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전력의 송희경이 지함양군사가 되다


  세종 4년(1422) 1월에 송희경이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에 임명되자 10일에 사헌부 집의 박안신(朴安臣) 등이 상소하기를,
"영락 13년(1415 태종15) 8월 13일에 내린 교지의 조목에 '수령은 백성에게 가까운 관직이니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이에 매여 있다. 일찍이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죄를 범한 사람은 다시 천거하여 쓰지 말고 , 만약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주(擧主)까지 죄를 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보건대 송희경은 일찍이 금산군수가 되었을 때 형벌을 굽혀 두 사람을 죽였는데 지금은 지함양군사가 되었으니, 원컨대 이미 내린 명령을 회수하여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고, 그 법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17일에 전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송희경의 직첩을 거두고 장(杖) 1백 대를 속(贖)받게 하였다. 처음에 송희경이 금산(錦山)에 임명되었을 때 사냥을 맡아 보는 아전이 잡은 노루와 사슴을 숨긴다고 의심하여 장(杖)을 때려서 죽은 자가 2인이었다. 감사(監司)가 이를 입안(立案)하여 파직하고 속(贖)을 거두었더니, 송희경이 말하기를,
 "아전은 실지로 병사(病死)한 것이요, 장(杖)으로 인하여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고, 상서(上書)하여 변명하였다. 명하여 경차관(敬差官)과 행대감찰(行臺監察)을 파견시켜 그 고을로 가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니, 송희경이 도리어 반좌(反坐:무고자가 반대로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음)되었다. 《태종실록》

  송희경은 피직된 뒤 얼마 안 있어 중국과 일본에도 사신으로 갔다 왔고 그 공으로 선공감 정이 되었는데 그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함양군사가 된 뒤 목민관이라서 전력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았지만 무사하였고 4년간 재임하였으니 세종 4년(1422)에서 7년(1425)까지 재임한 것이다. 송희경은 가사문학의 대가 면앙정 송순의 고조부로 호는 노송당(老松堂) 또는 균리(筠里)이고 담양으로 이사하였다. 《함양군읍지》나 《함양군지》에 다 송희경이 고려 시대 수령으로 되어 있는데 틀린 것이다. 《천령지》에는 구분이 없는데 고려 이숭인(李崇仁)의 아들인 이차약(李次若)이 먼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후 고려 시대 수령으로 오해한 것 같다.