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

 

고운 선조 바로보기

 

始祖 孤雲崔致遠先生 바로보기

 

          

                                                            中國遺蹟地踏査와 親撰詩文에 의거

 

                                             從前 史書의 잘못을 전면 是正한다.

                                                                                 

                              (필자 / 崔 在 旭 / 현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회장, 전 환경부 장관, 2선 국회의원, 경향신문사 사장 역임)

 

 

(序 一) 잘못된 기록이 많은 이유

  

  文昌侯 孤雲 선생에 관해서는 각종 史書와 교과서에서부터 연구논문, 연구책자, 위인전, 백과사전, 遺蹟地 碑文, 讚揚詩, 事蹟 안내문, 郡誌, 관광팜플렛, 전설, 족보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분야에 걸쳐 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에는 오류와 혼선과 왜곡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고운선생이 활동하신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천 1백여 년 전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역사학-고고학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된 시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진실을 명확히 究明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둘째, 진실 구명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고운선생의 글들이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분야를 전공했다는 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당시로서는 최고 품격>의 글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일류 문인의 문체는 四六騈儷體였는데 이것은 글자를 넉 자나 여섯 일곱 자씩 짝을 지어 문장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또 얼마나 많은 故事成語가 문장 속에 소개되는가가 글의 격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고사성어도 천년 뒤의 우리가 즐겨 쓰는 고사성어와는 범위와 질이 판이하게 달랐고, 또 四六이라는 字數제한이 있기 때문에 극히 縮略된 형태로 활용되었다. 그러니 글자 한 두 자로 고사 전체를 대변하는 방식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는데, 이러한 글을 후인들이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史家나 연구자들의 恣意적인 자세를 들 수 있다. 典故가 어려워서 고운선생의 글을 이해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심지어는 진실을 뒤바꾸는 誤譯까지 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사료의 의식적인 무시 내지 배제이다. 金富軾(1075-1151)은 삼국사기를 쓸 때 고운선생이 편찬한 桂苑筆耕을 거의 참고하지 않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선생이 "縣尉의 治積考査로 승진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承務郞 侍御使 內供奉 魚袋 등의 직첩을 '우수 지방관'에게나 주는 것 정도의 보통 일로 본 것이다. 계원필경을 보면 이러한 직첩이 얼마나 획득하기 어렵고 또 영광스러운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나오는데 이를 간과했다. 그리고 시대의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檄黃巢書'에 관해서도 삼국사기는 언급이 없다. 또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선생의 力作 '四山碑銘'을 참고 대상에서 일체 배제했다. 사산비명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도 없고, 물론 그 비명을 보면 명백해지는 엄연한 사실도 참고하지 않았다. 고운 선생의 아버지 부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김부식이 유학자라 불교 관계 글을 평소부터 외면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선의로 해석해서 고운선생의 聲價에 儒學界로부터 이의가 제기될 소지를 미리 봉쇄하려는 충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연유야 어떻든 고운선생의 참다운 肖像을 정립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는 그 불완전한 기술을 이후의 유학자들이 천 여 년에 걸쳐 이어받아 옴으로써, 고운선생 생애의 진실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어려움을 끼친 端初가 되었다.

  다섯 째, 고의적인 왜곡이다. 이른바 '鷄林黃葉 鵠嶺靑松'이 그 한 예이다. 뒤에 설명한다.

  여섯 째, 종교적이나 국수적인 한정된 시야에서 가해진 비판이다. '佛' '慕華'說이 그것이다. 이것도 뒤에 설명한다.

 

(序 二) 새 傳記 작성의 원칙

 

  이러한 오류와 혼선과 왜곡을 걷어내고 조금이라도 진실에 더 접근한 고운선생 전기가 나올 것을 待望한다는 차원에서, 다음에 관계자료를 분야 별로 상세히 정리해서 傳記양식으로 기록한다.

  (1) 이 정리에서 주축이 되는 것은 '계원필경집' '사산비명'을 포함한 고운선생 親撰시문이다.

  옛사람을 아는 데에는 몇 백년 뒤 사람의 상자 가득한 글보다도 당사자 본인의 글 한 장이 더욱 요긴하다. 史書로서 고운선생을 최초로 언급한 삼국사기만 해도 고운선생 활동기 150년 뒤의 작품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사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또 136년이 더 지나서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서의 기록은 고운선생 親撰시문의 내용과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기에 활용될 것이며 그 뒤 오늘날까지의 제반 기록이나 연구논문도 이런 원칙 하에서 보조적으로 인용될 것이다.

 (2) 2001년 10월 중순 선생이 도통순관으로서 중국생활 마지막 기간을 보낸江蘇省 揚州市에서 중국정부가 고운선생을 위해 주최한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15일부터 20일까지 1주일간에 걸쳐 열린 제1회 '중-한 경제문화 교류주간'의 일부 행사로 개최된 것이지만 모든 행사의 사실상의 주제는 고운선생이었다. 15일 오전 9시 당나라 때의 城이 보존되어 있는 唐城유적지 박물관에서 '최치원선생 史料陳列展'(동상도 제작 전시)이 개막되었으며 이어 10시 경주최씨 한국중앙종친회 주최로 告由祭가 열렸는데 여기에 양주시 孫永如부시장이 亞獻官으로 참례해 주었다. (박물관 董學芳관장은 박물관 옆 넚은 곳에 선생 기념관을 지을 것을 계획중이라면서 그 鳥瞰圖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사료 진열전과 고유제 행사가 끝난 후 양주시 문물考古연구소 顧大風소장은 선생이 도통순관으로 근무하며 '檄黃巢書' 등을 썼던 '회남절도사 관아터[衙署遺址]'(다음 三항에서 설명)와 또 선생이 자주 왕래했던 길(관아서 寶姓村 나루터에 이르는 5백m 길. 이곳에 '최치원선생 經行處'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음)을 우리 종인 일행에게 정중히 안내하고 고증 설명을 해 주었다. 이어 오후 6시에는 季建業양주시장이 우리 일행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고 이어 경제문화 교류주간 개막축하 음악회에 우리 일행 전원을 초청했다. 이튿날인 16일에는 양국학자 51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치원 학술세미나'가 사흘간 일정으로 개최되었다. 선생의 후예들로서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행사들이었다. 이 행사에 참석한 宗人들은 이외에도 선생이 첫 벼슬(縣尉)을 한 강소성  水縣을 방문, 그곳 박물관 경내에 건립돼 있는 선생의 동상에 참배했으며 이어 선생과 관련한 설화가 있는 이웃 高淳縣의 雙女墳도 둘러보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일행이 보고 들어 확인한 사항들은 다음에 작성하는 '고운선생 생애 신규정리'에 반영될 것이다.

 (3) 종전 기록에 오류와 혼선이 있어 시정이나 교통정리가 돼야 할 부분은 傍線 표시를 해서 모든 사람이 참고하기 쉽도록 했다.

 (4) 이 정리작업의 기본 텍스트가 되는 親撰시문 내용은 굵은 고딕체로 표시했다.

 (5) 宗人이 아닌 일반 연구자들도 이 자료를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조'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으며 尊稱 敬語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諸宗의 이해가 있으시기를 간망한다.

 

------------------------------(一) 출생과 世系------------------------------

  고운선생은 신라 헌안왕  1년인 서기 857년 경주 沙梁部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는 "역사의 전함이 없어져 윗 代를 알 수 없다.[史傳泯滅 不知其世系]"고 하지만, 사량부가 신라의 개국 원훈 蘇伐都利 공이 崔씨를 得姓한 곳(삼국사기 儒理尼師今條)인 점으로 보아 그의 후예이고, 아버지는 親撰한 글(大崇福寺 碑銘)에 肩逸이라 기록되어 있다. 견일은 왕실 사찰인 大崇福寺를 지을 때 큰 기여를 한 점, 또 이를 훗날 임금이 그 아들인 고운선생에게 직접 술회하기까지 한 점, 그리고 선생의 가문이 당시 骨品制 사회에서 임금이 될 수 있는 眞骨 다음의 六頭品이었던 사실 등을 감안하면 상당한 정도의 지위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구체적인 사항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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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선생은 어릴 때부터 명민하고 학구열이 깊어 12세 때 (868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다. 유학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國費유학이 아니고 私費유학으로서였다. 고국을 떠나기 앞서 아버지는 "네가 10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겠다."(계원필경 서문)라고 엄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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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18세에 科擧 及第-----------------------------

  선생은 당나라에서 "漢 나라 孫敬이 새끼줄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공부했던 일과, 전국시대의 蘇秦이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 가며 졸음을 쫓아 공부했던 일을 본받아 열심히 노력하여"(계원필경 서문) 6년 만인 874년 진사 과거에 응시, 첫 번 도전에 당당히 합격했다. 당나라는 이 때 외국인에게도 '賓貢'이라 간주하여 응시문호를 개방했다. 당시 나이 18세(만으로 17세), 낯설고 땅선 이국인으로서는 대단한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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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급제 후 몇 년 간 고독 속의 문필생활-------------------

  당나라 서울 長安에서 반년 여에 걸친 진사 급제 축하기간을 보낸 선생은 외국인인 처지라 고독과 착잡함 속에서 앞으로의 향로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한동안 고뇌한다. 그러다가 당나라 東都라 불리던 洛陽으로 옮겨 얼마동안 문필생활을 한다. 이때 지은 詩賦  30수로 책 3편을 만들어 뒷날 신라왕에게 봉정했는데(계원필경집序)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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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縣尉로 관직 시작---------------------------

  선생이 처음 맡은 관직은 지방관으로서 20세 때인 876년 水현위에 임관되었다.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현위는 그 직급은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 [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尉撫疲 ]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계원필경-'이함에게 천장현위를 보직시킴')고 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요새로 치면 미성년인 만19세의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중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우대(최준옥. '事蹟考' 1982.寶蓮閣 265면)였다.

  고운 선생 본인도 "본디 바닷가 출신으로 가문을 빛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더욱이 먼 곳 사람으로 한 고을 중책까지 맡았다." (사탐청요전장)고 회상했다. 이때 "급료가 많고(현위의 연봉은 200-300석이었다고 함-최완수 '신동아' 2001. 9월호) 일은 한가로와 더욱 배움에 촌음을 헛되이 않아 지은 글 모두 5권"(계원필경서문에서 중산복궤집 내력 설명)이었다. 선생은 귀국 후 이를 역시 신라왕에게 봉정했으나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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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학문정진 위해 縣尉 사직--------------------------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꿈이던 선생은 877년 겨울 현위의 직을 사임하고 산수간에 들었다. 그리하여 "학문이 넓은 바다에 이르기를 기약하고[學期至海] 절차탁마"했다. (계원필경 제2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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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 가난과 난리로 절박한 상황에----------------------

  하지만 혈혈단신의 외국청년으로서 공부에 장기간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두 세 해가 지나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으며"(제2장계) 설상가상으로 난리의 피 바람이 신변을 위협했다. 즉 885년에 반란을 일으킨 黃巢의 군대가 몸 가까이에 까지 밀어닥쳐  879년 6월 12일에는 율수의 州都인 宣州가 함락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계가 아닌, 생사 자체가 걸린 절체 절명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늘이 높으니 물을 곳이 없고 날이 저무니 어디로 가야할까[天高莫問 日暮何歸]"(여객장서) "어디로 향해야 생을 안돈할 수 있을까[指何門而欲安生計]."(재헌계)란 말은 바로 이런 급박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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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 高騈의 幕僚로 관직 다시 시작-----------------------

  이때 마침(879년 10월) 문인 출신인 高騈이 鎭海 節度使에서 淮南 절도사로 전임해 왔다. 그리고 이어 12월 高騈은 東面 諸道行營兵馬都統(동부지방 군총사령관)을 겸했다.(자치통감 권253 唐紀69 1750-1752면)

   高騈은 권력이 막강해지고 일이 많아지자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급제 동기생인 顧雲이 그 막하에 있었는데 선생의 처지를 동정한 그의 추천으로 선생은 館驛(兵站遞信支廳) 巡官(절도사 직속. 判官 推官의 다음 서열)에 기용되었다. 즉 高騈의 幕僚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임지는 당시 절도사 관할지 수도인 揚州의 외곽도시 高郵盂城이었다 (이 관역은 현재도 "중국의 現存最完整의 郵驛유적지"(중국동방항공 발행 '銀燕' 2001년 9월호)로 관광지가 되어 있다).

  위기에 처했던 선생으로서는 그야말로 "거적을 덮는 설움을 면하고[免泣牛衣]"(사차택장) "물고기와 거북이 물을 만나 갑자기 살아난[龜魚投水驟喜命蘇]"(재헌계) 격이었다. 현위를 지냈다는 경력 때문에 반란군에 잡힐 경우 처형당할지도 몰랐던 선생은 이 관역순관 취임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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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안도와 여유------------------------

  절박함에서 벗어난 선생은 찌들린 여관생활을 청산하고 官舍생활을 하면서 다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고 더 이상 출세할 생각도 없었다.

 "지난 날 과거 합격했을 때는 별로 뜻에 맞은 줄 몰랐더니, 이제 직책이 이 곳에 있게 되매 비로소 영광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부평초 같던 신세가 안정되어 날마다 학문의 배양이 불어간다." (出師후고사장)고 하는 것이 그의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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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 본격적인 從軍 시작--------------

  그러나 선생의 여유로움은 불과 몇 달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났다. 高騈은 얼마 안 있어 정승급인 태위로 승격되었는데 이 때문에 황제에게 보내는 表 등 문서 일이 많아진 高騈은 880년 여름 선생을 본부로 불러 올린다. 본부에서는 선생에게 배편을 마련하는 등 부산을 떨었고, 선생은 배를 타고 高郵에서 양주 교외 부둣가인 東塘(지금의 茱萸灣공원 부근)까지 40여 Km를 달려 그곳 군막에서 출정 나온 高騈을 대면한다. 여러 막료들의 추천도 있어 高騈은 선생에게 본부근무를 보직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태위가 된 데 대해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謝加太尉表' 등의 문서작성을 의뢰한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從軍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高騈은 고운 선생이 작성해 올린 글을 보고 그 식견과 문장에 매료되어, 선생에게 모든 문서에 관해 중간 과정 경유를 생략하고 直報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보람과 영광을 향한 제1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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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 단계를 뛰어 넘은 초고속 승진----------

  영광은 갑자기[遽 제2장계의 표현], 그리고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섯 개의 직첩이 일시에 선생에게 주어진 것이다. 절도사 겸 도통인 高騈은 선생을 절도사 직속의 순관에서 도통순관으로 막바로 승진시키는 한편, 황제에게 특별히 추천하여 承務郞 (6부 소속의 郎官) 殿中侍御史(御史臺에 소속되었던 벼슬) 內供奉 (大殿의 道場에 물품을 조달하는 벼슬)이란 세 가지 직첩과 이에 더하여 緋魚袋까지 하사 받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고운선생 자신이 놀랐다. 선생은 이를 "超昇(단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라 표현하면서 "지방의 한 현위로부터 곧바로 內殿의 직함을 받고 또 章 (인끈)마저 겸했다 (내공봉-전중시어사와 魚袋 받음을 말함). 이 나라에 벼슬하는  빛나는 젊은 사람들을 볼 때 등용 20-30년에도 남루한 도포를 입는 이가 많거늘, 항차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 이런 일이 있다니... 옛날에 하루에 벼슬이 아홉 번이나 올라감(漢나라 田千秋의 고사)도  이렇게 영광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고 토로했다. (계원필경 제2장계)

  특히 어대는 궁궐출입에 증명으로 사용되는 것이기도 해서 외국 청년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은상. 1971.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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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 승진을 사양한 또하나의 명문-------

  할 일은 하되 출세하는 것은 선생의 志向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역순관이 되었을 때도 "권세에 아부하는 영광[附勢之榮]을 버리고, 도를 지키고 가난함을 편안히 여겨[守道安貧]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즐거움[愛閑之樂]을 넉넉히 얻겠다."(사송순시어서)고 다짐했었다. 이러한 선생이기에 스스로도 놀란 파격적인 승진에 대해 극구 고사했다. 이것은 선생의 진심이었다. 여러 차례 사양의 편지를 올리고 발령장을 반납하기까지 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勅命'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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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 4년간에 쓴 글 1만 首---------------  

  이리하여 선생은 문서 일을 도맡게 되었는데[專委筆硯] 이후 "4년간에 쓴 글이 1만 首" (계원필경 서문)나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檄黃巢書(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포고문)다. 이 글에 대해 고려 때 학자 이규보(1168-1241)는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아마 지하의 귀신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抑亦地中之鬼 己議陰誅]>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부지불식중에 상 아래고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만일 귀신을 울리고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詩話叢林)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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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 글 속에 보이는 당 멸망의 前兆-----

  선생이 高騈을 대신하여 쓴 이 글들은 이처럼 적군을 질타하고 장병을 호령하는 것들이 많았으나, 동시에 집권세력 내부 문제로 고심하고 해명하는 글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였다. 나라의 쇠망을 예고하는 갖가지 병리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절도사들의 부정부패, 군부 내부 상호간의  참소-무고 사태가 번지더니, 드디어는 우군간에 관할지를 놓고 전투를 벌이는 난맥상까지 빚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임금도 누가 충신이고 누가 불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지역 총사령관인 都統과 국방비 담당 총수인 鹽鐵轉運使를 수시로 바꾸는 혼미한 리더십을 보였다. 도통과 염철전운사를 겸했던 高騈도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어려운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선생의 공칭 관직도 '도통순관'에서 '절도사순관'으로, 또 거기서 '도통순관'으로 여러 차례 왔다갔다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맡은 일이  高騈의 막료 일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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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 山水와 부모생각 더욱 간절--------    

 이러한 상황 속에서 榮華에 골몰하기보다는 山水를 더 그리워했던 선생의 初心은 한층 간절해졌다.  "나는 산에 가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속세의 잡일에 종사하여[未遂山棲 尙從塵役] 관사는 깊이 군영에 있으니 실로 陋巷과 한 가지이다. 털을 아끼는 표범은 비오는 날에는 산에서 나오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이 기약을 수년간 어겼다[數年乖豹隱之期]." (謝강고장) 라는 술회는 이것을 잘 말해준다. 이와 함께 부모를 그리워하고 또 봉양하고 싶은 심정은 여전히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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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 16년만에 귀국 길에------------------

  서기 884년 28세 때 드디어 선생은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의 전란 때문에  "외국 젊은이들이 놀라 제국을 떠나는[鸞鳳驚飛出帝鄕]."(봉화좌주...절구-뒤의 '논점 三'서 설명) 상황이기도 했지만, 앞서 예거한 '謝探請料錢狀'에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귀국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의 병환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래서 선생 본인은 <歸覲>이라 표현했다(謝許歸覲啓). 어버이를 뵈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의 사촌 아우 棲遠이 '신라국에서 회남에 들어가는 사신 [新羅國入淮使錄事]'의 관직명을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러 온 것(謝賜弟棲遠錢狀)을 보면 신라왕의 부름과 가족들의 상봉 소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884년 7월 마침 역적 황소가 토벌되어 '황소 죽인 것을 하례 드리는 表'를 마지막 글로 지은 후 이해 8월 귀국 길에 오른다. 당나라 毅宗황제는 신라에 詔書를 가지고 가는 使臣의 신분을 선생에게 주었으며, 高騈은 비용을 넉넉하게 지급하고 배편을 마련해 주는 등의 배려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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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 풍랑에 막혀 바닷가 생활 반년-------

  8월 淮南 군막을 떠나 10월 大珠山 밑에서 배를 띄었다. 배에 올라 대주산 산신에게 풍랑을 멎게 해 달라는 告祀를 지냈는데, 그때 명의가 "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前東面都統巡官 承務郞 殿中侍御使 內供奉 賜 緋魚袋 崔致遠"(계원필경 권20 '제참산신문')이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당나라 생활 16년을 총결산하는 직명이었다.

  이처럼 고사까지 지냈으나 풍랑은 그치지 않아 중도에 曲浦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게 됐다. 그 동안에 여러 지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시를 화답하면서 고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이듬해 바다가 잔잔해져 드디어 3월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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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귀국해 보니 그렇게도 보고싶어했고 또 봉양하기를 다짐했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니 계셨다.

  선생이 귀국 길에 올라 바닷가에서 반년을 보낼 때 아버지가 별세한 듯하다. 당시는 배편 외에는 아무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선생은  물론 알지 못했다. 대숭복사 비명을 보면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虞丘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 이제 부모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란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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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 헌강왕의 환대와 벼슬---------------------

  임금인 헌강왕은 고운 선생을 반겨 侍讀 겸 한림학사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벼슬을 주고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헌강왕으로선 최선의 배려를 한 셈이다. 그러나, 經世의 포부를 책임지고 펼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당시 중앙부처나 군부대의 長 등 요직은 귀족인 眞骨만이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선생은 귀족이 아닌 6두품 출신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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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 단순한 질투와 猜忌가 아니라...----------

  당시 신라의 기득권 층인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생의 귀국과 官界등장은 매우 거북스럽고 긴장스러운 돌발사였다.

 당시 신라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진골이라는 혈통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진골로서는 매우 만족스럽고 편안한 체제였다. 이에 힘입어 그들은 나라 발전의 결실을 독차지하고 사치를 즐겼다. 이런 계제에 진골 아닌 6두품의 고운선생이 골품제가 없는, 그래서 신라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의 空氣를 호흡하고 거기다가 신라에는 없던 과거라는 인재등용 시험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관작까지 지내고, 그것도 前途有望한 30 미만의 창창한 나이로 돌아왔다. 이러한 선생이 언제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그들의 독점적 지배체제에 도전할지, 그들이 불안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선생의 동태를 예의 주시했을 것임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처럼 당나라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들은 사회적 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최병헌 '신라사에서 본 최치원' 1983. 동방사상논고)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체제에 불만을 품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김경태등 '한국문화사' 1986.77면, 이화여대출판부. 하현강 '한국의 역사' 1979. 신구문화사. 95면). 선생이 이들의 선봉이나 領袖가 되어 예컨대 과거제도 실시와 같은 체제개혁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모든 기득권 세력에게는 혁명에 비견되는 타격이 된다고 할 것이다. 선생이 의심과 시기[疑忌 삼국사기의 표현]를 받았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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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 桂苑筆耕을 왕에게 바치다--------------

 특히 당시 임금인 헌강왕은 글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김인종 '고운 최치원' 24면) "선비들을 돌보고 예로써 대우"했다(낭혜화상 비명). 그리고 선생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기 위해 선생의 사촌 동생에게 사신의 자격까지 주어 당나라에 보내었다(十六항서 설명). 그래서 왕은 선생을 각별히 존경하고 중하게 여겨 장차의 국정에 선생의 기여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時王甚敬重之 若將與有爲於治. 최곤술 1925. '고운집' 편집서문]. 실제로 왕은 선생이 귀국하자 말자 선생을 불러 왕실 사찰인 대숭복사 비명과 國師인 지증대사 비명을 지으라고 친히 부탁했으며, 또 선생은 당나라 있을 때 쓴 글 수 만 수를 10개월 작업 끝에 "추리고 추려서[淘之汰之]"(계원필경 序) 886년 1월 이를 28권으로 엮어 헌강왕에게 바치는 열의를 보였다. 이때 바친 글에 계원필경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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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二) 두 왕의 잇따른 죽음-----------

  그러나 불행히도 이 계원필경을 올린 뒤 반년밖에 안 되는 이해 7월 헌강왕이 죽었다. 아들 嶢가 채 돌도 안되었기[生未周 ] 때문에 왕의 동생 정강왕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權統](삼국사기 진성왕조 '최치원 納旌節表') 그 정강왕도 또 1년 만인 887년 7월에 죽었다. 두 왕의 가까운 혈육으로는 누이동생 坦과  嶢밖에 없었다. 坦이 할 수 없이 "임시로 왕의 직무를 맡으니[權知當國王事]"(謝嗣位表) 이가 곧 진성여왕이다.

  이것은 고운선생의 입지를 매우 어렵게 하는 사태변화였다. 신라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잦은 왕위쟁탈전으로 정권의 권위가 흔들렸으나 헌강왕은 증조가 45대 신무왕, 조부가 46대 문성왕, 아버지가 48대 경문왕이어서 정통성 차원에서 한 치의 이의도 없었고 따라서 왕권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또 정강왕마저 일찍 죽어 여성이, 그것도 "임시"라는 이름으로 왕의 일을 맡으니 왕권이 제대로 안정될 리 없었다. 왕권이 약화되면 역으로 臣權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당시 신권은 진골귀족에게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골들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던 고운선생은 이리하여 중앙정계에서 철저한 疎外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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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 진골의 핍박속에 지방 太守로-----------

  이때부터 선생의 지방 太守(지금의 군수) 시절이 시작된다. 태수를 지낸 지역으로는 고운선생 親撰시문(贈희랑화상)에 天嶺(경남 함양)이 있고, 삼국사기에 大山(충남 부여군 홍산 일대-이병도 박사 추정. 그러나 太山, 즉 전북태인의 誤記일듯), 富城(충남 서산)이 있으며, 이밖에 擇里志에는 沃溝(전북)가 기록돼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어진 지방관이란 옛날에도 드물었다[良二千石 古難其人]"(허칙수廬州자사)고 한탄한 바 있던 선생인지라 선정을 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하나의 예로 咸陽上林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함양군 함양읍의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숲인데, 선생이 태수로 있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대규모의 防風 防災林으로서 지금도 2만여 그루의 정정한 나무들이 우람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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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 곳곳에서 반란이-----------------

  선생이 지방 태수로 전전하는 사이 신라는 급격히 쇠망의 길로 빠져 들어갔다. 폐쇄적 지배체제라는 구조적 원인에다가 왕권의 약화라는 시기적 상황까지 겹쳐 지방 豪族세력이 급격히 그 세를 팽창해 갔다. 더욱이 진성여왕이 美少年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맡기는 등의 亂政을 해 민심이 離反하던 끝에, 888년에는 여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조정 앞 대로상에 나붙는[欺謗時政 辭 榜於朝路] 사태까지 벌어졌다 (삼국사기).

  889년 들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지방에서 조세를 안 바쳐 국고가 비게 되었고 왕이 使者를 보내 이를 독촉했으나 도리어 이로 인해 도처에서  반란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元宗 哀奴 등이 沙伐州(尙州)에서 반기를 들었으며 891년에는 北原(原州)의 梁吉이 부하 弓裔를 시켜 溟州 관내 10여 군현을 빼앗았고 892년에는 裨將 甄萱이 完山(全州)에서 後百濟를 일으켰다.

  이 무렵 선생은 천령 태수로 있었다. 물론 조정의 명도 있고 하여 선생은 반란군을 방어하는 일에 힘썼다. 이때 선생과 지우관계에 있던 希朗스님이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講論했는데 선생은 "나는 반란군을 막는 일에 얽매어[ 虜所拘] 청강 못 하고 시로써 그 일을 기린다."면서 시(증희랑화상)를 보냈다. 이 시를 보낸 명의는 "防虜大監 天嶺郡太守  粲 崔致遠"으로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31. 함양名宦錄에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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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 다시 가 본 唐나라---------------

  미증유의 국난을 지방직에 있으면서 맞는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태수로 반란군을 막는다는 것은 무너지는 하늘을 지팡이로 막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없는 안타까움을 품고 선생은 893년께 충청도 부성태수로 옮겨간다. 충청지방 한 野史는 임지 瑞山에 부임한 선생이 "산성 아래 초막을 짓고 비운의 당나라와 신라를 비관했다."(保寧郡誌)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야사라고 해서 도외시할 말이 아니다. 그때 선생은 조정의 명을 받아 중국에 賀正使로 다녀왔기 때문이다.

  선생이 다시 본 당나라는 10년 전 귀국 때 보았던 상황보다 더욱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지배세력 내부의 상쟁과 난맥은 더욱 깊어져 선생이 애써 보필했던 高騈은 고발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던 끝에 벌써 6년 전에 피살되고, 절친했던 知己 顧雲도 벼슬을 떠났다. 그가 본 것은 절망뿐이었다.(사실 이로부터 10여 년 뒤인 907년 절도사 朱全忠은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당나라를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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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六) 救國의 直言--時務十餘條 ----

  당나라의 파국상을 직접 목도하고 귀국한 선생은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도 망할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판단한 선생은 진성여왕 8년 894년 2월 일신의 안위를 제쳐놓고 왕에게 구국의 직언을 하니, 그것이 時務十餘條(급선무로 시행해야할 시국대책 10여조항)이다. 내용은 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하현강 '한국의 역사' 95면)이다. 그리고 10여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선생의 평소 소신인 다음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귀순군 손단)

* 정치는 인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인을 이룬다.[政以仁爲本.......仁爲推濟衆之誠] (대숭복사 비명)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절서주보사공)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서주나성도기)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양관청치사표)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고패권지강주군주사)

* 아래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성린)

*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변하회고)

*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이다[撫俗所先 勸農爲最]. (허권섭관찰아추충홍택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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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 建議는 묵살되고-------------------

  선생의 시무십여조 건의 내용이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과 비난을 받았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왕이 이를 嘉納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 건의 내용이 하나도 실천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가납이라 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십여조를 여왕에게 간했으나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연암집-함양 학사루기)고 기술했는데 이 기술이 정확한 것일 듯하다. 그리고 아찬으로 승진시켰다고 하는 기록도 불분명한 점이 있다.

  선생은 이처럼 자신의 건의가 묵살되게 되자 그야말로 "앞으로 나아감에 받아들여질 데가 없고 뒤로 물러나도 베풀 데가 없는 지경[進不能容 退無可施之地]"(최곤술 '고운집' 편집서문)이 되었다.

  나라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 왔다.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惡中惡者 無處無也] 굶어 죽거나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餓 戰骸 原野星排]."(선생이 895년 7월 16일 지은 해인사 묘길상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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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八) 悲壯한 역사적 고발----------------           

  내란상태가 것잡을 수 없게 되자 897년 7월 진성여왕은 引責을 하고 孝恭王에게 양위한다. 신-구의 두 왕은 중국에 이를 고하는 글을 보낼 때 선생의 문장력과 중국에서의 연고를 고려하여 表文 짓기를 부탁한다. 국사가 걸린 중대한 문건이라 글을 쓰긴 했지만, 선생은 이 글에서 나라가 당면한 위급한 상황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그렸다.

 임금의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에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처절한 표현을 했다. 선생에게는 임금의 체면을 생각하여 사실을 糊塗하는 표현을 하기에는 사태가 너무나 절박했던 것이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왔다는 것을 새 임금도 알고 외국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런 대담하고 과감한 글을 썼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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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 벼슬 내놓고 가야산으로------------

  선생의 생애와 관련하여 위 글에는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 있다. 즉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멸사봉공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는 부분이다.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명백하다. 나라 상층부를 독차지한 진골세력이 위난에 빠진 나라를 구할 생각은 않고, 無爲無能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대한 지적이 틀림없다. 시무십여조 파동에 이어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게 된 진골세력들이 이제는 더 이상 두고볼 수는 없다 생각하고 선생을 축출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을 쓴 1년 뒤인 898년 선생은 별 실권도 없던 아찬 벼슬을 떠나게 된다 (동국문묘 18현 연보-景仁문화사 영인본 1980). 삼국사기는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自傷不遇 無復仕進意]."고 썼지만 선생이 한탄한 것은 자신의 불우가 아니라 조국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간다. 산에서 사는 것[山棲]은 당나라 때부터의 꿈이었으니(十五항 '사강고장') 이때 선생의 나이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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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 亂世成何事라며 著述에 心血-----

  선생은 가야산에 살면서 '해인사缺界場記'(898년), '해인사 선안주원벽기'(900년), '법장화상전'(904년) 등의 글을 썼는데 특히 법장화상전에서는 "利를 추구하지 않았던[非求利 진정상태위시]" 그의 청렴하고 가난했던 삶, 그리고 난세를 구할 수 없음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눈물겹도록 잘 나타나 있다.

  "904년 봄 나는 迦耶(선생은 伽倻를 이렇게 썼다.)山 해인사 화엄원에서 난리도 피하고 병도 요양하는 두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다[避寇養  兩偸其便]. 모든 봉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세상일은 멀리 던져버렸다. 입은 옷은 안개나 이슬 속에 노니는 듯 축축하고 앉은자리는 방축 못에 가까이 있는 듯[座若近陂] 하다. 게다가 병든 몸은 눈 뜸질을 일 삼는데 창구로는 쑥 연기가 뭉게뭉게 몰려든다. 삶이 귀찮아 더러 몸을 태워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병하는 이가 많지만 모두들 코를 가린다. (옛 사람의 글을 몇 부분 인용한 후)  난 황홀한 가운데 그 끝을 잇는다.

        난세에 무슨 일을 이룰 것인가                   亂世成何事

        감당할 수 없다는 '7불감'만 더할 뿐인데....       唯添七不堪

  이 법장화상전은 동양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대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이 밖에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불교관계 저술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은퇴 후의 시간을 史家들이 표현한 것 같은 吟風詠月이 아니라 연구활동에 바친 것을 實證的으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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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一) 入山의 참뜻---------------------

  선생은 가야산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지만 거기서도 보기 싫은 일을 보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두 사람의 華嚴宗匠이 있었는데 그중 希朗은 친고려를 표방하고 觀惠는 친후백제를 표방해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병헌).

  선생은 입산하기 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바 있다.('贈山僧' 또는 '入山詩'라고도 함)

  僧乎莫道 靑山好  스님들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시오.

  山好何事 更出山  산이 좋다면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시는가.

  試看後日 吾踪跡  두고 보시라. 나의 뒷날 자취를

  一入靑山 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여기에서 '산'은 단순한 거주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과 생각 그 모든 것이 속세를 떠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비록 산에 있더라도 속세의 정치나 정권과 연결돼 있다면 그것은 입산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스스로 산에 들어온 선생이었으니 그 심정은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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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 後學교육과 國土巡禮의 苦行------------

  선생은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전국 순례에 나선다. 선생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산수를 사랑했고 또 자신의 은퇴는 정치로부터 떠난 은퇴이지 산천사랑과 民族愛로부터 떠나자는 은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은 이러한 국토순례 과정을 통해 후학 교육에도 많은 시간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門人들로서 고려초기에 開城으로 가 벼슬한 이가 자못 많았다(삼국사기, 이병도 '고려시대연구' 아세아문화사 1989. 37면). 在朝時에는 후학교육의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을 것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門人指導는 은퇴 후에 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후학 지도에 관해서는 다음의 시를 참고할 수 있다.

  願言 利門  자네들 부디 이욕엔 문을 닫고

  不使損遺體  부모께 받은 귀한 몸, 상치 말아라.

  爭奈探珠者  어찌타 眞珠를 캐는 저 사람

  輕生入海底  목숨 가벼이 여기고 바다 밑을 들어 가는고.

  身榮塵易染  몸이 영화로우면 티끌에 더럽혀지기 쉽고

  心垢水難洗  마음에 낀 때는 물로도 씻기 어렵다.

  澹泊與誰論  담박한 맛, 누구와 의논하랴

  世路嗜甘醴  세상사람들은 단술(또는 단것과 술)만 좋아하는 걸. (寓興)

  국토순례와 관련, 삼국사기는 "산림과 강과 바다로 소요 방랑하며 정자를 짓고 송죽을 심으면서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울분에 찬 그의 은퇴과정과 그가 최후로 쓴 정부공식 문서의 비장한 구절(二十八항에 소개)을 감안할 때, 그 순례는 그런 牧歌的이고도 浪漫的인 것이 될 리 없다. 또 경제적인 능력에서 볼 때도 정자를 짓거나 할 여유가 없었을 것임은 다음 시 '길을 가다가[途中作]'에 잘 나타나 있다.

  東飄西轉路岐塵  동서로 떠도는 길, 헷갈리고 먼지투성인데

  獨策  幾苦辛  여읜 말 홀로 채찍하며 얼마나 고생했던가.

  不是不知歸去好  귀향함이 좋은 줄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只緣歸去又家貧  돌아간다 한들 또 집이 가난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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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三) 반란자들이 왕이 되고---------------

  선생의 울분과 비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신라의 천년 사직은 점차 기울어 간다.

  반란군의 세력은 날로 기세를 올려 900년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라西南都統'으로 자신을 부르던 견훤이 드디어 왕을 칭하고, 이어 梁吉과의 싸움에서 이긴 궁예도 901년 이를 따라 왕을 칭하니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신라왕은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했으나 이를 방어할 힘이 없으므로, 각 성주에 명하여 "출전하지 말고 성벽을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지시할 뿐(삼국사기 효공왕조)이었다.

  907년에는 드디어 당나라가 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조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반란자들이 왕이 되었다. 忠孝를 주창했던 儒者로서 선생의 胸襟은 어떠했을까. 선생은 술잔을 들고 시 한 수를 읊는다.

  亂世風光無主者  난세이니 이런 풍광에 주인도 없고

  浮生名利轉悠哉  뜬 인생의 명리, 더욱 아득하기만 한데

  思量可恨劉伶婦  생각하니 劉伶(중국의 유명한 애주가)의 아내가 한스럽다.

  强勸夫郞疎酒杯  왜 남편에게 술잔 멀리하라 강권했는지. (春曉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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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四)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

  정치라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것인가. 그에 대해 다시 무슨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희생되는 백성들의 버림받은 삶이 선생의 눈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역사의 길가에 버려진 접시꽃(蜀葵花)인가. 또 한 수를 읊는다.

  寂寞荒田側  거친 밭 언덕 적막한 곳에

  繁花壓柔枝  두툼한 꽃송이가 약한 가지 누르고 있다...

  車馬誰見賞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줄까.

  蜂蝶徒相窺  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

  自慙生地賤  천하게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堪恨人棄遺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참고 견딘다. (蜀葵花)

  선생은 897년 '양위표' '사사위표'를 조정에 마지막으로 써 준 이후 달리 어떤 관서나 사찰이나 요인의 글 부탁에 응한 기록이 없다.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重閼粲(아찬의 하나) 異才 부부의 청으로 908년에 쓴 '신라 수창군(대구 수성구) 護國城 八角燈樓記'이다. 그것은 異才 부부가 "법등을 높이 달아 빨리 전쟁을 없애야 되겠다[顯擧法燈  銷兵火]."(기문에 나옴)는 목적으로 등루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글을 청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은둔하고 있는 선생이었지만 전쟁을 없애야겠다는 그 취지는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生民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선생의 마음을 움직였던 듯하다. 이 글에서 그는 통한의 어조로 말했다.

  "하늘이 아직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있는데, 땅에서는 여전히 간악함이 판을 치는구나. 시국이 위태로우면 생명체 모두가 위태로우며[時危而生命皆危], 세상이 어지러우면 인심 또한 어지러워지는 법이다.[世亂而物情亦亂]"

  이 글은 선생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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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五) 68세 생존의 증거 智證大師碑---------

  선생은 최소 68세까지는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증거는 지증대사비로서 이 비는 924년에 세워졌다 (槿域書畵徵에 ''경명왕 7년 甲申建''. 경명 8년이 갑신이니 924년으로 볼 수밖에 없음). 이 때는 선생이 은둔을 시작한 지 26년이 되는 해인 68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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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 마지막 은둔지는?------------------

  삼국사기는 선생이 순례한 다섯 곳을 예거한 후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最後帶家隱伽倻山海印寺]... 조용히 쉬면서 노년을 보냈다[棲遲偃仰以終老焉]."고 쓰고 있다.

  은둔지에 관해 선생이 직접 언급한 것은 48세 때인 904년에 쓴 법장화상전의 가야산(三十항에 이미 설명) 뿐이다. 삼국사기의 "최후에는 가야산..." 운운은 이때를 말한 것일까.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생애의 남은 부분이 너무나 길다. 또 이 48세 때를 최후의 은거로 본다면, 강원도 북부의 금강산까지 포함(三十二항에 설명)하는  전국의 그 많은 유적지는 어느 기간에 다 둘러볼 수 있었을까 하는 시간적인 難點이 생긴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48세 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전국 곳곳을 순례한 뒤 다시 가야산에 제2차로 들어간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선후가 맞는 추정일 것 같다.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길 옆 언덕 바위에 선생의 유명한 시 '題伽倻山讀書堂'이 새겨져 있어 이를 題詩石이라 한다.

   狂奔疊石吼重巒   미친 듯 바위 위를 내달으며 산을 울리는 물소리에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이야기는 지척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다.

   常恐是非聲到耳   옳다 그르단 세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봐

   故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감쌌다.

  '흐르는 물을 시킨' 主語는 하늘일 수도, 時代일 수도, 또 自身일 수도 있는데 어떤 것이건 간에 속세와 절연하려는 선생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최후의 은둔지에 관해서는 지리산 설도 만만찮다. 전해오는 사적은 가야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충남 홍성군 설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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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七) 享年--------------------------

  선생의 향년에 관해서는 54세 경(최완수 '신동아' 2001. 10월호), 70세 경(김영두 교수 '고운 최치원' 177면), 72세(남경대학 고전문헌 연구소 1990년 편찬 '唐詩대사전' 421면), 95세 (함양 상림공원 함화루 문창후신도비. 후손 병식 1860년 씀)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1487년 徐居正이 낸 筆苑雜記에는 "927년 71세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되어 있다. 어느 설이나 다 명확한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자료를 제시하기로는 양기선 교수의 80세 생존설이 있다. 그는 "一然이 고운의 帝王年代曆을 참고해 삼국유사를 쓴 것은 이병도 박사, 최남선 선생 등이 입증했다. 삼국유사는 王曆 欄에 후백제와 고려를 다루면서 <병신년(936년)에 고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썼다. 그러므로 고운이 제왕연대력을 936년까지 기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운은 그 때 만 79세 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 연구' 7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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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八) 신선이 되었다는 설-----------------

  그러나 사실 선생을 기리는 일반 국민들은 선생의 享年이 얼마였는지에 대해 아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향년에 대한 민간전설도 일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선생의 신선 설만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신선 설에 관한 공개된 기록으로는 고려 고종 때 학자 이인로(1152-1220)의 '破閑集'이 최초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벼슬에 뜻이 없어서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문을 나간 후 간 데를 알 수 없었다. 冠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놓은 걸 보면 아마 신선이 되어 올라간 것 같다."

  이인로는 유학자이다. 유학자는 대개 신선을 부정하는데도 이런 글을 쓴 것을 보면, 그때 이미 고운선생이 신선으로 되었다는 설이 민간에 넓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신선 설을 주장하는 민간 설화는 매우 많은데 하나만 예거하면 전술한 바 있는 함양 상림(二十三항)이다. 당시 함양사람들은 선생이 “상림이 잘 자라면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한 말을 굳게 믿었다고 한다. 선생의 사망연대를 모르는 것도 상림이 잘 자라 신선이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  1996-11-20) . 해인사 학사대의 노송, 지리산 화개동의 팽나무, 정읍 무성서원 뒷산 모과나무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이 나무들은 지금도 창창하다.

  그러나 언젠가 이 나무들이 自然의 理致에 따라 생을 다한다 하더라도 人心의 理致는 결코 선생을 死別하려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다른 형식의 전설이 自生하여 선생을 그들의 마음속에 길이길이 모시려 할 것이다. 민중에게는 선생은 百世의 스승, 겨레의 영웅으로서 不死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집념과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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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九) 모든 계층이 推仰하는 이유

  선생을 기리는 데 있어서는 어떤 계층이나 신분이나 종교의 차이가 없다. 민간 설화가 많고 또 전국 곳곳이 그의 遺蹟地임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선생이 대중적인 기림을 받아왔다는 證左이다.

  "평생의 발자취가 미친 곳마다 지금껏 나무꾼 목동들이 이를 가리켜 <최고운이 들른 곳>이라 하고, 시골구석의 아녀자들까지 선생의 이름을 다 알고 있다."(東史纂要 1578.吳澐찬)고 한 것이 벌써 5백년 전 기록이다. "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 물에 빠졌어도 건져줄 수 없다[熱無以濯 溺未能援]."(양위표)고 한탄했던 선생이었기에 일반 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리는 것인가.

  그러나 백성들만이 아니다. 지배층들도 선생을 기리는 열기에 있어서는 별반의 차이가 없다. 고려 정권이 선생에게 증직을 내리고 문묘에 봉헌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1552년 명종이 "선현 문창후는 우리 나라 道學淵源之祖宗이니 그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불문하고 비록 먼 지방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잡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傳敎한 이후 선조 인조 정조가 같은 뜻의 명을 내렸다. 특히 정조는 "이 명을 준행했느냐를 조사해서 안 따른 군수는 나타나는 대로 처벌하라"고 강조했다.

  상층의 주류를 이룬 문인 선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조 성종 때 문인 沈義라는 사람의 소설에 大觀齋夢遊錄이란 것이 있다. 그 내용에 文人王國이 그려져 있는데 그 왕국의 天子는 고운선생이고 首相은 을지문덕(고구려), 그밖에 左相 이규보(고려), 右相 이제현(고려), 각료 金克己(고려) 이인로(고려) 권근(조선) 정몽주(고려) 이숭인(고려) 柳方善(조선) 강희맹(조선) 김종직(조선), 대제학 이색(고려)으로 짜여져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문인 선비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나 오직 선생의 이름만이 옛날을 빛내고 후세를 무색케 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東史纂要)는 찬양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생의 유적지를 들를 때는 예외 없이 선생을 기리는 시를 읊었다. 오죽하면  佛論(뒤에 설명)을 제기했던 이퇴계(1501-1570)도 노년에 경주 西岳精舍의 이름을 지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

  儒宮好闢仙山境  유학자로 신선의 경지 열기를 좋아했으니

  老我增恩實 名  늙은 나, 실로 뒤따르고 싶은 마음 더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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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 문집------------------------------

  선생의 문집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은 선생 자신이 신라 헌강왕에게 올렸던 계원필경 밖에 없었다. 그때 계원필경과 함께 당나라 있을 때 지은 다른 글도 많이 바쳤으나(二十一항에서 설명) 하나도 전해오지 않는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서 문집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불교관계 글은 萬曆年間(1573-1619)에 鐵面老人(선조때 승려 海眼이라는 설이 있음.)이 선생의 비명 4개를 뽑아 이를 불교 學人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사산비명'이 생겨났다.

  서유구(1764-1845) 같은 이는 "선생의 저작이 흩어져 전함이 없고 오직 절간이나 사당, 묘터의 숲을 헤치고 이끼를 긁으면 겨우 수십 편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문집과 관련, 현대의 사학자 이기백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최문창후 전집' 해설)

  "삼국사기에는 문집 30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집이 언제 누구에 의해 편찬되었는지 모르나 언제인지 없어져 버리고 조선 세조 5년 1459년에 왕은 崔沆 등에게 명해서 12권의 문집을 편찬케 했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전해오지 못하고 현존하는 문집은 1926년 (이것은 重刊版임-편집자 주) 최국술 (곤술의 초명)이 편찬한 3편 2권으로 된 것이다."

  현존 最古의 이 문집은 1925년에 初刊된 것이다 (이 책의 407면 편집서문에 <을축년 6월 10일>이라 명기되어 있음). 이 책은 '고운집 乾'과 '고운집 坤'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미 문집 형태로 확실히 남아 있는 계원필경 외의 모든 작품을 수록했다. 사산비명도 여기 실려 있다. 새로 발견된 시 '姑蘇臺' '碧松亭'이  실려 있고 법장화상전도 일본 자료(大正新修대장경 史傳部 2)에서 뽑아 '賢首傳'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수집한 '고운선생 사적'과 문인들의 고운선생 仰慕詩文도 부록으로 실었다.

  이 책은 1972년 '최문창후 전집'(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발행)에 複寫 轉載되었고 이어 1982년의 '국역 고운선생문집'(최준옥 편)에 이 책의 전문과 한글번역이 실리게 됨으로써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국역문집 발간은 고운연구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종전의 고운 연구자들은 선생의 글이 난해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정확한 연구를 하는데 많은 애로를 느꼈고 그러다 보니 매우 불완전하고 불충실한 孤雲像을 그리는 등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음에 나오는 論點 一, 二, 三과 같은 錯視현상도 그래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국역문집 발간을 계기로 선생과 관련한 출판물이 잇달아 나왔고 연구논문들도 이어져 이제는 그것들을 일일이 예거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역작은 최영성 교수의 문집주해 및 논문인데 그 주요한 내용은 본 기록 곳곳에 인용하였다.

  문집 이외의 글로는 '經學隊仗'이 있다. 경학대장은 18세기 말엽에 선생의 후손 致德이 家傳의 낡은 상자에서 처음 발견하여 복사해 둔 것(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석원)이라 한다. 치덕 자신은 "다만 아쉬운 것은 군자들의 채택을 겪지 않은 것"이라면서 "후손의 고증을 기다린다."고 했다(최준옥 '사적고' 278면). 이에 관해서는 한말의 학자 노상직의 '동국씨족고'(1907)에서 고운의 작품에 이 책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전술한 1925년 최곤술 편 '고운집'에 그 책명이 수록되고 1927년 경주 서악서원에서 목판본으로 발간됐으며 1937년 '自喜翁선생문집'에도 실렸다. 학계 일부에서 이 책은 선생의 작품이 아니고 명나라 학자의 것(이성애. 국회도서관보 17권 3호, 최영성 '역주최치원전집' 2권 32면)이라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문체가 騈儷體인 데다가 명나라 학자가 썼다는 확실한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김철희. 1975. '국역 경학대장 해제') 더 연구가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論點 一) 鷄林黃葉說----------------------------       

  삼국사기에 <왕건이 興起할 때 최치원은 비상한 인물이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글을 보내 문안했는데“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鵠嶺靑松]”란 구절이 있었다. 고려 顯宗 때 치원이 개국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동왕 11년 內史令을 贈職하고 13년에는 文昌侯로 追封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야말로 고려 건국을 미화-합리화하기 위한 서술이다.(한석수 '최치원전승 연구' 계명문화사 1989. 26면) 이러한 서술은 뒷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낳게 한다. 즉,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란 구절 때문에 신라왕이 미워하므로 치원은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숨었다."(崔滋 '보한집', 安廓 '조선문학사 1922.)는 것이다.

  왕건은 선생의 20년 연하인 877년생이다. 선생이 42세로 은둔할 때 그는 20대 초반으로 궁예휘하의 미미한 존재로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최영성 앞책). 선생은 908년 52세 이후 어떤 글을 쓴 일도 없는데,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의 왕이 된 것은 918년, 선생의 62세 때이고 곡령(송악산)이 있는 開城으로 천도한 것은 그 이듬해이다.

  민중이 선생을 우러르는 것은 선생이 난세 중에서도 左顧右眄하지 않고, 은둔하면서까지 신라인으로 남았다는 이유에서다. 해인사에 은거할 때 친고려-친후백제 승려가 대립하는 데 실망을 느낀 그는 몇 년의 침묵을 깨고 908년 생애의 마지막 글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 수창군 護國城 八角燈樓記'였다. "나라의 경사를 기하겠다"는 그 취지(三十四항에 설명)와 '護國城'이란 그 이름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만 봐도 영원한 신라인이고자 했던 선생의 자세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굶주리되 鵠嶺靑松은 먹지 않았던>(최곤술 1937. '가야산 학사당 이건상량문') 것이다.

  고려 때 선생에게 증직이 내려진 것은 "그가 이 나라 학문의 최고봉이요 또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한 것"이다 (시인 이은상, 1971.'해운대 고운선생동상 비문'). 이러한 당연한 이유 외에, 당시 왕인 8대 현종(재위기간 1009-1031)이 그때까지의 왕 중 유일하게 신라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라는 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즉 왕의 할머니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4촌 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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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點 二)  佛論----------------------------

  선생은 불교와 관련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전술한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은 동양불교를 연구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名著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조선조 유학자들은 "부처에 아첨[ 佛]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退溪 李滉(1501-1570)과 星湖 李瀷(1681-1763)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고운선생은 유학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넓은 涉獵을 했고 그러한 나머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究極의 지향에 대해 理解를 가지게 됐다. 예컨대 선생이 쓴 鸞郞碑서문(삼국사기 신라진흥왕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실로 3교(儒 佛 仙)를 포함한 것으로서, 뭇 생명들을 접촉하여 교화한다[接化群生].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집 바깥에서는 충성하는 것은 孔子의 가르침이요, 無爲의 일에 처하여 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老子의 취지요, 모든 악을 만들지 아니하고 모든 선을 봉행함은 釋迦의 교화이다."

  선생은 이 글에서 풍류는 유, 불, 도 사상이 전개되기 이전에 이미 그 主旨들을 포함하고 있던 우리의 고유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곧 풍류에는 공자의 충효, 노자의 무위, 석가의 선행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풍류'가 명산대천을 찾아 시와 가무를 즐기는 놀이의 문화가 아니라 修養과 精進을 요하는 민족문화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유, 불, 도 이전에도 우리 나름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조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우선 李瀷의 주장은 "노자와 석가를 같은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異端으로 유교를 해치는 선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이란 말은 용어선택의 오류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불교사회였다. 그리고 고운 가문도 아버지가 대숭복사 건립에 기여하고 친형이 승려가 된 것으로 보아(앞에서 설명) 불교를 믿는 가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운만이 당나라로 건너가 "오로지 유교를 따르겠다[但遵儒道]"(25세 때 쓴 '제2장계') 맹세하고 그에 정진했다. "먼 지방사람으로서 공자님의 생도라 일컬으니 영광이 바할데 없다[遠人稱尼父之生徒 光輝無比]"고도 했다(賀除吏部侍郞別紙). 그래서 주위로부터 "먼 이국에서 와서 유도에 이렇게 열심이다니[來自異鄕 勤於儒道]"(여객장서)라는 격려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불교사회- 불교가문이 그를 이단이라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당시 황무지였던 유교가 어찌 그를 이단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유교에 대한 선생의 입장은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승려나 사찰의 비명 지은 것을 들어 조선조 유학자들은 비판하지만 (이퇴계 언행록 "부처에 아첨한 작품을 보매 매양 마음이 통분하다") 이는 비명의 제목만 보고 내용은 고려하지 않은 소치다. 비문 속에는 공자의 가르침이나 유교 經書의 내용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어, 과연 이것이 승려 비명이 틀림없는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예컨대 '해인사 結界場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대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齋라 하며 걱정거리를 미리 방지하는 것을 戒라 한다[洗心曰齋 防患曰戒 주역의 注에 나오는 말]. 유교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거늘, 불교에서 어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儒猶若此 釋豈徒然]."

 儒者의 입장에서 불교에 충고를 한 것이다.

 당시는 출판문화도 대중매체도 없던 시대였다. 타종교의 비문에라도 유교의 가르침 한 구절이나마 전파하려 했던 선생의 고충과 용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오늘에 견주어 생각해보자. 불교방송 출연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너무나 자주 소개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또 易地思之해서 대유학자의 傳記에 석가의 가르침을 많이 소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감안해볼 때 儒道唱導에 대한 선생의 집념과 의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정도로 치열했던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생이 "유교를 해치는 선봉이 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선생이야말로 유교의 암흑기에 외로이 횃불은 든 <우리나라 道學淵源之祖>(1552. 조선조 명종임금 傳敎) <儒學의 初祖>(1887. 홍문관제학 이재완의 경남거창 手植松遺址비문) <儒宗>(1937. 최곤술. 가야산'학사당 이건상량문')이었다 할 것이다.

  선생의 이런 선봉적인 노력이 서서히 결실을 보아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드디어 국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조 학자들이 선생의 사적과 글을 좀더 치밀히 연구해서 유교창달에 끼친 공적과 은혜를 顯彰하는 것이 後人의 도리일텐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선조 정치정세를 회고해 볼 때 유학자들의 입장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당시는 經書의 一條一句를 놓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것은 단순한 학술논쟁의 차원을 넘어 선비들의 벼슬과 목숨이 달린 문제로 비화되었다. 심지어는 유교의 禮記 중에서도 지극히 사소한 일부분인 喪服期間을 싸고 의견이 대립되어(현종 때 趙大妃의 복상문제 등) 이것이 정권의 교체, 선비들의 귀양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몰고 올 정도였다. 그러므로 유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 약간의 이해라도 가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고, 하물며 승려 비문을 짓는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유학자면서도 약간의 이론차가 있으면 서로 상대를 이단, 즉 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치열한 爭論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운선생에 대해 的實한 평가가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고운선생의 유도창달 노력은 한층 더 돋보인다. 선생은 生殘을 위해, 그리고 나아가 직위를 지키고 상승시키기 위해 유도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다. 유도를 唱導하는 언동은 당시 신라의 불교사회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서, 일신의 安寧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안 되는 일일 수 있었다. 시무십여조에서 선생이 儒道政治를 건의한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인데(二十六항 참조) 이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猜忌와 의심을 더 받게 하고 결국 그의 정계은퇴를 재촉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신라 때는 유도를 주장할수록 핍박을 더 받았고, 조선조에서는 유도를 주장할수록 더 명예로울 수 있었다. 그러니 어느 쪽이 더 유도창달에 勞苦가 많았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 일신의 편안함 속에서 反日을 주장하면서, 일정 때의 광복군이 왜 좀더 열심히 싸워서 일본을 쳐부수지 않았느냐고 비판한다면, 그것이 事勢에 맞는 경우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산비명은 경주시 외동면 初月山의 대숭복사 비명, 하동 화개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명, 보령 崇嚴山 성주사의 낭혜화상 비명, 문경 가은 원북리 曦陽山 봉암사(일명 양산사)의 지증대사 비명을 말한다. 4개의 산에 있기 때문에 '四山'이라 한 것이다.

         * 사산비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찬사가 있다.

         "이 비명 속에 神出鬼沒하는 형상과 龍吟虎伏하는 기세를 감추고 있음을 기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놀라고 혼이 밝게 하며, 이목을 놀라게 하고 心脾를 씻게 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고운선생문집逸稿' 사산비명跋)

        * "그 명문들은 그의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이은상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

--불교관계 글을 많이 쓴데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신라 말기에는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믿는 인사들인데다가, (1) 임금의 엄중한 명령이 있었다. 선생은 (2)힘써 사양했지만 그것이 용납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 (3) 자신이 유교의 선비임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두렵고 송구스럽다는 마음을 나타냈고, 아울러 내용상으로도 (4) 불교에 대해 諷諫하는 말을 했다."(최곤술 '고운집' 편집서문)

  (1) 사산비명을 보면 전부 奉敎撰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에도 왕명을 받은 경위와 임금의 말이 쓰여 있다.

  (2) 글 짓는 걸 사양한 경위는 '낭혜화상비명'에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임금(진성여왕)이 나를 불렀다. 珠簾(여왕이므로 주렴을 드리웠다.) 밖에 내가 꿇어앉아 명령을 기다리자 임금이 말했다.

  "그대는 국사의 비명을 지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내가 사양하며 말했다.

  "약한 수레에다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줄의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퍼내려는 것과 같아 글 짓는 것을 피하고자 합니다."

  "사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風度라서 좋은 것이긴 하나, 진실로 비문 짓는 일을 해낼 수 없다면 과거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그러면서 임금이 갑자기 방망이 만한 두루마리를 내어주시니, 그것은 대사의 行狀이었다.>

  (3) '불국사 阿彌陀佛像讚序'에서 "이 못난 유학도[腐儒]..."라 했고 '지증대사 비명'에선 "유교를 매개로 하여[媒儒道] 중국에 갔다온 최치원..."이라 했다.

  (4) 諷諫하는 말로는 '지증대사 비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라에서는 불교서적을 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려전기를 간직하여 불교에 관한 碑銘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그래서 절묘한 글들을 두루두루 찾아보았는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無去無來]'란 말이 한없이 많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不生不滅]'는 말도 수레에 실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 말들엔 春秋에서와 같은 新義가 없었고 간혹 周公의 舊章을 인용했을 뿐이었다."

   *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에 筆削을 가하여 이룩한 춘추는 '微言大義'를 基底로 삼는데 불교서적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 춘추에서는 주공의 옛 법도와 같은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와 함께 장래의 법을 밝히는 노력을 병행했는데, 불교서적은 과거의 전통만 말하고 장래의 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참으로 대담한 불교비판이다. 그것도 일반 논저로 한 것이 아니라 스님 비명에다 공개적으로 삽입하다니, 그 용기의 대단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형편이다. 이래도  佛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불교 관련 글은 '많이 썼다'기 보다는 '많이 남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선생은 당나라 때에도 수 만 수의 글을 썼기 때문에 전 생애에 걸쳐 매우 많은 글을 찬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귀국해서도 수 만 수의 글을 썼을 것이다. 당나라 때 글은 그래도 본인이 챙겨서 신라왕에게 올림으로써 오늘날 세상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귀국 후에 쓴 글은 나중에 선생이 은둔하게 됨에 따라 아무 데도 봉헌할 데가 없었다. 일반 민간에 써 준 글도 물론 있었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천년 동안 그것이 민가에 보관되어 전승될 수는 없는 일이다. 국호가 바뀌니 滿月臺도 秋草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과거의 그 어떤 高臺廣室도 서책보존을 천년간 한다는 일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비석과 사찰이다. 선생이 불교관계 이외에도 많은 글을 썼지만 다른 것은 거의 전하지 않고 불교관계 글만 많이 전해지게 된 것은 그것이 비석에 새겼거나 사찰에 보관되어진 것(승려전기 등)이었기 때문이다.

--함양 上林의 樹林 전설처럼 선생이 健在해 있다면 이  佛論에 대해서 어떤 심정일까. 아마 선생은 빙그레 미소할 것이다. 자신을 비판한 몇몇 후인들의 유교에 대한 애정과 집념이 어쩌면 활동기 때의 자신과 그렇게도 비슷할까 여기면서 흐뭇해할 것으로 생각한다.(1999. 동화출판사 '망국의 한' 410면)

--이 논쟁에 있어서는 다음 글이 결론으로서 참고가 될 것 같다.

  "그는 儒者로 자처하면서도 마음은 끝내 불교와 도가사상의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불교와 도가사상에 심취했으면서도 유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송항룡 '최치원사상연구' 333-337면)

  *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조동일 교수는 "그는 어정쩡한 儒彿兩役論 같은 것을 전개하면서 자기의 한계를 스스로 노출시켰다"(1995.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52-53면)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든 이른바 兩役論이 진감선사 비명의 "드디어 감히 兩役(두가지  일)을 맡기로 했다[遂敢身從兩役]"는 구절을 두고 한 말이라면 사정이 곤란해진다. 선생이 말한 그 "兩役(두가지 일)"은 유교와 불교가 아니라, 비문도 짓고 글씨도 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산비명 중 이 진감선사 비명과 대숭복사 비명만은 선생이 직접 글씨까지 썼던 것이다. 오역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爭의 논리가 아닌 和에 기반을 둔 선생의 상호일체적이고 보완적인 三敎觀은 多文化-이질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각 종교간 민족간의 대화를 통한 교섭과 융합, 그리고 공동체의식의 고취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세계적으로도 민족-종교-문화-체제 등의 차이로 인한 모든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당위성에 대해 큰 示唆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고운선생은 過去完了型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고 세계인의 곁에서 같이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으로 살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최영성 앞책 546면)

 

----------(論點 三) 事大慕華說----------------------

  근대 사학자 신채호(1880-1936)가 선생과 김춘추 김부식 등을 사대적이고 중국을 사모한 사람이라고 거론('조선상고사' 삼성문화문고 1980. 73면)한 이후 일부 논자들이 동조하는 추세가 한때 있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하등 반박할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여기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했으나, 만에 일이라도 이에 迷惑되는 사람이 뒷날 나올지 모르기에 약간의 자료를 들어 논의하고자 한다.

  선생을 사대모화로 규정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고운 생애의 시간적 단계로 봐서 첫째 당나라 유학부터 생각해 보자. 당시 한민족의 입장에서는 당나라는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였다. 넓은 세계에 나가 학문과 문물을 배우는 것은 개인적인 소득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민족의 이익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에 견주어 보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 유학을 事大'慕美'主義者로 볼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둘째 중국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중국의 벼슬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당시의 모든 국민들에게 그러했고, 그리고 그 이후 천년을 내려오면서도 선생의 이러한 발자취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외국에서 벼슬이든 사업이든 연예체육활동이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을 한다는 것은 事大가 아니라 오히려 겨레를 빛내주는 일이다. 김창준, 박찬호, 박세리, 정경화, 조치훈, 또 최근의 韓流 스타들은 결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셋째, 선생이 구사한 문장을 얘기해 보자. 논자는 선생이 쓴 글들을 보고 그런 규정을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사대모화 지목을 들을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代撰한 외교문서들일 뿐 그 밖의 특별한 사례는 없다. 그것은 당시의 외교적인 여건과 환경이 그랬었기 때문이고 또 대부분의 외교문서에서 볼 수 있는 상투적이고 外飾的인 修辭들이었을 따름이다(최영성 앞책 22면).

  사대모화설을 제기한 신채호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한말의 지배층들이 친일-친청-친로파로 갈려 상쟁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게 하고만 데 대한 통분의 심정이 그러한 표현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운선생을 그러한 표적 속에 포함시킨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선생의 시문을 숙독하면 이 점은 좀더 명료해진다. 계원필경의 시 한 구절을 읽어보자.

  年年荊棘侵儒苑  해마다 유교엔 가시덤불만 쌓이고

  ........

  亂時無事不悲傷  난시라 모든 일이 슬프고 상심돼

  鸞鳳驚飛出帝鄕  외국 젊은이들이 놀라 제국을 떠난다.(봉화좌주...절구)

  선생이 중국에 간 것은 우리 나라보다 발전된 문물을 접하기 위해서인데 지나고 보니 실망투성이었다. 그래서 그도 끝내 중국을 떠난다. 이것을 과연 사대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 의아스럽다.

  글과 관련해서 또 하나 거론되는 것은 제왕연대력이다. 이 책은 전해오지 않아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지으면서 모두 00王이라고만 일컫고 居西干 등으로 말하지 않았다. 혹시 말이 鄙野해서 족히 부를 것이 못된다는 까닭에서일까. 중국 史書는 匈奴語인 撑 孤塗(황제라는 뜻) 등의 말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제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方言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

  이 기록을 들어 선생을 사대모화주의자로 규정한다면 이야말로 완전한 逆理다. 당시 중국인들은 외국의 황제를 결코 황제라 부르지 않았다. 흉노에 관해서도 이 기록에서처럼 '탱리고도'라거나 또는 '單于'(발음은 선우)라고만 불렀다(예: 한서 소무전). 주변 민족을 야만으로 보고 그들의 지도자는 酋長 정도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의 이 같은 自己傲慢의 典範을 따르지 않았다고 선생을 비판한다.

  선생이 박혁거세를 赫居世 居西干이라 부르지 않고 赫居世王이라 부른 것은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 신라의 임금이 야만족의 추장이 아니라 당당한 한 문명국(선생은 우리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다.-예. 제참산신문)의 임금이란 것을 내외에 분명히 하고자 그런 기록을 한 것이다. 특히 주변국을 낮추어 보는 중국인들에게는 더더구나 더 깨우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대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자존심의 발로라고 칭송해야 마땅할 일이다.

  고운이 민족자존심을 위해 勞心焦思했다는 결정적인 사실로 이제 접근할 때가 되었다. 다음 '西國표기와 東人意識'항에 설명한다.

--신채호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排他自尊의 선입견에 눌려 그의 저작도 진정한 한국사와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는 다분히 감정에 달리는 문장의 소유자이다. 함부로 아무 영역에나 闖入하여 임의의 독단을 내려서는 곤란한 일이다.(정해렴 편역 '홍기문 조선문화론 선집' 1997. 178면)

--신라 왕호 문제와 관련, 문제되는 것은 우리 사학계의 동향이다. 우리 사학계의 일부는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을 부족국가 시대의 장으로 보고 이 기간을 정식 국가성립이 안된 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런 현상이 있을 것을 천년 전 선생은 미리 알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왕' 칭호를 미리 써 둔 것일까.

 

---------(論點 四) 孤雲硏究의 새 地平 '東人意識'

 우리나라는 東國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는 海東 大東이라고도 했다. 이 용어는 오래 동안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정서를 가지고 사용돼 왔다. '東國李相國集' '東國通鑑' '東國與地勝覽' '東國史略' '東國通寶' '海東通寶' '海東孔子(최충을 말함)' '海東高僧傳' '東文選' '東史綱目' '東史簒要' '大東野乘' '大東輿地圖' 등등의 그 많은 이름들은 다 우리들이 즐겨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기준으로 해서 그 동쪽에 우리 나라가 위치한다는 것 때문에 이 용어가 쓰인 내력을 생각하면, 주체성의 면에서는 문제가 없지도 않은 표현이다.

  그런데 선생은 '사산비명'에서 당나라를 여러 차례 '西國'이라 불렀다. 선생 이전에도 이런 지칭은 없었고 그 이후 천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국을 이렇게 부른 이는 없다. 선생의 사대모화설을 제기했던 신채호도 포함해서다. 물론 중국인 자신들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부른 일은 역사상에 단 한 번도 없다. 우리는 고작해서 바다를 가리켜 겨우 西海라고 불렀을 뿐, 선생의 선구적인 西國표기마저 계승 못하는 小心한 後人으로 남고 말았다. 이런 우리 중의 누가 선생을 가리켜 사대라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을 알려면 선생의 저작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중국은 서국이고 우리는 동국이라는 당당한 對比意識의 表現은 단편적인 1-2回性으로 그치지 않았다. 선생의 많은 글에서는 '동쪽'이 갖는 가치와 철학과 자부심을 매우 진지한 자세로 추구하는 집념이 보인다. 몇 구절을 인용한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 누리를 비칠 바탕이 있는 것으로는 새벽해보다 고른 것이 없고 氣가 온화하고 무르녹아 만물을 기르는 데 功效가 있기로는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큰바람과 아침해는 모두 동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낭혜화상비문)

 "우리 大王의 나라는 일취월장하며 물은 순조롭고 바람은 온화하니, 어찌 다만 깊숙이 겨울잠을 자던 것이 다시 떨치고 소생하는 것뿐이겠는가. 아마도 싹을 잡아당겨 무성히 자라도록 하니, 생기고 변화하며 생기고 변화하는 것[生化生化]이 동방[震]을 터전으로 하는 것이다."(해인사 선안주원벽기)

 "東俗은 비록 칼 차는 것을 숭상하나 <武>는 진실로 <戈의 止>(전쟁의 종식)를 귀히 여긴다."(양위표)

 "서쪽은 동쪽으로부터 밝아진다.[西自東明]"(원측화상휘일문)

  선생의 이러한 동방예찬에 대해 최근에야 학계에서는 이를 '東人意識'의 개척이라 하여 큰 주목을 하면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최영성 교수는 "후삼국 당시의 지식층에서는 사대모화적 성향이 거의 일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문화민족이고 나아가 세계문화의 밑바탕이 된다고 외쳤던 것은, 후일 고려-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민족주체의식의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사대모화의식이 하나의 시대사조로 굳어져 自卑의 경향이 심각했을 때에도 민족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 연면히 이어지게 되었다."('최치원의 철학사상' 2001. 아세아문화사 427면)고 주장한다. 고운 연구에 있어서 실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새로운 地平이 열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東人의식에 대한 연구가 왜 이렇게 늦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래 고운선생을 다룬 책들이 거의 조선조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조 학자들은 선생에 관한 글을 쓰면서 불교관계 글들은 모두 배척했다. 삼국사기나 계원필경을 위주로 글들을 썼는데 그 책들은 동인의식과 관련되는 글들이 등장할 場所가 아니다. 동인의식에 관한 글들은 선생이 귀국 후에 찬술한 글, 특히 불교관계 글에서 주로 나온다. 특히 선생의 불교관계 글은 난해해서 이제서야 제대로 된 번역이 겨우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의 동인의식에 관한 학계의 開眼도 뒤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晩時之歎의 감은 있지만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다행함이 있다.

--동인의식 연구는 1981년 유승국 교수가 '최치원의 동인의식에 관한 연구'가 발표됨으로써 물꼬를 텄다. 이후 연구들의 몇 예.

  * "東土에 대한 애정적 감정의 표출을 심화시킨 흔적은 여러 내용 속에 나와 있다. 이것은 곧 그의 조국에 대한 호칭에서 증명되는데 그는 동방을 가리켜 仁鄕(양위표) 혹은 君子之鄕(지증대사비문) 君子之國(제참산신문)이라 했다. 자긍심에 찬 그의 東土觀은 곧 이상적 정치관과 연결된다. 그는 東人으로서 동인에 대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유성태 '고운의 정치사회관' 1989. 민음사 '고운최치원' 254-261면)

   * "그는 東으로 함축되고 상징되는 것을 가장 먼저 의식하고 인식하고 표출하여 東의 의식과 문화와 인간론을 전개한 초유의 인물이다."(김용구 '동과 서의 사유세계' 1991. 김지견화갑기념사우록)

 

---------(論點 五) 雙女墳의 說話--------------------

  선생이  水縣尉 시절 이 현과 이웃 高淳縣의 경계에 있는 공무 숙소에 들렀다가 무덤에서 나온 두 자매(八娘과 九娘-장사꾼에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定婚에 불응하고 죽어 나란히 묻혔다 함)와 시를 주고받으며 정회를 나누었다는 이야기. 이 설화는 우리 나라의 '태평통재'(성임(1421-1484)의 저작. 권60)에 실려 있고 중국의 '六朝事蹟'(張敦 저)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시와 '쌍녀분 記'는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그 동안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현존 最古의 선생 문집인 '고운집'(1925년 간행-前述)과 이후의 문집(대동문화연구소 간행, 최영성 주해서 등)에서 수록을 배제하고 있으며, 고운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를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다만 1982년 刊 '국역 고운선생문집'(최준옥 편)만이 "선생의 저술이 아니라는 설도 있기에 별도로 수록, 후인의 참고에 제공코자 한다"(하권 461면)라는 단서를 붙여 관련 시문을 <雜錄>이란 난에 따로 실었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는 최근 와서 이 설화에 대한 관심이 열기를 띠고 있다. 두 자매의 무덤이라는 쌍녀분이 있는 중국 고순현 당국은 1997년 7월 이 무덤 앞에 '쌍녀분 簡介(소개)'라는 비석을 세운데 이어 1998년에는 중국 측 각종사서와 논문, 무덤 사진 등을 묶어 '쌍녀분과 최치원'이란 책을 간행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를 오페라로 극화한 비디오 CD까지 나왔다(江蘇東視TV문화전파공사 제작). 제작사에서는 한글 자막까지 넣은 이 CD를 訪中 한국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열의도 보였다. 또 高在心이란 화가는 쌍녀분 시와 쌍녀분 記를 새긴 손바닥 크기의 石製기념물을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중국 측의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이 무덤을 찾는 한국인들도 최근 늘고 있다고 한다.

  경주최씨 족보들은  대부분 이 부분을 기록에서 제외시켜 왔다. 그러나 중국 쪽에서 고운선생 홍보를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에 따라 宗人들의 중국 유적지 방문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 쌍녀분에 관해서는 진실 여부를 떠나 그러한 설화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이 난에 저간의 경위를 소개한 것이다.

--2001년 10월 우리 宗人들이 고순현 현지의 비석을 둘러보았다. 陳后翔이란 사람이 쓴 비문에 "이곳의 나무와 돌을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구절이 있었다.

--고순현이 낸 책자에는 송나라 원종 때의 '健康志', 송나라 때의 '육조사적', 원나라 순제 때의 '金陵新志', 청나라 강희제 때의 '高淳縣志'가 복사로 등재돼 있는데 내용은 전부 비슷하다.

--이 설화에는 두 여인과 선생이 주고받았다는 20수 가량의 시가 나오는데 선생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시 한 구절을 보면 설화의 서두를 알 수 있다.

  自恨雄才爲遠吏  한스럽다. 웅비의 꿈 지닌 젊은이가 먼 타국의 관리되어

  偶來孤館尋幽邃  쓸쓸한 여관에서 유령을 찾다니.

  戱將詞句向門題  장난 삼아 시 한 구절 썼는데

  感得仙姿侵夜至  선녀가 감동해 깊은 밤에 찾아 오누나.

  

-----------(結語) 神秘의 靑山----------------------

  선생은 스스로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마지막 계제에서 이런 상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後人의 筆舌로는 아무런 규정도 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기록을 정리한 입장에서 토로하는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 이 기록이 취했던 자세대로 또 한번 선생의 親撰을 빌릴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 실려 젊은 세대들도 잘 아는 絶唱  '秋夜雨中'이다.

  秋風惟苦吟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 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에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불을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이 시를 쓴 시기에 대해서는 귀국 전(許筠 惺 詩話, naramal.com)과 귀국 후(이숙희  ‘한시 바로보기 거꾸로보기’1998..이회, 최영성 '고운문집' 56면)로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苦吟해도 知音이 드물어 마음이 천리만리 저 먼데로 떠나는" 선생의 처지와 心懷는 당나라에서나 신라에서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생의 생애와 관련한 기록을 신규 정리하는 것은 선생에 관해 기본적으로 잘못 전해진 것을 시정하자는 것이 당초의 취지였다. 선생의 親撰시문과 중국 현지답사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의문과 혼선은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 때문에 선생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때로는 莊重한 모습으로, 때로는 鬱鬱한 모습으로 이렇게 긴 세월을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天衣無縫의 문장 때문인가. 앞 항에서 東史纂要의 기록을 인용한 바 있지만, 5백년 전의 나무꾼과 시골 아녀자가 어려운 선생의 글을 어떻게 해독하여 선생을 기린다는 말인가. 지금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만으로 국민이 선생을 기리는 것은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不遇했다는 것 때문인가. 불우라면 마의태자도 있고 정몽주도 있다. 功績 때문인가. 그 때문이라면 세종대왕, 충무공이 있다. 山川巡禮 때문인가. 그것이라면 김삿갓과 大東輿地圖의 김정호가 있다. 隱遁 때문인가. 은둔이라면 杜門洞 충신들과 士禍때의 많은 선비들도 있다. 또 節槪라면 사육신과 삼학사가 있고 剛直이라면 성충과 조광조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을 합친 事蹟보다도 더 많은 고운선생 사적을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줄기차게 가슴에 담아 내려왔다.

  참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고 찾아도 찾기지 않는 해답이다.

  선생의 생애와 관련한 의문과 迷路를 찾아 그 해답을 구해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오늘의 이 기록도 그러나 지엽적이고 표면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더듬었을 뿐, 더 깊은 곳은 알아내지 못한 매우 未盡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참으로 怪異하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조금도 슬프지 가 않다.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인물, 그가 바로 고운선생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그 어떤 역사상의 우뚝한 인물도 史家의 追跡과 穿鑿에 그 실체를 捕捉당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선생은 수십 수백의 연구자가 천년의 공을 들여 탐색했음에도 결코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未知의 존재로 남아 있다.

  선생은 천년전의 옛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많은 글과 자취를 남겼다. 그런데도 후인들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글이 없는가, 더 많은 자료가 없는가 하며 목말라 한다. 고려의 대문인 李穡(1328-1396)은 이렇게 읊었다.(동국여지승람)

  請君細訪孤雲   그대, 고운의 자취를 자세히 찾아 돌아오거든

  歸來洗我塵胸臆  나의 가슴속 티끌을 시원하게 씻어주오.(權史官을 전송하는 시)

  그렇다. 선생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알고싶어지는 분이다. 선생은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분이다. 알고는 싶은데 알 수 없는 것이 신선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신선이다. 가야산이나 지리산의 신선이 아니라, 수많은 史家와 敬慕者들이 울창한 숲 속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어도 옷소매를 잡을 수 없는, 가야산이나 지리산보다 더 깊고 험준한 <神秘>라는 靑山의 神仙이다. 그리고 그 청산에서 "한번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三十一항 입산시)고 했던 다짐을 천년이 넘도록 墨守하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지극한 뜻을 구태여 왜 깨랴. 그래서 많은 未知를 남겨둔 이 기록을 아무 失望이나 遺憾도 느끼지 않은 채 주저 없이 여러분께 바친다.           

          

 

    * 위 내용을 다음 페이지에 年表로 정리했음.

   孤雲先生 관련 千年 年表

서기 857년/ 신라 헌안왕 元年/唐宣宗大中11년/丁丑

선생께서 탄생하시다.

ㅇ 12세까지 精敏 好學하시다.

 

868/ 경문왕 8년/ 懿宗咸通 9년/戊子/12세

당나라에 유학하시다.

ㅇ  "네가 10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겠다."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명심, <다른 사람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천의 노력을 하여[人百之己千之]> 공부에 정진하시다.

 

874/ 同 14年/ 僖宗乾符 元年/甲午/18세

進士 科擧에 급제하시다. (아버지가 정해준 시한을 4년 앞당겨 첫 번 응시에 합격하는 壯擧를 이루심)

ㅇ 이 때까지 지은 글이 상자에 가득했으나 모두 버리시다.

 

875/ 憲康王 元年/ 同 2年/乙未/19세

東都 洛陽에서 문필생활하시다. ㅇ 이 때 저술한 글 賦 5수, 시 百수, 잡시부 30수를 모아 뒷날 3편의 책을 만드시다. (지금은 전하지 않음).

ㅇ 이 때 黃巢의 난이 일어남.

 

876/同 2年/ 同 3年/丙申/20세

지방 司正기관 책임자인  水縣尉(宣州관내)에 임명되시다. (외국인으로 약관에 이런 관직에 취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ㅇ 공무 여가에 지은 글이 모두 5권으로 이것이 中山覆 集임. (지금은 전하지 않음).

ㅇ 쌍녀분의 전설은 이 때 일인데 眞僞는 不明임.

 

877/同 3年/ 同4年/丁酉/21세

겨울에 학문 정진코자 현위를 사임하고 入山修學하시다.

ㅇ 이해 왕건이 출생하다.

 

879/ 同 5年/同 6年/己亥/22세

6월 12일 황소가 宣州를 함락시키다. ㅇ 戰火를 맞은 선생은 설상가상으로 양식까지 떨어져 공부를 계속하지 못할 苦境에 드시다.

ㅇ 황소 토벌 위해 10월 鎭海節度使 高騈이 선생이 거처하던 淮南지방의 節度使로 부임해오다. ㅇ 12월 高騈이 東面 諸道行營兵馬都統(동부지구 군 총사령관)을 겸하다. ㅇ 高騈의 기용으로 館驛巡官이 되시다.

 

880/同 6年/僖宗廣明元年/庚子/23세

여름 총사령부 막료로 발탁되어 高騈의 서기 일을 도맡다. 모든 글이 선생의 손으로 이루어지다.

 

881/同 7年/僖宗中和元年/辛丑/24세

檄黃巢書를 지어 천하에 文名을 떨치시고 超高速 昇進을 하시다. (都統巡官 承武郞 殿中侍御史 內供奉으로 승진하고 緋魚袋를 하사 받으심)

ㅇ 이후 귀국 때까지 公私로 쓴 글이 만 여수가 됨(귀국 후 이를 추려 20권으로 편찬, 임금에게 올린 것이 계원필경임)

 

884/同 10年/同 4年/ 甲辰/28세

황소가 토벌되어 '賀殺黃巢表'를 쓰신 후 귀국을 결심하시다. ㅇ 황제가 사신의 자격을 주어 귀국하게 하다. ㅇ 8월 회남을 출발, 10월 배를 띄었으나 풍랑이 심해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내시다.

 

885/同 11년/同 光啓元年/乙巳/29세

3월 신라에 도착하시다. ㅇ 헌강왕이 侍讀겸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벼슬을 제수하다.

 

886/定康王元年/同 2年/丙午/30세

1월 헌강왕에 계원필경 등을 바치시다. 그러나 그 반년 뒤 헌강왕이 돌아가고 정강왕이 즉위하다. ㅇ 선생을 좋아했던 헌강왕이 돌아가자 당시 요직을 독점하고 있던 眞骨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선생을 견제하기 시작하다.

 

887/眞聖女王元年/同 3年/丁未/31세

정강왕마저 1년만에 돌아가고 여동생 진성이 즉위하다. ㅇ 진성여왕은 美少年을 대궐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권력을 주는 등 亂政을 하다.

ㅇ 이 해 당나라 정세도 혼미해져 高騈이 피살당하는 변이 생기다.

ㅇ 선생은 진골의 핍박으로 太山(전북 태인), 天嶺(경남 함양), 富城(충남 서산)태수 등 지방직을 전전하시다. 함양 上林 조성 등 곳곳서 善政을 펼치시다. (함양 재임시 防虜大監 겸 阿 으로 승진하심)

 

888/同 2年/昭宗文德元年/戊申/32세

여왕의 난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관가 大路에 나붙는 등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다.

 

889/同 3年/同 龍紀元年/己酉/33세

지방에서 조세를 안 바치고 元宗-哀奴가 상주에서 봉기하는 등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다.

 

891/同 5년/同 大順2年/辛亥/35세

梁吉의 부하 弓裔가 溟州를 점령하다.

 

892/同 6年/景福元年/壬子/36세

甄萱이 후백제를 세우는 등 나라가 더욱 위난에 빠지다.

 

893/同 7년/ 同 2年/ 癸丑/37세

부성태수 재직중인 이때 당나라에 賀正使로 가게 되었으나 도적이 많아 중지했다가 그후 다녀오시다.

 

894/ 同 8年/同 乾寧元年/甲寅/38세

나라의 천년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救國의 直言을 담은 時務十餘條를 여왕에게 올리시다. ㅇ 여기에는 人材의 공정등용 등 획기적인 국정개혁안이 제시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진골세력의 훼방과 음해로 하나도 실시되지 못하다. (따라서 여왕이 嘉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無實한 것임)

 

895/同 9년/ 同 2年/乙卯/39세

해인사 묘길상탑기 지으시다. 이 글에서 선생은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굶어 죽거나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다"고 탄식하시다.

ㅇ 왕건이 19세의 나이로 궁예휘하에 들어가다.

 

897/孝恭王元年/同 4年/ 丁巳/41세

난국이 수습되지 않자 진성여왕이 인책 사임하고 효공왕 즉위하다. ㅇ 선생은 두 왕의 '讓位表'와 '謝嗣位表'를 代撰해주면서 그 글에서 "어진 나라가 병든 나라로 되다니"라고 통탄하시다. 이 글에서 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滅私奉公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면서 지도층의 無爲無能을 비판하시다. (이 비판으로 진골세력은 선생의 제거에 본격적으로 나섰음.)

 

898/同 2年/同 光化元年/戊午/42세

간신들의 공세와 방해가 거세지자 아찬 등 모든 공직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은거하시다. ㅇ 해인사 結界場記 지으시다.

ㅇ 이후 해인사를 주 거주지로 하고 틈나는 대로 전국을 순례하며 후학교육과 국토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다. (紀行年期가 史書에 明記된 것이 없고 민간전설로만 전해오기 때문에 일일이 年表에 細分해서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곳에 뭉뚱거려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고 한스럽다.)   

 --선생의 紀行地에 대해 삼국사기는 경주의 남산, 剛州(지금의 의성)의 氷山,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合浦(지금의 마산-창원)의 別墅 등 다섯 곳을 예거했다. 이 밖의 기록이나 사적으로 전해지는 순례지는 다음과 같다.

  * 경북지방= 안동 청량산의 치원봉, 치원대, 치원암과 聰明水, 봉화 청량산,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 의성 騰雲山 고운사, 문경시 가은읍 夜遊岩과 백운대, 성주 초전, 고령 벽송정, 김천 梁金洞 학사대

  * 부산-경남지역= 부산의 해운대, 수영구 백산사의 玉蓮禪院,  남구의 신선대, 양산 孤雲臺 (일명 임경대), 거창 가조 고견사,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남해 錦山洞天(택리지에 기록 있으나 발견 안됨), 진해 靑龍臺刻石, (함양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기 이전의 것임)

  * 충청지역= 연기군 조치원읍, 보령군 성주사와 보리섬, 공주 공산성, 보은  속리산,  홍성 장곡면 쌍계 계곡

  * 호남지역= 김제시 금산면 歸信寺,  해남군 화원면 瑞洞寺, (태인, 옥구 등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 이전의 사적이 대부분)

  * 지금까지 밝혀진 선생의 紀行地는 영남 호남 충청 등으로 전부 三南지역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금강산 개방으로 그곳에도 선생이 紀行했다는 자취가 새로 확인되었음.

 

900/同 4年/同 3年/庚申/44세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지으시다.

ㅇ 견훤이 정식으로 왕을 칭하다.

 

901/同 5年/同 天復元年/ 辛酉/45세

弓裔가 摩震國을 세우다.

 

904/同 8年/哀帝天祐元年/甲子/48세

해인사에서 巨作 법장화상전 지으시다. 그 글에서 "이 난세에 무슨 일을 이룰 것인가[亂世成何事]"라고 탄식하시다.

 

907/同 11年/後粱 開平元年/丁卯/51세

당나라 망하다.

 

908/同 12年/同 2年/戊辰/52세

이 세상에 남겨진 최후의 글인 新羅壽昌郡(대구) 護國城 八角燈樓記 지으시다. ㅇ "법등을 높이 달아 하루빨리 전쟁을 없애야 되겠다"는 施主者에게 선생은 이 글에서 "사람에게 선한 소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이에 따를 것"이라고 격려하시다.

 

912/神德王 元年/ 太祖乾化2年/56세

효공왕 죽고 그의 매형인 박씨 신덕왕이 즉위. (이후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경애왕까지 세 왕이 박씨였는데 김씨들의 불만이 계속되었음)

 

916/同   5年/末帝貞明2年/丙子/60세

견훤의 대야성(합천) 공격 실패

 

918/景明王2年/同 4年/戊寅/62세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즉위

 

920/同 4年/同 6年/庚辰/64세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

 

923/同 7年/後唐同光元年/癸未/67세

가야산 인근의 星州가 고려에 歸附

 

924/景哀王元年/後唐莊宗2年/甲申/68세

선생이 893년에 비문을 써준 지증대사비 건립되다. (이 비문에 선생이 두 군데 수정해준 것이 있음)

ㅇ 이것이 문창후 손길을 예증해 주는 마지막 자취이고 이후는 아무 기록이 없음.

 

926/同 3年/ 明宗天成元年/丙戌/70세

渤海,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다.

 

927/敬順王元年/  明宗天成2年/丁亥/71세

견훤이 경주 공격해 景哀王을 살해하고 김씨계인 敬順王을 즉위케 하다. 직후 대구 팔공산서 왕건과 전투.

 

928/同 2年/同 3年/戊子/72세

가야산 바로 옆의 陜川 草溪서 고려-후백제 군이 치열한 전투.

 

935/敬順王9年/廢帝2年/乙未/79세

신라 망하다(고려에 歸附).

 

936/高麗太祖天授19年/ 天福元年/丙申/80세

후백제도 망해 고려 王建이 후삼국을 통일

ㅇ 이 때까지 문창후가 생존하셨다는 주장 있음.(양기선교수)

 

951/光宗光德2年/後周廣順元年/辛亥/95세

ㅇ 이 때까지 문창후가 생존하셨다는 주장 있음.(함양 상림공원 함화루 문창후신도비. 1860년)

 

1009/高麗穆宗12年/宋眞宗大中祥符2年/己酉/

고려에서 처음으로 新羅系인 현종이 즉위. 경순왕 사촌누이의 손자임.

 

1020/顯宗11年/天禧4年/庚申

8월 內史令을 追增받고 문묘에 從祀됨

 

1023/同14年/仁宗天聖元年/癸亥

2월 문창후로 追封됨

 

1074/文宗28年/神宗熙寧7年/甲寅

9월 5대손 善之를 都染署史로 삼다.

 

1145/仁宗23年/金熙宗皇統5年/乙丑

김부식의 三國史記 간행(史書로서 처음으로 선생의 사적을 기록함)

 

1200/神宗3年/寧宗慶元6年/庚申

이즈음 간행된 李仁老 '破閑集'서 선생의 신선설을 기록하다.

 

1459/朝鮮世祖5年/明英宗3年/己卯

왕명으로 崔恒등이 선생의 문집 12권 간행(지금은 전해지지 않음)

 

1552/明宗7年/世宗嘉靖3年/壬子

왕이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東方의 理學시조이니 그 자손은 귀천이나 嫡庶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軍役을 침범하지 말라"고 傳敎하다.

 

1561/同16年/同40年/辛酉

慶州 西岳 仙桃山下에 書院을 세우다. ㅇ "부윤 귀암 李公禎이 퇴계선생에게 품신하여 계해년에 位版을 봉안했다. 퇴계선생은 서악정사라 이름 짓고 강당은 時習, 동재는 進修, 서재는 誠敬, 동하재는 切磋, 서하재는  雪, 앞 누각은 詠歸, 문은 道東이라 하여 누각 난간에 선생의 필적을 걸어놓았는데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리고 위판은 산골짜기로 옮겼다"고 함

 

1573/宣祖6年/神宗萬曆元年/癸酉

"문창후는 도덕과 문장이 우리 동방에서 第一人이니 그 자손은 비록 미천한 庶孫까지라도 군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전교하다.

 

1600/同33年/同28年/庚子

경주부윤 李時發이 옛터에 초사를 세우고 위판을 환안하다.

 

1615/光海主7年/同43年/乙卯

호남 태인현에 무성서원을 건축하다.

 

1623/仁祖元年/熹宗天啓3年/癸亥

경주 선비진사 崔東彦 등이 상소하여 사액을 청했던바 '서악서원'이란 액자를 내리다.

 

1626/同4年/同6年/丙寅

"문창후의 후손은 비록 支派서손이라도 군정의 일을 시키지 말라"고 전교하다.

 

1670/顯宗11年/淸聖祖康熙9年/庚戌

함양에 백연서원을 건축하다.

 

1696/肅宗22年/同35年/丙子

무성서원을 賜額하고 致祭하다.

 

1755英祖31年/高宗乾隆20年/乙亥

대구 해안현에 桂林祠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다. 후에 구회당 후편으로 이건하다.

 

1796/正祖20年/仁宗嘉慶元年/丙辰

"문창후 자손은 비록 지파서손이라도 군역에 침범하지 말고 汰講(서원을 도태시킴)의 예에 넣지 말라고 열성조의 敎令을 받아온 이래 과연 遵行했느냐 해조에 엄숙히 훈령하고 범하는 수령은 나타나는대로 처벌하라"고 전교하다.

 

1846/憲宗12年/宣宗道光26年/丙午

창원 월영대에 월영서원을 세우다.

 

1850/哲宗元年/同30年/庚戌

경주 낭산 독서당에 유허비와 碑閣을 세우다.

 

1870/高宗7年/穆宗同治9年/庚午

함양 상림에 신도비를 세우다.

 

1871/同8年/同10年/辛未

경주 상서장에 신도비와 비각을 세우다.

 

1901/同 光武5年/德宗光緖25年/辛丑

하동 橫川에 影堂을 세우다.(금천서원이 毁撤되자 이곳에 이건하여 영정을 봉안하다)

 

1902/同6年/同26年/壬寅

창원 두곡에 영당을 세우다.(월영서원이 毁撤되자 이곳에 이건하여 영정을 봉안하다)

 

1920/庚申

청도 日谷에 영당을 세우다.(1976년 중건하고 鶴南서원으로 개칭하다)

林川에 영당을 세우고 道忠祠라 편액하다.

서산 지곡에 富城祠를 세우다.

옥구에 廉義서원을 復設하다.

 

1924/甲子

창원 월영대를 개축하고 비각을 건립하다.

 

1925/乙丑

현재 전해지는 선생문집 중 最古의 것인 '고운집'상-하권(崔坤述編)이 간행되다.(1926년 重刊)

 

1933/癸酉

익산 웅포에 영당을 세우다.

 

1937/丁丑

가야산 학사당이 이건되어 영정을 봉안하다.

 

1949/己丑

경주 상서장에 영당을 세우다.

 

1951/辛卯

가야산 학사당에 가야서당을 세우다.

 

1954/甲午

부산 해운대에 신도비를 세우다.

 

1969/己酉

부산 해운대에 동상을 세우다.

 

1971/辛亥

가야산 학사당 앞에 신도비를 세우다.

 

1972/壬子

안동에 影閣을 건축하고 영정을 봉안하다.

 

1974/甲寅

보령 聖住寺址에 신도비를 세우다.(面刻大字는 박정희대통령 친필)

 

1976/丙辰

익산 웅포 단동사 추원문 앞에 신도비를 건립하다.

 

1982/壬戌

선생문집의 한글 번역판 '국역 고운선생문집'(崔濬玉編)이 간행되다.

 

1996/丙子

2월 문화체육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생을 선정하다.

 

1998/戊寅

중국 高淳縣에 '雙女墳'碑 건립되다

 

1999/己卯

四山碑銘 最新註解書가 崔英成에 의해 간행되다.

 

2000/庚辰

중국  율水縣에 선생의 동상 건립되다.

 

2001/辛巳

5월 중국 揚州市 정부서 선생의 재임시절 자주 왕래하시던 곳에 '崔致遠 經行處'란 비석을 건립하다.

10월 同정부와 양주대학이 '韓中 崔致遠 학술세미나'와 '崔致遠 史料陳列展'(동상도 제작 전시)을 개최하다. 이에 한국종친들이 다수 참석, 告由祭를 올리고 遺蹟地를 순례하다.

-끝-

 

文昌侯 찬술  四山碑銘

<해설> 문창후께서 지으신 비명은 네 개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경주시 외동면 初月山의 대숭복사 비명, 하동 화개 智異山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명, 보령 崇嚴山 성주사의 낭혜화상 비명, 문경 가은 원북리 曦陽山 봉암사(일명 양산사)의 지증대사 비명으로서 모두 4개의 산에 있기 때문에 '四山비명'이라 한 다. 이를 다년간 연구한 최영성 교수의 소론은 다음과 같다.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는데 선생이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는 지금도 남아 있어 原碑 또는 탑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註解는 1926년(이것은 重刊本이고 初刊은 1925년임-발행자註) 후손 최국술(최곤술의 초명-발행자註)에 의해 간행되고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최문창후전집'을 影印 간행할 때 실렸던 것이다."

  이 사산비명은 선생의 역작으로서 후인들로부터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 비명 속에 神出鬼沒하는 형상과 龍吟虎伏하는 기세를 감추고 있음을 기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놀라고 혼이 밝게 하며, 이목을 놀라게 하고 心脾를 씻게 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고운선생문집逸稿' 사산비명跋) "그 명문들은 그의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이은상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는 말이 이 글의 위대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비명은 천백년 전의 비석을 탑본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전하는 각 책자마다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오늘 이 난에는 약간씩의 상위가 있는 책자들을 종합검토해서 가장 최근에 정리한 것(1998. 아세아문화사간)을 싣는다.

  그리고 한글번역은 생략한다. 한글번역본은 1982년 최준옥 편 '국역 고운선생문집'(홍진표 성낙훈 변각성 최병헌 역주)과 1999년 최영성 역주 '고운문집'이 대표적이다. 두 책은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본 대동보로서는 어느 한 주해만을 채택하기로 결론을 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고, 그렇다고 두 주해를 倂載하는 것은 體裁上의 문제점과 아울러 지면의 한계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문이 필요한 분들께서는 위 두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출신.

 

1. 가계 및 유년시절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2. 당나라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궤20集》 1부(部) 5권이다. 그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위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변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였다. 그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 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3. 귀국 후의 활동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게 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 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4. 시국관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海印寺)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두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사회개혁 활동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되어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6. 은거생활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연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으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7. 고려건국을 즈음한 태도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데 비하여,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8. 학문적 입장

 한편,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9. 역사인식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하여 삼국의 연표와 통일신라, 그리고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 上太師侍中狀〉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 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10. 한문학·불교업적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는데,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가운데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가운데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종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가운데는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바,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이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11. 도교·노장·풍수지리연구

 유교와 불교 이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었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 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 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그리고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 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2. 평가

 그런데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품 출신의 최치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 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13. 저술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 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으며,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 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상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할 뿐이다.

<계원필경집>이 당나라 유학 시절의 대표 저술이라면, 번역 출간된 <사산비명>은 그가 귀국한 뒤에 지은 대표작이다. <사산비명>은 숭엄산 성주사 대랑혜화상,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휘양산 봉엄사 지증대사 등 세 명의 스님에 대한 비명과, 신라 왕실에서 세운 초월산 대숭복사의 비명을 모은 것이다.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세 비명을 비문이나 탁본으로 확인할 수 있어 금석문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다. 비문을 통해 신라시기 불교는 물론,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와 최치원의 유·불·도 삼교 융합 사상까지 엿볼 수 있다. 그는 “도(道)란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란 나라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방 사람들이 불교도 받아들이고 유교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글씨도 잘 썼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1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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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디지털한국학 한국의 역대인물 http://www.koreandb.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