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소나무를 닮은 절 벽송사

 ->벽송사 삼층석탑, 목장승, 오도담

                                         지엄(智嚴): 1464(세조 10)∼1534(중종29)

虛白堂文集卷之四 男世昌編輯          성현(成俔): 1439(세종 21)∼1504(연산군10)
 
嚴上人碧松堂記 


師。湖南人也。智嚴其名。慈舟其號。以碧松扁其堂。一日。因吾贅郞崔生。踵門求言於余。余謂師曰。大抵林林總總。盈天地間者皆物也。物之類尙多。何獨取於松乎。余則汨利名。老塵寰者也。雖有慕松之名。而所知者糟粕耳。安能盡松之至味而我爲師記之。不幾於禿者之論髢乎。師曰。然則請以松證吾之道可乎。松之心貞。猶吾道之至正無邪。松之性直。猶吾道之直指見性。松之色不變。猶吾道之不二不壞。松之深014_449d根不拔。猶吾本源不動。而衆生皆化於善。松之柯葉層層敷敷。猶吾衆生皆仰大智而得其依庇。松之始生。甲拆句萌。其形至渺。至長而可拱可把。大則三圍四圍。最大者則千圍百圍。立虛牝而上肩千仞之岫。其大無窮。而其見亦與之無窮。猶吾道之由小而大。自下而上。進退不已。終陟於大光明地也。至於林壑幽幽。猩捂注蓬藋之徑。滿堂前後者皆蒼翠也。有時大塊噫氣。則膠刁焉號謞焉。靈籟自發。醒吾心耳而塵念不起。恍然坐我淸淨之界。聽天人八部樂也。當014_450a大地凝沍之時。而守一間蘭若。篝燈於榻。獨坐飜經。晨起推戶而視之。則靑女糢糊。騰六飛瓊而擺落。當此時。掬泉煮茗。其味澹泊而無厭。恍如雪山苦行。而苦中自有樂地也。噫。何地無山。何山無松。我之所往而松之隨之。松也我也。卽是閒中友也。卽皆無盡藏也。取不竭而用無禁者也。然則我捨松何適哉。於是相視一笑。遂作碧松堂記。以爲桑門後日再期張本。己未1499,연산5仲秋下澣。西山老叟記。

 

陽谷先生集卷之七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頭流山人性煕。來住上院寺。於其還也。詩以贈之。 


023_400d方丈三韓外。茲名天下知。山今多韻釋。觀也繼嚴師。期爾將傳鉢。臨分爲贈詩。他時過溪去。一咲兩伸眉。 頭流僧智嚴。最有禪行。今之靈觀。繼其名。故及之。

 

龍門先生集卷之三       조욱(趙昱): 1498(연산군 4)∼1557(명종 12)
 西齋錄
十六日齋飯後。運師與智嚴出遊。余獨坐菴中。就睡少頃。二僧尙未還。起而視之。雪已滿庭矣。 


028_205a閑中無事不從容。飽後憑床睡味濃。一鳥不鳴春寂寂。起看晴雪壓庭松。

 

頤庵先生遺稿卷之一        송인(宋寅): 1517(중종 12)∼1584(선조 17)

 詩○七言律詩
題僧云海卷 


生在湖南早出家。智嚴門下講楞迦。遊方始自頭流遍。結夏曾從怾怛多。已見安禪能有得。却要題卷果如何。尹生來往傳聞熟。相識寧須對面麼。

 

凌壺集卷之一 完山李麟祥元靈著
 
贈惺岸禪師。師在方丈山碧松菴。 


吾道已長熄。禪敎聞猶廢。莫通狗子性。硬誦栢樹在。南僧淨惠者。始倡華嚴會。細剖玅嚴品。微茫功德海。奧旨潛析毫。豪談或緩帶。有時騎駿馬。走赴達官待。弟子多聰明。臨死受玄戒。采晴貌深淳。惟善氣亢介。余愛岸師高。由樸入脫解。冷官呼不至。難經讀便罷。225_478c過余寒竹館。抗言在義禮。移阡營父葬。訟官爲門弟。出家篤人倫。中心誠愷悌。無以儒釋分。贈詩戒衰世。

 

 

함양 벽송사 내경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가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 리고 앞쪽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아담한 절이다.
 
창건년대 등 자세한 역사는 알 수가 없지만, 현재의 절이 들어서 있는 위치에서 약 50m 위쪽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잡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기를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1520년(중종 15)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 송사라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 에 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송사 삼층석탑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인 원통전을 비롯하여 선원·간월루 등이 있으며, 지정문화재로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474호 삼층석탑과 목장승 2기가 전한다.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생 각되는,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현재 보물 제 474호로 지정돼 있다. 사실 벽송사 가 칠선계곡에 있다고는 하지만, 등산로와도 관련이 없고 내노라 할 문화유적이 없어 인적이 드문데, 그런 중에서 벽송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들 목의 나무장승이다.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 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 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 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이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 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 으로 미루어,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 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람포인트
 
1. 벽송사는 지리산 칠선계곡에 자리하여 주변 풍광이 뛰어나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2. 경내 입구에 있는 목장승 2기는 「가루지기 타령」의 소재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벽송사 위치와 찾아오는 길

1. 위치

 

벽송사(碧松寺)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259번지 지리산에 자리한다.

 

2. 찾아오는 길

 

(1) 승용차


서울 방면에서 간다면 경부고속도로로 가다가 산내 나들목에서 대전-진주 간 대진고속도로로 바꿔 탄 다음, 지곡 나들목으로 나와 남원 방면 24번 국도를 탄다. 함양 읍을 지나 인월에서 실상사 방면 60번 지방도로로 좌회전 한 다음 실상사 입구를 지나 안국사를 지나면 금대암이 있는 의탄마을 못미처 오른쪽으로 추성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길 입구에는 벽송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길로 조금 더 가면 벽송사 입구가 나온다.

 

(2) 대중교통
 

벽송사에 가려면 일단 함양 읍까지 와야 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경부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함양까지 간다.
부산 방면에서 온다면 진주에서 시외버스로 함양까지 들어가는 것이 차편이 많아서 좋다. 부산∼진주는 10분 간격에 요금 4,900원이고 진주∼함양은 10분 간격 운행에 요금 4,100원이다.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함양교통터미널까지 걸어서 5분 거리고, 여기서 추성리 행 새마을버스를 타서 추성리에서 내린다. 여기에서 절 입구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린다. 새마을버스 운행은 오전에만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요금은 1,800원.
혹은 함양버스터미널에서 마천 행 버스를 타서 마천에서 내린 다음 이곳까지 택시를 타고 올 수도 있다.

 

http://www.koreatemple.net/temple/tour/list.asp?local=경상남도
작성일 : 2004년 9월 30일
수정일 : 2004년 10월 12일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지금 벽송사의 실질적 창건은 조선시대 중기인 1520년(중종 15)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엄 스님은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부용 영관·원오·일선 등이 이곳에서 선을 배웠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그 뒤 전쟁 중에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1961년 원응(元應) 스님이 6.25 때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을 천도하고 민족통일을 위하여 벽송사를 중창하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주석하고 있다. 원응 스님은 10년 동안 『화엄경』 80권을 금니로 사경하여 2004년 6월 화엄경 금니 사경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벽송사 벽송당 지엄영정

벽송 지엄(碧松智嚴, 1454~1534) 스님은 조선시대 초기에 오랫동안 폐허가 되었던 벽송사를 중창하여 실질적 창건주로 알려진 고승이다.
 
속성은 송씨(宋氏).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복생(福生)이며, 어머니는 왕씨(王氏)다. 어려서부터 문무를 모두 좋아하였고, 1491년(성종 22) 여진족을 토벌할 때 도원수 허종(許琮)의 지휘 아래에서 종군하여 이마차(尼麻次)를 물리치고 크게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마음을 닦지 않고 싸움터에 쫓아다니는 것이 헛된 이름만 숭상하는 것임을 깨닫고, 28세에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출가하여 조계대사(祖溪大師)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희(衍熙)·정심(正心)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1511년 봄 용문산에 들어가서 2년을 지내다가 1513년 오대산으로 옮겼고, 다시 백운산·능가산 등 여러 산을 옮기면서 도를 닦았다.

 

또 『고봉어록(高峯語錄)』을 보다가 ‘문재타방(聞在他方)’이라는 어구에 이르러 활연히 깨달았다. 1520년 지리산에 들어가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불법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그 뒤 문인 영관(靈觀)·원오(成悟)·일선(一禪) 등 60여 명에게 대승경론(大乘經論)과 선을 가르쳤다. 또한 『선원집(禪源集)』과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참다운 지견(知見)을 세우게 하고, 다음 『선요(禪要)』와 『대혜서장』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 주었다.
 
이 네 가지 문헌은 현재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서 사찰 강원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연원은 이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1534년 지리산 수국암(壽國庵)에서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의 “제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구절을 설명한 뒤 입적하였다. 저서로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이 있다.

 

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은 조선시대 후기에 벽송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 벽송사에는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김장생(金長生)의 8세손이다.
 
17세에 종로에서 관인(官人)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세속의 명리가 큰 걱정거리가 됨을 깨닫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靑龍寺)로 출가하여 영월(影月)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지리산 안국사에서 용악(龍岳)에게서 불경을 배운 뒤 용암(龍巖)에게 선(禪)을 배웠으며, 성전(聖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 뒤 벽송암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창하였다. 그러나 자기 본래 면목을 밝히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지리산 칠불암에 가서 수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옛날 벽송사에 머물던 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상민 스님은 노년에 벽송사에 있었는데, 입적에 앞서 제자들을 불러 그믐날 입적할 날을 알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날은 바쁘니 다른 날로 부탁하였다. 스님은 얼마 뒤 다시 제자들에게 정월 초이튿날 입적하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그 날은 불공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많아서 다시 며칠을 미뤄달라고 하였다. 초나흘, 상민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가도 되겠느냐?” 라고 묻고 입적했다고 한다.
 
1889년 12월 27일 병을 얻어 29일 열반에 들려고 하자 대중이 그 해를 마치는 불공이 바빠 걱정하였다. 그는 “내가 60년 중노릇을 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에 어찌 불사(佛事)에 방해하겠는가?”하고 연기하였다.
 
다시 새해 초이틀 또 열반하려 하자 대중이 또 칠성재(七星齋)로 걱정을 하였으므로 다시 연기하였으며, 4일 사시(巳時)에 대중으로부터 불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것을 부촉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고 하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상민 스님의 법맥은 부휴 선수(浮休善修)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어서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원민(圓旻)-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성안(性眼)-홍유(弘宥)-경암(鏡巖)-중암(中庵)-성전, 그리고 상민 스님으로 이어진다. 스님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영운(嶺雲)·동운(東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