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법


*교감

<삼국사기> 기록에는 김대렴은 없다.
신라 흥덕왕(826~836) 3년(828) 12월 조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茶)씨를 가져오니 임금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기록된 <삼국사기>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위의 기록 중 선덕왕은 신라 제 37대 선덕왕(宣德王, 780-785)이 아니고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宣德女王, 632-647)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덕왕(聖德王, 702~737)은 선덕여왕의 오기이다.
◆ 견당사 대렴이 '흥덕왕 3년 12월에 당나라에 갔다가 문종의 연회에 참석하고 차종자를 가져와 임금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한 옛날 당나라의 수도 낙양(후기)에 1개월 내에 다녀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대렴은 그 전(흥덕왕 3년 2월)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비롯, 여러 문헌에 '김대렴'이라 창씨한 것은 잘못이다. '대렴'의 성씨는 '대'씨로 잘못 기록된 사실은 사실 그대로 수정되어야 한다.

*함산: 대렴은 성명표기에서 성생략법이니, 신라 귀족은 다 성골, 진골로서 굳이 성을 표기하지 않아도 다 김씨인 것을 안다. 고로 생략한 것이다. 대렴이 대씨라면 궁예의 명이 선종(善宗)이므로 선(善)씨의 시조라고 하겠는가?

*전고

銘文에 이르기를
 혁혁한 충렬은 동국의 황제의 讓位와 같고
 (*분양이란 황제의 양위 요 임금이 분양에서 仙人과 나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赫赫忠烈 東國汾陽 滿庭蘭玉 幷秀爭芳

汾陽 : 중국 唐代 玄宗時에 郭子儀가 安祿山의 亂을 平定 한 공으로 汾陽王의 封을 받았다
8남 7녀가 모두 조정에서 벼슬하여 손자가 수십명이나 되니 문안 인사를 하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다만 턱만 끄덕일 정도다
부귀와 공명과 자손의 복을 모두 구비하였다 하여 汾陽淸福이라 함

晉有祁奚 唐有汾陽 保皐 孰謂夷無人哉

*구두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82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헌창(金憲昌)이 반역을 꾀하니 완산(完山)의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조아찬(助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쳐 와 변(變)을 고하였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지위에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도 급찬을 제수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조(助)는 주조(州助)이니 벼슬 이름이다. 최웅이 상변(上變)한 공로로 속함군 태수에 제수되었다고 하면 그 문세가 보기 쉬운데, 《동국통감(東國適監)》에는 이를 상고하지 않고 곧 그대로 완산의 장사 최웅과 속함군 태수 영충이 고변하였다고 썼으니, 이는 영충으로 속함군 태수를 삼은 것이다. 너무나 잘못이기에 이제 본사(本史)를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