翁二塔名及掛懶翁眞事。奉塔名於檜巖。大設掛眞008_177a佛事於廣明寺。自製眞贊云。指空千劍平山喝。選擇工夫對御前。最後神光留舍利。三韓祖室萬年傳。十月。國設轉藏佛事於演福寺。命師主席。師自戊寅辭退之後。倦於待衆。雖以上命復住檜巖。旋入金剛山眞佛菴。乙酉春。有微疾。侍者欲進醫藥。師却之曰。八十有疾。何用藥爲。夏四月。移于金藏菴。師其示寂處也。八月。義安大君致書。師答書。有山居邈。亦會謁無期。他時異日。佛會相逢語。謂大衆曰。不久吾逝矣。已而果然。始師疾革。僧問四大各離。向甚處去。師云不知。又問。師厲聲云不知。又僧問和尙病中還有不008_177b病者也無。師以手指傍僧。又問色身是地水火風。摠歸磨滅。那箇是眞法身。師以兩臂相柱云。這箇是箇。答已。寂然而逝。夜半也。時華嚴釋贊奇在松京法王寺。夢見師立空中佛頂蓮花之上。佛與蓮花。其大彌天。覺而心異之。與寺中說其夢。聞者疑其非常。未幾訃至。卽其夢時也。師所著曰印空唫。文靖公序其端。印成大藏。安于龍門。文靖公跋其尾。師性尙質。不喜文飾。自奉甚菲。餘輒施捨。嘗自言曰。八萬行中。嬰兒行爲第一。凡所施爲。無不相若者。且接人之恭。愛物之誠。出於至心。非有所勉。蓋其天性然也。臣季良謹008_177c拜稽首。而名其塔曰慈智洪融。且系以銘。銘曰。師之道卓。匪夷所思。禪覺之嫡。祖聖之師。師在平居。嬰兒之如。具眼之遇。箭鋒相柱。一鉢一衣。謙謙自卑。尊崇無對。若固有之。或去或就。先見不苟。天錫佛壽。七旬有九。來也何從。日射懷中。去也何向。蓮花之上。處處其徒。圖表厥跡。兩間之堅。無久惟石。刻此銘章。垂示罔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