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 최한후가 간행한 황산곡시집의 책판을 후임 최연손이 불태우다
성종 13년(1482)에 전 거창현감(1479~1482재임) 유호인이 지은 발문을 소개한다.
"내가 마침 부모가 연로하다고 사직하고 함양에 돌아올 때《황산곡집 黃山谷集》1질을 성임(成任 1421-1484) 공에게 빌렸고 또 별집(別集) 산질을 그 아우 성현(成俔 1439-1504) 공에게 얻었다. 그것을 갖고 뇌계(水+雷 溪 상림 상류) 가에서 음미했는데 거창에 부임하게 되어 널리 펼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이때 김자행(金自行)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하형산(河荊山) 공이 도사(부지사)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부탁해서 각수를 모집하여 판각하였다. 절반쯤 했을 때 가뭄이 들고 농사일이 급박해 즉시 편의상 이웃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게 했는데 지연되어 해를 넘겼다.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채 나도 그만두고 돌아왔다.
지금 관찰사 이철견(李鐵堅 1435-1496, 1481.10~1482.7 재임) 공이 우리 고을 군수 최한후(崔漢侯) 선생에게 그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고을을 널리 감독하며 친히 오류를 바로잡아 한결같이 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겨우 열흘 만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중종실록》중종 2년(1507) 10월 7일(정유)에 사헌부가 아뢰기를,
"봉상시 정 최연손(崔連孫)이 전에 함양군수를 역임할 때 그 아들의 장모 집이 고을 안에 있었는데 본래 빈궁하여 초가집을 짓고 살았었습니다. 연손이 부임한 지 6년 동안에 크게 기와집을 짓고 곡식이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황산곡집》의 책판이 고을에 있었는데 유림이 다투어 인쇄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연손은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그 책판을 불태웠으니, 이것은 선비가 차마 할 짓이 아닙니다. 그의 직책을 바꾸소서." 라고 하였다.
봉상시 정(정3품)에 임명되자마자 탄핵을 받았으니 이 바로 전에 함양군수를 역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연산군 8년(1502)부터 중종 2년(1507)까지 만 5년의 임기를 채운 것이다. 《황산곡집》은 중국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동파와 병칭되는 산곡 황정견의 시집으로 한국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교본이었으므로 널리 유행되었다. 화순 최씨 양성재(養性齎) 최한후가 성종 13년(1482) 에 함양군수로서 간행하였는데 그 20년 뒤의 후임군수가 유림들의 잦은 인쇄 요구에 싫증을 내어 발본색원 책판을 소각시켜 버린 것이다.
전주 최씨인 암계(巖溪) 최연손은 성종 11년(1480)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도 동시에 합격하였으며 성종 20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 이조 참판(총무처 차관)까지 지낸 인물이니 그런 짓을 할 교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번거로워서 그랬든 송시풍을 반대해서 그랬든 문화재는 사라진 것이다.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차남 최엄조(崔엄祖)가 함양 사람 남원 양씨와 혼인하였으니, 그 인연으로 전최 집안이 함양 주로 뇌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리라. 최연손의 증조부인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도 세종 10년(1425) 12월 10일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부임하였었으니 함양과 인연이 깊은 집안이다.
佔畢齋集卷之八 |
詩 |
|
五福於人備却難。公無一欠性情寬。靈椿拔地枝方旺。神劍衝星氣倏殘。編簡謾敎評宿德。鄕閭無復奉淸歡。鄙夫豈是雷同哭。爲忝當時子姪看。
점필재집 시집 제8권 |
[시(詩)] |
최 판서선문에 대한 만사[挽崔判書善文]동년(同年)인 최한공(崔漢公)과 한후(漢侯)·한백(漢伯)·한번(漢蕃)의 아버지이다. |
사람에게 오복을 갖추기가 어렵건마는 /
五福於人備却難
공에겐 하나도 흠결 없고 성정도 관후하였네 / 公無一欠性情寬
우뚝 솟은 영춘에 가지는 한창 왕성한데 / 靈椿拔地枝方旺
번쩍이는 신검은 기가 언뜻 쇠잔하여라 /
神劍衝星氣倏殘
서책은 부질없이 쌓은 덕을 평론케하고 / 編簡謾敎評宿德
마을에선 다시 평소의 모습 뵐 수 없게 되었네 /
鄕閭無復奉淸歡
못난 내가 어찌 남을 따라서 곡하리요 / 鄙夫豈是雷同哭
생전에 자질처럼 보아주신 때문이라오 /
爲忝當時子姪看
[주D-001]영춘 :
매우 장생(長生)한다는 나무의 이름인데, 본디 남의 부친(父親)에
비유한다.
海東雜錄[一]○權鼈 |
本朝[一] |
崔漢公 |
金山人。字台甫。天順己卯春。與諸友生同赴鄕試。馬上忽夢垂楊裊裊嚲于馬首。覺而異之。說與同行。友生曰。垂楊之狀。正似靑蓋。汝夢奇甚。吾當買之。崔先生曰。吉兆已定。何可賣得。遂捷鄕圍。果登第。
瑣錄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최한공(崔漢公) |
○ 본관은 금산(金山)으로 자는 태보(台甫)이다.
천순(天順) 기묘년(세조 5년) 봄에 여러 학우들과 더불어 향시(鄕試)에 응하였는데, 말 위에서 문득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말 머리에 휘늘어 지는
꿈을 꾸었다. 깨어서 이상히 여겨 동행자에게 말하니, 그 학우가, “수양버들의 형상은 꼭 청개(靑蓋 왕족이 타는 수레의 푸른 뚜껑) 같으니,
너의 꿈은 심히 기이하다. 내가 그 꿈을 사겠다.” 했다. 최 선생은, “길한 조짐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어찌 팔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드디어 향시에서 합격하고 과연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소문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