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유두류록>

 
  신남석(21회) : http://www.kn21.or.kr

 

 
 

 지리산 기행(遊頭流錄)-선인들이 오른 우리 산

 
지리산 기행(遊頭流錄)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다-


김종직(金宗直 1432~1492)

나는 영남에서 태어나 자랐다. 두류산은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런데도 남쪽과 북쪽으로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며 세상사에 골몰하다보니 벌써 마흔 살이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이 산을 유람하지 못하였다.

신묘년(성종,1471) 봄에 함양으로 고을살이를 나갔는데, 두류산이 그 경내에 있어 우뚝한 푸른 봉우리들이 고개만 들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민생의 일로 조처할 일이 너무 많아 부임한 지 2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유람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유호인(兪好仁,김종직의 문인으로 자는 克己),임대동(林大仝,자는 貞叔)과 이 이야기를 할 적마다 마음속에 서운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금년(성종 3년,1472,김종직의 나이 42세 때이다) 여름 조위(曺偉,자는 太虛,무오사화에 연류돼 세상을 떠남)가 관동에서 와 나에게 예서(禮書)를 배웠다. 가을이 되자 그는 부모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 산을 유람하자고 청하였다.나 또한 생각건대 몸이 파리해지는 증세는 날로 심해져 다리의 힘은 날로 쇠약해지니,올해 유람을 하지 못한다면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울 듯하였다.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중추(仲秋,음력 8월)의 계절, 습하고 흐릿한 기운이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우는 새벽녘에 해돋이를 구경하고, 환히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조망하면 일거양득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드디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유호인을 불러 조위와 함께 “(*)수친서(修親書)에 실린 등산에 필요한 도구를 살펴보면서 준비물을 챙겼는데,거기 적혀 있는 물건 중에 조금은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였다.
(*수친서-수친양로서를 가리키는데,송나라 진직이 지은 것으로 노인을 봉양하는 자세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14일,덕봉사(德峯寺)의 해공 스님이 길을 안내하고, 한인효(韓仁孝,자는 百源)도 따라 나섰다.엄천(嚴川,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엄천강)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그때 법종 스님이 왔는데, 길을 잘 알므로 역시 길을 안내하게 했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갈라져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 벌써 빼어난 경치를 느끼게 하였다.

1리쯤 가니 환희대(歡喜臺)라는 바위가 있었다. 조위와 한인효가 그 꼭대기로 올라갔는데, 그 아래는 1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그 아래에 금대암(金臺庵,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금대산 자락의 절),홍련암,백련암 등 여러 암자가 보였다.

선열암(先涅庵)에 들렀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지었는데, 절벽 아래에는 맑은 샘 두 개가 있는데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바위 홈으로 물이 흘러 떨어지는데, 밑에 있는 오목하게 패인 바위가 그 물을 받아 맑게 괴었다. 바위틈에는 몇 치쯤 자란 적양(赤楊,오리나무)과 용수초(골풀의 일종으로 화문석 만드는 재료)가 나 있고, 그 바로 옆에 돌계단이 있는데, 등덩굴 한 가닥을 나무에 매여 놓아 그걸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을 오르내린다.

범종이 말하길 “옛날 한 비구(比丘)가 하안거(夏安居 승려들이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외출하지 않고 선방에 모여 참선 수행하는 것)에 들어가 우란분(于蘭盆)의 공양(供養,하안거가 끝난 뒤 온갖 만난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와 부모에게 공양함으로써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끝낸 뒤, 구름처럼 정처 없이 어디론가 떠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바위 곁에 오이와 나목(무)이 심어져 있고, 두어 되 곡식을 찧을 만한 절구통이 있을 뿐이다.

선열암에는 중이 살고 있지 않다. 이 암자 역시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동북쪽에는 천 여자가 넘는 독녀암(獨女巖)이란 바위가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우뚝 솟았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쌓고 그 속에서 도를 닦아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독녀암이라 부른다는 법종 스님의 말인데, 그때 쌓은 돌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는 잣나무가 있어 사다리를 놓고 그 잣나무를 부여잡고 바위를 돌아 등과 배와 살이 벗겨지도록 기어올라야만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데,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상이 올라가 엉거주춤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내 일찍이 산음(山陰,지금의 산청)을 오가며 이 바위를 보니,여러 산봉우리들과 키를 다투듯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 보였는데,지금 이곳에 오르니 머리털이 쭈뼛하고 등골이 오싹하며 정신이 아득하여 내가 아닌 듯하였다.

서쪽 능선을 따라 조금 가서 고열암(古涅庵)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가 서쪽 봉우리에 있었다. 유호인 등이 뒤에 처져 있어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三盤石)에 올랐다. 향로봉(香爐峯),미타봉(彌陀峯)이 발 아래 있었다. 잠시 뒤에 암자의 주지가 납의(衲衣,검게 물들인 승려의 옷)를 입고 와서 합장하고 말하길, “고을 원님께서 행차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디 계십니까?” 라고 하였다. 해공이 그에게 말을 않고 눈짓을 하자 그 승려의 얼굴빛이 조금 붉어졌다. 나는 장자(莊子)의 말을 빌어 위로하며 말하길, “불을 쪼이려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려는 자는 자리를 다툰다(*)고 하는데 나도 그러고 싶었던 거요. 지금 주지는 한 시골 늙은이를 만났을 뿐이니, 어찌 내가 고을의 원님인 줄 알았겠소.” 라고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김종직이 마음이 앞서 일행보다 먼저 삼반석에 오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날 나는 처음으로 험난한 길을 20리 남짓 걸었다.몹시 피곤하여 일찍 곯아떨어졌다가 한밤중에 잠이 깨었다. 달빛이 여러 산봉우리 삼킬 듯 뱉을 듯하고 구름이 용솟음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15일, 동이 틀 무렵에는 구름이 더 끼었다. 주지가, “제가 이 산에 오래 있었는데 구름의 형세로 보니 오늘은 비가 오지 않겠습니다.” 한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짐꾼을 줄여 돌려보내고 절을 나섰다. 푸른 넝쿨 우거진 수풀 속에는 저절로 죽은 큰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아 다리 구실을 하기도 하며,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땅에 걸쳐 있어 지나갈 때 말을 탄 것처럼 출렁거렸다. 머리를 숙이고 쓰러진 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언덕 하나를 넘었다. 해공이 말하길, “여기가 아홉 고개 중에서 첫 번째 고개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고개를 서너 개 넘으니 널찍한 곳이 나왔는데, 주위가 넓고 그윽하였다. 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며 굽이쳐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고,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만약 닭,개,소를 이끌고 들어와 나무를 베고 개간을 해서 조속,기장,삼,콩 따위를 심고 산다면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듯싶다. 내가 지팡이로 시냇가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호인을 돌아보며, “아, 어느 때나 그대와 함께 은둔해 이런 곳에서 노닐어볼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그제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다다랐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집 앞의 시냇가 바위에 앉아 조금 쉬었다.

여기서 영랑재(永郞岾)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 ‘봉선의기(封禪儀記,고대 제왕이 천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의례를 기록한 책)’에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만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본다.”고 한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고서 겨우 오르내릴 수 있었다.정오가 지나서야 영랑재(永郞岾)에 올랐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산봉우리가 가장 우뚝하였는데 이곳에 올라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이 우러러 보인다. 영랑은 신라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인데, 3천 명의 낭도를 이끌고 산수(山水)를 구경다니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다 해서 영랑점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소년대(少年臺)는 푸른 봉우리가 만 길이나 되는데, 소년이란 영랑의 낭도를 가리킨 말이 아닐까? 돌 모서리를 잡고 밑을 내려다보니 꼭 굴러 떨어질 것 같아 일행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흩어지고 햇살이 아래로 비추니 산의 동쪽과 서쪽 계곡이 환하게 열렸다. 멀리 바라보니 잡목은 하나도 없고 모두 삼나무,회나무,소나무,녹나무였는데, 말라죽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게 3분의 1은 되었다. 그 사이에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여 있어 한 폭의 그림인 양 아름답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는 모두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줄기가 왼쪽으로 휘어져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였다. 해송(海松,여기서는 잣나무)이 아주 많아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이면 잣을 따다가 공물(貢物)로 충당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한 나무도 열리지 않았으니, 정해진 양을 다 거두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수령(守令)인 내가 이 실상을 보았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해유령을 지나자 옆에 배바위(船巖)가 있었다. 범종이 말하길, “바닷물이 땅을 덮던 먼 옛날에 이 바위에다 배를 묶어두었는데 그때 게가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그대의 말대로라면, 그 당시 생물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겠구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남쪽 능선을 타고 중봉(中峯)에 올랐다. 이 산 속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모두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중봉만이 흙에 덮여 중후하였다. 그래서 빨리 걸을 수 있었다.조금 아래로 걸어내려가다가 말바위(馬巖)에서 쉬었다. 그곳에 맑고 시원한 물이 있었는데 마실 만하였다. 가뭄이 들면 사람이 이 바위에 올라 발울 구르면서 돌면 반드시 천둥과 비를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지난해와 올 여름에 사람을 보내 시험해 보았더니 제법 효험이 있었다.

저녁 무렵 천왕봉에 올랐다.구름과 안개 때문에 산천이 어두컴컴해 중봉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聖母)사당에 들어가 자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내가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 까닭을 물으니 “속설에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세수를 한 후, 의관을 갖추고 돌길을 더듬어 들어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빌었다.
“저는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할 뜻을 두었으나, 공무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금년 중주(仲秋)를 맞아 남쪽 지방의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우러러보게 되어 친구들과 구름을 타고 이 사당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김 서리듯 깔려, 어쩔 줄을 몰라 답답하고 좋은 날을 헛되이 보낼까 걱정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성모께서는 이 술을 받으시고 신통력을 발휘하사 오늘 밤은 하늘이 활짝 개어 달빛이 그림처럼 맑도록 해 주시며, 내일 아침에는 만 리를 볼 수 있도록 탁 트이게 하소서. 그래서 산과 바다를 갈라놓아 저희가 장관을 보게 된다면 어찌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 모두 사당 앞에 앉아서 술 몇 잔씩을 든 다음 일어났다. 성모 사당은 삼간 집인데 엄천리(嚴川里,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일대)에 사는 사람이 고쳐지었다. 판잣집이어서 못을 단단히 박아서 그렇지 바람에 날려 갈 것 같다. 사당 안 벽에는 두 승려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성모상(聖母像)은 돌로 되어 있는데, 얼굴이 예쁘고 머리를 쪽 찌었는데 분단장을 했다. 이마에 이지러진 자국이 있어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태조(太祖)께서 인월(引月) 싸움에서 승리하던 해에 쫓기던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왔다가 칼로 찍어 놓은 것을 손질했다고 한다.

동편에 돌을 오목하게 쌓아 둔 곳에 해공 등이 아까 빌었던 부처가 있다. 이 부처는 성모의 샛서방이라 한다. 그래서 성모는 누구냐고 물으니 이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대답이다.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記)에 보면, “지금 있는 지리산의 천왕(天王)은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하였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을 신격화시키기 위해 꾸며 낸 것이리라. 그런 것을 이승휴가 듣고 제왕운지에 실었으니 믿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이야 믿을 나위가 있겠는가?

해가 저물자 음산한 바람이 매우 거셌다. 동서로 거세게 불어와 지붕을 날려버리고 봉우리를 뒤흔들 듯한 기세였다. 축축한 안개가 몰려와 의관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함께 사당 안에다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몸을 부르르 떨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가져다 불을 피우고 쐬도록 했다. 밤이 깊어 희미한 달빛이 어렴풋이 비추는 것을 보고 반가워 일어났더니,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벽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온 천지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큰 바다가운데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이리저리 기울어지면서 파도 속에 휩쓸리는 듯하였다.

16일,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먼저 하인을 향적사로 보내 식사 준비를 하게하고, 지름길을 찾아 우리를 마중 나오도록 했다. 한낮이 지나서야 비가 조금 그쳤다. 비에 젖은 돌길이 매우 미끄러워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떠밀려 구르듯 내려갔다. 몇 리쯤 내려가니 쇠줄을 매어놓은 길이 있었는데 매우 위태로웠다. 그리고 곧바로 석굴을 통해 빠져나왔다.

힘을 다해 걸어서 향적사에 다다르니, 승려가 거주하지 않은 지 2년이나 되었다. 바위틈에서 나온 물이 나무 홈통을 따라 졸졸 흘러 물통에 떨어지고 있었다. 창문,자물쇠,향반(香槃),등잔 따위가 그대로 있었다. 하인들을 시켜 말끔히 청소하고 향을 피우게 한 뒤 들어가 쉬었다.

저물녘에 안개가 천왕봉으로부터 순식간에 걷혀내려 먼 하늘에 반사되는 빛이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손을 흔들며 매우 기뻐하였다. 문 앞의 반석에 나와 멀리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굽이굽이 흐르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이 운무 사이로 다 보이기도 하고 반쯤 보이기도 하였다. 꼭대기만 보이는 것은 마치 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투만 보이는 것 같았다. 산 정상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내가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聖母寺) 곁에 있는 흰 깃발만이 남쪽을 향해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승려가 내게 알려준 그곳이었다.

남북의 두 바위를 번갈아 바라보며 또 달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이때 동쪽 하늘은 아직 환하게 다 개이지 않았다. 게다가 한기가 느껴져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관솔불을 피워 방안을 훈훈하게 한 뒤 잠자리레 들었다. 한밤중이 되자 별빛과 달빛이 환하였다.

17일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느라 놀빛이 눈부시게 찬란하다. 일행 모두가 내가 피곤해서 더 오르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궂었던 날씨가 갑자기 갠 것으로 보아 하늘이 나에게 좋은 경치를 보게 하려는 모양인데, 지금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힘을 내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붙이고서 지름길로 석문(石門,통천문)을 통하여 위로 올라갔다. 발에 밟히는 초목마다 모두 서리가 내려 있었다.

성모 사당에 들어가 다시 술을 부어놓고 빌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확 트이는 것은 진실로 신명의 은혜입니다.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유호인,해공과 더불어 북쪽 돌무더기(천왕봉 정상) 위로 올라가니 조위는 벌써 판잣집(성묘사) 위쪽에 올라가 있었다. 기러기나 고니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높이 날 수는 없으리라. 때마침 날씨가 막 개어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었다. 다만 하늘이 푸르고 아득하여 끝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일행에게, “먼 곳을 보는 데 요령이 없으면 나무꾼들이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선 북쪽을 본 후 동쪽을 보고 그 다음 남쪽과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기면서 보면 되네.”하였다. 해공이 능숙하게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일러주었다.

이 산은 북쪽에서 뻗어 내리다 남원에 이르러 우뚝 솟아 반야봉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거의 2백여리를 뻗어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 솟구쳤다가 북쪽으로 서려 끝이 난다. 그 사방의 봉우리들은 시샘하듯 빼어나고 골짜기들은 다투듯 흘러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셀 수가 없다. 꼬리를 물고 빙 둘러 있는 성첩(城堞)은 함양의 성인 듯하고, 푸르고 누른 산빛이 어우러지고 흰 무지개가 가로지른 것은 진주의 강물인 듯하고, 점점이 이어지며 뾰족 솟아 푸른 소라처럼 생긴 것은 남해와 거제의 섬인 듯하였다. 그러나 산음(山陰).단계(丹溪 산청군 신등면),운봉(雲峰).구례,하동 현(縣)은 모두 산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산의 북쪽으로 가까이 황석산(黃石山,안의)과 취암산(鷲巖山,함양)이 있고, 멀리 덕유산(德裕山,거창 가조)과 계룡산(鷄龍山,공주),주우산(走牛山,금산)과 수도산(修道山,김천 지례)과 가야산(伽倻山,성주)이 있다. 동북쪽으로 가까이에 황산(皇山,산청의 왕산)과 감악산(紺嶽山, 합천 삼가)이 있고, 멀리 팔공산(八公山,대구)과 청량산(淸凉山,안동)이 있다 동쪽으로 가까이에 자굴산(의령)과 집현산(集賢山,진주)이 있고, 멀리 비슬산(毗瑟山,현풍)과 운문산(雲門山,청도)과 원적산(圓寂山,양산)이 있다. 동남쪽으로 가까이에 와룡산(臥龍山,사천)이 있다. 남쪽으로 가까이에 병요산(甁要山,하동의 금오산)과 백운산(白雲山,광양)이 있다. 남서쪽으로 멀리 팔전산(八顚山,고흥의 팔영산)이 있다. 서쪽으로 가까이에 황산(荒山,운봉)이 있고, 멀리 무등산(無等山,광주)과 변산(邊山,부안)과 금성산(錦城山,나주)과 위봉산(威鳳山,고산)과 모악산(母岳山,전주)과 월출산(月出山,영암)이 있다. 북서쪽으로 멀리 성수산(聖壽山,장수)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나지막한 언덕 같은 산도 있고, 용이나 호랑이 같이 기상이 서린 산도 있으며, 상 위에 음식을 차려놓은 듯 소담스런 산도 있고, 뾰족한 칼날처럼 날카롭게 치솟은 산도 있다. 그러나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은 뭇 산 중에서 제법 활처럼 우뚝 솟아 있다.

계립령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하고, 대마도 이남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하늘에 맞닿아 시야가 가물가물하여 더 이상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유호인을 시켜 기록할 만한 것을 적게 하였더니 위와 같았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스스로 바라보며, “예로부터 이 봉우리에 오른 사람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 우리처럼 이렇게 명쾌하게 살펴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고 스스로 축하하였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迦葉)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그 목에 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이 아닐까? 가섭상의 오른팔에 흉터가 있는데 불에 그슬린 듯하였다. 해공이 다시 말하기를 “이는 겁화(劫火)에 그을린 것으로 조금 더 타면 미륵세상이 된답니다.”라고 하였다. 돌에 난 흔적이 본래 그러한 것인데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내세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돈을 보시(布施)하게 하니, 참으로 가증스럽다.

가섭상의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이다. 그중의 하나는 아래가 반반하고 위는 뾰족하여 꼭대기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넓이는 겨우 한 자 정도였다. 승려들의 말에, 그 위에 올라가 예불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인 가운데 옥곤과 염정이 그 위에 거뜬히 올라 절을 하였다. 나는 절에서 바라보다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들을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이들은 너무나 어리석어 숙맥(菽麥,옛날 속담으로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쑥맥’이라 한다.)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운명을 판단하니, 승려들이 백성을 능란하게 속이는 것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법당에 몽산(蒙山,중국 원나라 때의 고승으로 려말 나옹화상과 교류한 인물)을 그린 족자가 있는데, 그림 위쪽에 이런 찬(贊)이 있었다.

불도를 닦는 것이 제일이니(頭陁第一)
이는 번뇌를 떨치기 위한 것(是爲抖擻)
밖으로는 속세를 멀리 하고(外已遠塵)
안으로는 찌든 때를 씻었네(內已離垢)
도를 얻은 것 먼저였고(得道居先)
적멸에 든 것 뒤였네(入滅於後)
눈 덮인 계산(雪衣雞山)
천년토록 썩지 않으리(千秋不朽)      

그 곁에 전서(篆書)로 작게 ‘청지(淸之)’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는데, 이는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다.[*비해당은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6-1453)의 호이고 청지는 그의 자이다.삼절은 시.서.화를 말한다. 이 그림과 찬(贊)의 글씨가 안평대군의 솜씨라는 말이다.]

법당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매우 달았다.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중냉천(中冷泉,중국 강소성 진강현 서북쪽에 있는 샘물 이름)과 혜산천(惠山泉,중국 강소성 무석현 서쪽 혜산에 있는 샘물 이름))도 이보다 더 낫지 못하리라. 샘물의 서쪽에 무너진 절이 덩그렇게 있었는데, 이것이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 깎아지른 봉우리에 있는 작은 탑은 돌의 결이 가늘고 윤기가 났다. 이 탑도 왜구가 무너뜨렸다. 뒷날 가운데 철심을 박고 다시 쌓았지만 유실되었다.

18일,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섬진강 조수(潮水)가 불어난 것을 바라보았다. 바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이었다. 밥을 먹고 모두 절의 서북쪽으로 가 영신봉(靈神峯) 위에서 쉬었다. 멀리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리 쯤 되었다. 그러나 발이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해서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수 없었다.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가니 길이 더욱 가파르고 험했다. 나무뿌리를 붙잡고 돌 모서리를 밟으면서 수십여 리를 내려왔는데, 모두 그런 길이었다.

동쪽을 향해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 듯하였다. 대나무 가지에는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따버렸다. 소나무 중에 큰 것은 백 아름이나 될 듯한데 산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가파른 곳을 내려와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진 곳(한신계곡과 지계곡이 만나는 가내소폭포)에 이르렀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산기슭에 진동했다. 맑고 깊은 못에는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입을 헹구고 언덕을 따라 지팡이를 끌면서 걸었는데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입구에는 초라한 사당이 있었는데, 하인들이 말을 끌고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서 실택리(實宅里,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실덕마을)에 다다랐다. 노인 몇 명이 길 왼쪽에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절을 하고 말하길, “우리 사또께서 두루 유람하셨는데도 별고 없으시나, 감히 하례를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공무를 제쳐두고 실컷 유람하였는데도 백성들이 탓하지 않으니, 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있었던 절)로,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조위,유호인,한인효는 용유담(龍遊潭,함양군 휴천면 임천강 상류에 있는 못)으로 유람을 떠났다. 나는 등구재(登龜岾, 마천면 창원리에서 합양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官衙)로 돌아왔다.

유람한 것은 겨우 닷새지만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 비록 처자와 아전들이 나를 보더라도 떠나기 전과 달라졌다고 여기리라.

아! 지리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崇山)이나 대산(岱山)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封禪,봉은 영산에 올라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선은 땅에 지내는 제사이다)을 하고 옥첩(玉諜)의 글을 봉하여 상제(上帝)께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武夷山)이나 형악(衡岳)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한창려(韓昌黎,당나라 때의 문장가 韓愈),주회암(朱晦菴,남송의 유학자 朱熹),채서산(蔡西山,송나라 때의 학자 蔡元貞) 같이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이나 손흥공(孫興公 진나라의 孫綽),여동빈(呂洞賓,당나라의 呂巖),백옥섬(白玉蟾) 같이 연단술(鍊丹術)을 수련하던 사람들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뒤따르며 그 속에서 배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용렬한 사람, 도망친 종, 신분을 숨긴 자, 불법을 배우는 자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오늘 이 산에 한 번 올라 유람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공무에 매여 바쁘다보니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五臺寺) 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산이 나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당나라의 시인 杜甫)의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다른 이름) 은 바다 건너 삼한(三韓)에 있네”라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임진년(성종 3년,1472) 추석이 5일 지난 날,이 글을 쓰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본관은 선산,호는 점필재.밀양 서대동에서 태어났다.16세 때 과거시험에 낙방하였으나 그때 지은 '白巖賦'가 세종의 마음에 들어 영산현(靈山縣)의 훈도(訓導)에 임명되었다.2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다.29세때에는 문과시험에 합격하였고 40세 때인 1470년 함양군수로 나아갔다.이때 훗날 무오사화(戊午史禍)의 한 원인이 된 유자광(柳子光)의 글을 불태워버렸다.1472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遊頭流錄"을 지었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어받은 부친 김숙자(金淑滋)에게 배워 영남학파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에게 학풍이 계승되면서 그는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화려한 시문이나 형식미를 따르지 않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학문 성향과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녔다.

점필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의 문인들이 많이 벼슬길에 올랐다.이들은 기성의 훈구파(勳舊派)와 갈등을 일으켰고, 급기야 1498년 김일손이 점필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한 것으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문인들도 참화를 입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청구풍아' 등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일선지',이촌록 등을 편찬했다.  


<참고>

지리산 기행:1472년(성종 3)년 8월 14일~8월 18일)

동행: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해공,법종,아전 옥곤,용상,하인

일정

8/14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고열암

8/15 고열암-(쑥밭재)-청이당-영랑재(하봉)-해유령-중봉-마암-
       천왕봉-성모사

8/16 성모사-통천문-향적사

8/17 향적사-통천문-천왕봉-통천문-중산(제석봉)-세석평원-창불
       대-영신사  

8/18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실택리-등구재-함양
       군 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