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 安國寺와 행호조사行乎祖師
안국사(安國寺) 승려가 간행한 소아과 전문 의서 보유신편
점필재집 시집 제10권
[시(詩)]
극기와 생질 강군이 안국사에서 목욕한 뒤에 지은 시에 화답하다[和克己及康甥安國寺浴後之作]
마른 창자 밤마다 울어댐을 견딜 수 없는데 / 叵耐枯腸夜夜鳴
산중의 화초들은 개인 봄을 다투누나 / 山中花卉競春晴
이미 난초 혜초 꿰어서 허리에 찼으니 / 已將蘭蕙紉爲佩
술 깨기 쉬운 제호탕을 빌리지 않는다오 / 不借醍醐醉易醒
바구니에 수북한 건 자라의 다리를 보겠고 / 戢戢筠籠看鱉脚
솔솔 끓는 남비에선 소나무 소리를 듣겠네 / 颼颼銚聽松聲
좋은 풍광 사라질 날이 많지도 않거늘 / 風光歸去無多日
나는 한창 직무에 얽매임이 부끄럽구려 / 愧我方爲簿領縈
뇌谿集卷之六
七言律詩
往浴安國寺。述懷奉呈佔畢齋。
蘭湯百沸聒雷鳴。
暖霧驚漚撥眼晴。
毛孔涔涔心忽悶。
天風颯颯骨還醒。
熹微月壑山都影。
凄斷雲林杜宇聲。
一夢뇌谿春已暮。
滿城花落柳絲縈。
뇌谿集卷之二
七言小詩
往遊安國寺。卽事錄示 百源。
靑山路黑白雲深。不分田家載酒尋。
說共耕耘春雨足。依然疏野去年心。
戢戢陽崖逬紫莖。剩收圓滑滿籃籯。
憐渠眞箇南烹味。絶勝坡仙玉糝羹。
落日殘鍾僧閉門。桂香旖旎雨紛紛。
數聲銅笛頭流月。吹破猿啼萬嶺雲。
冷風吹下紫鸞笙。正是孫登長嘯聲。
七十溪流煙霧裏。醉歌款乃訪靑城。
뇌谿集卷之二
七言小詩
寄安國寺義禪師
不見旻公十五春。
紅塵白髮更誰親。
如今信步山扃去。
好在煙霞舊主人。
滿眼溪藤雪陸離。
雲山珍重客來時。
才名老去偏蕭索。
如許靑山未有詩。
久堂先生集卷之十五 |
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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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策馬而行十里。抵百巫堂。堂是淫祠。巫覡所會處也。所謂堂直者。例供遊人賓從。此則自龍游堂亦已然矣。暫憩堂中。捨馬乘藍輿。到河東巖。僧言古有河東守到此遇雨。迷失道。故名此巖云。自是山益峻路益險阻。四人魚貫而進。到舊帝錫堂基。
又曰一宿君子寺。遠上天王峯。月明吹玉笛。滄海舞群龍。乙酉乍陰。蚤朝還下。少留帝錫堂及百巫堂。夕到安國寺宿焉。是日下峯時。霰雪微灑。丙戌晴。設泡晩發。乘藍輿過金臺菴。菴在安國寺五里許。而地勢孤迥。一山面目。無少蔽虧。猶金剛山之於正陽南樓也。望見第一峯宿處。則一柱揷天。雲霓明滅。眞古人所謂怳然一夢瑤臺客也。有詩曰靑鞋踏破萬重山。更向金臺古寺還。第一峯頭昨宿處。白雲靑靄有無間。午抵涵虛亭。登亭後高臺。依然去時風景也。暫歇而過。夕宿沙斤驛亭。丁亥晴。謝道卿早發。與梁丈及永叔。並馬歷登雲皐亭。醉話移時。有詩曰醉上沙斤馬。臨流不用扶。平生得意處。肯羨執金吾。吟罷歸來鈴閣。便是舊吾。愁對雁鶩行。塵土遂已滿襟矣。
癸未仲秋晦日庚寅。高靈朴長遠仲久記。
不憂軒集卷二 정극인(丁克仁) 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세종 19)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
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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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臣丁克仁等。誠惶誠恐。謹上言于主上殿下。臣等俱以庸資。幸際昌辰。接迹芹宮。游心聖學。其於異端之說。粗嘗涉獵。夫佛氏之害。固非一端。無父無君。毀人心滅綱常。闢之而後。可以興學也。遊手遊食。逃賦稅蠹民財。汰之而後。可以利民也。故孟子曰。我欲正人心息邪說。釋之者曰。佛氏之害。甚於楊墨。又曰。邪說害正。人人得而攻之。不必聖賢。如春秋之法。亂臣賊子。人人得而誅之。不必士師。又曰。學者於是非之源。毫釐有差。則害流於生民。禍及於後世。古人所以辭以闢之。如是之嚴者。誠以吾道行。則彝倫敍而天下治。異端興。則彝倫斁而天下亂也。若使其道大行。擧世從之。雖堯舜復起。其將誰與爲君哉。是固殿下素所明辨而取舍者。玆不極論。姑以今日之事言之。伏惟聖慈垂覽焉。臣等竊謂人主萬民之表。京師四方之本。人主所好。萬民慕之。京師所尙。四方效之。觀感之機。捷於影響。可不謹哉。近年以來。水旱相仍。丙辰
世宗十八年 以後。饑饉尤甚。民之老羸。轉于溝壑。壯者。散而之四方者幾千人矣。是乃救荒賑窮。節用愛民之時也。歲在丁巳。 世宗十九年 重創興天寺。 在西部皇華坊。今貞陵洞。丁丑。太祖葬神德王后康氏于貞陵。建此寺。是爲禪宗。太宗移陵于東小門外。今貞陵是也。而寺則因存。
大興土木。供養布施。多出府庫。雖曰役游手之徒。其供億之費。出自何地。是必浚吾民之膏澤。成無用之虛器。臣等已有感焉。于時臺省進諫。而殿下辭以興天。祖宗所刱。不忍坐視其廢也。臣等初以爲然。寧知其弊之至此極也。矧今農事方興。連月不雨。觀其氣候。有同丙辰。哀我人斯。誠可憐憫。興天僧徒。乃於是取民財利。計出百端。巧爲勸文。每受懿親名押。遍滿中外。虛張誑惑。以誘愚民。無知之民。怵於禍福之說。不計後日之饑饉。掃蕩家產。以充其欲。於是。竊吾民之財。積鉅萬之粟。乃於大都之中。大設安居之會。公然不憚。莫之知禁。無貴無賤。靡然從風。飯佛齋僧。擧國爭先。富人猶云哿矣。雖以貧乏之民。亦且強爲。終轉溝壑。正猶蛾之赴燭而不自知悔也。噫。京師風化之源。而反爲香火之場。則四方之趨向者。將有甚於高髻廣袖也。苟有知識。孰不切歎。近者。臺省具將此意。封章廷爭。
臣等以爲國家之大幸也。豈意殿下終莫之聽也。非徒不聽。使禁軍步卒。嚴守興天寺門。羅列左右。禁人出入。其爲深固。不啻九重之邃。雖臺諫之紀綱。不得到焉。彼將恣行不義。無所忌憚。誰得以禁之。反覆思之。雖於臣等之愚。尙不忍也。況於聖心乎。臣等又聞前朝之季。有僧懶翁。以寂滅之敎。惑愚庸之輩。當時推戴目爲生佛。至屈千乘之尊。枉拜匹夫之賤。而國勢將傾。吾道浸衰。幸賴有道之士。絶其根株。竟使自斃。誠衰世之一大幸也。恭惟太祖康獻大王經綸草昧。日不暇給。猶慮浮屠之害。嚴立僧徒之禁。太宗恭定大王灼知其弊。革去寺社。什存一二。土田臧穫。俾充軍需。山陵之制。亦不建寺。其所以闢異端回世道之慮。嗚呼盛矣。及我主上殿下。以堯舜之資。承二聖之統。謂革弊之方。當自內始。於是。先廢內佛堂。乃減宗門。且令僧徒禁入城市。年少之輩勿令剃髮。是時。僧徒歛跡縮首。莫敢恣行。臣等咸仰吾道之日昇。豈意異端之復興也哉。今者。有僧行乎住持興天。不鑑昔日之轍。自謂懶翁之儔。惑世誣民。思易風俗。民之敬服。無異懶翁。宗親貴戚。不惜名位之重。躬詣沙門。恭行弟子之禮。臣等每見如是。扼腕腐心者有日矣。今又復聞出內帑珠玉錦繡。造成法衣而掛于禪房。飾用金銀。鑄成食鉢匙筯念珠。以賜行乎。不識此語誠然乎哉。臣等寤寐歎傷。不覺揮涕。以爲今日之於佛。方信而或疑者。惟以聖上在上。以吾道爲道。而不以佛道爲道故也。今行乎所賜。雖於聖心。固無所關。然彼僧徒之自誇者。與愚民之方信者。豈不曰聖上猶然。況其他乎。於是。上自宗室。下至閭舍。瞻奉捨施。敢仰歸依。如恐不及。人人慕爲弟子。家家願被因果。其勢益張。罔有紀極。是乃敎猱升木。決壅流注也。爲吾道計者。寧不重爲寒心哉。矧乎以金銀非我國所產。請免金銀。已懇於上國。若使上國得聞此事。將謂殿下何如也。又況君擧必書。請免金銀。旣書于策。而金銀念珠。繼書于後。則千載之下。亦謂殿下何如主也。倘曰行乎已得佛道。然漢唐以後。事佛者非一。而未聞以佛力享國者也。楚英信佛而終致大獄之誅。梁武事佛而未免臺城之餓。則佛之無益於人國。蓋可推類也。況淸淨寡慾。佛氏之敎。則爲行乎者。入名山坐靜室。衣衲絶食。以明其道。乃其事也。何可服彩服食精食。誇耀閭里哉。彼以滅倫絶理之道。薰陶援引。移風易俗。臣恐數年之後。擧國之人。淪於無父無君之敎。盡爲髡首之徒。而人類滅矣。今觀營繕僧徒。新受度牒。一歲之內。幾至數萬。則人類之滅。已兆矣。是未必不自此僧召之也。當前朝衰季。尙能誅懶翁。以洗妖穢。況我聖上乎。伏願殿下去邪勿疑。除惡務本。下令攸司。斷行乎一僧頭。永絶邪妄之根。則國家幸甚。臣等又聞薰蕕不可以同器。眞僞不可以兩立。是以。紫之亂朱。君子惡之。讒生於疑。識者謹之。吾儒之於浮屠。其是非得失。固不啻如薰蕕也。而三年考藝兩宗。僧徒之選。擬諸文武之科。雖於國家待之之禮。固有輕重。然其設科選試之法。則與吾道似矣。彼亦自謂儒釋同風。此豈非紫之亂朱。而讒生於疑歟。彼有乖於寡慾定慧之義。則姑置勿論。而其與吾道並立於聖世。誠有識者所共憤也。又況設科。所以得人。得人欲其致用。不識僧徒將何所用而猶爲設科乎。是乃無用之弊法。而爲後世識者之指笑也。臣等又有憾焉。臣等歷觀諸寺。每於門上。特書掛榜。其略曰。主掌官禮曹承旨成念祖。
己亥乙科三人。官知中樞院使。諡襄惠公。父揜。昌寧人。奉傳。以爲自今以後。生徒遊於諸寺。卽令禁止。不識殿下崇重文敎。不使儒生慢遊廢學而有是榜歟。抑將崇信佛敎。不使儒生汚染三寶而有是榜歟。曾謂禮曹。禮義之所出。承旨爲王之喉舌。而作爲斥儒之文。掛諸沙門之上。遂使吾儒之徒。反見斥於異端而莫之恤歟。臣等又聞。有國家者昇平日久。則人物無虞。不有夷狄攻伐之變。則必淫於佛老。陵夷至於國非其國者有矣。漢明梁武之事。亦可鑑矣。在今日聖世。固無足慮。若舊根未除。則安知子孫萬世。不有漢明梁武者哉。是可大慮也。而廟堂大臣。嘿不進言。臺省言官。諫而不懇。其於陳善閉邪之義。維持永固之道。何如哉。嗚呼。古人有言曰。創業易。守成難。自古國家之業。積之百年而不足。毀之一日而有餘。是以。伯益戒慢遊於大舜。周公戒淫逸於成王。誠以處泰和之時。持盈成之業。有至可畏之機。生於一念之忽也。恭惟殿下卽位以來。小心翼翼。勵精圖治。從諫如流。樂取諸人。無有邪說亂其間矣。式至於今。敬謹之心。浸不如初。異端之害。至於如此。而不之禁焉。臣恐太平之治。始虧於今日。而臣民之望。於是乎缺矣。易曰。天行健。君子以。自強不息。書曰。終始惟一。時乃日新。伏願殿下勿謂一念之忽。無害於事。一事之非。何傷於治。推至誠以法天之行健。勉自強以體君子之不息。益堅前日之心。永保祖宗之業。則吾道幸甚。臣等無任激切屛營之至。謹昧死以聞。
동문선 제81권 |
기(記) |
만덕산 백련사 중창 기(萬德山白蓮社重創記) |
윤회(尹淮) 1380-1436(우왕6-세종18)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남쪽에
산이 있어 우람차게 일어나 맑게 빼어나고 우뚝하여 바다 기슭에 접하여 그쳤으니, 이름은 만덕산(萬德山)이요, 산의 남쪽에 사찰이 있어 통창하고
광활하여 한 바다를 굽어보니, 이름은 백련사(白蓮寺)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설되고 고려 원묘(圓妙)국사가 중수하였으며,
11대를 전하여 무외(無畏)국사에 이르도록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명찰이라 일컬었다. 왜적이 날뛰게 되자 바다를 의지하던 구석
땅은 모두 빈터가 되니, 사찰도 역시 시대의 성쇠(盛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조선에서 성신(聖神)이 계속 일어나서 해악(海岳)이
깨끗하고 편안하여 풍진(風塵)도 놀라게 하지 아니하니, 이에 천태영수(天台領袖) 도대선사(都大禪師) 호공(乎公)이 백련사에 구경갔다가 그 황폐한 것을 보고서
석장(錫杖)을 머물고 깊이 탄식하여 폐한 것을 일으키고 옛 모양을 회복하며, 임금을 장수하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할 서원(誓願)을 분발함과
동시에 그 도제(徒弟) 신심(信諶) 등에게 부탁하여 여러 선남 선녀에 시주를 권유하여 모든 계획을 차리게 하고, 또 신심을 보내어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편지를 올려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니, 대군은 이에 흔연히 허락하고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동의하여,
재정을 시주하고 기력을 내주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좇아서 멀다 아니하고 모여들었는데, 장흥부(長興府) 사람 전도관좌랑(前都官佐郞)
조수(曹隨)와 강진현 안일호장(安逸戶長) 강습(姜濕)이 가장 선두가 되었다. 경술년 가을에 시작하여 병진년 봄에 준공하였는데, 불전(佛殿)과
승사(僧舍)는 거의 태평시대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고, 설법하고 축복하는 것도 옛날에 비해서 오히려 나은 셈이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이니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요, 고죽(孤竹)의 상족(上族)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계행이 남보다 뛰어나고 묘법(妙法)을 돈오(頓悟)하여 승려들의
존경을 받았다. 태종(太宗) 공정대왕(恭定大王)께서 일찍이 치악산(雉岳山) 각림사(覺林寺)를 지으시고 대회를 베풀어 낙성하는데, 선사의 명망을
듣고 불러서 그 자리를 주장하게 하였고, 또 장령산(長領山)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 묘소 곁에다 대자암(大慈庵)을 짓고 명하여 주지를 삼았었다.
지금의 상께서 즉위하시자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로 부르시니, 선사는 세속에 남아 있다가 얼마 안 있어 문득 버리고 떠나서 산골에 숨었는데 그
고상한 품이 이와 같았다.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여 그 어미를 섬기어 살아서는 봉양에 극진하였고, 죽어서는 장사에 제 힘을 다하여 다른 중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두류산(頭流山)의 금대(金臺)와 안국(安國), 천관산(天冠山)의 수정(修淨)은 다 그가 새로 지은 것이요, 백련사는 그가
최후에 지은 것이다. 효령대군이 내가 선사와 친분이 있음을 알고 나로 하여금 시종을 간단히 기록하게 하므로,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대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호(乎) 선사와 더불어 아래로 시주하는 데에 힘을 다하여 미래의 세복(世福)을 구하였으니, 함께 불토(佛土)에 올라 앉아 모든
쾌락을 받는 것은 장차 이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행호(行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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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은 조선시대 후기에 벽송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 벽송사에는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김장생(金長生)의 8세손이다.
17세에 종로에서 관인(官人)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세속의 명리가 큰 걱정거리가 됨을 깨닫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靑龍寺)로 출가하여 영월(影月)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지리산 안국사에서 용악(龍岳)에게서 불경을 배운 뒤 용암(龍巖)에게 선(禪)을 배웠으며, 성전(聖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 뒤 벽송암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창하였다. 그러나 자기 본래 면목을 밝히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지리산 칠불암에 가서 수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옛날 벽송사에 머물던 서룡 상민(瑞龍詳玟, 1814~1890) 스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상민 스님은 노년에 벽송사에
있었는데, 입적에 앞서 제자들을 불러 그믐날 입적할 날을 알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날은 바쁘니 다른 날로 부탁하였다. 스님은 얼마 뒤 다시
제자들에게 정월 초이튿날 입적하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그 날은 불공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많아서 다시 며칠을 미뤄달라고 하였다. 초나흘, 상민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가도 되겠느냐?” 라고 묻고 입적했다고 한다.
1889년 12월 27일 병을 얻어 29일 열반에 들려고 하자 대중이 그 해를 마치는 불공이 바빠 걱정하였다. 그는 “내가
60년 중노릇을 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에 어찌 불사(佛事)에 방해하겠는가?”하고 연기하였다.
다시 새해 초이틀 또 열반하려
하자 대중이 또 칠성재(七星齋)로 걱정을 하였으므로 다시 연기하였으며, 4일 사시(巳時)에 대중으로부터 불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것을
부촉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고 하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상민 스님의 법맥은 부휴 선수(浮休善修)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어서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원민(圓旻)-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성안(性眼)-홍유(弘宥)-경암(鏡巖)-중암(中庵)-성전, 그리고 상민
스님으로 이어진다. 스님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영운(嶺雲)·동운(東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