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벽송
지엄(碧松智嚴, 1454~1534) 스님은 조선시대 초기에 오랫동안 폐허가 되었던 벽송사를 중창하여 실질적 창건주로 알려진
고승이다.
그러나 마음을 닦지 않고 싸움터에 쫓아다니는 것이 헛된 이름만 숭상하는 것임을 깨닫고, 28세에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출가하여 조계대사(祖溪大師)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희(衍熙)·정심(正心)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1511년 봄 용문산에 들어가서 2년을 지내다가 1513년 오대산으로 옮겼고, 다시 백운산·능가산 등 여러 산을 옮기면서 도를 닦았다.
또 『고봉어록(高峯語錄)』을 보다가 ‘문재타방(聞在他方)’이라는 어구에 이르러 활연히 깨달았다. 1520년 지리산에 들어가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불법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 뒤 문인 영관(靈觀)·원오(成悟)·일선(一禪) 등 60여 명에게 대승경론(大乘經論)과 선을 가르쳤다. 또한
『선원집(禪源集)』과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참다운 지견(知見)을 세우게 하고, 다음 『선요(禪要)』와
『대혜서장』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 주었다. |
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은 조선시대 후기에 벽송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 벽송사에는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김장생(金長生)의 8세손이다.
17세에 종로에서 관인(官人)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세속의 명리가 큰 걱정거리가 됨을 깨닫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靑龍寺)로 출가하여 영월(影月)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지리산 안국사에서 용악(龍岳)에게서 불경을 배운 뒤 용암(龍巖)에게 선(禪)을 배웠으며, 성전(聖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 뒤 벽송암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창하였다. 그러나 자기 본래 면목을 밝히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지리산 칠불암에 가서 수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옛날 벽송사에 머물던 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상민 스님은 노년에 벽송사에
있었는데, 입적에 앞서 제자들을 불러 그믐날 입적할 날을 알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날은 바쁘니 다른 날로 부탁하였다. 스님은 얼마 뒤 다시
제자들에게 정월 초이튿날 입적하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그 날은 불공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많아서 다시 며칠을 미뤄달라고 하였다. 초나흘, 상민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가도 되겠느냐?” 라고 묻고 입적했다고 한다.
1889년 12월 27일 병을 얻어 29일 열반에 들려고 하자 대중이 그 해를 마치는 불공이 바빠 걱정하였다. 그는 “내가
60년 중노릇을 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에 어찌 불사(佛事)에 방해하겠는가?”하고 연기하였다.
다시 새해 초이틀 또 열반하려
하자 대중이 또 칠성재(七星齋)로 걱정을 하였으므로 다시 연기하였으며, 4일 사시(巳時)에 대중으로부터 불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것을
부촉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고 하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상민 스님의 법맥은 부휴 선수(浮休善修)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어서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원민(圓旻)-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성안(性眼)-홍유(弘宥)-경암(鏡巖)-중암(中庵)-성전, 그리고 상민
스님으로 이어진다. 스님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영운(嶺雲)·동운(東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