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귀국기

會昌 5년(845)에 (新羅로) 돌아왔는데 皇帝의 命令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며, "連城璧(大師)이 다시 돌아왔다. 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니 땅도 다행히 여기리라"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大師가) 이르는 곳마다 벼와 삼같이 빽빽히 모여 들었다. 王城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뵈오니 크게 기뻐하여,

  돌이켜보면내가 옛날에 꾼 꿈은 곧 優曇鉢羅樹가 한번 꽃 핀 것이 아니겠느냐. 來世를 濟度하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는 문을 기대어 기다리는 생각〔倚門之念〕에 흔들리지 않겠다. 이제 그만이다.(俗世 血緣의 情을 淸算하겠다는 뜻)

 라고 말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가서 눈으로 직접 餘生을 몸붙일 곳〔終焉之所〕을 고르려 하였다. 때마침 王子 昕이 벼슬을 그만두고〔懸車〕山中宰相이 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 바라는 바가 합치되어 (大師에게) 일러 말했다.

  대사와 나는 함께 龍樹乙粲(武烈大王)을 祖上으로 하는데, 大師는 內外로 龍樹의 令孫이 되었으니, 참으로 나는 멍하니 뒤진 채, 따라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滄海의 밖(唐나라를 가리킴)에서 XX의 옛일을 밟았으니 곧 親舊의 因緣이 진실로 얕지 않습니다. 한 절이 熊川州 西南 모퉁이에 있는데 이는 나의 할아버지 臨海公〔할아버지 仁問이 예貊을 伐한 곳입니다. 그 사이에 큰 불이 災殃으로 번져 金田(寺院)이 반쯤 재가 되었으니 자애롭고 밝은 분이 아니면 누가 능히 없어진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가히 억지로라도 쓸모없는 이몸을 위하여 住持의 자리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대사는 답하기를, "因緣이 있으면 머물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大中(847~859)初에 비로소 나아가 머물고 또한 그것을 整齊하여 꾸미니 얼마 안 되어 도가 크게 행해지고 절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 멀리서 이 절을 찾는〔問津〕 무리들이 千里를 반걸음같이 여기니 그 수를 헤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인원이었다. 大師께서는 鐘을 쳐주기를 기다리고 거울이 피곤함을 잊은 것 같이 하니, 찾아온 사람들은 慧炤로서 자신들의 눈을 이끌고 法喜로써 자신들의 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끊임없는 발자취가 이끌려오게 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풍속을 변화시켰다. 文聖大王이 그이 運用 作爲가 모두 王의 敎化에 보탬이 된다는 것을 듣고, 매우 그를 존중하여 手敎를 급히 보내 넉넉히 위로하고 大師가 山相(王子 昕)에게 대답한 네 글자〔有緣則住〕를 중히 여겨서 절의 이름〔寺방〕을 바꾸어 聖住라 하고 인하여 大興輪寺에 編錄시켰다. 大師께서 使者에게 應答하기를,

  절이 '聖住'로 이름을 삼은 것은 절〔招提〕로서는 실로 영광스러운 바이지만 庸劣한 僧을 지극히 寵愛하여 높은 지위에 猥濫되게 불러 올리니, 진실로 바람을 피한 새에게 견줄 만하고 안개에 숨어있는 표범에게 부끄러울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憲安大王이 施主이며 舒發韓으로 追序된 魏昕(金陽의 字)과 南北相〔각기 그 벼슬자리를 지켜 左相·右相과 같음〕이 되어 있었는데, 멀리서 弟子의 禮〔攝齊禮〕를 펴고 香과 茶로써 폐백을 드리어 使者가 빠진 달이 없었으며, 名聲이 東國에 젖어 들도록 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士流로서 大師의 禪門을 알지 못하는 것을 一世의 수치로 생각하게끔 하였다.

 (大師의) 발 아래 禮를 올린 사람들은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탄성을 내어, "직접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나 낫다. (大師의) 말씀이 입으로 나오기도 전에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조급하고 포악하기로 으뜸가는 사람들〔후虎而冠者〕도 그 조급함을 삭히고, 그 포악함을 고치어 다투어 좋은 길로 달렸다.

 憲安王께서 王位를 이어받음에 미쳐 글을 내려 말씀을 구하니 大師는 대답하기를, "周禮에 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禮經에 실려 있으니, 청컨대 자리 곁에 새겨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贈太師 先大王께서 卽位함에 미쳐, (大師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先祖의 뜻과 같아, 날로 더욱 두터웠다. 무릇 施行할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급히 보내 諮問을 구한 뒤에 행하였다.

 咸通12년(871)가을에 敎書〔鵠頭書〕를 날려 驛馬로 불러올리면서, "山林은 어찌 가깝게 하면서 城邑은 어찌 멀리 합니까"라고 말했다. 大師께서 生徒에게 일러 말하기를,

  문득 伯宗에게 命令을 내리니 깊이 遠公에게 부끄럽다. 그러나 道가 장차 행해지려면 때를 가히 잃어 버릴 수 없으며 咐囑을 생각하여(國王大臣에게 佛法流通에 관한 도움을 부탁하기 위하여) 나는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어느덧 都城〔穀下〕에 이르러 謁見하니,先大王이 冕服을 하고 절하여 國師로 삼았다. 王妃, 世子 및 太弟相國〔뒤에 惠成大王으로 謚號를 올려 받들었던 분〕그리고 여러 公子 公孫들이 빙둘러 우러르기를 한결같이 했는데, 마치 옛 伽藍 그림 벽면에 서방의 여러나라 君長들이 佛陀를 대접하는 모양을 그려낸 것같았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弟子가 才操는 없으나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劉협의 《文心彫龍》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有에만 執滯하고 無만 지키는 것은 한 것 銳利하기만 하고 偏僻하게 이해할 뿐이다. 참된 근원에 나아가고자 하면 般若의 絶境이라야 한다."했으니 境의 絶한 것을 가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기를,

  境이 이미 絶했음에 이 또한 無입니다. 이 印을 묵묵히 行할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과인은 진실로 조금 더 나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질문을 하게〔갱수당격〕하고는, 매 질문마다 그 질문에 알맞는 적확한 답변을 해주었는데〔춘용진성〕, 막혔던 것을 트고 번잡했던 것을 깨끗이 떨어버리기를 가을 바람이 어두침침한 안개를 잘라내듯 하엿다. 이에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고 대사를 늦게 만나보게 된 것을 한탄하며,

  몸을 공손히 하고 임금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南宗을 알게 해주니, 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하였다.

 이미(宮을) 나왔으나 경상들이 다투어 영접하여 더불어 의논하기에 겨를이 없고 사서인들이달려와 떠받드니, 가고자 해도 갈 수 없었다. 이로부터 국인들임두 옷 속의 진주(마음 속의 진리)를 인식하게 되고 이웃의 장노들이 행랑의 보옥을 엇보는 젓(자기가 지닌 보배를 밖으로 내팽개친다는 뜻)을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새장 속에 있는 듯 괴로워하여 곧 도망가듯 떠나갔다. 임금께서 억지로 붙들 수 없음을 알고, 이에 손수 글월〔지검〕을 내리어 상주의 심묘사가 서울에서 멀지 않으니 참선하는 별관으로 삼으라고 청하였다. 사양을 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가서 거처하였는데, 하루를 머물지라도 반드시 집을 수리하여 엄연히 화성(절)이되게 하였다.

건부 3년(876) 봄에선 대왕께서 편치 않으셨는데, 근시에게 명하기를, "급히 우리 대의왕을 맞아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사자가 이르름에, 대사가 말하기를,

  산승의 발이 왕문에 미치는 것이 한번도 심한 것이니,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를 무주라 할 것이며,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염을 유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 임금과는 향화로써 맺은 인연이 있고, 도리의 행차(임금의승하를뜻함)가 기일이 있으니, 어찌 나아가 한 번 고별을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며, 다시 걸어서 임금의 거처에 이르러서 약언과 함계를 베푸니 병이 잠시 나아서 온 나라가 이상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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