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과 쌍녀분


한국 최초의 고전소설, 최초의 傳奇小說


<최치원(崔致遠)>


   

 

[등장 인물]

* 최치원 : 874년 당에서 과거급제 후 초임지인 율수의 현위 직위
* 八낭자 : 여 주인공, 紫裙者(붉은 치마)로 칭, 女兄(姉). 定婚鹽商(소금장사)
* 九낭자 : 여 주인공, 紅袖者(붉은 소매)로 칭, 弟(妹). 許嫁茗고(차상인)
* 翠襟(취금) : 두 여주인공의 侍婢(시비)


[경 개]

(1) 최치원이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의 현위에 임명된다.
(2) 현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남쪽 경계에 있는 招賢館(초현관)에 머물던 중 앞 언덕에 있는 쌍녀분을 찾게된다.
(3) 무덤의 石門에다 죽은 두 여인을 꿈에라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4) 저녁 무렵 아릿다운 여자가 팔낭자, 구낭자가 준 붉은 주머니 2개를 들고 나타난다.
(5) 이 주머니에는 두 여인의 답시가 들어 있었다. 시의 내용은 최치원이 만나자는 제의에 응낙하는 것이었다.
(6) 심부름 온 여자는 두 여인의 시녀로 이름을 취금이라 하였다.
(7) 취금이 최치원의 답시를 가지고 사라진지 얼마 후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자매로 율수현 楚城鄕 張씨의 두 딸이었다. 그들은 부모가, 언니는 소금장사에, 동생은 차장사에게 강제로 정혼을 시켰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울화병에 걸려 요절했다고 하였다.(747년)
(8) 최치원이 두 여인에게 술을 권해 서로 마시면서 시를 지었는데 이 세상에는 없는 빼어난 시들이었다.
(9) 최치원이 시를 읊조리다가 음악을 곁들이자고 하였고 이에 구낭자가 시비 취금에게 노래를 시켰다.
(10) 셋이 취하게 되자 그는 노충과 완조(죽은 여인과 연분을 맺음)의 경우를 들면서 두 여자에게 연분을 맺자고 하였다.
(11) 두 연인은 순임금과 주유도 두 여인을 받아들였다며 허락하였다.
(12) 세 개의 베개에 하나의 이불을 깔아 셋이 동침하였는데 그 사랑의 곡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13) 그는 살아있는 미인의 배필은 되지 못하고, 무덤의 죽은 여인들을 껴안게 되었음을 탄식하며 이를 기연으로 돌렸다.
(14)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이 떠나면서 쌍녀분에 다시 오게되면 무덤이나 잘 보살펴 달라고 청하면서 이별하였다.
(15) 최치원은 그 다음날 아침 무덤가로 가서 탄식하며 장문의 시를 읊어 자신을 위로하였다.
(16) 그 뒤 최치원은 귀국해 속세를 벗어나 전국을 유람하였고 말년에는 해인사에서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주 제]

① 현실계의 남주인공이 비현실계의 영혼과 나누는 사랑의 곡진함
② 이국 땅에 벼슬하면서 정상적인 사랑 체험을 하지 못한 젊은 지식인이, 영혼의 여성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대리만족을 느껴보는 신비체험의 감회

 

[번역문]

김현양 외, {수이전 일문} (박이정, 1996) 참고

   최치원(崔致遠)

최치원은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12살에 서쪽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 건부(乾符) 갑오년(874)에 학사(學士) 배찬(裵瓚)이 주관한 시험에서 단번에 괴과(魁科)에 합격해 율수현위( 水縣尉)를 제수받았다, 일찍이 현 남쪽에 있는 초현관(招賢館)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관(館)앞의 언덕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어 쌍녀분(雙女墳)이라 일컬었는데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치원이 무덤 앞에 있는 석문(石門)에다 시를 썼다.

誰家二女此遺墳 어느 집 두 처자 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寂寂泉 幾怨春 쓸쓸한 지하에서 몇 번이나 봄을 원망했나.
形影空留溪畔月 그 모습 시냇가 달에 부질없이 남아있으나
姓名難問塚頭塵 이름을 무덤앞 먼지에게 묻기 어려워라.
芳情 許通幽夢 고운 그대들 그윽한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면
永夜何妨慰旅人 긴긴 밤 나그네 위로함이 무슨 허물이 되리오.
孤館若逢雲雨會 고관(孤館)에서 운우(雲雨)를 즐긴다면
與君繼賦洛川神 함께 낙천신(洛川神)을 이어 부르리.

쓰기를 마치고 관(館)으로 돌아왔다. 이 때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닐다 홀연 한 여자를 보았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그 여인은 손에 붉은 주머니를 쥐고 앞으로 와서 말하였다.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수재께 말을 전하랍니다. 아침에 특별히 어려운 걸음 하시고 거기다 좋은 글까지 주셨으니, 각각 화답하여 받들어 바친다 하셨습니다."
공이 돌아보고 놀라며 어떤 낭자인지 재차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아침에 덤불을 헤치고 돌을 쓸어내어 시를 쓰신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공이 그제서야 깨닫고 첫 번째 주머니를 보니, 이는 팔낭자가 수재에게 화답한 시였다. 그 시에.

幽魂離恨寄孤墳 죽은 넋 이별의 한이 외로운 무덤에 부쳤어도
桃 柳眉猶帶春 예쁜 뺨 고운 눈썹엔 오히려 봄이 어렸구나.
鶴駕難尋三島路 학 타고 삼도(三島)가는 길 찾기 어려워
鳳 空墮九泉塵 봉황비녀 헛되이 구천(九泉)의 먼지로 떨어졌네.
當時在世長羞客 살아있을 당시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 하였는데
今日含嬌未識人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품도다.
深愧詩詞知妾意 몹시 부끄럽게도 시(詩)의 글귀가 제 마음 알아주시니
一回延首一傷神 한번 고개 늘여 기다리고 한편으론 마음 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두 번째 주머니를 보니 바로 구낭자의 것이었다. 그 시에.

往來誰顧路傍墳 왕래하는 이 그 누가 길가의 무덤 돌아보리
鸞鏡鴛衾盡惹塵 난새거울과 원앙이불엔 먼지만 일어나네.
一死一生天上命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고]
花開花落世間春 꽃 폈다 지니 세상은 봄이로구나.
每希秦女能抛俗 늘 진녀(秦女)처럼 세상을 버리기 원해
不學任姬愛媚人 임희(任姬)의 사랑 배우지 않았도다.
欲薦襄王雲雨夢 양왕(襄王)을 모시고 운우(雲雨)를 나누려 하나
千思萬憶損精神 이런 저런 걱정에 마음 상하네.

라고 하였다. 또 뒤 폭(幅)에.

莫怪藏姓名 이름을 숨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孤魂畏俗人 외로운 혼백이 세속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欲將心事說 본심을 말하려 하니
能許暫相親 잠시 가까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이미 아름다운 시를 보고 자못 기뻐한 공은 그 여자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취금(翠襟)'이라고 했다. 공은 취금이 맘에 들어 추근거렸다., 취금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수재께서는 답장을 주시면 되련만 공연히 귀찮게 하십니다."
치원이 시를 지어 취금에게 주었다.

偶把狂詞題古墳 우연히 경솔한 글을 오래된 무덤에 썼으나
豈期仙女問風塵 선녀가 세상일 물을 줄 생각이나 했겠소.
翠襟猶帶瓊花艶 취금(翠襟)조차 구슬꽃같은 아름다움을 띠었으니,
紅袖應含玉樹春 붉은 소매 그대들은 응당 옥나무에 어린 봄기운을 품었겠지요.
偏隱姓名欺俗客 성명을 숨겨서 세속 나그네 속이시고
巧裁文字惱詩人 공교한 시로 시인을 괴롭히시는군요.
斷腸唯願陪歡笑 애가 끊어지도록 만나 즐겁게 웃기를
祝禱千靈與萬神 천영(千靈) 만신(萬神)께 기원하나이다

그리고 끝에.

靑鳥無端報事由 파랑새가 뜻밖의 일을 알려주어
暫時相憶淚雙流 그리움에 두 줄기 눈물 흐르네.
今宵若不逢仙質 오늘 밤 선녀같은 그대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判却殘生入地求 남은 인생 땅 속으로 들어가 구하리.

라고 썼다. 취금이 시를 얻고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가버리자 치원은 홀로 서서 슬프게 읊조렸다.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서 짧은 노래를 읊조렸는데 마칠때쯤 해서 갑자기 향기가 나더니 한참 후에 두 여자가 나란히 나타났다. 정녕 한 쌍의 투명한 구슬 같았고 두 송이 단아한 연꽃 같았다. 치원은 마치 꿈인 듯 놀라고 기뻐 절하면서 말하였다.
"치원은 섬나라의 미천한 태생이고 속세의 말단 관리라, 어찌 외람되게 선녀들이 범부(凡夫)를 돌아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냥 장난으로 쓴 글인데 문득 아름다운 발걸음을 드리우셨군요."
두 여자가 살짝 웃을 뿐 별 말이 없으니, 치원이 시를 지었다.

芳宵幸得暫相親 아름다운 밤 다행히 잠깐 만나뵙건만
何事無言對暮春 어찌하여 말없이 늦은 봄을 마주 대하십니까.
將謂得知秦室婦 진실부(秦室婦)라 생각했을 뿐
不知元是息夫人 원래 식부인(息夫人)인 줄 몰랐구려

이때 붉은 치마의 여자가 화내며 말하였다.
"담소를 나눌 줄 생각했더니 경멸을 당했습니다. 식규(息 )는 두 남편을 좇았지만 저희는 아직 한 남자도 섬기지 못했습니다."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은 말을 잘하지 않지만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군요."
두 여자가 모두 웃었다.
치원이 물었다.
"낭자들은 어디에 사셨고, 친족은 누구인지요?"
붉은 치마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와 동생은 율수현( 水縣)의 초성향(楚城鄕) 장씨(張氏)의 두 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현의 관리가 되지 못하고 지방의 토호(土豪)가 되어 동산(銅山)처럼 부를 누렸고 금곡(金谷)처럼 사치를 부렸습니다. 저의 나이 18세, 아우의 나이 16세가 되자 부모님은 혼처를 의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금장사와 정혼하고 아우는 차(茶)장사에게 혼인을 허락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매번 남편감을 바꿔달라고 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다가 울적한 마음이 맺혀 풀기 어렵게 되고 급기야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어진 사람 만나기를 바랄 뿐이오니 그대는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
치원이 말했다.
"옥같은 소리 뚜렷한데 어찌 혐의를 두겠습니까?"
이어서 두 여자에게 물었다.
"무덤에 깃든 지 오래되었고 초현관에서 멀지 않으니, 영웅과 만나신 일이 있을 터인데 어떤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는지요?"
붉은 소매의 여자가 말했다.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비루한 사람들뿐이었는데, 오늘 다행히 수재를 만났습니다. 그대의 기상은 오산(鼇山)처럼 빼어나서 함께 오묘한 이치를 말할 만합니다.
치원이 술을 권하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세속의 맛을 세상 밖의 사람에게 드릴 수 있는지요?"
붉은 치마의 여자가 말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좋은 술을 먹게 되었는데 어찌 함부로 사양하고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술을 마시고 각각 시를 지었으니 모두 맑고 빼어나 세상에 없는 구절들이었다. 이때 달은 낮과 같이 환하고 바람은 가을날처럼 맑았다. 그 언니가 곡조(曲調)를 바꾸자고 하였다.
"달로 제목을 정하고 풍(風)으로 운(韻)을 삼지요."]
이에 치원이 첫 연을 지었다.

金波滿目泛長空 금빛 물결 눈에 가득 먼 하늘에 떠있고
千里愁心處處同 천리 떠나온 근심은 곳곳마다 한결 같구나.

팔랑이 읊었다.

輪影動無迷舊路 수레바퀴 옛길 잃지 않고 움직이며]
桂花開不得春風 계수나무꽃 봄바람 기다리지 않고 피었네

구랑이 읊었다.

圓輝漸皎三更外 둥근 빛 삼경(三更) 너머 점점 밝아오는데
離思偏傷一望中 한번 바라보니 이별 근심에 가슴만 상하는구나.

치원이 읊었다.

練色舒時分錦帳 하얀 빛깔 펼쳐질 때 비단 장막 열리고
珪模暎處透珠  홀무늬 비추는 곳 따라 구슬 창 통과하네.

팔랑이 읊었다.

人間遠別腸堪斷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져 애가 끊어질 듯
泉下孤眠恨莫窮 지하의 외로운 잠에 한(恨)은 끝도 없어라.

구랑이 읊었다.

每羨嫦娥多計校 늘 부러워했네. 상아가 계교 많아
能抛香閣到仙宮 향각(香閣)버리고 선궁(仙宮)에 갔음이여.

공이 더욱더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때 앞에 연주하는 음악이 없다면 좋은 일을 다 누렸다 할 수 없겠지요."
이에 붉은 소매의 여자가 하녀 취금을 돌아보고서 치원에게
"현악기가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가 사람 소리만 못하지요. 이 애는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 "
라 하고 소충정사(訴衷情詞)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한 번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청아해서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세 사람은 얼큰히 취했다. 치원이 두 여자를 꼬여 말하였다.
"일찍이 노충(盧充)은 사냥을 갔다가 홀연 좋은 짝을 얻었고, 완조(阮肇)는 신선을 찾다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하신다면 좋은 연분을 맺고 싶습니다."
두 여자가 모두 허락하며 말하였다.
"순(舜)이 임금이 되었을 때 두 여자가 모시었고 주랑(周郞)이 장군이 되었을때도 두 여자가 따랐지요. 옛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오늘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치원은 뜻밖의 허락에 기뻐하였다. 곧 정갈한 베개 셋을 늘어놓고 새 이불 하나를 펴놓았다. 세 사람이 한 이불 아래 누우니 그 곡진한 사연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치원이 두 여자에게 장난스레 말하였다.
"규방에 가서 황공(黃公)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에 와서 진씨(陳氏)여자를 껴안았도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만남 이루었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언니가 시를 지어 읊었다.

聞語知君不是賢 그대의 말 들으니 어질지 못하군요.
應緣慣與女奴眠 인연이 그렇다면 그 여자와 자야했을 것을

시를 마치자마자 동생이 그 뒤를 이었다.

無端嫁得風狂漢 뜻밖에 풍광한(風狂漢)과 인연을 맺어
强被輕言辱 지선(地仙)을 모욕하는 경박한 말을 들었구나.

공이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五百年來始遇賢 오백 년만에 비로소 어진 이 만났고
且歡今夜得雙眠 또 오늘 밤 함께 잠자리를 즐겼네.
芳心莫怪親狂客 고운 그대들 광객(狂客)을 가까이 했노라 한탄하지 말라
曾向春風占謫仙 일찍이 봄바람에 적선(謫仙)이 되었었으니.

잠시 후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자가 모두 놀라며 공에게 말했다. ]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이별이 길어지면 만날 날 가까워지지요. 이는 인간세상에서 귀천(貴賤)을 떠나 모두 애달파하는 일인데 하물며 삶과 죽음의 길이 달라 늘 대낮을 부끄러워하고 좋은 시절 헛되이 보냄에랴! 다만 하룻밤의 즐거움을 누리다 이제부터 천년의 길고 긴 한을 품게 되었군요. 처음에 동침의 행운을 기뻐했는데 갑자기 기약없는 이별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두 여자가 각각 시를 주었다.

星斗初回更漏  별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물시계 다하니
欲言離緖淚 干 이별의 말 하려하나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르네.
從玆便結千年恨 이제부턴 천년의 긴 한만 맺히고
無計重尋五夜歡 깊은 밤의 즐거움 다시 찾을 기약 없어라.

다른 시에 읊었다.

斜月照窓紅 冷 지는 달빛 창에 비추자 붉은 뺨 차가와지고
曉風飄袖翠眉  새벽 바람에 옷깃 나부끼자 비취 눈썹 찌푸리네
辭君步步偏腸斷 그대와 이별하는 걸음걸음 애간장만 끊어지고
雨散雲歸入夢難 비 흩어지고 구름 돌아가버려 꿈에 들어가기도 어려워라.

치원은 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 여자가 치원에게 말하였다.
"혹시라도 다른 날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신다면 황폐한 무덤을 다듬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치원은 무덤가로 가서 쓸쓸히 거닐면서 읊조렸다. 깊이 탄식하고 긴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하였다.

草暗塵昏雙女墳 풀 우거지고 먼지 덮혀 캄캄한 쌍녀분
古來名迹竟誰聞 옛부터 이름난 자취 그 누가 들었으리.
唯傷廣野千秋月 넓은 들판에 변함없이 떠있는 달만 애달프고,
空鎖巫山兩片雲 부질없이 무산(巫山)의 두 조각 구름 얽혀있네.
自恨雄才爲遠吏 뛰어난 재주 지닌 나 한스럽게 먼 지방의 관리되어
偶來孤館尋幽邃 우연 고관(孤館)에 왔다 조용한 곳 찾았네.
戱將詞句向門題 장난으로 시귀를 문에다 썼더니
感得仙姿侵夜至 감동한 선녀 밤에 찾아왔도다.
紅錦袖紫羅裙 붉은 비단 소매의 여인, 붉은 비단 치마의 여인
坐來蘭麝逼人薰 앉으니 난초향기 사향향기 스미네
翠眉丹頰皆超俗 비취 눈썹 붉은 뺨 모두 세속을 벗어났고,
飮態詩情又出群 마시는 모습과 시상(詩想)도 뛰어나네.
對殘花傾美酒 지고 남은 꽃 마주하여 좋은 술 기울이고
雙雙妙舞呈織手 쌍으로 비단 같은 손 내밀며 묘하게 춤을 추네.
狂心已亂不知羞 미친 내 마음 이미 어지러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芳意試看相許否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할지 시험해 보았네.
美人顔色久低迷 미인은 얼굴을 오래도록 숙이고 어쩔 줄 몰라
半含笑態半含啼 반쯤은 웃는 듯 반쯤은 우는 듯하네.
面熟自綠心似火 낯이 익자 자연히 마음은 불같이 타오르고,
 紅寧假醉如泥 뺨은 진흙처럼 발개져 취한 듯하네.
歌艶詞打 合 고운 노래 부르다 기쁨 함께 누리니
芳宵良會應前定 이 아름다운 밤 좋은 만남은 미리 정해진 것이었으리.
 聞謝女啓淸談 사녀(謝女)가 청담한 것 듣고,
又見班姬擒雅詠 반희(班姬)가 고운 노래 뽑는 것 보았도다.
情深意密始求親 정이 깊어지고 마음이 살뜰해져 친해지기 시작하니
正是艶陽桃李辰 바로 늦은 봄날 도리꽃 피는 시절이구나.
明月倍添衾枕思 밝은 달빛 베개맡 생각 곱으로 더하고,
香風偏惹綺羅身 향기로운 바람 비단같은 몸 끌어 당기는구나.
綺羅身衾枕思 비단 같은 몸 베갯맡 상념이여.
幽歡未已離愁至 그윽한 즐거움 다하지 않았는데 이별의 근심 왔네.
數聲餘歌斷孤魂 몇 가락 여운의 노래 외로운 혼 끊고,
一點殘燈照雙淚 한 가닥 스러지는 등잔불 두 줄기 눈물 비추네.
曉天鸞鶴各西東 새벽녘 난새와 학은 각각 동서로 흩어지고,
獨坐思量疑夢中 홀로 앉아 꿈인가 여겨보네.
沈思疑夢又非夢 깊이 생각하여 꿈인가 하나 꿈은 아니라,
愁對朝雲歸碧空 시름겨워 푸른 하늘에 떠도는 아침 구름 마주 대하네.
匹馬長嘶望行路 말은 길게 울며 가야할 길 바라보나,
狂生猶再尋遺墓 광생(狂生)은 오히려 다시 버려진 무덤 찾았도다.
不逢羅襪步芳塵 버선 발 고운 먼지 속으로 걸어 나오지 않고,
但見花枝泣朝露 아침 이슬에 흐느끼는 꽃가지만 보았네.
腸欲斷首頻回 창자 끊어질 듯 머리 자주 돌리나,
泉戶寂廖誰爲開 저승 문 적막하니 누가 열리오,
頓 望時無恨淚 고삐 놓고 바라볼 때 끝없이 눈물 흐르고,
垂鞭吟處有餘哀 채찍 드리우고 시 읊는 곳 슬픔만 남아있도다.
暮春風暮春日 늦봄 바람 불고 늦봄 햇살 비추는데
柳花 亂迎風疾 버들개지 어지러이 빠른 바람에 나부끼도다.
常將旅思怨韶光 늘 나그네 시름으로 화창한 봄날 원망할 터인데.
況是離情念芳質 하물며 이렇게 이별의 슬픔 안고 그대들 그리워함에랴.
人間事愁殺人 인간 세상의 일 수심의 끝이 없구나.
始聞達路又迷津 비로소 통하는 길을 들었는데 또 나루를 잃었도다.
草沒銅臺千古恨 잡초 우거진 동대(銅臺)엔 천년의 한 서려 있고,
花開金谷一朝春 꽃핀 금곡(金谷)은 하루 아침의 봄이로구나.
院肇劉晨是凡物 완조(阮肇)와 유신(劉晨)은 보통사람이고,
秦皇漢帝非仙骨 진황제(秦皇帝)와 한무제(漢武帝)도 신선이 아니네.
當時嘉會杳難追 옛날의 아름다운 만남 아득하여 쫓지 못하고,
後代遺名徒可悲 지금까지 남겨진 이름 헛되이 슬퍼하는구나.
悠然來忽然去 아득히 왔다가 홀연히 가버리니,
是知風雨無常主 비바람 주인 없음을 알겠네.
我來此地逢雙女 내가 이곳에서 두 여인을 만난 것은
遙似襄王雲雨夢 양왕(襄王)이 운우(雲雨)를 꿈 꾼것과 비슷하도다.
大才夫大才夫 대장부 대장부여!
壯氣須除兒女恨 남아의 기운으로 아녀자의 한을 제거한 것 뿐이니,
莫將心事戀妖狐 마음을 요망스런 여우에게 연연해 하지 말아라.

나중에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다 길에서 시를 읊었다.

浮世榮華夢中夢 뜬 구름 같은 세상의 영화는 꿈 속의 꿈이니,
白雲深處好安身 하얀 구름 자욱한 곳에서 이 한 몸 좋이 깃들리라.

이어서 물러가 아주 속세를 떠나 산과 강에 묻힌 스님을 찾아갔다. 작은 서재를 짓고 석대(石臺)를 찾아서 문서를 탐독하고 풍월을 읊조리며 그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남산(南山)의 청량사(淸凉寺). 합포현(合浦縣)의 월영대(月影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석남사(石南寺), 묵천석대(墨泉石臺)에 모란을 심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니, 모두 그가 떠돌아 다닌 흔적이다. 최후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그 형인 큰 스님 현준(賢俊) 및 남악사(南岳師) 정현(定玄)과 함께 경론(經論)을 탐구하여 마음을 맑고 아득한 데 노닐다가 세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