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천사략 및 엄천사와 헌강대왕


 

엄천사(嚴川寺)와 헌강대왕 99.6.4.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含山抄譯)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강희 32년 계유(1693,숙종19) 2월 5일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이후 48년 기축(1709,숙종35) 6월 2일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시서 생략)

 *엄천사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에 있던 큰절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신라 시대에 하동, 구례, 함양 등지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전래되는 것을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1471-1476)로 부임한 뒤 새로 차밭(茶園)을 조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결언선사(決言禪師) : 865년(신라 경문왕 5년): 화엄대덕(華嚴大德) 결언(決言)이 해인사에서 5일간 경을 강의. 大嵩福寺碑銘: 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 

해인사는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 10월16일 의상 스님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스님이 지은 화엄 도량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던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83년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불상으로 판명됐다.

고운 최치원의 친형인 현준대덕(賢俊大德)은 정강왕 1년(886년)에 화엄경사(華嚴經社)를 지리산 화엄사에 결성하고 경전의 글을 베껴 썼으며, 현준과 함께 결언대덕(決言大德)도 화엄의 종장(宗匠)들이라 할 연기(緣起), 지엄(智儼), 의상(義湘), 원측(圓測)을 위해 남악(南岳)인 화엄사와 북악(北岳)인 부석사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삼았다.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엄천사를 창건하였으니 엄천사는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 된 것이다.

결언선사는 883년(헌강왕9)에 엄천사 창건이라 했는데 낭원대사 개청은 이미 859년(헌안왕 3)에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창건 연대가 오히려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대 기술에 착오가 있은 것이다.

중창기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

대사의 호는 개청(開淸)이었고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는데,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화엄사로 출가하여 정행법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화엄학을 익혔다.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오대산의 통요대사(通堯大師, 범일 [梵日, 810~889])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정행법사(正行法師) :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경문왕 10년(870)에 잡화(雜花:화엄)의 묘지(妙旨)를 전하고 낭원(郞圓)이 청강(聽講)하였다고 하였다.

*범일(梵日 810~889) :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엄천사는 나말여초의 관단(官壇)이 설치된 계단사원(戒壇寺院)으로서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공증 수계 장소인 계단사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했는데 남방의 계단사원은 강주(서부경남지방)에선 엄천사가 유일하였다. 계단사원은 신라의 통일후에 冥州 福泉寺, 康州 嚴川寺, 全州 華嚴寺, 全州 金山寺, 漢州 莊義寺, 白城郡 長谷寺, 熊州 普願寺 등이 그 기능을 하면서 승단의 형성에 계율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선종에서 출발한 승려들도 수계함으로서 신라에서 공적인 역할을 한 사원이었다. 특히 福泉寺, 嚴川寺, 華嚴寺는 官壇이라 명시되어 나머지 수계 기능을 한 사원도 관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사원은 대체로 9州에 망라되어 성립되었다. 주: 韓基汶, 「新羅末 高麗初의 戒壇 寺院과 그 機能」, ꡔ歷史敎育論集ꡕ12, 1988.

*성선(性宣) 대사 :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엄천사 중수, 강법사가 되다.

고려 인종 시대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절터에 수정사(水精社)란 절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1123, 고려 인종 1) 계묘(癸卯)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1129, 고려 인종 7) 기유(癸酉)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지리산수정사기>

오대사는 조선 시대에도 절이 건재하였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오대사를 읊은 시도 있다. 지금은 국선도에 팔려 백궁선원이란 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牧隱詩稿卷之三十三
 
送惠生僧統住嚴川


儒釋相非久。誰知我獨親。跡雖爲佛子。心不廢人倫。歲月萱堂靜。雲山紺宇新。講餘時定省。風俗想還淳。

 

佔畢齋集卷之十
 
贈無比師。與克己同賦。 


012_290c師年七十有五。與吾黨金大猷,申挺之。共登頭流。宿天王峯。脚力甚壯。挺之等亦不及焉。余以禱雨。方齋于嚴川。比來請詩。書此以贈。

老臘近八十。兩脚超飛鴻。頭流最高頂。俯瞰扶桑紅。却笑少年子。喘如吹竹筒。長嘯擺綠蘿。忽拉方瞳翁。祕訣共商略。當還氷雪容。

 

佔畢齋集卷之七
 詩集
嚴川寺午睡 


麥熟何妨省敎條。偸閑暫憩野僧寮。翛然午睡無人覺。只有林間婆餠焦。

 

佔畢齋集卷之七
 詩集
宿嚴川寺 


012_262b嚴川寺裏兪林我。煮茗淸談愜素期。一夜簪纓渾忘却。灘聲驚夢忽尋詩。

 

濯纓先生文集卷之五
 
頭流紀行錄
東行至龍游潭。潭南北。幽窅奇絶。塵凡如隔千里。貞叔先待於潭石上。具饌以待。點罷遂行。時適新晴。水襄兩崖。潭之奇狀。不可得而窺矣。貞叔云。此佔畢公爲郡時禱雨齋宿處也。潭石鱗鱗。如田之畇畇。多宛然之迹。又有石如瓮如金鼎類者。不可勝紀。017_259b民以爲龍之器皿也。殊不知山澗湍急。水石流轉。相磨之久。而至於成形。甚矣。細民之不料事而好誕說也。由潭而東。路極險阨。下臨千尺。竦然如墜。人馬脅息而過者幾三十里。隔岸望頭流之東麓。蒼藤古木之間。指點先涅古涅等方丈。不知其幾也。一葦如隔弱水。雖欲跋一步以登而不可得矣。路漸低而山漸夷。水漸安流。有山自北而斗起爲三峯。其下居民僅十數屋。名曰炭村。前臨大川。伯勖曰。此可居也。余曰。文筆峯前。尤可卜也。前行五六里。篁竹林中。有古寺曰巖川。土壤平廣。可以廬其居也。由寺而東一里。峙017_259c壁千尋。人鑿斜逕於壁間而行一里許。踰一小峴北行。出貞叔田園之下。貞叔邀請不已。日已暮。又恐雨益甚水益漲。辭曰。王子猷。到門而返。不見安道。況今與貞叔共數日之遊。不必更入門矣。貞叔謝以足疾。未得卒陪杖履云。與之別。曛黑投沙斤驛。兩股疼痛。更不可步。翌日。盡還天嶺來隨人。騎馬行一里許。竝大川而南。皆巖川之下流。西望蒼山。纍纍然抑抑然。皆頭流之支峯也。

 

엄천사략


859년 통일신라 헌안왕 3년 함양 엄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굴산문 낭원대사 개청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5~930)의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遊車)이고, 신승(神僧)이 금인(金印)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8세 때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25세(859, 헌안왕 3)에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하여 *정행 스님으로부터 개청이라는 법명을 받고 화엄학을 익혔다.

고려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지은 오진탑비문에 대중(大中:당 선종 연호) 말년(13, 859) 신라 헌안왕 3년(859)에 개청이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했으니 이때 이미 엄천사는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이어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일음(玉軸一音)을 듣고 금강삼매(金剛三昧)의 진리를 얻었다고 한다. 구산선문의 사굴산문의 시조 오대산의 통효대사(通曉大師;*범일)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탑비의 원래 명칭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지탑비명(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之塔碑銘) 보물 제192호(최언위 글, 구족달 글씨)이다.

1407년 태종 7년 정해 12월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난 해에 사사(寺社)를 혁파하여 없앨 때에 삼한(三韓) 이래의 대가람(大伽藍)이 도리어 태거(汰去)하는 예에 들고, 망하여 폐지된 사사(寺社)에 주지(住持)를 차하(差下)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승도(僧徒)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산수(山水) 좋은 곳의 대가람(大伽藍)을 택하여 망하여 폐지된 사원(寺院)에 대신한다면, 거의 승도들로 하여금 거주할 곳을 얻게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 고을의 자복사를 모두 명찰(名刹)로 대신하였는데,

조계종(曹溪宗)에 양주(梁州)의 통도사(通度寺) 등등 감음(減陰)의 영각사(靈覺寺) 등등

천태종(天台宗)에 등등

화엄종(華嚴宗)에 등등

자은종(慈恩宗)에 승령(僧嶺)의 관음사(觀音寺) 등등 남포(藍浦)의 성주사(聖住寺) 등등 함양(咸陽)의 엄천사(嚴川寺) 등등

중신종(中神宗)에 등등

총남종(摠南宗)에 등등

시흥종(始興宗)에 등등. 태종실록.

1774년 영조 50년 갑오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 산청의 심적암(深寂菴)에서 서거. 추파는 함양 벽송사 고승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의 스승이다. 일찍이 생전에 함양 휴천면 동호리 소재 엄천사(嚴泉寺) 종각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다.추파집.

1783년 정조 7년 계묘 6월에 사근도 찰방 아정 이덕무가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1797년 정조 21년 정사 감모재 노광두:1772(영조 48)∼1859(철종 10)가 26세 때 엄천사에 이우하다.《感慕齋集》 年譜 26세 正祖 21년 丁巳 1797 4월 移做于嚴川寺.9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