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송사 탑 碧松寺塔


  벽송사삼층석탑
  (碧松寺三層石塔)

  소  재 : 마천면추성리
 
  연  대 : 신라 말 또는 고려 초 추정
 
  가  치 : 보물 제 474호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가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리고 앞쪽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아담한 절이다.

 창건 연대 등 자세한 역사는 알 수가 없지만, 현재의 절이 들어서 있는 위치에서 약 50m 위쪽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기를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중종 15 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에 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는,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현재 보물 제 474호로 지정돼 있다. 사실 벽송사가 칠선계곡에 있다고는 하지만, 등산로와도 관련이 없고 내노라 할 문화유적이 없어 인적이 드문데, 그런 중에서 벽송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들목의 나무장승이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 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이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 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이건하였다.
 

국립 공원 안에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

종   목   보물   474호
명   칭   벽송사삼층석탑
  (碧松寺三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8.12.19
소재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8-1 벽송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벽송사
관리자   벽송사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碧松)이 창건한 사찰이다.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1520년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은 것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한 장의 널돌로 이루어졌으며 밑에는 수평으로 얇은 단을 새겼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하다. 하지만 지붕돌 윗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치켜올림의 정도도 심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2단, 3층이 3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있다.

이 석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며 짜임새 또한 정돈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탑을 두는 것과 달리 탑을 절 뒤쪽의 언덕 위에 세우고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벽송사목장승

 <경상남도민속자료 2호>(1974.12.24)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양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목장승이다.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기능과 함께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神將像)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2기 모두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혀 있어,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고, 그나마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하다.

대체로 잘 남아 있는 오른쪽 장승은 대머리에 크고 둥근 눈이 돌출되었다. 코 주위에 깊은 선을 둘러 뭉툭한 코가 더 두드러져 보이며, 꽉 다문 입 주위와 턱 아래에는 톱니 모양의 수염을 묘사해 놓았다. 몸통에는 ‘호법대신(護法大神: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왼쪽 장승은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이 파손되었다. 남아 있는 눈은 크고 둥글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짧은 수염을 표현하였다. 몸통에는 ‘금호장군(禁護將軍:경내에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구전에 의하면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시대가 오래되어 보기드문 모습이다. 비록 눈·코·입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였으나 순박한 인상을 주고, 무서운 듯 하면서도 친근함을 느끼게 하여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입구

 

 

지리산-26(벽송사)

***벽송사***

*벽송사*
숱한 설화남긴 조선 불교 큰 맥
판소리 "변강쇠타령"주무대
사찰입구 독특양식 남녀 목장승 눈길
빨치산 야전병원 근대사 수난 잔영도
천왕봉에서 중봉을 거쳐 하봉에 이르면 지리산 능선에서는 보기드문 암릉이 이어지는 독특한 능선길이 있다.
근래까지도 인적이 드문 이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얼음터가 있고 여기서 오른편으로 향햐면 용이 노닐었다는 엄천강의 용류담을 만나고 왼편으로 내려오면 광주리점이 있었다는 광점동마을과 벽송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벽송사는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자리잡은 사찰로 숱한 창건 설화와 이에 얽힌 얘기들이 남아있다.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에서 2km남짓 떨어진 산자락에 위치해 큰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일반 등반객들이 한번 찾기 어렵다.
벽송사는 우선 입구의 목장승부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에 읽힌 사연도 질퍽하다.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타령)의 주무대가 벽송사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이는 함양에, 특히 등구 마천땅에 유난히 장승이 많았던 까닭일 것이다.
"가루지기"타령 내용 중에는 천하의 오잡년 옹녀가 천하의 변강쇠와 내외 삼아 함양 땅에 살았다.
잡질 외에는 아무 재간없는 강쇠란 놈 나무 해 오라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 뽑아 패어 불을 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나는지라 원통한 함양 장승신 서울 노량진 나루터의 우두머리 장승 찾아 나섰다.
성이 난 우두머리 장승 팔도에 통문 돌려 수만 장승 새남터에 모이게 하고 강쇠란 놈 응징방법 강구한다.
결국 8백여가지 병으로 강쇠에게 병 도배해 죽게한다 는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 함양땅이 본 무대로 추측된다.
지리산 권역의 문화가 "음잡한 소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함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권선징악의 형식을 지향하던 우리 고대문화의 단면은 "가루지기"이외에 인근 남원군의 흥부마을을 무대로한 "흥부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만큼 지리산이 한민족, 특히 남도 주민들에게 애환과 낭만, 그리고 풍자와 풍류의 장소로, 또는 삶의 터전으로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든 장승은 지금도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아직도 깊은 산중이나 절간의 입구에 나무나 돌로 만든 장승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장승이 바로 지방민속자료2호로 지정된 벽송사 목장승이다.
벽송사 입구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데 남자장승은 호법대신이며 여자장승은 금호장군이다.
왼쪽에 있는 장승이 여자장승으로 입이 합죽하며 꼭 다물어 뺨이 움폭 패어 있는데 지금은 머리 부분만 불에 타 손상돼 있다.
오른편 남자장승은 짱구로 양에 왕방울 만한 눈알이 튀어 나오고 우뚝 솟은 코는 얼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키는 2m남짓으로, 참나무로 조각돼 있고 얼굴 표정은 소박하면서도 위압적이며 과장과 질박을 동시에 표현해 장승의 성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찰 입구의 두 장승은 절 입구의 이정표겸 사천왕문격으로 절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서운 형상의 장승을 지나 5백여m 의 숲속길을 오르면 새로 단장한 벽송사가 나타난다.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했는데 처음에는 벽송암이라 했다.
그 후 숙종 30년(1704년)실화로 불에 타버린 것을 지안대사가 신도들의 모금을 통해 완전히 중수 했으나 6․25로 다시 불타버렸다.
지금의 사찰은 지난 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이곳에 와 절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사찰 경내에는 높이 3.5m의 화강암 3층 석탑이 있는데 보물 제 474호로 양식은 신라석탑 조형이지만 기본 형식에 벗어나고 무기력한 점등을 볼때 조선초기, 즉 사찰 창건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기단에 넓은 대리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부를 깔게 했는데 하층기단 하대석은 형식적으로 잔각한 하나의 돌로된 중석을 두고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 1주씩 있다. 중석과 지대석 사이에 높은 별석이 삽입되어 딴곳의 3층 석탑과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개씩 되어 있으며 아무런 조화를 이루지 않고 있어 양식은 신라 석탑이지만 이같은 부조화로 조선초기 작품이라는게 함양군의 설명이다.
벽송사는 입구의 기이한 형태를 한 두 목장승에 얽힌 사연과 사찰의 소실, 중건등에 얽힌 얘기 외에 사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흥미롭다.
지금으로부터 4백60여년 전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송지암이 태어났다.
총명해 10세가 되기 전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해 장군의 칭호를 받고 변방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인간이 서로 죽여야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인생 무상을 실감 계룡산에 들어가 불교수행에 정진한다.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쌓던중 자신이 나아갈 바를 찾아 지리산 어딘가에서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대사는 조선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지금의 광점동에서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내다 팔고 있던 터라 수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송지암에게 수도는 커녕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뭐가 깨우침을 기대했다가 3년여 동안이나 잡일을 하게 되자 어느날 대사의 문하를 떠나려 했다.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선뜻 대답했다.
이에 광점동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가니 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라 그 길로 돌아가 무릎 꿇고 경솔함을 사죄하니 모든 것이 걷히고 마침내 도를 깨쳤다 한다.
모든 물욕과 욕망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대사로부터 벽송대사의 칭호를 받게돼 벽송대사는 자신이 깨우침을 얻게된 곳에 사찰을 세우니 바로 지금의 벽송사라는 것이다.
벽송대사가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정심대사는 운명했다.
벽송대사는 곧 사찰을 세워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법비를 내렸다고 한다.
벽송의 문하에서는 그후 서산대사의 스승이 되는 부용, 경성등 두 고승을 배출하는 등 조선시대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 왔다한다.
벽송대사는 70수를 넘기고 열반했는데 수많은 사리가 나와 염주와 함께 석불에 보관해 왔으나 6․25 당시 불에 타 아깝게도 벽송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벽송대사의 창건 설화속에 싸리로 광주리를 만들던 곳은 그후 광주리점동이라 불리었으며 지금은 광점동으로 불린다.
이 땅에서 배척 당하던 시기에 불사를 일궈 사라져가던 조선시대 불교의 맥을 면면히 이어온 벽송사는 6․25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등 근래에 접어 들어 수난을 당했다.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던 탓에 국군 토벌대와의 교전으로 사찰이 불타고 수많은 인민군들이 죽었다 한다.
벽송사의 소실은 지리산자락 곳곳에 남겨진 또하나의 이데올로기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을 통해 인생무상을 느끼고 구도의 길을 걸었던 벽송대사의 정신이 서린 벽송사에서 4백여년이 지난 후 동족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

 

선사들과의 만남
 
참 도는 따로 있지 않다 - 碧松.
 

 
  벽송(碧松 : 1464~1534) 선사는 전라도 부안 사람으로 속성은 송씨이며 법명은 지엄(智嚴)이다. 28세 때 허종의 군대에 들어가 여진족과 싸워 공을 세웠으나 삶과 죽음을 체험한 후 계룡산 상초암으로 들어가 조징대사 밑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조선 중종 15년(1520) 3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암에 머물면서 외부와의 일체 교류를 두절한 채 정진하였다. 중종 29년(1534) 겨울에<법화경>을 강하다가 71세로 입적했다
.

벽송 스님은 처음으로 정심(正心) 선사를 찾아갔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어디서 온 납자인가?"
"참선의 묘리를 배우고자 왔습니다."
"나는 도(道)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보다시피 먹고 살기ㅔ
바쁘네. 그리고 자네가 거처할 방도 없고."
벽송 스님은 그날부터 토굴 하나를 따로 짓고 정심 선사와 같이
나무를 해다 팔며 생활하였다. 날마다 두 스님은 나무를 해서 시
장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벽송 스님은 산에 오를 때마다 정심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오늘은 좀 바빠서 말해 줄 수 없다."
"스님께서 깨쳐서 얻은 도리만 일러주십시오"
"산에가서 빨리 나무를 하자. 그것은 내일 말해 주겠다."
이렇게 대답을 3년이나 미루어 왔다.
벽송 스님은 어느 날 정심 선사가 없는 사이에 짐을 꾸려 떠나면
서 밥 짓는 공양주 보살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 떠나야겠습니다."
"별안간 무스 소립니까?"
"제가 스님을 찾아온 것은 도를 배우러 온 것이지 고용살이를 하
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3년이 지나도록 도를 가르쳐 주지 않으니 더 기다릴 필요가 없
게 되었습니다. "
"그래도 정심 스님이 오시면 떠나세요."
"지금 떠나겠습니다"
벽송 스님은 일종의 분노를 안고 발길을 옮겼다.
이때 정심 선사가 나무를 해가지고 돌아오자 공양주 보살이 다급
하게 말했다.
"벽송 스님이 떠났습니다."
"왜 떠났는가?"
"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떠났습니다."
"무식한 놈,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제놈이 그 도리를 몰랐
지. 자고 나서 인사할 때도 가르쳐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할 때
도 가르쳐 주었지."
"그런 것이 도입니까?"
"도가 따로 있나? 따로 있다면 도가 아니고 번뇌지."
"그럼 저에게도 가르쳐 주었겠습니다."
":암, 가르쳐 주었지."
"벽송 스님은 왜 몰랐을까요?"
이때 정심 선사가 토굴 밖으로 뛰어나가 멀어지는 벽송 스님을
소리쳐 불렀다. 이에 벽송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정심
선사가 또 한번 크게 소리쳤다.
"내 법 받아라."
이 순간 벽송 스님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