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 명환 신라 최치원 致遠 寄海印僧希朗 詩下題 防虜太監 天嶺郡太守 알粲 崔致遠
고운문학관 孤雲文學館
崔致遠雙溪寺碑及海東名迹秋風唯苦吟字體橫豎之畫瘦勁與算子相似。直致而少姿態。成石璘演福寺碑及都評議使司廳記字體如成字等戈畫中字等直下之畫甚長。絶不與他人字樣相類。每竊怪之。亂後赴京。購得諸法帖。其中歐陽詢所書醴泉觀銘皇甫府君碑字畫瘦勁如算子褚遂良聖敎序戈畫中字等畫甚長。始知崔學歐陽體而成倣褚體也。雖在我東。至於名筆則不敢自作體而動效古人。於此可見。至於我朝以來。倣之體者。下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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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陵雜稿卷之七 原集 |
雜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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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靖甲辰四月初九日丁丑。
有老宿指點煙霧中云。彼金生窟。彼致遠臺。此後有元曉寺。西有義相峯。昔者。四聖人居是山。結爲道友。往還游息於斯云。余應之曰。元曉。新羅中葉僧。金生,義相。亦皆羅產而異世。最後者崔孤雲。其生在羅末。安得相從。爾無以瞽說罔我。自此釋徒不得發誕厖。諺云。昔有寺僧。欲創是寺。死爲三角牛。輸入供財。其勤殊苦。一日。死于寺下。遂聚石爲墓。試問此。欲針其誣惑。有小衲開口將答。老衲目止之。遂合喙不敢吐。徐曰。有一琴姓生員。命畫三角於寺門。使來者皆知其結緣也。余謂崔孤雲入大唐。檄黃巢。名動天下。遂爲東方文章之祖。至於配食文廟。然其實吾儒之罪人也。昔王夷甫善淸談。誤天下蒼生。使神州陸沈於五胡。永爲中原百代罪人。若孤雲則反有甚焉。彼其負大名東歸。雖不爲朝廷所容。東人望之若神仙中人其平生所歷一水一石。至今猶稱道不衰。誠使孤雲粗識吾儒之門戶。而昌言排之。則五百年高麗。未必陸沈於佛。若是之酷也。其稱順應曰大德。利貞曰中庸。嗚呼。是二妖僧者。果能爲大德,中庸。孰不爲大德,中庸乎。其助桀爲虐。得罪萬世名敎。可勝言哉。若琴生者。亦孤雲之罪人也。
거창을 찾았던 명현들
최 치원(崔 致遠:857∼?)
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로 호는 고운(孤雲)이다. 신라 경문왕 9년(867) 당나라에 유학 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879년 황건의 난에 종군하여 당시의 표장 (表狀) 서계격문(書啓檄文)등은 모두 그의 손으로 지어 졌으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 文)은 명문으로 알려졌다. 885년에 귀국하여 내직에 있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하여 외직을 자청해서 천령(현 함양) 등의 태수를 지냈다. 진성여왕 7년(893) 시무십조(時務十條) 를 상소하여 시행케하고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글씨도 잘 썼으며 그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항하는 한편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의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제향되었고 숭복사비, 진감국사비 등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고 계월필경 등의 저서가 있다.
그가 천령 태수로 함양에 오가던 때인지 아니면 말년의 유랑 생활에서 가야산에 은둔할 때인지는 모르나 가북의 몽석골에 온 적이 있었다. 지금 가북면 몽석리 내촌 가북저수지 위 수도산록(修道山麓)에 고운정(孤雲亭)이 있으니 일명 송풍대(送風台)라고도 한다. 1887년에 이재완이 문창후 수식송 유지비문을 찬하고 1896년 11월에 비를 세웠고 본래 그 곳에 최 치원이 손수 심었다는 거목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